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맥크리는 식당에 레예스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몇 번이고 더 신중하게 주위를 살핀 후에야 자세를 낮추고 세 시간 내내 처박혀 있던 구석에서 나왔다. 점심을 굻은 그의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난처한 듯 배에 힘을 주었으나 멈추지 않고 식당 뒤쪽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후 3시부터 30분. 점심 시간이 끝난 후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전까지 식당 종업원들이 쉬는 시간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조심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피해야 할 사람은 주방장이나 종업원이 아닌 가브리엘 레예스였다.



아침에 기상 사이렌 한 번에 깔끔하게 일어난 것까지는 좋았다. 오늘 아침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나온다는 특식인 것도 괜찮았다. 문제가 생긴 건 아침 훈련 전에 주어지는 자유 시간부터였다. 아침을 먹고 2시간 뒤에 시작되는 체력 훈련에 가기 전에 몸풀기나 할 겸 사격 연습이나 해보려는데, 블랙워치 사격장은 변변찮아서 오버워치 사격장으로 숨어들어갔다 괜히 훈련생들이랑 시비가 붙어 주먹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격장 담당자가 오기 전에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덜미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분명 오버워치 내에서 맥크리를 아는 사람이 없으면 블랙워치에 소식을 알릴 것이고 레예스는 단박에 맥크리의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침 훈련은 가브리엘 레예스가 담당이라는 사실이 이 난장판에서 가장 끝내주는 부분이었다.

사격 연습 좀 해보겠다는데, 왜? 오버워치나 블랙워치나 같이 죽고사는 동료 조직이라면서, 좋은 시설을 함께 쓴다고 뭐가 덧나나?

맥크리는 오버워치 훈련생들 앞에서 꾹꾹 밀어넣었던 말을 곱씹었다. 재수없는 자식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애들끼리 치고받는 싸움에서 이겼다는 시시한 사실 정도. 맥크리는 갱단 시절 밥 먹듯이 벌어졌던 막싸움에서 상대를 쉽게 제압하고 놀릴 수 있는 기술 몇 개를 배울 수 있었다. 그가 레예스를 피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맥크리 자신이 죽을 지경이 되어 왔다면 좀 나았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죽을 지경이 된 건 오버워치 훈련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그럴듯한 변명 하나 생각해놓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반나절을 도망치듯 숨어있어야 했다.



코너만 돌면 바로 식당 입구인데, 누군가가 복도 맞은편 벽에서 다가오는 낌새가 느껴져 몸을 휙 숙이고 쥐죽은 듯이 있었다. 발소리는 그의 바로 옆에서 멈췄다. 상대와 맥크리 사이에 벽이 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이 보일 리는 없었지만 맥크리는 예상치 못한 긴장감으로 숨 쉬는 것까지 멈춰가며 얼어붙어 있었다. 발소리의 주인은 한참 벽 앞에서 왔다갔다 했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가브리엘 레예스는 아닌 것 같아 긴장은 조금 풀렸지만, 하필 그 사람이 멈춘 곳이 맥크리가 훔치려던 빵이 들어있는 바구니 앞이었다. 맥크리는 욕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베짱은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해 보니 그새 10분이나 지났다. 맥크리는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대담하게 코너를 돌아가 식당으로 돌진했다. 다행히 빵은 그가 배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빵을 집기 전에 주변에 누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맥크리는 순간적으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푸른색의 오버워치 요원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깊고 짙은 눈동자가 놀란 기색 없이 맥크리에게로 향해 있었다. 요원복 모자 아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검고 긴 머리칼이 짙은 피부색과 어울려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맥크리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식당 모서리 한 켠 의자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정확히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찌릿한 느낌에 맥크리는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구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거지? 왜 지금도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건데?

데드락 갱단에서도 식량을 훔치다가 들킨 적이 많았지만 맥크리는 그때마다 훌륭한 처세술로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하얗다. 능청스럽게 넘겨야 하는데, 누군지도 파악이 안 되고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서, 그리고 말을 제대로 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맥크리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가 숨어있던 복도로 달음박질쳤다. 그녀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맥크리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자신에게 너무 크게 들려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걸지도 모른다. 그는 차마 고개를 돌려 그녀가 아직도 자신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심장이 제 말을 안 듣고 터질듯이 쿵쾅거렸다. 이미 배고픔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2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되는대로 찡그리며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자마자 간단히 세수하고 피스키퍼 손질을 하려던 맥크리는 허리춤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보통같았으면 없어진 순간 바로 알아챘을 텐데, 어제 하도 정신없는 바람에 생각조차 못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 피스키퍼를 잃어버릴 수가 있지?


맥크리는 피스키퍼를 잃어버렸을 만한 상황을 곱씹어보았다. 어제 사람들을 피해다니느라 돌아다닌 곳은 많았지만 딱히 주머니가 가벼워지거나 했던 기억은 없었다. 아, 몸싸움 중에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긴 했었다. 벨트나 금속붙이 같은 것인줄로만 알았지. 맥크리는 앞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리며 스스로에게 짜증을 표출했다. 지금 가봤자 피스키퍼가 떨어진 위치에 그대로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 누군가가 오버워치 내에 주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레예스에게 주지 않았을까? 레예스는 그게 내 거라는 사실을 잘 알텐데.


맥크리는 원치 않았지만 그의 피스키퍼를 찾으려면 오늘 아침 훈련장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맥크리는 훈련장에 나타났다. 비록 삼심분 정도 늦었지만. 그는 레예스가 기본적인 전술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 멈춘 것을 무시하며 훈련장 구석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스키퍼를 돌려 받으려면 얌전히 굴어야 해. 또 욱 해서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 맥크리는 훈련장에 들어가기 전에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이며 다짐을 했다. 그러나 막상 레예스가 그를 교묘히 걸고 넘어지기 시작하자 마음먹은대로 평정심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내가 강조했던 부분이 어디였는지 기억나나, 제시 맥크리? "



또 이런 식이다. 어제 무단으로 훈련을 빠진 건 잘못한 게 맞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어제 훈련 시간에 맥크리가 없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을 돌리면서 맥크리를 콕 집어내 남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이런 놈들은 똑같이 남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게 내 모토인데. 맥크리는 속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

"당연하다. 어제 훈련을 무단으로 빠졌으니 들은 적도 없을 내용이지. 입 아프게 말해봤자 더 이상의 훈계는 듣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몸을 혹사시키면서 반성하도록 해. 넌 오늘부터 일주일간 훈련장 청소야, 알겠어? "

"...네. "



훈련장 청소는 모든 블랙워치 훈련생들이 기피하는 벌이었다. 훈련장 자체가 넓을 뿐더러 레예스의 '훈련장' 벌은 블랙워치 시설 내 모든 훈련장의 청소를 포함했다. 전체 훈련장 청소를 하루만 해도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는 소문은 블랙워치 본부가 지어진 이후로 전통처럼 내려오는 괴담같은 사실이었다. 참아라, 맥크리. 참아. 맥크리는 이를 바득 갈면서도 잃어버린 소중한 피스키퍼 생각을 했다. 오늘은 왠일인지 레예스도 오래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훈련은 길고 지루했으나 끔찍하지는 않았다.



맥크리는 훈련을 마치고 나서 다른 훈련생들이 다 나가 아무도 없는데도 훈련장을 떠나지 않고 그 주위를 미적미적거렸다. 레예스는 뒷마무리를 하다 맥크리가 아직도 안 가고 남아있는 것을 보고 가도 된다고 소리쳤다. 

뭐지, 괘씸해서 안 주려는 건가? 이만하면 많이 굽히고 들어간건데? 맥크리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그는 레예스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오는 것을 본 레예스는 뭔가 숨기고 있다기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뭐야. 죄송한 마음이 커져서 진정어린 사과를 하러 온 거냐 아니면 청소 건에 대해서 말싸움하려고 온 거냐? "



레예스가 이렇게 나오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 무기 내놔요? 뭐 받은 건 없어요? 뭐라고 말해야 하는거지? 결국 맥크리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레예스를 빤히 쳐다보는 수 밖에 없었다. 레예스도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윽고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맥크리가 느낀 게 맞다면, 비웃음이었다.



"사과를 해도 훈련장 청소는 철회하지 않을거다. 사실 사과는 필요도 없고, 청소나 열심히 하고 훈련 좀 빠지지 마라. 안 그러면 그냥 갱단에다 도로 던져 넣을 수도 있어. 요즘 막 그런 생각이 드는 참이니까. "



맥크리는 레예스가 애초에 그가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피스키퍼를 넘겨받은 적도 없고, 어제 맥크리가 난리피운 소동에 대해선 들었을 테지만 그 이상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맥크리는 기다린 시간을 아까워하며 대꾸도 없이 뒤돌아 훈련장을 나갔다.




#3


결국 맥크리는 사건 현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어젠 벽이 부서지고 대리석 재질의 파편이 튀기면서 완전히 난장판이었지만 지금 가니 누가 마법으로 치워놓은 듯 말끔했다. 맥크리는 그 복도를 따라 걸으며 그가 잃어버린 소중한 무기의 흔적을 찾았다. 사실 이곳에서 피스키퍼를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단서도 없었다. 마지막 희망에 매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리볼버는 진짜 잃어버려선 안 되거든.


단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이 빠지도록 밑바닥을 주시하며 긴 복도를 지나 코너를 도는 참인데, 눈 앞으로 얼핏 금속이 햇빛에 반사되어 내는 빛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진짜 그의 피스키퍼였다. 맥크리는 정신없이 달려가 바닥에 깔끔하게 놓인 피스키퍼를 낚아챘다. 어제 아침과 비교했을 때보다 먼지가 좀 앉았지만 어제 몸싸움 하면서 떨어진 것 치곤 말끔했다.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맥크리는 피스키퍼를 손 끝으로 집어들고 뭔가 이상은 없는지 누가 보복성 장난을 위해 설계해 둔 함정이 아닌지 세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다시 빠져나가려했던 맥크리는 다시 코너를 지나 긴 복도에 되돌아가자마자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였다. 그 때와 똑같은 차림새에 똑같은 표정. 맥크리는 한 손에 피스키퍼를 들고 얼굴은 대놓고 드러내고 있던 상태라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직접 걸어서 맥크리에게 가까이 올 때까지 시간이 멈춘 듯 그 자세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맥크리가 얼어붙은 것을 보더니 그가 소중히 쥐고 있던 피스키퍼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리볼버 주인 맞지?"



강하고 절도있는 목소리였다. 맥크리는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발뺌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건 직감적으로 잘 알 수 있었다.



"아나 아마리 지휘관이야. 그 무기 관련해서 취조할 게 있으니까 좀 따라와야 할 것 같군."



자신을 '아나' 라고 소개한 그녀는 맥크리에게 인사를 건네듯이 한 손을 내밀었지만, 맥크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취조란 단어는 예전에 데드락 갱단 시절 들었던 적이 있다. 취조인가 고문인가 뭐 그 비슷한 것 같지만, 둘 다 좋은 의미로 쓰이진 않았었다. 맥크리는 피스키퍼마저 그녀의 눈 앞에서 숨겨버리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나가 그것을 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을 바꿨다.



"취조라기보단, 몇 가지 질문이랑...좀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서. 겁먹지 않아도 돼. "



그렇게 나오니 맥크리로서는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아나를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맥크리는 또다시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보다니, 최악의 첫인상이었을 것이다.




사격장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건물로 걸어간 아나는 깔끔한 파란색으로 도색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보아하니 직원 공용 휴게실이거나 그녀의 사무실인 듯햇다. 아나가 문을 열고 맥크리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맥크리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들어가려 했지만 긴장해서 발이 꼬여 휘청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나는 책상 앞에 앉더니 맥크리에게 손짓해 바로 앞 의자에 앉도록 했다. 맥크리가 앉자 그의 눈높이에 딱 맞는 위치에 그녀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진 패가 보였다.  


[아나 아마리 Ana amari 지휘관 Commander]


맥크리는 그녀의 직책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를 조금 위축되게 했다. 그 옆에 놓여진 하나의 사진이 아나의 강한 인상을 조금 부드러워보이게 했다. 그녀와 똑닮은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 사진이었다. 아나가 정신없이 사진을 보는 맥크리를 조용히 살펴보더니 먼저 말문을 텄다.



"어제 아침 사격장 복도에서 난리났던 사건, 알지? 그것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부른거야. 이름은? "

"...제시 맥크리. "

"내가 그 사격 훈련대를 맡고 있어서 말이야, 녀석들한테 사건의 주동자를 찾아 달라는 부탁도 받았거든. "



맥크리는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자신을 혼내려는 건지 훈계만 주려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맥크리가 슬쩍 고개를 들어 아나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녀석들 말로는 처음 싸움이 시작된 이유가 네가 제이미를 쳤기 때문이라던데. "



맥크리는 아나 앞에서 치부가 까발려지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이 내뱉었다.



"그 새끼가 사격 연습 좀 하려는데 못 쓰게 하잖아요. "

 "규율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제시. "



아나의 목소리가 매서워졌다. 맥크리는 날카로워진 그녀의 태도에 살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악의없이 제 이름만으로 불러준 첫 번째 사람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부르는 '제시'는 맥크리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나는 눈도 못 마주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는 맥크리를 보더니 표정을 조금 풀었다.



"사실 네 사격 실력은 잘 알고 있어. 저번부터 가끔씩 몰래 사격장 와서 쏘고 가곤 했잖니? 이번에 운 나쁘게 걸린 거고. 그래서 내가 끼어들어서 조금 도와줘볼까, 했는데 싸움이 나버린거야. "



맥크리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아나의 표정을 살폈지만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 때 당시에 욱해서 달려들지 않았으면 이 사람에게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었을까?  맥크리는 약간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아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맥크리를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후회해봤자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쓸모없는 건 아니야. 이번에 후회했으면 다음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해서 바꿀 수 있으니까. "

"어떻게 바꿀 수 있죠? "



맥크리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반항적으로 대들었다.



"지금은 당신이 날 도와줄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당시에 저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왜냐하면 이곳에 내 편은 없으니까. "



도와달라고 외쳐봤자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었을텐데. 왜냐하면 난 쓰레기들만 굴러다니는 황무지에서 흘러들어온 범죄자라고 낙인찍혀있으니까. 생각할수록 비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나는 맥크리가 풀죽어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닫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뿌리치면 네가 원하는 삶을 가꿔나갈 수 없어, 제시. 그리고 천천히 생각해보렴. 그때의 네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이곳은 무법지대가 아닌 엄연히 규율이 존재하는 곳이고, 규율이 있는 곳에 들어온 이상 상호간에 존중되는 규칙은 지켜야 하는거야. 그 이후에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다보면 널 도와 네 편이 되어줄 사람도 점점 늘어나겠지. 그리고 우린 사람을 버리지 않아. 이곳에 완벽한 혼자는 없어. 가브리엘도 네 입장에 대해 분명 알고 있었을거야, 어떤식으로 도와줄지를 고민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렸을 뿐이지. "


그녀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 나오자 맥크리는 혼란스러워졌다. 레예스와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맥크리는 그녀가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데드락 갱단원이었던 과거마저도 그녀가 꿰뚫고 있는 것 같아 온 몸이 간지러워졌다. 저도 모르게 팔뚝 부근에 있는 문신을 조심스레 가렸다.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서로를 믿으면 그만큼의 보답이 돌아오는 곳이니까. 오버워치의 모토 중에 하나가 동료간의 믿음과 신뢰지. "



아나가 덧붙였다.



"물론 블랙워치도 같을거야.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



맥크리는 대답 대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아나는 맥크리의 표정이 조금 나아진 것을 보더니 그에게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을 내어주면서 말을 이어갔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어. 네가 갖고 있는 신념은 뭐니?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는...그런 믿음 말이야. "



맥크리는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죄다 아나에게 말하기엔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상대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 상대가 조롱하면 그를 더 큰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것, 그런...시시콜콜해 보이는 것들. 데드락 시절에는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던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입 밖에 내기가 싫은 말들이었다. 맥크리는 고민하다가 대충 우물거렸다.



"날 괴롭히는 것들을 없애자는 것도 해당되나요?"

"맞아. 보통 그런 것들로 시작해. 자신을 지키는 것. "



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조심할 것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다간 외롭고 슬픈 사람이 된다는거야. 신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지. 어떠한 신념을 목표로 삼는지에 따라 모두에게서 부정당하고 배척될수도 있고,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스스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야. 신념이란 너의 중심이야. 혼란스러울 때, 화가 날 때, 죽고싶을 만큼 비참할 때, 널 잡아줄 수 있는 중심. 굳은 신념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길을 가르쳐 주기 마련이야. "



아나를 올려다보는 맥크리와 그에게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맥크리는 그녀의 열의에 이끌려 눈을 뗄 수 없었다.



"날 괴롭히는 것들을 없애자는 신념이, 나중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자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지키자는 것으로 바뀔 수 있어. 그렇게 너의 정의를 멋진 의미로 가꿔나가면 나중에 어제보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 난 네게 '신뢰'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믿음' 자체를 믿음으로 삼는거야. "



그녀는 맥크리가 고개를 젓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믿어주고 그들에게 너의 신뢰를 보여준다면, 그걸 눈앞에서 저버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그리고 오버워치 내에선 그런 사람은 더더욱 없을거야. 남에게서 받는 신뢰라는 건 무겁고 값진 거니까. "

"다른 사람을 믿으라고요?"

"그래. 믿고, 기다리고, 이해하고, 그들에게 네가 이해받고 신뢰받기를 기대해 봐. 어제처럼 그렇게 막 나가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날거야. "

"그렇게 하면...뭐가 더 나아질까요?"



맥크리는 쉽게만 생각해오던 인생이라는 길이 갑자기 복잡한 실타래가 꼬인 미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그녀의 진중함이 무겁게 다가왔다.



"처음엔 작은 것 부터. 그런 작은 믿음들이 쌓여가면서 그 믿음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네 마음에 자리잡는 걸 느끼게 된다면 그때 다시 오렴. 너에게 사격술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아나는 한참 열변을 토한 후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사격술을 알려준다고? 맥크리는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을 밀어내려고 했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가요? 우리가 접점이 더 있을 수 있나요?



"하지만 지금의 태도를 고치기 전엔 만날 수 없어, 알지? 훈련엔 꼬박꼬박 나가서, 그냥 참여하는 게 아니라 수석을 노리고 훈련해. 네 스승의 말도 좀 잘 듣고, 그도 널 위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까. 밥도 꼬박꼬박 잘 챙겨먹어. 그날처럼 빵 몇조각으로 때우려 하지 말고. "



아나가 순식간에 잔소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레예스에게 매번 듣던 것과 달리 그리 기분나쁘지 않아 맥크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눈이 마주쳤던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맥크리는 빵 사건이 떠오르자 부끄러워 몸을 뒤틀고 싶어졌다. 훈련도 자주 빠지는 걸 잘 알고 있는 걸 보면 대장이랑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공유하는 엄청 친한 사이란 걸로 정정해야할 것 같았다.


이후 맥크리는 아나의 손에 떠밀려 사격장에서의 싸움에 휘말렸던 아이들 앞에 가서 사과했다. 맥크리는 그들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거나 되려 큰소리 치면서 자신을 그들 앞에서 깔아뭉개려 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지휘관이 지켜보지도 않았지만 소년들은 사과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같이 사과를 했다. 맥크리는 처음 보는 평화로운 광경에 놀라 그들이 인사하며 멀어져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느낌인가? 믿음과 신뢰가 어디에서나 있는 조직이란 것이. 저 아이들도 담당 지휘관인 아나의 말에 감명받아 신념을 세우고 그것에 따르기 때문에 저런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 맥크리의 마음 속에서  조그만 신뢰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날 밤 늦게 방으로 들어온 맥크리는 생각을 멈추고 싶어 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구식 라디오를 끄집어냈다. 주변이 조용하면 오늘 들었던 말을 비롯해 온갖 생각이 밀고 올라와 밤을 새버릴 것 같았다. 라디오는 먼지가 쌓여 버튼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형태라 음악이 나오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30분 정도 끙끙대자 지지직 거리는 소음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음미하던 맥크리는 생각이 멈추기는 커녕 더 활발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것으로 이루어진, 멋진 사람

당신과 같이 내 마음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사람은 처음이예요

당신의 마음 속에 내가 자리잡을 수 있게 할 거예요

나를 지금까지 혼자 있게 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겠어요

말했잖아요, 사랑이라고

Gold/Chet Faker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멈춘 것은 한참 후였다.


맥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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