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우주 한가운데, 엔터프라이즈 호가 멈춰 서 있다.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멈춰 있는 듯 했다. 함선의 주변으로 함박눈이 내리듯이 운석과 얼음 조각들이 천천히 스쳐지나간다.


운석과 얼음이 즐비한 카이퍼 벨트를 지나던 엔터프라이즈 호는 그만 커다란 운석과 충돌해버리고 말았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네이셀의 수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지체되어 우주 한가운데서 체류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얼음과 운석들 사이에 갇혀버린 지 벌써 열흘 째.


함선에 올라탄 뒤로, 이렇게 오랫동안 멈춰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물며 지구에 있을 때에도 멈출 줄 모르고 매일같이 앞을 향해 질주해왔고, 첫 장기 임무를 수행하며 요크타운에 들렀을 때에도 쉬기는커녕 새로운 임무를 맡아 그 곳을 바로 빠져나왔으니 오죽하겠는가.

최근에 한 곳에서 꽤나 오래 머물렀던 때는 크롤의 침략으로 부서져버린 엔터프라이즈 호의 재건을 위해 요크타운에 체류할 때였고, 그조차도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이전에는 나에게 드리워졌던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면, 지금은 함선과 대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함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내 등을 떠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체기가 길어짐에 따라 대원들 사이에서 호흡 곤란과 우울 증세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내 안의 조바심은 점점 자라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손이 떨렸고 늘 불안했다.


내 불안감을 다스릴 수 있을까 싶어 본즈와 휴게실에서 브랜디를 마셨다. 처음에는 그저 별 일 없겠지, 하며 여가 삼아 홀짝이던 브랜디는 이제 매일같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매일같이 들이키는 브랜디 때문에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브랜디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엔터프라이즈 호 안에서는 어디에서나 우주가 보였고, 조용하고 어두운 휴게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우주는 고요함에도 전혀 평온해 보이지 않아서 내 불안감을 가라앉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얼음 덩어리와 운석 덩어리들이 한데 뒤엉켜 맴도는 카이퍼 벨트에서는 간헐적으로 푸른 빛이 반짝 하고 빛나는데, 평소같았으면 아름답다고 여겼을 그 장면은 내게 더 이상 아름다워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그 푸른 빛들은 자신을 태우면서 열정적으로 내달리는 혜성들의 붉은 빛과는 전혀 다른, 앞을 가로막는 멈춰있는 것들을 내리쳐 부숴버리는 차갑고 냉혹한 파괴의 빛이었다. 나는 그 푸른 빛이 정체된 엔터프라이즈 호의 미래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아니, 나 하나만 부서지고 끝난다면 상관없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꾸만 엔터프라이즈 호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는 본즈의 모습이 떠올라,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눈 앞의 잔상을 지워내려 애썼다.






결국 브랜디 잔을 큰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불안감이 잔뜩 고조된 상태에서 예민해진 나는 본즈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유리잔이 쨍 하고 울리는 큰 소리에 바로 후회가 밀려들었다. 본즈는 우주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 한가운데에 갇혀버린 지금, 그는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무서울까. 제길,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한 걸까.


기관실에 가봐야겠어.


본즈와의 자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에도 갔던 기관실이지만, 이미 충분히 힘들 본즈에게 나라는 짐을 더 떠안기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엔터프라이즈 호 안에서, 이렇게라도 어디론가 움직여야만 숨이 트일 것 같았다. 만류하는 본즈를 뒤로 한 채, 술기운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기관실을 향했다.







매일같이 들이킨 브랜디가 너무 고되었는지, 얼마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잔뜩 오른 취기에 정신이 아득했다. 기관실 문을 열고 스코티와 킨저에게 인사를 나눴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내 얼굴은 테이블에 고꾸라져 처박힌 채였다. 흐린 눈을 껌뻑였다. 머리는 여전히 어질어질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귀는 웅웅 울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모여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내 어깨를 흔들자 머리가 울렸다. 우, 머리야. 부스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본즈였다.


안녕, 본즈.


취기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사랑하는 본즈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 또 미간을 찌푸린다.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날 쳐다보고 있는 본즈의 눈이 너무나 다정해서,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입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여긴 비석들이 너무 많아. 공동묘지처럼.


누구도 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본즈, 네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무서워. 본즈, 네가 사라질까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이 입술 안에서 맴돌았다. 술기운에 여전히 웅웅거리는 귀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날 보며 중얼거리는 본즈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곧이어, 목에 강하게 찌르는 듯한 충격이 뒤따랐다. 본즈가 놔준 하이포 덕에 정신이 점점 돌아왔지만, 나는 차마 떨어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준 본즈가 기관실을 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어올릴 수 없었다.

창 밖으로 푸른 빛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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