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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은 베란다의 볕이 잘 드는 구석에 일렬로 놓인 화분들을 살펴보았다. 겨울 지나고 점점 냉기가 견딜만한 서늘함으로 변하는 무렵, 실내에 있어서 따뜻한지 어떤 녀석들은 벌써 꽃대를 내놓고 있었다. 마른 잎들을 만져보던 정운이 성급한 꽃봉오리를 보고 기가 막혀 했다. 벌써 봄인 줄 아는 거야, 부지런한 거야. 어째 이 녀석은 매년 저 혼자 이런다니까. 물뿌리개를 들고 마른 흙에 물을 뿌리자 물이 흙에 스며들며 사라락 젖어 드는 소리를 내었다. 촉촉한 흙에서 특유의 냄새가 난다. 정운은 잠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면적의 볕을 느끼며 밖을 내려다 보았다.

   수해가 자리를 비우는 날들이 잦아졌다. 한동안 곁에 잘 붙어있더니, 또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는 날들의 반복이다. 이틀째인가... 언제 들어온다고 말도 안 해주고. 연락이라면 30분 전 쯤에 주고받았다. 잠깐 쉴 때나 식사 때 맞춰서 꼬박꼬박 연락이 온다. 그래도... 집에 안 들어오는 건 심하지 않나.

   너무 집착하는 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정운은 화분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흙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불안한 마음에 괜히 손톱 끝을 툭툭 뜯었다. 분명 마음이 짙어진다고 느꼈는데. 짙어지다 못해 조여들 정도로 나한테 쏟아지는 애정이었는데. 왜 또 멀어지는 거지.

   처음 수해와 만나고 가까워지기 시작한 무렵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그래, 원래 이랬었지. 이게 맞는 거지. 한 곳에 마음 붙이고 머무는 법이 없었던 수해는 바람이 부는 대로 밀려가는 자신의 일상에 무리해서 정운을 끼워 넣었고 정운과 정운의 집은 결국 수해를 늘 돌아오게 하는 지점이 되었다.

   그렇게 변한 삶이 싫을 수도 있다. 나 때문에 자기 삶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고. 정운이 좋은 문제와 자신의 삶이 변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 게다가 수해는, 자신과 붙어 있으면 오히려 집착이 더 심해지는 것 같으니까. 차라리 지금이 나을지도. 흥미가 생긴 대상에 집착하고 파고드는 수해의 성격을 알고 있다.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다. 그 에너지가 단 하나의 대상에 맞추어지면 지나치게 힘이 실려 수해 본인도 종종 곤란해하곤 했다. 밖으로 나가 여러 대상에 동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았다.

   전기 티포트를 꺼내 물을 끓이고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다. 드립백에 뜨거운 물이 닿자마자 향기가 피어오른다. 뜨거운 물이 드립백을 통과해서 쪼르르 담기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너무 고요하네. 사람은 굳이 말소리를 내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들어있기만 하면 끊임없이 인기척을 낸다. 아주 작은 소리이지만 공간에 나 이외의 누군가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에 비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섬뜩할 정도로 아무 소리도 없다. 공간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공백을 느끼게 한다.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를 들고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메모를 체크했다. 정확히 특정할 순 없지만 대략의 날짜와 시기가 적혀있다. 재성이 죽기 전, 부대에 있을 때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떠오르는 대로 남겨둔 기록이다. 이미 시간이 지난 일들이라 더 기억에서 꺼내올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재성이 그때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하며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기억들이 추가로 떠오르곤 했다. 거짓 기억일까. 이런 일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 나머지 기억을 꾸며대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정말로 재성이 그런 말을 했었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이제 그것을 확인해줄 사람이 없다.

   재성이 죽기 전 가장 마지막 몇 주간의 상황은 비교적 선명했다. 보직 특성상 고위 간부들과 가까이 지내며 업무 볼 일이 많았던 재성은 틈만 나면 업무 도중 겪었던 부조리한 일과 부당한 상황에 대해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몇 주간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 말이 없다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알아버렸다며 겨우 말한 것이 다였다. 언뜻 보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의 징후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정운을 보던 눈빛은 삶을 포기하는 사람의 무기력과 슬픔이 아닌, 궁지에 몰려 도움을 바라는 사람의 절박함이었다. 정운을 믿고 털어놓아도 될지 한참 동안 고민을 했겠지. 그때 자신은 왜 재성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을까. 결국 재성이 정운에게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탓에 지금 정운이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수해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해볼까. 곧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깨닫는다. 재성이 남긴 부채와도 같은 일을 수해에게? 자신과 정운 사이의 일에 다른 이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인지하기만 해도 분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떠는 수해에게? 정말이지 큰일 날 생각이다. 그리고 너무 바쁘기도 하고. 정운은 괜히 스마트폰을 한번 들어서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어떻게든 증거가 되거나 의문을 제시할 만한 타당한 정보가 있어야 뭐라도 해볼 텐데... 이제 군인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빨리 나가라고 한 거였나... 괜히 남아서 들쑤시지 말라고. 정운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정운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

   수해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외투를 벗고 짐을 정리한다. 생각보다 엄청 지치거나 피곤해 보이진 않네. 속으로 잠깐 의심이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이 집으로 귀가하지 않고 수해의 집에서 지냈을 수도 있겠구나. 여기 말고도 지내는 집이 몇 군데 있다고 했으니까. 나와 잠시 거리를 두고 싶어서 일 핑계를 대는 거 아닌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지... 사람이 점점 미쳐간다. 평소 같았으면 지나치게 과정들이 많이 생략된 감정만이 잔뜩 실린 억지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젠 이런 아주 자그마한 균열을 일으키는 생각이 한번 피어오르면 쉽게 없어지질 않고 찜찜하게 몸집을 키워가서 아주 곤란하다.

   정운은 한숨을 내쉬며 수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폭 안긴 수해의 목덜미에서 익숙한 체향이 느껴진다. 옅은 담배 냄새. 늘 뿌리는 향수 냄새. 아직은 이 집에서 세탁한 것이 분명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아주 약하게 남아있다.

   "별일 없었어요?"

   "응. 별일 없죠."

   수해가 정운의 등을 마주 끌어안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정운의 냄새와 익숙한 체온을 느끼고 있다. 잠시 정운을 끌어안고 있던 수해가 자리를 옮기려고 슬슬 몸을 돌렸다. 괜히 놓아주기 싫어 안은 채로 있으니 수해가 허리에 정운을 매달고 주방으로 가서 머그잔을 꺼낸다. 수해의 어깨에 고개를 얹고 찬장에서 스틱 핫초코를 꺼내 머그잔에 쏟아붓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담아두고 있던 의심이 덩달아 쏟아진다.

   "수해 씨. 그러고 보니 집에는 자주 가요?"

   "집? 뭔 집?"

   전기 포트에 물을 담으려던 수해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휙 내려 정운을 돌아본다.

   "아... 저기, 건너편에 집 얻은 데랑 다른 데? 가끔 공과금 확인하러. 여기 동네 집 빼고 거의 정리 했어요. 저기도 뭐 거의 창고지 뭐. 물건만 쌓아놓고."

   스위치를 탁 내리자 곧 전기 포트에서 부글대는 소리가 났다. 수해는 양손으로 주방 조리대를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씨.. 거기 청소 좀 하고 환기도 시켜야 되는데. 정운은 수해를 더 꼭 안으며 수해의 뺨에 얼굴을 댔다.

   "이번에는 며칠 쉬었다 다시 나가요?"

   "아... 내일 바로 나가야 될 것 같은데. 잠깐 들렀어요."

   수해가 시선을 피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좀 그렇네. 계속 지켜봐야 하는 일이 있어서...

   속상해 죽을 것 같다. 이렇게 꽉 안고 있는데도 왜 잡히질 않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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