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스가 로코물

* 익명게시판 썰 기반 리맨물

"저는 오늘 남자와 키스했습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면... 아니, 오히려 좋았다면 그건 왜 그런걸까요?"






04.





  2팀 팀장을 포함한 모든 사원의 시선이 다이치에게로 향했다. 단순히 파일이 날아가서 그렇다, 죄송하다는 변명으로 무마했지만, 저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존재는 쉬이 무마할 수 없었다. 아직 저를 살피는 몇몇 시선에 다이치는 오후쯤에 가져다주려던 다른 부서의 서류를 집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자신도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오죽했을까. 왜 벌써 가져왔냐는 질문에 다이치는 오후에 잊어버릴까 싶어 미리 가져다주는 거라는 변명을 대며 하하 웃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일하는 데 방해되어 가슴 포켓에 꽂아둔 사원증을 빼고, 주름진 곳이나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괜히 셔츠랑 바지를 툭툭 털던 중이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너무 빨리 보네요.”



  다른 부서에 일이 있어 나왔는지 스가와라의 손에는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간단히 인사하고 지나가도 될 텐데 그는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잘 지냈어요?”

“네.”



  서로 좋은 만남도 아니었는데 계속 말을 거는 스가와라가 불편했고, 그가 더 말하기도 전에 다이치는 짧게 인사하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고작 점심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스가와라 주위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족히 한 달은 출근한 사람처럼 자기 부서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 부서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늘 출근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몰려오는 식곤증에 아무리 기지개를 켜고, 손가락을 주물러도 소용이 없어 다이치는 결국 커피 자판기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찔러 넣어도 잡히는 거라고는 주머니 속 갇혀있던 공기나 실오라기가 전부였다. 이번에는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그쪽도 다르지 않았고, 뒷주머니 두 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귀찮을 정도로 짤랑짤랑 거리던 동전들이 꼭 필요할 때는 없었다. 어쩔 수 있는가, 아래층 탕비실에 가든, 아니면 다시 자리로 돌아가 동전을 챙겨 나오든. 둘 중 하나였다.

  덜그럭-

  다이치 앞에 손이 하나 쑥 들어오더니 투입구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자판기 안으로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 드실래요?”



  요즘 일이 바빠서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발령 받은 지 한 달째인데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러기에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생했다.



“저기-”

“저기, 가 아니라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 스가면 돼요.”

“스가와라 씨, 오늘 발령받은 지 첫날인 건 알고 계십니까?”



  그는 스가면 된다고 했지만, 다이치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뒷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가와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그럼 이렇게 한가롭게 계셔도 됩니까?”

“점심시간에 팀장님께서 사와무라 씨한테 배울 게 많을 테니 시간 되면 잘 따라다니라고 하시던데요?”



  2팀의 토죠 팀장이 있었다면 분명 그 옆에는 다이치의 상사인 1팀 팀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말리기는커녕, 제 아랫사람이 한 명을 더 짊어지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유능한 사원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자신 또한 부족한 사람이니 스가와라에게 가르쳐 줄 만한 건 없다는 걸 말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뭐 마실래요? 커피? 에너지 드링크?”

“됐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요. 저번에 호텔에서 신세도 졌는데.”

“그...! 이, 입조심 하세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떤 거요? 우리가 K 호텔 화장실 앞에서 뽀뽀라도 했다는 거요?”

“스가와라 씨!”



  스가와라의 놀림에 다이치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회사에서 목소리를 높인 적이 거의 없던 그가 하루에 두 번이나, 그것도 동일 인물 때문에 소리를 지른 것은 입사 이래 처음이었다.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앞에 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여기 따로 있는 상황이 참 황당했다. 그런 다이치의 속내를 알면서도 스가와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걱정 마요. 아무도 없으니까. 생각보다 걱정을 사서 하시네요.”

“매사에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괜한 오해를 살 일 만들고 싶지 않고요. 그리고 당연히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특히나 게- 하아, 아무튼 그런 추문은요. 스가와라 씨는 그쪽일지 모르지만 전 아닙니다.”

“나도 아닌데요?”



  부정적인 대답에 다이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면서 왜 그런 짓을 벌였냐는 불만과 어이없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저도 평범한 노멀입니다. 그때는 그냥 맞선보기 싫어서 빠져나갈 방도로 사와무라 씨에게 다짜고짜 키스한 것뿐이고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사와무라 씨가 아니더라도 저는 했을 겁니다.”



  커피면 돼요?

  깔끔한 답변과 이어지는 질문에 다이치는 허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는 제 손에 쥐여 주고, 하나는 자기가 챙기는 모습이 조금 전 생각보다 대담한 발언을 한 사람치고는 여유로웠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까 저번에 했던 말 지킬게요. 언제 시간 돼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언제 우리가 약속했었던가, 기억을 곱씹었다.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스가와라가 오른손으로 밥을 떠먹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떠올랐는지 짧은소리를 냈다. 키스를 당하고, 상황을 제대로 따지기도 전에 정중하게 사과받고, 밥 한 번 사겠다는 말을 들은 그날의 일 전부 말이다.



“...요즘 일이 많아서 확답을 못 드리겠네요.”

“그럼 시간 괜찮을 때 말해주세요.”



  스가와라는 알겠다는 대답도 듣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와 말을 했다 하면 제대로 맞받아치지도 못하고, 멍해지기 일쑤였다. 첫 만남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제가 생각해도 답답하기 그지없는 본인의 태도에 속이 타 커피를 크게 두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저릿하게 만드는 강렬한 쓴맛은 침을 몇 번이나 삼켜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평소 피곤할 때마다 자주 마시고 많이 마신 커피인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씁쓸하고 적응이 되지 않아 정수기에서 물 한 잔을 받아 입에 머금어 가글하고 삼키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참... 오늘 뭔가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스가와라의 밥 산다는 약속은 믿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신세 졌으니 밥을 산다면서 전화번호는커녕 고작 이름 하나 묻고 가버리는 사람에게 신뢰는 눈곱만큼도 없었고, 그 약속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 식의 첫 만남에 이어 회사에서의 동료로 만난 것은 더욱 불편했다. 몇 번 보지 않은 상대를 너무 섣부르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안 그래도 불편한 초기 관계인데 사적인 식사까지 함께하는 건 몇 배로 어색할 것 같았다. 다이치는 맛있는 음식은 편하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이런 다이치의 마음도 모르는 데다가 무엇보다 끈질겼다.



  화요일.


“오늘 저녁 어때요?”

“야근 있습니다.”



  수요일


“오늘 한잔 어때요?”

“팀 회식 있습니다.”



  목요일


“거, 밥 좀 먹읍시다.”

“오늘 영업 2팀 회식이라던데요.”



  금요일


“오늘도 거절하면 드러누울 겁니다.”

“...여기가 화장실 바닥인 건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마 내가 여기서 구르겠어요. 방금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물어보는 스가와라의 고집에 질릴 법도 했고, 그 때문에라도 한 번쯤 들어주고 말 법도 했는데, 핑계를 생각할 것도 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이 생겨 다이치 본인도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스가와라 또한 지치기 시작했고, 다이치의 반박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니, 밥 먹자고 한 게 언젠데. 나랑 밥 먹기 싫어요? 싫으면 싫다고 말해요.”

“일이 계속 있었지 않습니까.”

“그럼 나랑 밥 먹는 거 싫은 건 아니죠? 일 없으면 괜찮은 거죠?”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사와무라 씨, 빈말이라도 못 한다는 말 들어봤어요?”



  오른쪽 벽면에서 핸드타월을 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화장실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 같다는 것을 알고, 둘이 나란히 걷기에 적당한 복도라서 따라 옆에서 저녁 먹자고 고집부리는 그가 불편했다. 이 정도 거절이면 그만해도 될 텐데.



“내일 아침 일찍 일이 있어서 오늘 안 될 것 같습니다.”

“.......”

“거짓말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나랑 밥 먹기 싫어서 없는 약속 지어낸 거 아닐까 하는 생각 같은 거 안 했어요.”

“...제가 졌습니다. 기회 되면 같이 먹읍시다. 정말로요.”



  다이치는 몸을 돌려 스가와라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접인데 결연한 표정과 마지막 말, 그리고 말투는 마치 제발 같이 먹어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제대로 마주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키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위로 솟은 머리카락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머리 위 형광등 때문인지 아니면 뒤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 때문인지 회색빛을 띠는 그의 머리칼은 가는 은실을 곱게 풀어놓은 것 같았다. 그 머리칼 아래의 동그란 연갈색 눈동자는 거울처럼 굳은 표정의 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왼쪽 눈 아래에 뭐가 묻은 줄 알고 알려주려다가 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말을 삼켰다. 일주일이나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게 조금 미안했다.



“밥, 같이 먹읍시다.”



  조금 전보다 확실히 부드럽다는 걸 본인이 느낄 정도였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풀어지는 얼굴 근육도, 성대의 울림도, 혀를 거쳐 입술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도.

  투덜거리던 표정은 사라지고 이제야 원하는 답을 들어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괜찮은 시간을 알려달라는 스가와라는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금세 업무에 집중하는 그가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엄지로 턱을 받치고, 검지를 입술에 살짝 물고 모니터를 응시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고운 사람이다. 저를 포함한 주위의 남자 동료들처럼 뭉툭하고 선이 굵다는 표현보다 가늘고 유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 같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그냥 남자치고 곱다는 의미였다. 고작 생각일 뿐이었다. 아무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말인데 다이치는 입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쁘다는 말을 써도 괜찮냐고. 대상이 생략되어 있어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제 자리에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질문과 대답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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