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키리마루 연애드림. 사니와 이름 및 캐릭터 설정 있음. 귀환엔딩 IF 후일담)


 이시키리마루는 밝은 빛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곳은 어디일까? 분명히 자신은 모든 일이 끝나고 사니와였던 그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면서 잠들어 버렸을 텐데. 아직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눈앞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밝은 갈색의 곱슬머리에 커다란 다갈색 눈, 기억 속의 그와 비슷한 아이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아야 본인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소녀는 그와 닮아 있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그를 보며 소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키리마루 님이시죠?”
 “아, 아아……. 이시키리마루라 한다. 돌을 베는 신도라고는 해도 거의 종기나 병마를 병적으로 베는 일이 많군. 여하튼 신사 생활이 오래되어서 말이야, 전투보다는 신사일 쪽이 특기가 되어 버렸어. 그나저나 나를 깨운 것은 너인가?”

 소녀는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인사는 ‘처음 뵙겠습니다.’였다. 그였다면 다른 인사였을 터인데 역시 이 아이는 다른 아이구나. 실망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다행이네요. 제게도 사니와의 힘이 있는 것 같아서. 이제야 저희의 사명을 이룰 수 있게 되었어요.”
 “사명? 그게 무엇이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것을 받아주시겠어요? 받아보시면 알 거예요.”

 그가 전해준 상자 안에 든 것은 낡은 머리 장식 하나와 색이 바래 버린 편지들이었다. 정중하게 접혀있던 편지지 한 장을 꺼내 펼치는 순간, 낯익은 필체가 보여 자신도 모르게 편지지를 든 손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이시키리마루님께 삼가 아뢰옵니다.
 건강히 잘 계신가요? 저는 원래 시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비일상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제 마음은 허전하기만 한지 모르겠네요. 이시키리마루 님과 다른 분들을 남겨두고 온 것이 못내 후회될 따름입니다. 그래도 울지 않고 건강히 행복하게 살기로 약속했으니까 앞으로 힘을 내서 살아갈 거예요.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부디 당신에게 행복이 가득하기만을 바랍니다.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아야 올림.‘

 ‘오늘은 저희 시대에 남아 있는 당신의 본체를 찾아보았어요. 아직은 사니와의 힘이 없는지 혼을 불어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령 그 힘이 있었다고 해도 만나는 것은 지난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했던 당신이 아니었겠지요. 잘 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부모님께서 슬슬 결혼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성화입니다. 제 마음에는 아직 이시키리마루 님과의 기억이 너무나도 많아서 다른 사람과의 삶을 상상할 수가 없는데 말이에요. 이대로 당신과의 추억만을 간직하고 만나러 갈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어떻게 하죠, 이시키리마루 님. 제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런 저라도 좋다고 해 주시는 분이 나타났어요. 당신을 배신하는 것이 될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이시키리마루 님. 정말로 죄송해요. 오늘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분과 결혼했어요. 상대는 제 특별한 경험을 알고 있음에도 당신을 잊지 않아도 좋다고 해 주신 착한 사람이에요. 행복해지라 말씀해주셨던 당신. 형태는 다르지만 제게 미소를 주는 그 사람과 함께 이 시공의 시간을 함께 걸어보고자 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돌아가는 그 날 사과드릴게요. 영원히 이시키리마루 님하고만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목구비가 그이보다는 저를 많이 닮은 딸이에요. 제가 그 시공에서 돌아온 지 어느덧 십사년 째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이 아이가 크면 당신과 있었던 소중한 추억들을 잔뜩 이야기해 줄 생각이에요. 지금의 그이와 결혼했을지언정 당신과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은 제게 있어 무엇보다도 큰 보물이었으며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요.’

 ‘안녕하세요, 이시키리마루 님. 또 보고드릴 것이 있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딸이 결혼하게 되었어요. 아빠를 닮은 건지, 아니면 제 취향을 닮은 건지…착하고 건실한 남자입니다. 처음으로 인사를 왔을 때, 사위가 하세베 님과 비슷하게 생기셔서 얼마나 그립고도 반가웠는지. 웃음과 눈물이 함께 터져 나오는 거 있죠.’

 ‘이시키리마루 님, 제가 드디어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손주들은 남녀 쌍둥이라고 해요. 벌써 그날로부터 사십육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버렸네요. 딸에게 전해준 것처럼 이제는 손주들에게도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제 기억이 퇴색되지 않도록,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렇게 이야기를 전해가다 보면 언젠가 저와 같은 힘을 가진 아이가 나타날 수도 있겠죠? 그 아이가 꼭 이 편지들을 당신께 전해드리면 좋겠어요. 제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아뇨, 살았다는 것을 꼭 당신께 알려드리고 싶거든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로서도 아이 엄마로서도 많이 모자랐을 텐데 언제나 고맙다고 웃어주던 소중한 사람이었어요. 당신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평생을 함께할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했었어요. 당신과의 이별에 이어 이제는 그이와도 이별을 겪으니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이 허전하네요.’

‘손녀에게 대신 부탁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제 죽음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요. 당신이 마중 나와 주셨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도 듭니다. 저는 이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젊지도 예쁘지도 않으니까요. 물론 이시키리마루 님은 좋은 분이시니까 그래도 예쁘다고 웃어주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당신의 바람대로 이 시공에서도 행복했습니다. 평생의 반려도 만났고 딸과 손주들도 모두 잘 커 주었어요. 이제 내가 떠날 일만 남았네요. 나의 특별한 사람. 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있을까요. 다시 만나게 되면 이제야말로 당신 곁에서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요.’


 마지막 편지 한 통마저 읽고 나자 이시키리마루는 말없이 편지들을 고이 접어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로 탄식했다.

 “인간의 생이라는 것은 참으로 짧고도 덧없는 것이로다. 나의 마음은 지금도 돌과 같이 변함이 없고 그저 잠시 잠들어 있었을 뿐이었건만 벌써 그대는 이 세상에는 없구나.”

 이윽고 고개 숙인 그의 양 뺨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소녀에게는 그것이 보였으나 그의 마음을 헤아려 모른 척 해 주었다. 얼마를 그리 울었을까,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아이야, 나를 이 상자와 함께 잠들게 해 다오. 영원히 너희를 지켜보며 사는 것도 좋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는 그 꿈속으로 가고 싶구나. 소식을 전해주어 고맙다. 너희와 그의 피를 잇는 모든 이에게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마.” 

 소녀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의 심정을 알 수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영력을 담아 하얀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상자와 함께 빛무리 속에 녹아들어 가면서도 다정한 미소와 함께 감사하다 인사를 남기는 그에게 소녀가 작별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개를 올리자 어느새 그는 사라진 상태였고, 그 자리에는 처음 이 혼마루를 방문했을 때처럼 대태도 한 자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앞으로는 되살아날 일 없이 영원히 선조님과 함께 행복한 잠이 드시기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시키리마루 님.”

 

 대대로 물려받았던 사명은 소녀에 의해 완수되었다. 그러나 소녀는 신비한 힘을 가졌던 그녀의 선조와 천년이 넘은 도 한 자루의 시공을 넘긴 사랑 이야기를 여태까지 자신의 선조들이 그래왔듯 앞으로도 두고두고 전해가겠다고 다짐하면서 미련 없이 혼마루를 뒤로하였다.


드림러. 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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