운명을 믿으시나요? 흔히 볼 수 있는 문구였다. 대개는 코웃음을 치거나 무시를 했지만, 정윤오는 달랐다. 누군가가 운명을 믿느냐 물어본다면 전방에 도영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쳐댈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정윤오와 김도영은 존나게 운명이다, 라고 아주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려는지 둘은 엠티에서 같은 조가 되었다. 7조 박지훈…김도영 정윤오 김정우……. 단톡방에 뿌려진 배정표를 보자마자 도영과 나란히 누워 자는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 순순하게 잠을 자는 것만 떠올렸음에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가 이렇게 변태 같은 놈이 아닌데.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았다. 뭔가가 잘 될 것 같은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도심뽀까 : 
도영이 형.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요?

w. 잳잳

 




서울을 벗어나는 버스는 조용할 틈이 없었다. 첫 엠티라는 명목은 갓 입학한 새내기들을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들고 온 힙찔이가 국내 힙합 노래를 연신 틀어댔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과자 봉지에서는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도 윤오는 꽤나 잘 버텨냈다. 건너편 대각선에 앉아 있는 도영을 보면서 말이다. 꾸벅꾸벅 졸아대는 까만 머리통이 귀여웠다. 옆자리에 앉아서 어깨를 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윤오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저보다 늦게 버스에 올라탄 도영이 가까이 자리한 것을 보고는 바로 정우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김정우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창가에 기대서 잘 거라고 개진상을 떨어대더니, 뭐냐? 길어지는 투정은 자리와 함께 창가로 밀려났다.

 



도착한 숙소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커다란 집 두 채에 복층으로 이루어진 넓은 방이 8개나 있었으며, 운동장만한 마당 한편에는 바비큐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맑은 하늘 밑으로 깔린 푸른 나무까지. 꼭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야. 작년보다 훨씬 더 좋은데? 헌내기들이 입을 모아 찬양을 해댔다. 모두가 만족하는 모습에 학생회의 어깨가 이만큼이나 올라갔다. 7조는 여기로 와.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조장인 지훈의 뒤를 따랐다. 여럿이 굴러다녀도 될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모두가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을 해댔고, 윤오는 해맑게 웃는 도영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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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전까지의 스케줄은 별 게 없었다. 빙 둘러앉아 학생회에서 나눠주는 밥버거로 늦은 점심을 때웠고, 커다란 전지에 조 이름과 조원 이름을 적고 대충 꾸며서 문 앞에 붙여놓았다. 모두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바쁜 와중에도 윤오는 도영의 옆자리를 악착같이 지켜냈다. 나름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중인 도영은 그 사실을 꿈에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 맞다. 혹시 내일 장기자랑 나갈 사람 없냐?”

 



누워서 폰게임을 하던 지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각자의 방법으로 쉬고 있던 조원들이 지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과가 억지로 시키고 그런 건 없긴 한데, 노래 부르기로 한 애가 목감기 걸려서 아예 목소리가 안 나온대서. 그 말에 윤오는 자연스레 밴드부 김도영을 떠올렸다. 가수를 해도 될 만큼 고운 음색에 갖춰진 가창력까지. 운동장 한 가운데서 기억을 걷는 시간을 부르던 도영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분명 세상을 다 가진 듯 노래를 부르던 도영이었는데, 지금 윤오의 시야에 담긴 도영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진짜 없어?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는 도영이 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있으면 바로 말해줘. 지훈이 다시 몸을 눕혔고, 끝끝내 도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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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입 저녁은 빠르게 찾아왔다. 방에 틀어박혀서 떠들던 인간들이 하나둘씩 바비큐장으로 모였다. 각 조장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숯에 불을 피웠고 나머지는 테이블을 세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조용하던 바비큐장이 시장 바닥마냥 시끄러워졌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윤오는 계속해서 도영을 힐끗거렸다. 남들 앞에서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노래하던 사람이 왜……. 저가 알지 못하는 도영의 시간 속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도영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는 거였다. 장난을 치며 꺄르르 웃어대는 도영을 보며 윤오는 쓸 데 없는 걱정일 거라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배려심이 가득한 지훈은 고기를 굽는 족족 조원들에게 토스를 했다. 야 박지훈. 너도 그만 굽고 와서 먹어. 도영의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꼼짝도 않고 고기를 뒤집어댔다. 결국 도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구울게. 분명 그 말을 하려고 입을 떼려던 참이었다.

 



“제가 남은 거 구울게요.”

 



맞은편에 앉아서 그 모습을 전부 눈에 담아낸 윤오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지훈의 손에서 집게를 뺏다시피 가져왔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윤오가 불판 위로 고기를 올렸다. 들린 엉덩이를 다시 붙인 도영이 빤히 윤오를 쳐다봤다. 쟤가 저렇게 싹싹한 애였던가. 김도영이 고생하는 건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정윤오의 마음을, 도영은 꿈에도 모를 터였다.

 



“너도 좀 먹어.”

 



땀까지 흘려가며 고기를 굽던 윤오의 눈앞에 동그란 쌈이 불쑥 들어찼다. 가위질을 하던 손이 멈칫했다. 누구인지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랑해마지 않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들자 무심하지만 사랑스러운 얼굴이 저를 보고 있었다. 지금 나 먹으라고 손수 쌈까지 싸준 건가. 머리가 멍해졌다. 내밀어진 쌈과 도영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봤다. 나 팔 떨어진다. 그 말에 얼른 윤오는 입을 벌렸고 순식간에 입 속이 쌈으로 가득 찼다. 그 과정에서 윤오의 아랫입술에 도영의 손가락이 스쳤다. 그 찰나의 감촉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입을 움직여 음식을 씹었다. 분명 열심히 씹어댔지만 이상하게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도영이 싸줘서 꿀같이 맛있는데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야. 너네 조 고기 맛있냐?”

 



정신을 저 멀리 팔아버린 윤오의 어깨가 흔들렸다. 친한 척을 하며 비실하게 웃어대는 민철이었다. 고기를 전투적으로 집어먹던 정우가 두 볼이 빵빵한 채로 민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 윤오가 구워서 그른가 대따 맛있어요. 쌍따봉을 날린 정우는 다시 쌈을 싸는 데에 집중했다. 넌 또 왜 왔어. 도영의 핀잔에 민철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구. 우리 도영이 내가 늦게 와서 삐졌구나. 집게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씨발. 죽을힘을 다해서 노려보자, 이내 도영에게 응징을 당하는 민철이 보였다. 진짜 뒤진다. 꽤 살벌한 대사였지만 전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저 형은 화내는 것도 귀엽지.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는 윤오였다.

 



“조장도 아닌데 고기 굽는 거야?”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잠깐 돌린 윤오가 다시 불판에 집중했다. 누가 구우면 뭐 어때. 한결같은 무심한 말투에 은선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민철오빠가 여기 오자 그래가지고 한 번 와본 거야. 그 뒤로도 은선은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놨다. 고기를 뒤집고 자르는 윤오는 영혼 없는 리액션을 간간히 보일 뿐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어디선가 달갑지 않은 감탄이 새어나왔다. 이야. 너네 그렇게 서있으니까 존나 걍 한 쌍의 커플인데? 미처 입 안에 있는 고기를 다 씹지도 못한 민철이 손가락으로 액자까지 만들어 둘을 한 프레임에 집어넣었다. 옆에 서있던 정우 역시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오빠, 그러지 좀 마요. 은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둘을 향한 관심이 늘어갔다. 이런 반응이 처음도 아니고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될 일이었는데.

 



“그러게. 이렇게 보니까 되게 잘 어울린다.”

 



김도영이 이런 소리를 한다면 말이 달라졌다. 접시에 고기를 옮겨 담던 윤오의 손이 멈칫했다. 내가 여태 누구때문에 땀까지 흘려가며 먹지도 못하고 이걸 다 구워냈는데. 숨겨지지 않는 원망스런 눈빛이 도영을 향했다. 오빠까지 이럴 거예요? 은선이 도영에게 약한 주먹을 휘둘렀다. 아 알겠어. 미안미안. 웃으며 주먹을 밀어낸 도영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틀었다. 윤오와 눈이 마주친 도영이 서서히 웃음을 거뒀다. 예전부터 정말 궁금했고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너 왜 자꾸 나 그런 눈으로 쳐다 봐? 꼭…버림받은 사람처럼.

 



/




뒷정리를 마친 이들에게 펼쳐진 것은 엠티의 꽃, 술판이었다.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빙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으레 그렇듯 한가운데 몰려있는 안주는 엉덩이를 떼고 손을 앞으로 쭉 뻗어야 겨우 닿을 정도였다. 모두가 차라리 안 먹고 말지 따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 술은 쭉쭉 들어갔고 굴러다니는 빈 병이 늘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방을 들락날락 거리는 덕에 술자리 멤버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물론 자리를 뜨지 않는 도영을 따라 윤오 역시 자리를 지켰다. 아까 일이 서운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도영이 그런 소리를 못할 것도 없었다. 혼자 삐졌다가 혼자 용서하고, 일인극에 가까운 묘기를 보이는 중이었다.

 



“나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잔을 비운 도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윤오의 시선 역시 쑥 올라갔고,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냥 술기운에 저러는 건가. 아님 아까 노래 때문인가. 다시금 찾아온 걱정에 윤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유노야아. 우리 짠 하자, 짠! 자신의 잔을 들고 허공에 손을 뻗어대는 정우를 밀어냈다. 이미 술기운이 오를 대로 오른 정우가 작은 힘에도 크게 휘청거렸다. 우씨. 왜 밀어어어. 발끈하는 정우를 뒤로하고 윤오가 다리를 세웠다. 오지랖 좀 부려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영은 숙소 뒤편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헤매던 윤오의 발걸음이 그제서야 속도를 줄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도영이 점차 가까워졌다. 갑작스레 들리는 인기척에 도영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빛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가로등이 다인지라 또렷하진 않았지만 누구인지는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얼굴에 도영이 놀란 기색을 내비췄다. 그도 그럴게 둘은 여전히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영은 이내 미소를 보였고 여기 앉으라며 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 모든 게 알콜의 힘 덕분이었다. 쭈뼛대던 윤오가 슬며시 도영의 옆자리에 몸을 붙였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귀뚜라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도영이 형.”

“응.”

“형 이제 노래 안 불러요?”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이 결국에는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듣는 기분은 뭐랄까……. 지나가던 행인이 대뜸 단단히 엉켜버린 실뭉치를 안겨준 느낌이었다. 토끼눈을 뜬 도영이 아예 몸까지 돌려 윤오를 마주했다.

 



“너 내가 노래 부른 거 어떻게 알았어?”

“형 진짜 나한테 관심 없나보다. 저 현영고 나왔다니까요.”

“아…….”

“밴드부 김도영 모르는 사람도 있나.”

 



도영의 얼굴 위로 쓴 웃음이 자리했다. 내가 그렇게 유명했던가. 다시 등을 기대고 앉은 도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윤오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아까 표정이 어두웠던 게 노래 때문이 맞다. 둘째, 김도영은 여전히 정재현을 기억하지 못한다. 두 사실 모두 윤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별이 가득한 하늘을 향한 채였다.

 



“나 공부한다는 핑계로 밴드부 관뒀거든. 넌 모를 수도 있겠다.”

 



이미 윤오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윤오는 묵묵히 도영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암튼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 때문에 관뒀으니까 처음에는 별 미련 없었다? 계속해서 노래를 할 것도 아니고 대학가서 먹고 살 길은 찾아야 하니까. 혹시나 마음 흐트러질까봐 진짜 공부만 했어. 뭐 그 덕에 이렇게 좋은 대학교에 오긴 했지만. 근데 있잖아……. 말을 이어가던 도영이 잠시 숨을 골랐다. 도영의 옆모습을 빤히 보던 윤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행여나 흘러나오는 눈물을 저 때문에 억지로 삼킬까봐서.

 



“손꼽히는 명문대를 왔는데도 조금 행복하다가 말더라고.”

 



내가 그걸 몰랐었어. 노래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노래가 생각보다 나한테 큰 의미였다는 걸. 그때 포기하면 안 됐었다는 걸, 내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야. 메어지는 목에 도영이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뭐 암튼 그래서 후회도 되고, 복잡한 감정때메 노래 안 해 이제. 과거의 김도영한테 미안해서 잘 못하겠더라고. 짧은 정적이 맴돌았다.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낸 도영이 몸을 들썩였다. 아 내가 너무 분위기 잡았나? 별 얘기 아닌데 너무 오바했다, 미안.

 



도영의 말을 들으면서 윤오는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 아픔을 혼자 앓고 있었을 김도영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 관두지 말라고 붙잡을 걸. 노래하는 김도영이 최고라고 칭찬이라도 퍼부어 줄걸.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내가 몰랐던 시간의 김도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구나. 마음 같아서는 꼭 끌어안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위로를 받아도 모자랄 김도영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때에는 정말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준 도영에게 고마웠다. 성큼, 저와 도영의 사이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게 왜 미안한 일이에요.”

“넌 관심도 없을 텐데 나 혼자 떠들어가지고.”

 



도영은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이 윤오라는 걸 잊은 듯 했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윤오가 도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거 말고 다른 거요.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다른 거? 눈을 동그랗게 뜬 도영이 윤오와 눈을 맞췄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올 뻔 했다. 언젠가는 꼭 저 까만 머리통에 토끼 머리띠를 씌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저 재현이에요. 밴드부 매일 찾아가던.”

“……어?”

“어떻게 나를 못 알아보냐. 이거 진짜 미안해해야 돼요.”

 



의문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이, 이내 깨달음을 득도한 신도마냥 커졌다. 헙. 그렇게나 놀랄 일인지 도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그 새마을? 손가락 끝이 윤오를 향했다. 저 형은 아직도 나를 초록색 반티 따위로 기억하는구나. 참 기분이 뭣 같은데 놀란 얼굴이 너무 깜찍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도영의 머리 위로 귀가 톡하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너 그때 좀 살집이. 목소리도 디게 높고. 또 안경은 어디로…….”

 



정말 제대로 놀랐는지 내뱉는 문장마다 끝을 맺지 못했다. 다시금 입을 틀어막은 도영이 미간을 한껏 구겼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저가 기억하는 재현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다고? 그때 저를 붙잡고 밴드부에 들어오고 싶다던 정재현과 눈앞에 있는 정윤오가 동일인물이라니. 커다란 충격을 껴안고 있는 도영을, 윤오는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왜 진작 말 안 했어. 진짜 꿈에도 몰랐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도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서야 자신을 향하던 알 수 없는 눈빛이 이해가 되었다. 그때 분명 대화도 몇 번 했던 거 같은데……. 뭔가가 생각났는지 도영이 손뼉까지 쳤다. 너 노래 잘 한다고 하지 않았어? 포지션을 물어서 노래라고 답한 기억은 있지만 잘 한다고 했던 기억은 없었다. 윤오가 고개를 내젓자 도영이 거짓말 말라며 똑똑히 기억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지 도영이 계속해서 네가 정재현이라고? 와 진짜 대박이다, 따위의 말을 반복해댔다.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뜯어보는 도영에게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정말 기억나는 게 그거밖에 없느냐고.

 



/




정윤오오오오오오오오. 윤오의 이름을 연신 불러대며 휘젓고 다니는 정우 덕에 둘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야! 너네 어디 갔다 와. 7조도 아닌 민철이 자기 방인 듯 퍼질러 누워있었다. 빨리 와봐. 민철이 빠른 손짓으로 도영을 불렀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의구심을 가득 담은 도영이 터덜터덜 민철의 옆으로 가 다리를 접었다. 낮아지는 목을 후딱 감아낸 민철이 몸을 붙여왔다. 빈자리에 몸을 구겨 넣은 윤오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김민철 저 새끼는 왜 자꾸 도영이 형한테 들러붙고 지랄이야. 윤오가 아랫입술을 씹어댔다. 민철의 속삭임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도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아무래도 곧 올해의 첫 씨씨가 탄생할 거 같으니까 우리가 좀 밀어주자. 정윤오 아닌 척해도 좋아하는 거 다 티나더라. 쫑알대던 민철이 드디어 도영의 목을 놓아주었다.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로 민철을 빤히 보던 도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 새끼가 취해가지고 뭐라는 거야. 반 쯤 정신줄을 놓은 민철은 혀가 꼬일 대로 꼬인 상태였다. 뭐 씨씨 어쩌고 정윤오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자연스레 시선이 맞은편에 앉아있는 윤오에게로 향했다. 딱히 밝은 표정이 아닌 윤오는 끈질기게 들러붙는 정우를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씨씨면… 정재현이 누구를 좋아하나? 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술기운도 올랐겠다. 왕게임 한 번 조지자.”

 



역시나 이번에도 김민철이었다. 그 말에 제일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윤오였다. 저는 술기운이 오르지도 않았으며, 떡하니 김도영에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를 몸소 겪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도영과 말을 섞거나 몸을 조금만 붙여도 질투심에 속이 뒤틀리는데 왕게임이 웬 말인가. 중요한 건 정윤오만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거였다. 나머지는 오랜만에 재미 좀 보자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심지어 헤롱대던 정우까지 와아-하고 박수를 쳐댔다. 그리고 타칭 왕게임의 제왕 김도영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깊은 통 안으로 자리한 여러 개의 나무젓가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 뽑아. 얌전히 둘러앉아 있던 몸들이 빠르게 원 안으로 손을 뻗어 젓가락을 뽑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는 자연스레 윤오의 몫이 되었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어기적 몸을 움직였다. 모두가 자신의 번호를 확인했다. 윤오는 1번이었다. 사실 자신의 번호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이 게임에서 정윤오가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였다. 도영이 다른 그 누구와도 스킨십을 하지 않기. 만약 걸린다면 그 상대는 꼭 정윤오이기.

 



“아싸. 내가 왕이다.”

 



김민철이 별 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떨었다. 한심한 모습에 혀를 찬 도영이 몸을 뒤로 기댔다. 여기까지는 여느 왕게임과 다를 게 없었다. 유독 몸을 꿈틀대는 두 명이 도영의 시야에 걸려들었다. 고개를 뒤로 쭈욱 뺀 정우가 옆에 앉은 윤오의 젓가락을 주시했다. 어찌나 집중을 했는지 인중이 이만큼이나 늘어났다. 눈치를 보던 정우가 검지 하나를 슬쩍 펼쳐보였다. 쟤 지금 뭐하는 거야. 이번에는 지훈이 입모양으로 삼을 외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둘의 시그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민철이었다. 이 개수작을 단번에 파악한 도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1번 3번 볼뽀뽀!”

 



행여나 도영이 벌칙에 걸릴까 싶어 온 신경을 쏟아 부은 윤오는 아무것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3번이 김도영이 아닌 이상, 윤오는 그 누가 나오든 관심이 없었다. 그때 젓가락을 내려놓은 은선이 입을 열었다. 저 3번이에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윤오는 중앙에 놓여있는 벌주가 가득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야 그걸 왜…. 지훈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윤오가 잔을 비워냈다. 막힘없는 행동에 모두의 말문이 막혔다. 빈 잔을 내려놓는 윤오를 보며 도영이 픽 웃었다. 정재현 생각보다 더 골 때리는 놈이구나 싶었다.

 



호기롭게 시작된 일명 개수작 왕게임은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왕이 된 정윤오 덕에 키스를 명받은 지훈과 민철은 소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눠 마시기도 했으며, 눈앞이 흐릿한 정우가 번호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은선과 지연이 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게다가 도영은 왕을 뽑고서도 개수작일동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고, 학생회인 소희가 정우의 얼굴에 자신의 뒷 번호를 진하게 찍는 일도 일어났다. 화끈한 스킨십에 모두가 목청이 터져라 환호를 했다. 어쩌다 개수작이 통하나 싶다가도 윤오는 자기가 걸렸다 싶으면 무조건 술잔부터 잡고 봤다. 덕분에 윤오와 은선을 어떻게든 엮어보려던 인간들의 모임은 서서히 와해되었다. 그렇게 윤오와 도영을 뺀 모두가 꽐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음…5번이 3번 얼굴에 연지곤지 찍어주기.”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을 악착같이 뜬 소희가 왕이 적힌 젓가락을 툭 던지며 벌칙을 외쳤다. 5번 누구야. 도영의 목소리였다. 턱을 괴고 있던 윤오가 깜짝 놀라 허리를 폈다. 설마 김도영이 3번인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얼굴을 구긴 윤오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얼마 안 가 은선이 투정을 부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왜 하필 오빠가 3번이에요? 윤오의 입장에서는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진 소리로 들렸다.

 



“하기 싫음 말고. 근데 나는 저거 못 마셔. 와서 찍든가 저거 마시든가 너 알아서 해.”

 



도영은 단호했다. 왕게임에서 단 한 번도 벌주를 마셔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김도영은. 남 일인 듯 미소를 짓는 도영이 아주 조금 미웠다. 그냥 술 좀 마시지. 대신 벌주를 마셔 주거나 연지곤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김도영이 벌칙을 할 바엔 차라리 저가 하는 게 나았다. 잠시 술을 빤히 보던 은선이 몸을 일으켜 도영 쪽으로 걸어갔다. 다들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둘을 주시했다. 언제 가져온 건지 베개를 끌어안고 있던 정우는 뚜루뚜뚜 따위의 멜로디를 읊조려댔다. 5번 박은선이 3번 김도영의 이마와 두 볼에 차례대로 연지곤지를 찍었다. 당연히 입술로. 해봤자 5초 될까 말까 한 장면이 윤오의 속을 헤집어 놨다. 저깟 게 뭐라고 김도영은 눈까지 감고 난리야. 질투가 화산 터지 듯 폭발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덤덤했고, 정윤오만 가슴이 너덜너덜해졌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며 민철이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젓가락을 통에 담아 넣었다. 지훈과 소희는 이미 정신줄을 놓고 널브러진 지 오래였다. 만취상태인 민철은 자꾸 미끄러지는 손으로 소주 뚜껑을 겨우 깠다. 자, 마지막이니까 소주 두 병! 술에 지배된 인간들은 민철에게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고, 윤오는 아직까지도 연지곤지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제정신인 도영이 이제 그만 하라며 통을 흔들어대는 민철을 툭툭 차댔다. 그럼에도 김민철은 강경했다. 아무 반응이 없는 인간들 앞에 손수 젓가락을 놓아줄 정도로 말이다. 누가 보면 게임 못해서 뒤진 귀신이라도 들러붙은 줄 알겠네. 도영이 경멸스런 눈빛을 쏴댔다.

 



“2번 6번 존나 진하게 키스하기. 안 하면 소주 두 병이다!”

 



그 와중에 용케 왕을 뽑은 민철이 헤벌쭉 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우욱. 그 옆으로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났다.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못했던 지연이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2층에 위치한 화장실로 향했다. 지연아 괜찮아? 놀란 은선이 비틀대며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소희와 지훈을 이어 정우까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잠들어 있었고, 민철 역시 정신줄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야씨. 김도영 너 6번인데 왜 가만히 있어.”

 



도영 쪽으로 몸을 기울인 민철이 발끈했다. 지금 이 게임 너 혼자 하고 계시거든요. 도영이 끙끙대며 민철을 저만치 밀어냈다. 그 광경을 빤히 보던 윤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도영 앞까지 걸어가 눈높이를 맞추기까지가 고작 3초였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키스 안 하면 소주 두 병을 중얼거리던 민철이 결국 정신을 잃었다. 그런 민철을 한심하게 보던 도영이 윤오와 눈을 맞췄다. 눈앞에 가득 들어차는 도영의 얼굴에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혹시 나 취했나.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건지 모를 용기가 윤오를 조종했다.

 



뭐냐, 정재현. 불쑥 자신 앞에 앉아 눈을 맞추는 인간에게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도영은 아까부터 정윤오를 정재현이라고 불렀다. 그래봤자 고작 한 번 불렀던 게 다면서, 그 이름이 익숙하다고 그랬다. 참 별 것 아닌 걸로 윤오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는 도영이었다. 저 2번이에요. 도영의 목을 살짝 감싼 윤오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이거 안 해도 되는 건데.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윤오의 입 속으로 먹혀들어갔다.

 



2번으로 가장한 7번 정윤오와 6번 김도영의 첫키스였다.

 



/




쌀쌀한 바람이 여기저기를 파고들었다.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몸을 기울인 도영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갑갑하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페트병 뚜껑을 따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자 정신이 맑아졌다. 새벽 2시와 어울리지 않는 산뜻함이었다. 건물 아래로 정신줄을 놓고 뛰어다니는 망나니들이 간간히 보였다. 하여간 술이 문제야. 다리가 풀려 넘어지는 꼴을 보니 웃음이 났다.

 



“도영이 형.”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윤오가 발코니로 들어섰다. 고개를 살짝 틀어 얼굴을 확인한 도영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불과 삼십 분 전에 이루어진 키스로 윤오는 여전히 심장이 아팠지만, 도영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이미 숱하게 경험한 일이었다. 물론 남자랑 이렇게까지 진하게 혀를 섞어가며 오랫동안 입을 맞춘 적은 없지만……. 대충 같은 범주로 취급해버렸다. 문득 심히 술에 찌든 민철과 짧게 입술을 스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거나 이거나 거기서 거기지 뭐. 도영은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 속을 알 리가 없는 윤오는 애가 탔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도영이 마음에 걸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분명 벌칙치고는 과한 키스였다. 혀가 뒤섞이고 질척이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오랫동안 이어졌다. 윤오를 더 돌게 만드는 건 밀어내기는커녕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준 김도영이었다. 그러던 중 화장실을 갔던 지연과 은선이 밑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렇게 둘은 물고 있던 서로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윤오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바람을 쐬며 주변을 배회했지만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나 밑으로 쏠린 피를 풀어내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자꾸만 부드럽고 촉촉했던 감촉이 떠올라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정도면 김도영도 눈치 채지 않았을까. 무조건 벌주를 마셔대던 애가 대뜸 키스를 퍼부었으니 오해할 만도 했다. 아니, 차라리 오해를 해줬으면 싶다. 이렇게 질질 끄는 것도 지겨워진 윤오였다. 어떻게든 결판을 내자 싶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2층 발코니에 서있는 도영을 발견한 윤오는 망설임 없이 그 쪽으로 향했다. 도영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너 어디 가서 그렇게 키스하면 사람들 오해하겠더라.”

“…….”

“물론 나는 익숙한 일이라서 괜찮고.”

 



도영의 입장에서는 나름 배려를 하고자 뱉은 말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뭐 그런 뜻을 담은 배려. 상대는 전혀 바라지 않은 쓸 데 없는 배려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무리 정재현이라고 해도 소주 두 병은 좀 오바이긴 하지. 갈수록 환장할 말만 늘어놨다. 어떻게 그 키스가 익숙한 일이 될 수가 있어. 왜 너는 오해를 안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줘. 두서없는 말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참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인내심이 바닥난 정윤오는, 쉽게 말해서 헤까닥 돌아버렸다.

 



“저 형 좋아해요.”

“……엉?”

“좋아하는 거 같은 것도 아니고 진짜 좋아해요.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말고 남자로서 좋아요. 첫 눈에 반했어요. 형이 체육대회 날 노래 불렀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김도영이 좋아 죽겠어요.”

 



도영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잊고 있던 고딩 정재현의 고백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숨도 쉬지 않고 뱉어대는 문장을 모두 귀에 담았다. 윤오가 말을 멈춤과 동시에 적막이 찾아왔다. 결국 엎질러져버린 물에 윤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던 도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지금…이거 고백인 거지? 말을 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어 망설이는 게 눈에 다 보였다. 무드도, 감동도 없었지만 고백은 맞았다. 술과 왕게임이 불러온 대참사라고 하기에는 정윤오가 너무 불쌍했다.

 



“미안, 재현아. 나는 남자를 좋아해본 적이…….”

 



말끝을 흐린 도영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차라리 뺨을 갈기지 그렇게 웃어주면 나는 어떡하라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도영이 멈칫했다. 삐걱대며 올라온 손이 윤오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었다. 연달아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된 후배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였다. 그렇게 도영은 발코니를 미련 없이 떠났다. 멍하니 방금까지의 일을 곱씹은 윤오가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럴 거면 그냥 키스하지 말걸. 아니, 키스 받아주지 말지. 원망스런 말들이 저와 도영 사이를 번갈아가며 튀었다. 가까워질 일만 남은 줄 알았던 김도영이 순식간에 우주 끝까지 멀어져버렸다.

 



짝사랑의 비극적인 결말은, 에타 인기남 정윤오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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