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간학교편(5권) ~ 교토 부정왕편 사이 쯤의 이야기


* 유키린(유키). 주로 린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 2019년 3월 23일(토) 개최 예정인 [청십자마켓 온라인점] 발매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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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칠판의 글씨도, 클래스메이트의 목소리도, 오래된 교실의 나무냄새도, 손끝에 닿는 교과서의 감촉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졌다. 믿어왔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에 린은 소스라쳤다.


유키오와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다. 어린 시절, 늘 자신의 뒤를 쫓으며 미소 짓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했다. 중학생이 되고, 유키오의 키가 훌쩍 자라고, 각자의 세계가 생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늘 변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것도 잔소리를 하는 것도 가끔은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것도 모두, 유키오는 항상 형을 생각해주었다. 수험 준비를 한다고 밤낮 할 것 없이 공부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사실 함께하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아쉽기도 했었지만, 그것이 실은 엑소시스트가 되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물론 처음에는 아버지와 동생이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조금, 아니 꽤 섭섭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납득은 할 수 있었다. 스스로가 봐도 엇나갔던 중학교 시절, 네가 사탄의 아들이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악마’라는 말에 유난히 민감했던 린을 생각한 후지모토 신부의 판단은, 최선은 아니었지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유키오는 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자주 아팠던 것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과 함께 언제나 두려움과 경계를 풀지 못했던 것에도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고교생인 린도 처음 악마를 보았을 때 두려움을 느꼈다. 태어났을 때부터 보아온 유키오의 공포는 자신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공포 앞에서 유키오는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있겠지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형인 린이 ‘악마’기 때문이아닐까. 린이 악마가 아니었다면, 형제를 그리도 깊이 사랑했던 후지모토 신부가 동생을 험난한 엑소시스트의 길로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겠지. 린이 스스로조차 돌보지 못하는 동안, 유키오는 고사리 같은 손에 총을 쥐어주고 피비린내가 나는 현장에 섰다. 이제는, 이제야말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와 닿았다.


“…린, 린!”

“……어? 시, 시에미?”


떠돌던 생각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의 소녀뿐이었다. 상념에 빠진 사이 수업이 끝나버린 모양이었다. 허둥거리는 린에게 시에미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그, 그래?”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엉망으로 굳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린의 얼굴을 살피며 덧붙였다.


“수업 내내 표정이 안 좋았어. 오늘은 바로 기숙사에 가서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서도 안 좋으면 유키짱에게 꼭 이야기하구.”

“…유키오에게…”


태어나서 가장 많이 불렀을 이름이 겨우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기숙사에 돌아가면 유키오가 있겠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왜 이제야 떠오른 것일까. 바닥이 사라진 것처럼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지금 그의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평소 쓰지 않던 머리가 혹사 끝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메피스토에게 잠시 피난처를 만들어 달라고 할까, 수도원으로 돌아갈까, 적당한 곳에서 노숙을 할까… 유키오를 피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있을 곳은 동생의 옆뿐이었다.


“어서와- 많이 늦었네.”

「어서와, 린! 어디 갔다 왔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앞에 앉아있던 동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침대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쿠로가 한 쌍의 꼬리를 살랑살랑 거렸다. 린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로 향했다.


「린?」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누운 린의 곁으로 쿠로가 다가왔다. 유키오가 의자를 뒤로 물리며 뒤돌아보았다.


“교복은 벗고 누워. 옷에 주름 생기잖아.”

“…….”


익숙한 잔소리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대답대신 등을 돌리는 린에게, 작은 한숨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쿠로가 걱정스러운 듯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감긴 파란 눈동자에는 그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혹시 싸우기라도 한 거야?”


린이 유키오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엇나가던 중학생 시절, 자신을 걱정하는 동생의 말을 마음속으로 갖은 핑계를 대며 무시했었지. 자신을 바라보던 녹색 눈동자가 언제나 두려우면서도 기뻤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발기척이 다가왔다. 린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아까보다 좀 더 가까워진 목소리가 말했다.


“상처는… 있었어도 재생되었겠군. 진짜 싸운 거야? 누구랑, 어디서.”

“……싸운 거 아니야.”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시비를 거는 녀석도 없었지만, 자신이 악마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부터 누군가와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쥐어 짜내듯 대답한 린에게 유키오가 되물었다.


“그럼 무슨 일인데.”

“…….”


숨기는 것을 잘 못하는 린이지만, 이것만큼은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네가 해 온 모든 것들이 나의 마장 때문이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동생이 재촉하듯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형,”

“말하기 싫어. 좀 내버려 둬!”


박수치는 것 같은 타격음이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 짓누르는 죄책감은 거부의 말이 되어 튀어나갔다. 마주친 녹주석의 눈동자에 숨기지 못한 당혹감과 옅은 상처가 비쳤다. 또 같은 실수의 반복이었다. 그에게 남은 길은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말하기 싫으면 더 이상 안 물을게. 하지만 알고 있지? 형이 사고 치면 결국 수습하는 건 내 몫이라는 거. 웬만하면 일이 커지기 전에 말해주면 좋겠어.”

“…….”


등을 돌리고 이불을 덮어쓴 린의 머리 위로 유키오의 냉정한 말이 쏟아졌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형을 두고 동생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먼저 씻고 올게. 잘 거면 옷은 갈아입고 자. …불편하잖아.”


말을 마친 그의 인기척이 멀어지며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섶이 바스락거리며 자그마한 무게가 어깨 위에 올라왔다.


「린, 괜찮아?」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머릿속이 지금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겁고 살갗에 닿는 모든 것이 차갑게 느껴졌다. 감기라도 걸린 것일까, 인간일 때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를 악마가 되어서야 걸리다니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린?」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난 그를 쿠로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잔뜩 구겨진 교복의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역시나 엉망이 된 바지를 벗었다. 허물이라도 벗는 것처럼 신속하게 옷을 갈아입은 그가 다시 이불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아파서 일찍 잘래.”

「응. 잘 자.」


뺨을 비빈 쿠로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빙글빙글 머리속을 돌던 생각들이 까맣게 물들어 갔다. 필름이 끊긴 영화처럼, 주변의 풍경이 검게 지워졌다.




“으… 으음…”


아침 햇살의 노크에 무거운 눈꺼풀을 열자 익숙한 2층 침대의 천장이 보였다. 머리가 무겁고 어깨가 뻐근했다. 이마 위에 뭔가가 붙어있어서 손으로 잡아뗐다. 얇은 시트는 제 역할을 마친 듯 쉽게 떨어졌다.


“일어났어? 형.”

“…유키오.”


방문이 열리고, 유키오가 방으로 들어왔다.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봐서, 학교 갈 준비는 이미 마친 모양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큰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린에게 말했다.


“기분은 어때? 아픈 곳은 없고?”

“…딱히…”


평소와 똑같은 동생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최종적으로는 늘 린을 용서하던 유키오였지만, 하룻밤 만에 풀린 일은 좀처럼 없었다. 말끝을 흐리는 린에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 밤에 가위 눌린 것 같았는데 괜찮아? 열도 나서 일단 해열 시트 붙이고 이불도 바꾸었는데.”

“…….”


그러고 보니 덮고 있던 이불이 도톰했다. 입고 있던 잠옷 대용의 티셔츠가 눅눅했다. 대답 없는 린의 이마에 유키오가 손을 뻗었다.


“열은 내린 것 같네. …어제 평소랑 다르다는 생각은 했는데, 설마 열이 나고 아픈 건 줄은 몰랐어. 제때 눈치 채지 못해서 미안.”


설마 여기에서 사과의 말이 나올 줄이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린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가 열이 난 걸 네가 왜 사과해.”


스스로가 듣기에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가시에 찔린 것처럼 흔들리는 눈빛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는 린에게 유키오가 대답했다.


“감시역에는 형의 건강관리까지 포함되어있으니까. 형이 아픈 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


냉정한 말이 오히려 듣기가 좋았다. 악마와 엑소시스트, 감시하는 자와 감시 받는 자. 누가 봐도 명확한 이유라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그리고…… 가족이잖아. 아픈 데 못 알아준 게 미안하고, 걱정되지.”


이어진 동생의 다정한 말이 쐐기처럼 심장에 박혔다. 겨우 가라앉혔던 마음의 수면에 뒤흔들리며 수많은 생각의 동그라미를 그려나갔다. 다정한 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거짓 위에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오쿠무라 린을 악마이자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따스함이었다.


“…형?”

“아, 아픈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스스로도 몰랐나 봐. 어제 저녁보다는 괜찮은데… 오늘 하루는 쉬어도 돼?”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가면을 썼다. 이불 아래에 주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유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마. 먹을 거랑 약은 여기 있으니까 잘 챙겨먹고, 혹시 안 좋아지면 수업 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꼭 연락해.”

“응. 걱정 마.”


순순히 대답하는 형의 모습에 마음이 놓인 듯, 동생은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린은 머리를 감싸 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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