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파일럿 이제노X의사 황인준

로맨틱 파일럿 (Romantic Pilot)

契. 여홍



1.


- 10분만 더 늦었으면 입 돌아가서 만날 뻔했네요.


 편의점 봉투를 품에 안은 인준이 흠짓놀라 얼른 고개를 든다. 무슨 의사가 밤 무서운 줄 모르고 그렇게 돌아다니시나. 장난스레 웃어보이는 제노가 얼른 인준이 안고있던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밤 낮으루 눈 뜨고 사는게 의산데요, 무섭기는요. 빼앗긴 봉투를 회수하려다 실패하고는 멋쩍게 목덜미를 매만졌다.


 - 훈련있다면서요? 보름동안은 못 볼 거라 했잖아요.

 - 시간이 나서 왔어요. 되게 보고싶었나봐? 섭섭한 목소리인데?

 - …아닌데요.

 - 아니야? 다시 갈까요?


 삐죽대는 입술에 제노가 피식 웃고만다. 근데 웬 맥주를 이렇게 샀어. 봉투 안을 살펴보는 제노가 못 마땅하다는 눈으로 인준을 본다. 나 보고 싶어서 왔죠? 당황해 얼른 말을 바꾼 인준이 허둥지둥 했다.


 - 보고싶은거야 시도때도 없어서 문제죠?


 켈록. 민망함에 헛기침을 한 인준이 능구렁이, 하고는 주머니를 뒤적인다. 저녁은 먹었어요? 인준의 품에 봉투를 안기는 제노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더 있다가고 싶은데 내일 새벽 다섯시 기상. 아쉬움이 이는 것을 애써 감추며 제노가 건넨 봉투를 든다. 


 - 진주에서 서울까지 멀잖아요. 힘들게 오지 마세요.

 - 안 보고싶을 자신은 있고?


 빙긋 웃는 눈과 마주하자 인준이 시선을 떨구고 만다. 안 힘들어요. 힘들면 그게 군인입니까. 벌갛게 얼은 볼 위에 손등을 댄 제노가 조심스레 양 볼을 쓸어 올렸다. 갑니다. 보고싶어도 울지말구요. 말랑한 입술이 이마 위에 닿았다 떨어진다. 어쩐지 울컥한 기분에 제노의 손목을 쥐었다.


 - 어어? 갑자기 손 잡고 그러면 안됩니다. 난 애인 있어요.

 - 자꾸 장난칠 거예요?

 - 아뇨, 지금 하는 건 장난 아닙니다.


 볼에 닿았던 손등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는다. 가늘은 턱을 쥔 손이 뒷목을 감싸 안았다. 다정하고 세심하지만 강렬한 키스. 마음이 벅차오르고, 눈가가 축축히 젖어올수록 그와 몸을 가까이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손목을 쥐고있는 손에 힘이들어가자 제노의 입술이 떨어진다. 위태롭게 손목을 쥐고있는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 잘자요. 시간나면 내 꿈도 좀 꾸고.


 삐죽 솟아오른 머리칼을 정리한 제노가 인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갈게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 인준이 허겁지겁 집으로 뛰어 올라가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군인은 죽어도 하늘보고 죽습니다. 등 보이는거 아닙니다. 먼저 가도 된다는 말에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던 제노가 언젠가 해주었던 말이다. 그리고, 뒷모습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애인한테. 내 얼굴 보여주기도 바쁜데. 뒤엣말만 아니었으면 군인정신 대단하다고 한탄 했을 것이다.


 - 보고싶었어요. 보고싶을거예요. 와줘서 고마워요.


 부끄러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2.


 무슨 소리야? 환자가 사망했다니? 수술방에서 나온지 30분도 안되어 온 연락이었다. 정과장님 오시는 거 보고 나갔잖아. 우물쭈물하는 인턴이 정재현 과장님이 찾으세요, 하고는 말을 돌린다. 막 받아온 식판에 숟가락을 꽂아 넣기도 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준이 식판을 정리하고는 곧장 수술방으로 올라갔다. 


 - 정과장님, 이게 무슨… 사망이라니요?

 - 투약지시 어떻게 했습니까?


 분명 방금까지 멀쩡히 살아있던 환자였다.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는 재현이 인준을 본다. 응, 응급에서 트랜스퍼를 받고 수술동의서도 확인했습니다. 재현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혀들어갔다.


 - 미다졸람을 IM으로 사전투약해 2.5% 펜토탈을 투약하면서 마취를 시작했습니다.

 - 본인 오더확실해요?

 - 네, 제, 제가 직접 투약했습니다.

 - 혈압과 맥박이 과다 상승해 도파민과 에페드린을 투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에페드린 투약 시점은요.

 - 컨티뉴어스 IV 경로로 투약했습니다. 

 - 나재민 선생한테 맡기고 나갔죠. 황선생 나가고 저혈압 상태가 지속된 환자, 15분 후 심정지했습니다.


 누구 문젭니까? 응급입니까, 아니면 마취과입니까. 덜덜 떨려오는 손을 감추려 등 뒤로 손을 감췄다. 수술 이력, 마취전력이 없던 환자였습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싹 마르는 입 안을 겨우 적셔가며 입을 열었다.


 - …아나필라시스 쇼크로 추정합니다.

 - 보호자한테는 내가 설명할테니 사망확인서, 본인이 작성하세요.


 마스크를 벗으며 수술방을 나선 재현이 숨을 들이 마신다. 창 밖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보호자의 모습이 보인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셨잖아요, 선생님. 오열하는 보호자의 목소리가 귓전에 가시처럼 박혔다. 시야가 흐릿했다.



 3.


 인준과 연락이 끊긴지 벌써 한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보고싶다는 문자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하는 연락에도 답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병가를 냈다는 말만 전해왔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간 병원에서 다짜고짜 아무 의사나 붙잡고 인준에 대해 물었다. 난감한 얼굴을 하는 재민이 인준의 애인이라는 말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한달 전에 투약사고로 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어요. 그것때문에 충격을 많이 받으셨는지….

 - 사고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고 했다. 하지만 제 손으로 직접 투약을 한 환자가 사망한 일은 처음이라 충격이 컸는지, 인준은 그 이후로 일에 집중하지 못 했고, 병원에서는 인준에게 징계와 함께 휴가지시를 내렸다. 그 이후로는 본인도 잘 모르겠단 말 뿐이었다.


 - 혹시 황선생이 갈만한 곳이 있습니까?

 - 집에 안 계시면 아마… 병원 근처에 드림모텔이라고 있는데요, 응급이나 비상 대비해서 저희가 하루이틀 묵는 곳 있거든요. 그쪽에 가서 한번 여쭤보세요.


 재민의 말마따나 인준은 그곳에 있었다. 껄끄러워 하는 주인의 손에서 카드키를 빼앗아 방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기대어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인준이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황선생님. 제노의 목소리에도 인준은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 한달동안 전화도 안 받고, 집에 찾아가도 없고. 실종신고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내가.

 - ……….

 - 계속 그러고 있을겁니까. 얼굴 안 보여줘요?

 - ……….

 - 인준씨 잘못 아니에요. 


 수술 이력도, 마취 전력도 없던 환자였다면서요. 응급실에서도 몰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준씨가 투약을 잘못한게 아니라고요. 심지어 집도의는 다른 사람…. 제노가 말을 마치기 전에 인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 중위님. 시선을 놓치지 않은 제노가 바로 대꾸한다.


 -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 인준씨 잘못이 아닙니다.

 - 가, 가, 가이드 라인에 맞춰서 상태 확인하고 했는데, 부, 분명히….


 횡설수설하는 인준의 어깨를 안았다. 작은 몸이 쉼없이 떨려온다. 괜찮아요. 뜨거운 이마가 뾰족한 어깨 끝에 닿는다. 괜찮아요, 그럴수도 있는 일이었어요. 누군가 이렇게 위로를 해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쏟아져 나오는 울음에 제노는 그저 아무말없이 인준을 안아 등을 다독여주기만 했다.


 - 혼자 견디지 말고 같이 견딥시다. 우리.

 - ……….

 - 그러라고 있는 애인인데 너무 활용을 안 합니다, 인준씨는.


 인준의 눈꼬리가 작게 휘어져 올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제노가 눈물을 닦아준다. 하고싶은 말도, 해야할 말도 많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제노의 품에 기댄 인준이 두텁고 거칠은 손을 감싸 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평안했다. 



 4. 


 이 중위 요즘 어딜 그렇게 나돌아다닙니까? 비어콜에서 호출이 와 가보았더니 도영이 인사도 전에 대뜸 질문을 하며 맥주잔을 내밀었다. 뭐 그런 걸 궁금해 하십니까. 잔을 받은 제노가 앉으며 한 모금 들이킨다.


 - 밖에 금송아지라도 숨겨놨어요? 그래서 그렇게 나가는 겁니까?

 - 금송아지라뇨. 그거보다 더 귀한겁니다.

 - 매일 군복입고 나가시던데.

 - 옷 갈아 입을 시간 아끼려고 그럽니다.

 - 제복에 페티시있는 사람 꼬시려고 그러는거 다 압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비어콜을 가득 메웠다. 이 중위는 거울도 안 봅니까? 그러고 다니는거 반칙입니다. 잘생겼는데 전투기 조종하는 것까지 알면 사람들 쓰러집니다. 밉지 않게 제노를 흘기는 도영이 과일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런거 아닙니다, 김 대위님. 씩 웃는 제노가 도영을 보며 말했다.


 - 저는 제 애인 하나 관리하기도 벅찬 사람입니다.

 - 애인?

 -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여기가 좀, 다쳤거든요. 아프지 말라고 열심히 웃겨주는 중입니다.

 - 개그엔 소질이 없으시던데.


 제 가슴에 손가락을 겨누고 있던 제노가 목을 가다듬는다. 그래도 좋아합니다. 저 보면. 어느새 비워진 잔을 가득 채워주는 도영이 군인이라서 미안하단 소린 했습니까, 하고는 군복을 본다. 네. 제 직업도 저만큼이나 사랑해주려고 노력하는 예쁜 애인이거든요. 도영이 허! 하고 황당하단 눈을 한다.


 - 개그는 몰라도 자랑엔 소질 있네요.

 - 부러우면 연애 하십시오.


 겨울인데 혼자만 꽃피는 봄이라 좋겠습니다, 아주. 말은 그렇게 해놓고선 활짝 웃는 도영을 따라 제노도 환히 웃어보였다.



 5.


 어느정도 우울증에서 벗어난 인준은 병원에 복귀했다. 수술방 출입은 스스로가 금지시켰지만, 다른 일은 이전처럼 곧잘 해냈다. 의사로 살면 수도없이 볼 거다. 실수로, 사고로 사람 죽는 거. 마음 속에 그 사람들, 담아두면서도 끌려다니지 않는게 중요한거야. 끌려다니는 순간, 실수가 반복되는 법이거든. 인준이 내민 진료확인서를 보는 원장이 바짝 긴장하고 서있는 인준을 보며 말했다. 응급의학과 지원 안 한게 천만다행이다. 분위기를 풀어주려 건넨 한 마디에 인준이 뒤늦게 미소지었다.


 단기 휴가를 낸 제노는 오랜만에 사복을 꺼내 입었다. 하도 군복만 입었더니 어색하네. 살갗에 닿는 니트의 감촉이 어색했다. 내일은 인준의 오프라고 했다. 어쩌면 처음으로 다른 커플들처럼 데이트를 하고 싶단 마음에 낸 휴가다. 이런 날까지 군복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퇴근하는 인준이 보였다. 조용히 뒤에 다가가 인준의 어깨를 두드린 제노가 상체를 조금 숙였다.


 - 시간 있으시면 차라도 한 잔?

 - 90년대 멘트를 아직도 써먹는 사람이 있네.

 - 공부하고 운동만 하다보니 그런 쪽으론 업데이트가 안됐지 말입니다?


 제노의 말에 픽 웃어버리고 만다. 뭐 마실까요? 쌍화차? 계란 띄워서? 장단 맞춰주는 인준을 보는 제노가 어깨를 안아 자신의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지난 번에 못 먹었던 저녁 먹어도 됩니까? 녹녹한 눈에 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너무 기대는 마세요.

 - 원래 밥은 누구랑 먹느냐가 제일 중요한 법이거든요.

 - 그래서 짬밥은 입에 맞으세요?

 - 그럴리가요. 시커먼 장정들이랑 먹으면 랍스터도 물릴겁니다.


 인준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몇달 내내 실없는 농담에도 웃지 않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인준의 집에 도착했다. 씻고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시작한 인준은 제법 진지한 눈이었다.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물끄러미 인준의 뒷모습을 보는 제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 요리하는 모습도 예뻐서 큰일이네요.

 - 뭐, 그런 말을 다….

 - 당분간은 긴장하셔야겠습니다.

 - 왜요?

 - 내가 언제 결혼하자고 할지 모르니까.


 아! 느닷없는 소리에 놀란 인준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도마 위로 새빨간 핏방울들이 떨어진다. 당황한 인준과는 달리 침착하게 인준의 손을 쥔 제노가 자신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엇! 아까보다 더 놀란 인준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 괘, 괜찮아요. 밴드 붙이면….

 - 내가 안 괜찮습니다.


 물컹한 혀의 감촉에 손가락이 굽어 들어갔다. 조심히 손가락을 빼낸 제노가 싱크대 위로 피를 뱉었다. 안 아파요? 인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을 틀어 손을 씻어낸 제노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 밴드는요?

 - 저기, 첫번째 서랍이요.


 밴드를 꺼내 손가락에 둘러주고는 손가락을 몇번 죔죔여준다. 파상풍 주사는요? 의사라도 된양 이것저것 묻는 모양새가 귀여워 인준이 웃으며 의사는 저거든요, 하고는 손을 빼내려 뒤로 힘을 주었다. 제노가 바로 인준의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이끈다. 반동에 제노 품으로 고꾸라진 인준의 귀가 제노의 심장 위에 닿았다. 불규칙적인 박동이 기분 좋게 울려온다. 몸을 감싸 안는 팔이 단단하다. 귓불 근처로 내려앉는 숨소리가 달콤했다.


 - 기왕 90년대 멘트 쓴 김에, 더 촌스럽게 굴어도 됩니까?

 - ……….

 - 황선생은 차가운 유리컵에 담긴 물 처럼 보이네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제노의 고개가 인준 쪽으로 떨어진다.


 - 세상에서 가장 목 마른 사람입니다.


 푸스스 웃는 인준이 제노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뜨거운 입술이 겹쳐진다. 부드러운 손길이 옷 안으로 밀려 들어와 살결을 어루만졌다. 골반을 잡은 손에 단호한 힘이 들어간다. 여러번 겹쳐지는 입술 아래로 달뜬 숨결이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매끄러운 가슴 위로 탄탄한 가슴이 와닿는다. 같은 울림이었다.


너무 오래 업데이트 없이 비워둔 것 같아 가벼운 단편 하나 보여드리고 갑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_^)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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