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수병

 꿈을 꾸었다. 원탁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주위는 온통 검고, 바닥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곳이 무엇인가, 짐작하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하릴없는 짓이었다. 꼼짝달싹 할 수 없이 옭아맨 두 사람의 시선. 나는 고개를 떨구고 원탁 밑에 숨겨져 있는 두 손을 맞잡는다. 나는 손가락으로 왼편 검지 손가락의 손톱 근처의 살을 누른다. 밴드엔 금세 핏물이 고이기 시작하고, 누군가 움직여야 한다. 누군가 말을 꺼내야 한다. 그게 누굴까? 차고 뜨거운 시선을 견디며 나는 회피하기를 거듭한다. 그 때 내 왼편에 있던 누군가의 흰 손이 나를 자폐적인 행동을 다정히 감싼다. 누군지 알고 있다. 손끝조차 뜨거운 다정한 변백현. 그 때 오른편의 짧게 자른 손톱이 팔의 살갗을 느리게 긋는다. 뱀처럼 야릇하게 나를 범하는 차가운 박찬열. 나는 참을 수가 없었고, 일어나 검은 사위의 끝을 절박하게 두리번거린다. 앞으로, 뒤로, 좌우로! 간다면,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긴 한 걸까? 그리고 두 사람의 손길이 사라지고, 그들을 비치는 스포트라이트가 점멸한다. 나는 밀려오는 미지근한  토기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바스락거리는 눈꺼풀이 종이처럼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리고 누군가가 묵직하게 몸을 누르기 시작한다. 가위가 시작된다. 몸을 뒤틀면서 맘 속 한 켠으론 이 무게가 날 압사하기를 바란다.

 눈을 떴을 땐 빛의 사위어 가고 있었다. 몸을 모로 하자 고인 식은 눈물이 떨어진다. 꿈에서 조차 비겁한 나. 나는 누구의 손도 쳐내지 못했다. 점멸하는 빛 사이 두 사람의 입술은,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경수야…. 경수야….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더는 잠들지 못하고 눈을 떴을 땐 다시 밤이 되었다. 목이 말라 몸을 일으켰을 때 불현듯 난 변백현이 생각났다. 차가운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침대 맡 서랍장에 있는 핸드폰으로 시선이 나른하게 움직인다. 눈 깜박임을 센다. 하나, 둘, 셋. 신호가 걸리고,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 경수?>


 주위가 시끄럽다. 몸이 차갑게 식는다. 세차게 뛰는 심장에서 박하향이 난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꿈에서 널 봤어.’

 정확히 말하지만 박찬열도 봤구. 갑자기 스멀스멀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도 나 이상하지? 나도 내가 이상해. 냉장고을 열고 생수병을 꺼낸다.

 <경수야.>
 "…… 응?"

 그가 내 숨소리을 가늠할 정도로 뜸을 들이고 나는 대답한다.

 <…… 무슨 일 있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급히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을 그렸다. 나에게로 향하는 초조한 몸짓. 핸드폰 너머 소란스러움은 잦아들고, 변백현의 다급한 숨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진다. 변백현 곧이어 xx동이요. 하면서 다급하게 말한다. 

<경수야?>
“…… 보고 싶어.”

 그 때 물병을 가볍게 쥐고 있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나는 변백현이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전화를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 언젠가 도서관 창가에 앉은 나의 입술을 고요히 바라보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매만졌던 그 입술이, 보고 싶다고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다. 갑자기 생수병의 차가운 표면에 놀라 나는 손을 떼었고, 생수병은 콸콸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물이 발등을 적시기 시작한다. 



 1-1

 속이 빈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현관 벨소리가 들렸다. 박찬열이었다. 박찬열의 매낀한 낯을 보자, 나는 급속도로 피로해졌다. 그런 나의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뭐야."
 "웃기지 않아? 우리 셋. 아직 미성년자인데도 각자의 집이 있지. 아무한테도 침범 받지 않는 오로지 나 혼자인 공간. "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박찬열은 탁자 위에 있던 책장을 스르륵 넘긴다. 책은 금방 싱겁게 덮인다. 

"신발이나 벗지?"


구두코를 까닥이며 씽긋 웃는 박찬열의 낯짝을 스치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낸다.

"똘마니들은 안 데리고 왔네?"

 싱크대 위의 환기창에 번진 빛 무더기를 보며 타는 목을 축였다. 잘못 든 잠이었다. 낮의 해의 열기가 얼마간 나의 정연함을 태워버린 듯 했다. 어지럼증.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경수랑"
 "……"

 "… 잤어?"
 "잤으면?"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앞 뒤로 흔들던 박찬열이 고개를 들고 살얼음이 낀 눈동자로 나를 직시한다. 차분히 거짓말인 내 대답을 비꼬아야 하는 박찬열의 숨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듣기 거북하네."
 "……"
 "이 상황이 장난 같지?"
 "이런 꼴을 당하고도 장난이라 여기면 병신이지."
 "얼굴이 많이 상했네."
 "경수 제쳐두고 너 나랑 한판 붙자. 이거 영 분이 안 풀려. 잘생긴 얼굴이 이게 뭐냐구."
 "너랑 나랑 피터지게 싸우면 뭐가 달라지는데?"
 "경수가 미치도록 미안해하겠지."
 "……"
 "내게."

 거실을 돌던 박찬열이 우뚝 멈춘다.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거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등을 보인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네가 자꾸 이러면 경수가 힘들어져."
 "경수 두고 협박하다니. 우습다 너."
 "너 같은 거!!!!!"

 박찬열은 곧장 걸어와 식탁 위에 있던 물병을 쥔다. 박찬열의 두 눈은 굳은 얼굴 중에 유일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죽일 수 있어. 그거 쉬워."
 "죽여. 바라던 바야. 죽이고, 평생 경수 껍데기만 가지고 살아봐."

 페트병의 얇은 막이 구겨지기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걔는 이 손에 피 묻히는 거 싫어해."
 "……"
 "잘 들어. 네가 낄 자리가 없어. 네 그 우스운 동정심으로 …… 건들이긴 말이야.”
 "……"
 "우리 관계가 꽤 복잡하고 곤고해."

 한참을 피가 굳은 내 입가를 노려보던 박찬열은 쥔 물병을 세차게 식탁 위에 둔다. 물이 튄다. 식탁을 두 손으로 짚고 몸을 지탱한 박찬열은 목을 살짝 기운다. 

 "경고했어. 눈치껏 행동해. 너."

 박찬열은 일어나 몸을 돌리고, 그 반동에 생수병이 넘어진다.

 식탁에 반쯤 걸쳐져 있던 생수병에서 물줄기가

 쏟아진다.

  

 "너 지금 나 잘못 건들인거야."


혀로 입술을 축이고 한 걸음 내딛자 떨어진 물이 발을 적셨다.







됴른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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