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의 입에서는 거품까지 나기 시작했다. 사지를 파르르 떨던 동물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러나 부러진 다리는 달랑 달랑거리며 몸뚱이를 세우지 못했다. 튀어나온 허연 뼈에 몇몇 아이들은 급하게 뒤를 돌기까지 했다.


“나, 나 못 보겠다.”


“아씨, 저거 언제 죽어.”


“빨리 좀 죽어라.”


이진은 창백한 얼굴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꺾인 다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제 어머니에게서 나온 핏물처럼 진득해보였다. 검붉은 피를 보며 이진은 생각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몸속에 있는 피는 똑같구나. 고라니는 쇠에 손톱을 긁은 듯이 높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계속 되는 울음에 이진은 몸이 떨렸다. 그 역시 뒤로 물러나는 아이들을 따라 도망치고 싶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이진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마침 그 쪽에는 정우가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정우의 얼굴에 이진은 몸을 움찔거렸다. 정우는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부릅뜬 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찌된 걸까. 두렵기만 했던 감정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버렸다. 떨림이 점차 누그러졌다. 이진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어들었다. 비소를 머금고 있던 정우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진은 약간 놀란 시선을 보지 못했다. 그는 죽어가는 어린 새끼에 다시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하이진?”


“야, 너 뭐하는......”


아이들의 말 끝이 점차 흐려졌다. 이진은 단검을 든 채로 고라니 쪽으로 다가갔다. 바둥거리는 고라니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이진은 단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눈 가를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진은 땀과 눈물로 범벅인 얼굴로 뜨거운 한숨을 쉬었다. 두 손으로 단검을 강하게 그러 쥐었다. 후욱, 후욱, 후욱....... 볼썽 사나운 숨소리에도 아이들은 이상하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설마’하는 생각에 감히 말리지 못했다.


이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단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날카롭게 벼른 검 끝이 고라니의 목을 꽂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울렸다. 이진은 부드럽게 갈라지는 느낌에 몸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더 검을 들어서 내리찍었다. 핏물이 튀면서 이진의 옷과 얼굴을 적셨다. 뜨겁고 비릿한 피에 이진은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이진은 어떻게든 빨리 고라니에게 죽음을 주고 싶었다. 칼이 목뼈를 긁는 걸 선명하게 느끼면서도 칼질을 멈출 수 없었다.


“그만해.”


누군가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이진은 듣지 못했다.


“으흑, 윽....으으......”


“그만하라니까.”


갑자기 하이진은 옆으로 거세게 떠밀리고 말았다. 단검이 데구르르 굴러가 버렸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이진은 멍하니 옆을 보았다. 정우는 작게 혀를 찼다.


“됐어.”


무엇이? 이진은 눈을 깜빡거렸다.


“죽었어.”


“......아.”


이진의 뺨에는 핏방울이 눈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넋을 잃은 얼굴로 수응하는 걸 보며 정우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정우는 들고 온 자루 안으로 고라니를 넣었다. 이진은 비칠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헉’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진은 천천히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무리들은 이진을 피해 양쪽으로 비켜섰다. 그는 터덜터덜 아이들을 지나 산 아래로 내려갔다. 넘어질 듯이 비틀거리는 이진의 뒷모습을 정우는 가만히 응시했다. 긴 앞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드러난 눈동자가 번득 빛이 났다.


*


자꾸만 땀이 나서 창을 열어둔 게 화근이었다. 창을 열자마자 들어온 바람이 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읽던 책 위를 확 가려버린 어둠에 이진은 한숨을 쉬었다. 사방이 깜깜해졌다.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 화로에 있는 불씨를 얻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탁자를 더듬거리며 이진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이제 곧 있으면 11월이 찾아온다. 날씨는 더욱 더 추워질 테고, 그럼 화로가 없으면 못 사는 겨울로 변해갈 것이다. 온갖 책들이 가득하게 있는 광명실에는 밤중에 화로를 가져가서는 안 되었다. 실수로 책이 불탈 수 있기에 이권이 미리 막아놓은 규칙이었다. 가장 행복한 시간을 빼앗길 생각에 이진은 벌써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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