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 흥해도 청춘 망해도 청춘 9


W. 스킨




지훈은 다니엘을 잘 알았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이 붙어지내온 약 13년의 세월은 쉬이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니엘이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뭔지, 어떨 때 기분이 좋아지고 또 어떨 때 화를 내는지. 다니엘에 관한 거라면 웬만한 건 다 안다고 생각했고 그 누구도 자신만큼 다니엘을 잘 알 수는 없을 거라고 자부했다. 단 한 가지, 애인을 대하는 다니엘이 어떤지는 제외하고 말이다.

"땅콩 나 요즘 일찍 잘 일어나지."
"그러게. 웬일이야?"
"땅콩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가 봐."
"......"
"왜 또 눈 피해. 아 존나 귀여워."

타고나길 다정한 다니엘이 과연 제 애인에게는 어디까지 다정해질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 봐도 다정의 극치를 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본인의 말처럼 다니엘은 지훈과 사귀기로 한 이후 시간에 맞춰 재깍재깍 기상했다. 어떤 날은 지훈보다도 먼저 일어나 지훈을 깨우기도 했다. 창문을 벌컥 열어제끼고 땅콩을 불러대는 가라앉은 목소리에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는 일이 많아졌다.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요즘이다. 그래도 틈만 나면 귀엽다며 이렇게 대뜸 볼에 뽀뽀를 해오는 건 아직까지 영 어색했다. 어색하기만 하면 다행이지, 지훈은 지구를 뚫을 만큼 부끄러워져서 매번 불타는 고구마가 된 얼굴을 숨기기 바빴다. 오늘도 지훈의 불타는 얼굴과 함께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 진짜, 좀! 누가 보면 어쩌려고 자꾸 그래...!"
"뭐가?"
"그렇게 갑자기 뽀뽀하고, 막... 그러지 말라구..."
"볼뽀뽀도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입뽀뽀는 먼저 어떻게 했대."
"...너 그 얘기 언제까지 할래."
"땅콩이랑 경로당에서 알까기 할 때까지."
"진짜 싫다."

히죽거리는 다니엘을 쭉 밀어내며 지훈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요즘의 둘은 지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생부장 쌤은 물론이고 각자의 담임, 반 친구들마저 웬일이냐는 말을 습관처럼 건네왔다. 그때마다 지훈은 별다른 대답 대신 웃어보일 뿐이었지만 다니엘은 요즘 눈이 그렇게 잘 떠진다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다른 이들 모두 그 대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지훈만은 뾰족해진 눈으로 다니엘을 째려보았다. 지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다니엘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장난스레 윙크를 날리고 에어뽀뽀까지 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티내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아직까지 조심 또 조심 중인 지훈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다니엘이었다.

땅콩 근데 손 왜 그래.
응? 왜.
여기 상처 있는데. 어디 베였어?
헐, 몰라. 근데 아파...
갑자기?
히잉... 보니까 아파. 원래 상처는 보면 아픈 거야. 아 진짜 아파...
아 얘 또 귀여운 짓하네. 이리 와봐, 뽀뽀 한 번만 하자.

"...뭐고. 박지훈?"
"아악!"

꽤 이른 시간에 도착해 복도에 사람이 없었다. 지훈의 손을 잡고 조물거리다 지훈 본인도 모르고 있던 상처를 발견한 다니엘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뽀뽀를 시도한 순간이었다. 다른 반에서 교과서를 빌리고 나오던 우진이 그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처음 몇 초는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요즘 진짜 지각 안 하네, 이런 가벼운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다니엘이 지훈의 손을 붙잡고 뭐라뭐라 말을 하는 그 모습이, 지훈에게로 고정된 다니엘의 시선과 표정이, 그러다 지훈의 양 볼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려는 폼이 너무 예사롭지 않아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지훈을 불러버렸다. 당연하게도 지훈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덩달아 움찔한 다니엘이 휙 고개를 돌렸다. 우진과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멍해지는 듯하더니 이내 금방 웃어버린다.

"우진이 안녕."
"...예, 형. 안녕하세요."
"너 학교 엄청 일찍 오는구나."
"어제 게임하느라 밤 새가지고 걍 일찍 와버렸어요. 행님은요?"
"나는 요즘 눈이 엄청 잘 떠져서. 일어난 김에 일찍 왔어."
"아아."

또 시작이다. 지훈은 여유롭게 웃고 있는 다니엘을 몰래 쏘아봐준 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무심한 얼굴로 서 있는 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우진의 눈이 저에게 수만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지훈의 마음을 알고 있던 우진이건만, 차마 사귀게 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직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지훈은 우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당황했던 얼굴을 지우며 우진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 그보다 먼저 우진이 입이 열렸다.

"둘이 드디어 사귀기로 했나."
"뭐, 뭐라, 어? 나? 아니? 뭐, 뭐가?"
"뭐라노. 잠 덜 깼나."

다니엘이 밖에서 대뜸 뽀뽀를 해올 때 만큼이나 당황해버렸다. 어버버버 난리가 난 지훈을 보며 우진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그렇게 당황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분명 같이 당사자인 다니엘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평온한 얼굴로 당황한 지훈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또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우진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맞네. 사귀네. 존나 사귀네.

"내 입 그래 안 싸니까 걱정 마라. 니엘이 행님, 저 소문 안 내니까 걱정하지 마요."
"아냐, 난 소문 내주면 더 좋은데."
"야 너 진짜 뒤질래?"
"근데 우리 땅콩이 안 된다네. 일단 우진이만 알고 있어 그럼."

예예. 우진은 얼른 대답하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둘이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지랄쌈바를 추든 제 알 바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 풋풋한 커플을 오래 보고 있는 건 정신건강에 해로웠다. 어느새 둘만의 세상에 빠져버린 다니엘과 지훈을 빠르게 지나치며 우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앞으로 굉장히 힘들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역시나 적중했다. 우진만이 유일하게 둘의 연애 소식을 알게된 오늘, 다니엘은 매 쉬는시간마다 4반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그때마다 우진을 방패삼아 지훈에게 스킨십을 했다. 스킨십이라고 해봤자 통통한 볼따구를 조물거린다거나 손을 만지작대는 정도였지만 그마저도 지훈이 기함을 하는 탓에 다니엘은 온갖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우진은 제 등 뒤에서 속닥속닥 실랑이를 벌이는 둘을 힐끔 쳐다보곤 아침보다 좀 더 짙어진 한숨을 내뱉었다. 앞에 서 있는 대휘와 진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 더 몸을 틀어 둘을 가려주었다. 제 한 몸에 다니엘의 덩치가 가려질지는 의문이지만 우진은 나름대로 커퀴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고 있었다. 가히 놀라운 우정이었다.

"근데 둘은 아까부터 박우진 뒤에 숨어서 뭐해?"

대휘의 말에 지훈은 초인적인 힘으로 다니엘을 밀어냈다. 어쩐지 다니엘의 눈꼬리가 좀 내려간 것 같았지만 지훈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긴 뭘 해, 아니야. 지훈의 어색한 변명에 괜히 보는 우진까지 식은땀이 삐죽 흐를 것 같았다. 둘이서만 몰래 뭐 먹었지! 다행히 한참 잘못 짚은 대휘 덕에 대화 주제는 빠르게 바뀌었다. 지훈의 자그만 손에 밀려났던 다니엘은 지훈을 향해 불타는 시선을 보냈지만 결국 쉬는시간이 끝날 때까지 눈빛 한 번 받지 못했다. 지훈의 주특기가 여기서 나왔다. 물 흐르듯 가뿐히 무시하기. 다니엘의 입술이 조금 삐죽였다. 자타공인 쿨한 성격의 소유자도 지훈 앞에선 한 마리의 어린 강아지에 불과했다.

"야 다니엘."
"왜."
"...이따 밥 같이 먹어?"
"응, 그러든가."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별다른 인사도 없이 나가려는 다니엘을 붙들고 물었더니 아까와는 묘하게 다른 어투와 눈빛이 돌아왔다. 지훈은 살짝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미련 없이 뒤돌아 교실을 나갔다. 남겨진 지훈이 바보 같이 눈만 깜빡이는 걸 보며 우진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면서 속으로 장담했다. 저 둘은 장차 이 시대 최고의 사랑꾼이자 핵민폐 커퀴벌레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교실로 돌아간 뒤 수업시간 내내 조금 뚱해 있던 다니엘은 점심시간이 되고 지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원래 애인이 너무 잘생기고 예쁘면 싸우다가도 화가 그냥 풀리고 그런다는데, 다니엘은 본인들이 아마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단순한 다니엘은 급식실로 내려가는 길에 지훈을 슬쩍 잡아당겼다. 바로 앞엔 우진과 진영, 대휘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어깨를 감싸기에 지훈은 반사적으로 뒤를 살펴보려다가 말았다. 어깨동무 정도는 다니엘이 누구에게나 많이 하는 것이었다. 이 이상의 것만 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예를 들어 손을 잡거나,

"땅콩 손 잡고 싶어."

뽀뽀 같은 것만 아니면.

"아 뽀뽀하고 싶다."

퍽. 그 말에 지훈은 놀고 있던 손으로 다니엘의 복부를 내려쳤다. 이젠 다니엘을 때릴 때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애인이라고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그 솜방망이 같은 주먹에도 다니엘은 큰 반응을 보였다. 이 또한 다니엘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땅콩과 놀아주며 생긴 하나의 버릇과도 같았다. 왜 때리냐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다니엘은 전혀 억울해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깨 위에 걸쳐진 다니엘의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지훈의 볼에 닿았다. 말랑거리는 느낌이 좋다며 시도때도 없이 만져대는 곳이었다. 또 조물대기 시작하는 큰 손을 떼어내자 금세 다시 붙어 꼬물거린다. 그 행동을 네 번 정도 반복했을 때 지훈은 아예 어깨에 올려진 다니엘의 팔을 밀어냈다. 그것도 모자라 옆으로 크게 거리를 두기까지 했다. 다니엘의 시선이 자동으로 지훈에게 따라붙었다.

"왜 떨어져. 이리 와."
"아 진짜 하지 마 다니엘."
"뭘."
"밖에선 나한테 손 대지 마."
"......"
"...아니 이게 말이 좀 그런데, 그냥 누가 보면 좀 그러니까..."
"...알았어."

초롱초롱하던 다니엘의 눈빛이 생기를 잃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는 다니엘의 옆에 따라붙으며 지훈은 다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눈꼬리가 아까보다 더 처진 것 같았다. 아씨, 삐쳤나? 괜히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하며 관심을 끌어보지만 다니엘은 앞만 보고 걸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야겠단 생각에 입을 떼려는데 앞서 걷던 진영이 휙 뒤돌았다. 얼른 오라며 손짓하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습관처럼 입꼬리를 올렸던 다니엘은 지훈이 쳐다보는 순간 웃음을 싹 지웠다. 삐친 거 존나 맞았다.

"다니엘 국 먹지 마. 새우 들었어."
"응."
"떡갈비 줄까?"
"똑같이 받았는데 왜. 너 먹어."
"...요구르트 하나 더 받아올까?"

급식을 먹을 때도 지훈은 다니엘의 눈치를 보며 계속 말을 걸었다. 이미 밥에 눈이 돌아간 진영과 대휘는 몰랐겠지만 우진은 괜히 또 눈치가 보여 밥 먹는 속도를 빨리했다. 아까 내 뒤에 숨어서 꽁냥꽁냥 지랄할 땐 언제고 지금은 또 뭐 때문에 저러는지. 빛의 속도로 식사를 마친 우진은 아직 덜 먹은 대휘와 진영까지 재촉했다. 당연하게도 짜증이 돌아왔지만 우진은 재촉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누구보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롯이 둘만 남게 되자 지훈이 다니엘의 눈치를 보는 횟수가 더욱 늘어났다. 끊임없이 말을 거느라 지훈의 식판은 처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힐끔 지훈의 식판을 쳐다본 다니엘이 젓가락 끝으로 식판을 톡톡 건드렸다.

"나 그만 보고 밥 먹어 밥."
"...배가 별로 안 고파."
"왜. 이따 빵 사줄까."
"아니이..."

삐친 와중에도 지훈이 밥을 잘 먹지 않는 건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저 때문인 것 같아서 고개를 들고 지훈을 마주봤다. 여전히 힐끔거리고 있던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저렇게 눈치를 볼 때마다 토끼 같아서 귀여워 죽겠다. 다니엘은 또 자기가 삐쳤다는 걸 잊고서 웃고말았다. 얼른 밥 먹어. 다니엘의 말에 지훈은 그제서야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웃어주는 걸 보니 그나마 걱정은 좀 덜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다니엘."
"응."
"...아니야..."

그러나 지훈은 응 하고 대답하는 게 어려워 뽀뽀를 하는 모순적인 부끄럼쟁이였다. 막상 미안하다고 말을 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식판을 정리하면서 한 번, 계단을 올라가면서 한 번, 각자의 교실로 들어가기 전에 또 한 번. 총 세 번의 시도를 거쳤지만 결과는 모조리 실패였다. 지훈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그 할 말이 미안하다는 말일 것도- 알았지만 다니엘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우물쭈물거리는 지훈도 참 귀여웠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다. 양치 도구를 챙겨나오면서 지훈은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양치 다 하기 전엔 꼭 얘기해야지. 꼭꼭.

"아이에."
"다니엘?"
"웅."
"양치 다 하고 얘기해 바보야."
"히어."

분명 자신은 싫어, 라고 말했는데 잔뜩 뭉개진 발음이 튀어나왔다. 밥을 늦게 먹어 그런지 화장실에 사람이 없었다. 나란히 세면대 앞에 서서 양치를 하며 지훈은 용기있게 다니엘을 불렀다. 입엔 치약 거품이 가득했고 그때문에 자연히 발음이 뭉개지는 게 좀 웃겼지만, 지훈은 어쩐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됐다. 다니엘은 입을 헹구면서도 피식피식 웃었다. 저 땅콩은 참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린다. 거품을 한 번 퉤 뱉은 지훈은 다시 한 번 치카치카 칫솔을 움직이며 다니엘을 불렀다.

"아이에-"
"왜 자꾸 불러."
"...미아내."
"뭐가. 자꾸 불러서?"

도리도리.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른하게 쳐다보는 다니엘의 눈빛에 지훈은 슬쩍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까 나한테 손 대지 말라고 했던 거, 미안해. 물론 아주 뭉개진 발음이었다. 다니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러 얼굴을 굳히며 칫솔을 탁탁 털자 지훈의 시선이 힐끔 와닿았다.

"안 매워? 일단 입 헹궈."
"아이에에..."
"이따 많이 대답해 줄 테니까 얼른 헹궈. 나 그만 부르고. 맵겠다."
"웅..."

말은 또 잘 듣는다. 얌전히 허리를 숙이고 우물우물 입을 헹구는 지훈에 다니엘은 몰래 심호흡을 했다. 마침 아무도 없겠다 당장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러다 진짜 접근 금지령이라도 받으면 정말 우울할 것 같았다. 내가 이 사랑스러운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니, 이게 사랑이란 걸 진작에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때아닌 후회를 하며 다니엘은 지훈이 양치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물을 푸하 뱉으며 지훈이 허리를 바로 하자 다니엘은 가까이 다가가 젖은 입가를 닦아주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 손을 타는 지훈이 사랑스러웠다.

"양치 끝났으니까 다시 말해봐. 아까 하도 웅얼거려서 뭐라는지 못 알아들었어."
"......"

사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다 알아들었지만 제대로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 지훈의 동공은 지진이 일어났다. 양치하면서 하나 지금 하나 말로 하는 건 똑같은데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은근히 끈질긴 구석이 있는 다니엘은 여유로운 웃음을 입가에 걸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말할 때까지 여기 있지 뭐. 그 말에 지훈은 입술을 삐죽이다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째 양치를 하면서 말할 때보다 더 줄어든 목소리였다.

"나한테 손 대지 말라구 했던 거... 그거 미안하다구..."
"그럼 이제 손 대도 돼?"
"뭐?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 내 말은, 밖에서 갑자기 그러지 말라구."
"그럼 미리 말만 하면 되는 거지?"
"아니이... 개새끼야."

텅 빈 화장실에 다니엘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결국 욕을 뱉어버린 지훈은 제가 더 놀라선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과하는 입장에서 욕을 해버리다니. 미안해하는 지훈과 달리 다니엘은 그것마저 좋아 죽겠다며 웃었다. 현재 다니엘의 머릿속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뽀뽀하고 싶다.

"땅콩 이리 와봐."
"왜. 야, 야 뭐해!"
"쉿."

혹여나 누가 들어올 것을 대비해 다니엘은 지훈을 데리고 맨 끝 칸으로 들어갔다. 당황하는 지훈을 문 앞에 세워두고 손을 뻗어 문을 잠갔다. 등 뒤로 철컥 소리가 들리자 지훈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좁은 칸 안에서 가까워진 둘 사이에 아주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미소 띤 얼굴로 지훈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다니엘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쪽 하고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감질맛이 났다. 코앞에서 지훈의 눈을 쳐다보던 다니엘은 그대로 다시 입을 맞췄다. 몇 번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다 지훈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물었다. 잔뜩 움츠러든 지훈이 손을 들어 밀어내려는 게 보였다. 다니엘은 한 손으로 지훈의 손을 잡아내리며 다른 손으로는 괜찮다는 듯 등허리를 쓸어주었다. 지훈에겐 그게 오히려 더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입술을 물었다 놓는 행동이 반복되면서 쪽쪽거리던 소리가 어느새 촉촉하게 바뀌었다. 다니엘이 입술을 빨아들이는 범위가 점점 커질수록 지훈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깐만, 다니엘,"
"나도 잠깐만, 지훈아."
"......"

여기서 다니엘이 땅콩이라고 불렀다면 밀어낼 수 있었을까. 지훈은 아마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떨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지훈의 입술을 살살 간질이던 다니엘의 혀가 그 속을 가르고 들어왔다. 곧 맞닿은 말캉한 감촉에 지훈의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이러다 주저앉겠다 싶어 다니엘은 두 팔로 지훈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단단히 둘러진 팔에 둘의 몸이 더 밀착되었다. 다니엘의 고개가 더욱 숙여지며 깊게 파고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굳어버린 지훈의 혀를 감싸고 빨아들이는 움직임이 능숙했다. 이 새끼 더럽게 많이 해봤나 보네. 지훈은 상황에 맞지 않게 순간 질투가 났지만, 이 또한 잠시뿐이었다. 다니엘의 따뜻한 혀가 입 안 여기저기를 맴도는 동안 지훈은 혼이 쏙 나가버렸다. 벌어진 둘의 입에서 시원한 치약향이 맴돌았다. 다니엘이 조금 더 파고들려고 할 때 지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니엘을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준 다니엘은 아쉽다는 듯 지훈을 바라보다 입가를 엄지로 슥 쓸어주었다. 쪽소리나는 뽀뽀를 마지막으로 지훈은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어? 지훈이다!"
"아, 아 안녕하세요."

타이밍좋게 화장실 휴지를 채우러 들어왔던 성우와 입구에서 딱 마주쳤다. 조금만 늦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지훈은 인사만 건네곤 급히 교실로 돌아갔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성우는 뒤이어 걸어나오는 다니엘을 보고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네 화장실에서 치고박고 싸웠냐?"
"아니, 싸우진 않았는데."
"지훈이 얼굴이 고추장 색깔이던데. 싸우진 않은 거면 뭐야. 치고박고는 맞다는 소리?"
"그냥 뭐. 비슷해."

키스도 어떻게 보면 치고박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다니엘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이미 지훈은 교실로 쏙 사라져버린 후였다. 하여튼 귀여워 죽겠다 진짜. 같은 시각 교실로 달려들어간 지훈은 우진을 비롯하여 벌써 여섯 명에게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야, 안 아파..."

뽀뽀보다 수십 배는 더 역사적인 지훈의 첫키스였다.

-

다니엘의 직진본능은 학교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한결같았다. 하교를 하고 집에 돌아온 지훈은 간만에 다니엘과 함께 저녁을 먹자는 엄마의 말에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평소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겠지만 혹시나 다니엘이 제 부모님 앞에서까지 애정행각을 할까 봐 걱정이 됐다. 이미 저녁 준비를 마쳐가는 엄마는 얼른 가서 데려오라며 지훈을 부추겼다. 결국 다니엘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문 앞에 서서 몇 번이고 불러보지만 다니엘은 대답이 없었다. 자나? 열쇠를 꺼내들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마침 샤워를 하고 나온 다니엘과 마주쳤다. 웃통을 훌러덩 벗어제끼고 트레이닝 바지만 입은 상태로. 다니엘 벗은 상체야 질리도록 봐왔는데 왜 이리 민망한지 모르겠다. 순간 화장실 학교 안에서 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이게 지금 왜 생각나는 거야. 다니엘은 현관에 멀뚱히 서 있는 지훈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지훈은 조금 격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우리 집 와서 같이 밥 먹으래."
"아 진짜? 잠깐만. 나 옷만 입고."

멍한 지훈의 시선이 자꾸만 탄탄한 복근으로 향했다. 뒤돌아 방에 들어가려던 다니엘이 멈칫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냥 이러고 갈까?"
"미쳤냐! 빨리 옷 입고 와."
"아니 땅콩이 좋아하는 것 같길래."
"뭐래, 하나도 안 좋아. 씨발... 진짜야."

얼굴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면서 죽어도 인정은 안 한다. 다니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장난을 쳐도 최대의 반응이 돌아오니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편한 티셔츠를 입고 돌아온 다니엘에게서 바디워시 향이 폴폴 풍겼다. 익숙한 좋은 냄새에 코를 킁킁대자 다니엘은 신발을 신다말고 지훈을 꽉 껴안았다. 버둥대는 지훈의 얼굴 위로 꾹꾹 입술을 내리기도 했다. 말랑말랑한 살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아 갑자기 왜 이래 또!"
"땅콩 너무 귀여워."
"너만 그래 너만."
"나만 그러면 됐지 뭘. 뽀뽀."
"아 됐다고..."
"빨리. 뽀뽀."
"하, 진짜..."

기어이 뽀뽀를 받아내고서야 다니엘은 지훈을 품에서 놔주었다. 대문을 나서면서 지훈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니엘을 돌아봤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다니엘에게 야무지게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너 원래 이래?"
"뭐가?"
"이때까지 여자친구 생기면 다 이랬냐?"
"이러는 게 뭐야."
"막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손 잡고 끌어안고, 어? 뽀뽀하고 그랬냐고!"
"...땅콩."
"뭐."
"방구 뀐 이불이랑 과거는 들추는 게 아니랬어."

그 말인즉슨, 노코멘트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지훈은 빵빵해진 볼로 뒤돌아섰다. 쪼만한 게 또 질투를 하는구나. 다니엘은 금방 지훈을 끌어당겨 도로 제 집 마당에 들어왔다. 손만 뒤로 뻗어 대문을 닫아버리고 지훈의 어깨 위에 양 손을 올리자 지훈의 뿔난 시선이 다니엘을 향했다. 자신은 아무런 경험이 없는 모태솔로인데 다니엘은 모든 것에 능숙한 유경험자라는 것이 못견디게 억울한 지훈이었다.

"빨리 가야 돼. 엄마 기다려."
"가기 전에 풀고 가야지."
"풀 게 없는데 뭘 풀어."
"땅콩 삐쳤잖아."

안 삐쳤어.
삐쳤잖아. 아님 화난 거야?
삐친 거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야.
그럼 웃어봐. 예쁘게.
내가 네 개냐? 아 비켜! 나 배고파.
아 지훈이 진짜 싸가지도 없고 개까부는데 왜 이렇게 귀엽지?
넌 싸가지도 없고 개까부는 애랑 왜 사귀는데!
말했잖아, 귀엽다고. 존나 너무 귀여워서 씹어먹고 싶어.
변태새끼. 비켜라 진짜.
아으 귀여워!

그렇게 둘은 십초면 갈 거리를 십분이 훌쩍 넘어서야 도착했다. 뭐했길래 이리 오래 걸렸냐는 말에 다니엘도 지훈도 그저 웃어보이기만 했다. 차마 부모님께 뭐 이것저것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느라 좀 걸렸습니다, 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조금 부어오른 입술로 오물오물 밥을 먹었다. 다니엘과 지훈만 아는 비밀과 함께 저녁이 깊어갔다. 봄날의 낮시간처럼 기분좋은 저녁이었다.









비루한 흥청망청을 추천해주고 다니시는 분들,,, 정말루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녤톤트럭도 됐으니 이제 완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녤윙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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