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저항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몰고 퇴근하는 길에 재환은 자신의 아파트 동 1층 우편함에 우편물이 잔뜩 꽂혀있음을 발견했다. 아 오늘 카드 명세서 나오는 날이지. 이런건 꼭 한 번에 온다니까. 재환은 문 쪽을 향해 우산에 묻은 빗물을 살짝 털고 젖은 옷도 살짝 털은 뒤에 우편함 입이 터지도록 끼워진 우편물을 빼냈다. 이건 신한은행, 이건 보험사, 이건 국민은행... 수많은 명세서가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건 청첩장이었다.


 참으로 오래 사귄 사람이었다. 누구는 장거리 연애를 하면 쉽게 헤어진다는데 재환은 장거리 연애 중에도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게 연애가 끝나지 않았다. 가끔 한국에서 하던 섹스가 그리우면 통화로 뇌설적인 말을 주고받으며 자기위로를 한다던가 방학을 하면 한국으로 귀국해 호텔에서 날 잡고 불타는 밤을 보낸다던가. 그러나 독일에서의 모든걸 끝마치고 귀국한 날 한 섹스가 이젠 더 이상 유학을 떠나기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때, 재환은 어렴풋이 느꼈다. 곧 헤어지겠구나. 재환은 직감이 뛰어난 편이었고 그건 곧 현실로 다가왔다. 우리... 다시 친구하자. 먼저 친구하자고 말 꺼낸 건 본인이었으면서 차츰 연락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어떻게 셀 수 없이 많이 섹스한 사이에 다시 친구가 될 수가 있어. 섹스파트너면 몰라도. 재환은 차츰 줄어드는 연락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먼저 청첩장을 보냈다. 그렇게 오래 만난 재환이 아닌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고. 조심스레 뜯은 청첩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재환은 핸드폰을 켜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답장은 빨랐다. 나 근데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 오랜만에 한 연락이 결혼한다는 소리인 것도 웃긴데 와중에 부탁까지 들어보기라도 해보자 싶었다. 뭔데? 결혼식 음향 네가 담당해줬으면 좋겠는데... 힘들까? 끝까지 뻔뻔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결혼까지 갔을지도 모를 옛 추억에게 보이는 배려란 눈꼽만큼도 없었다. 이런 인간하고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 한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재환은 가끔 성격이 불같을 때가 있었다. 아니. 당연히 해줘야지. 친군데. 오기에 따른 승낙이었다.


 재환은 먹는 걸 좋아했다. 일반적인 한끼 메뉴 뿐만 아니라 디저트, 음료도 맛집을 속속들이 찾아가는 데 취미가 있었다. 너도 먹스타그램이라도 하지 그래. 동종업계에서 꽤 오래 친분을 쌓고 지낸 성운은 SNS를 열심히 하기로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유명한 만큼 인스타에서도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고. 재환과 성운이 같이 파스타를 먹으러 간 날 무슨 놈의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찍는지 같이 먹는 재환은 의아했다. 이런거 올리면 좋아? 당연하지. 좋아요 많이 찍힐 수록 얼마나 기분이 좋다고. 성운은 사진을 올리면서 태그를 음식명, 식당명, 식당이 있는 지역명 등을 달면 검색을 통해 본 사람들이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준다고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 재환은 성운이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크게 흥미가 생기지 않아 듣는 척 하면서 열심히 먹기만 했었다. 나만 잘 먹으면 되는거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여놓고 그에 스트레스를 받는 자기자신을 재환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시선을 돌려볼 어딘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두들 한다는 스트레스 푸는데 제격이라는 SNS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호기롭게 앱도 깔았다. 요새 젊은 층들이 가장 열심히 한다는 인스타그램이었다. 계정 만드는 데만 약 한 시간을 소비했다. 페이스북이나 싸이월드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뭘 자꾸 연동하라는데 뭐라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재환은 우선 인스타를 시작한 걸 지인 그 누구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연동은 안 되는 쪽으로 간신히 가입을 했다. 


 인스타에 로그인을 하고 몇 가지 기본적인 설정을 했더니 아무래도 게시글이 아예 없는건 너무하다 싶었다. 그래서 갤러리에서 열심히 스크롤을 내려 예전에 찍어둔 사진 중에 가장 잘 나온 마카롱 사진을 업로드했다. 휑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올린 게시글에 곧장 알림이 울렸다. 누군가가 재환이 올린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른 것이었다. 역시 먹는 사진이 효과 직빵이라던 성운의 말이 옳았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좋아요를 누른 장본인이 궁금해 재환은 좋아요를 누른 사람의 계정에 들어갔다. 그 계정은 인스타를 시작한지 꽤 된 편인지 게시글이 작년도꺼 부터 있었다. 주로 꽃 사진을 올려뒀으나 여행 사진이나 음식 사진도 간혹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뭔가 그런거 있지 않은가. 내 글에 가장 먼저 좋아요를 해준 사람한테는 특별한 감정이 드는 것 같은. 재환은 성우와 친해지고 싶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환은 먼저 다가가기로 마음 먹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이것도 인연인데 잘 지내봐요! 라고 한 적은 많았어도 요새 가장 많이들 한다는 SNS에서 SNS친구를 만들기란 처음이었다. 재환은 가장 마음에 드는 게시글인 파란 수국이 찍힌 사진을 눌렀다. 좋아요만 6개 찍힌 게시글에 댓글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재환이 달면 최초의 댓글이 되는 것이었다. '최초'라는 말에 뭐가 되는 듯 해서 괜히 자세까지 고쳐잡아 댓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제 인스타에 좋아요 눌러주신걸 보고 호기심이 생겨 그 쪽 인스타에 들어갔는데 흥미로워보... 아니야 말이 너무 길어. 댓글을 이렇게 길게 달아버리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재환은 고마워했을거 같기는 한데 다른 사람들은 다를 수 있으니까 더욱 신중해졌다.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지 10분째 역시 짧고 간결한게 최고라고 마음을 먹었다. 


 jae_0527 안녕하세요, 친구하고 싶어요. 10초 전


 보냈다. 재환은 두 손으로 붙잡은 핸드폰을 들고 긴장감에 폰을 꽉 쥐었다. 아, 이거 너무 딱딱해 보이는거 아닌가. 지울까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재환이 달은 댓글에 대한 답글이었다. 답글이 원래 이렇게 빨리 달리는 건가? 재환은 약 1년 동안 사용한 폰을 마치 방금 새로 개통한 폰을 다루듯 조심스레 알림창을 눌렀다.  인스타에 올린 게시글을 닮은 답글이었다.


 Seal_ong25 @jae_0527 어? 안 그래도 먼저 팔로 하고 있었는데... 선댓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팔로 해주세요! 25초 전 


 답글과 더불어 뜨는 'Seal_ong95님이 회원님을 팔로우하기 시작했습니다.'라는 알림이 있었다. 그 알림을 보는데 기분이 묘한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래서 다들 SNS를 하는건가. 상당수의 사람들과 친구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던 성운의 모습이 문득 머릿 속을 스쳐지났다. 재환은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서 무의식에 손버릇으로 인중을 살짝 긁다가 재환이 자신을 팔로워해달라는 성우의 답글이 기억났다. 팔로가 이렇게 하면 되는건가? 인스타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재환은 한참을 헤매다가 성우의 인스타 계정에서 보이는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팔로우는 팔로잉으로 바꼈고 재환과 성우는 '맞팔'인 관계가 되었다.


 성우와 재환은 그 뒤로 서로의 게시글에 가장 많이 그것도 자주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아주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얼굴과 이름은 아직 하나도 모르고 그 흔한 다이렉트 메세지도 주고받지 않았으나 재환은 성우와 오래 본 사이처럼 마음 한 켠이 아늑했다. 이제는 어느 식당이나 카페를 가도 성우가 달아줄 댓글을 상상하며 사진 찍는 각도나 필터에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좋아요 10개

 #속초 #동해 #물회 #바다마을

 Jae_0527 오늘 속초가신거예요? 대박 부럽다. 저 속초에서 파는 물회 좋아해요.

 Seal_ong25 @Jae_0527 속초 맞습니다~ 물회 좋아하세요? 좋아요 1개

 Jae_0527 @Seal_ong25 ㅠㅠ 저 물회 환장해요... 그냥 회도 좋아해요...ㅋㅋ

 Seal_ong25 @Jae_0527 그럼 나중에 저랑 속초에 물회 먹으러 갑시다. 저 숨겨진 맛집 알아요.

 Jae_0527 @Seal_ong25 헐 대박 좋아요! 좋아요 1개


  좋아요 12개

 개인적으로 여기 비르너를 제일 좋아한다. 독일 유학 시절을 생각나게 해주는 맛.

 #압구정 #비르너 #독일 #Das_Vollkornbrot

 Seal_ong25 완전 맛있겠다. 저 비르너 처음 봐요.

 Jae_0527 @Seal_ong25 독일식 케이크예요. 입에서 살살 녹아요! ㅋㅋㅋㅋ

 Seal_ong25 @Jae_0527 낼 압구정 가는데 무조건 가야겠네요. 좋아요 1개

 

 재환은 결혼식에 쓰일 음악을 선정하고 편집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을 성우와의 SNS놀이로 풀기 시작했다. 전화 같은거 다시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혼식 음향 얘기를 빌미로 저와의 전화통화를 이어가려는 전 애인의 구질구질한 미련같은 걸 몸소 느낄 때 같을 때? 이번 일로 미련이란게 참 지나가는 차가 남긴 매연만도 못하다는 걸 재환은 배웠다. 가끔 재환은 전 애인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네 약혼자는 지금 너 이러는거 아냐고. 뭐라고 할라 치면 잔꾀 부리는 습성은 여전해 잘도 불리한 상황은 피해가는 전 애인이 얄미웠다. 그래서 딱히 더 뭐라하지는 않았다. 하느님께서 저런 놈은 언젠가는 벌을 내려주시겠지 싶은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좋아요 23개

 향긋한 장미향 가득한 5월.

 #로즈데이 #장미

 Jae_0527 장미 좋아하시는구나. ㅋㅋ

 Seal_ong25 @Jae_0527 어릴 땐 장미의 매력을 몰랐는데 성인이 되니까 훅 다가오더라구요.

 Jae_0527 @Seal_ong25 저는 장미를 별로 안 좋아해요.

 Seal_ong25 @Jae_0527 그럼 가장 좋아하는 꽃이 뭐예요?

 Jae_0527 @Seal_ong25 수국이요. ㅋㅋ


 아, 그래서 그 때 그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구나. 성우는 재환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핸드폰 액정을 가볍게 두들겼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희미하게나마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하얗고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Seal_ong25 @Jae_0527 수국이 색깔마다 꽃말이 다양하거든요. 하얀색은 변심, 변덕이고 분홍색은 소녀의 꿈이고 파란색은 거만에 마지막으로 보라색은 진심! 장미 같아요.

 Jae_0527 @Seal_ong25 신기하네요. 저는 꽃은 잘 몰라서...

 Seal_ong25 @Jae_0527 제가 직업이 플로리스트라 꽃에 대해 궁금한거 있으시면 더 물어보셔도 좋아요.^^ 좋아요 1개


 어쩐지 인스타에 꽃에 관한 게시글이 많다 했더니 직업이 플로리스트였다. 성우가 올린 장미는 크기도 적당하며 빛깔도 고급진 붉은색이라 한 송이만 해도 가격이 꽤나 나갈 것 같았다. 오랜만에 곱게 포장된 장미를 보니 예전에 사귈 때 종종 장미를 선물해주던 그 사람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술은 혼자 마시는거 아니랬는데 술기운이라도 있어야 다음 작업이 수월히 이뤄질 것 같았다. 달력을 보니 결혼식까지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가볍게 크래커와 모짜렐라치즈 그리고 방울토마토로 카나페를 만들고 양주를 꺼냈다.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다음날 머리가 아플게 뻔했지만 두통때문에라도 딴 생각이 안 드는게 편한 나날이었다.


  좋아요 18개

 오랜만에 자작.

 #혼술 #진토닉 #보드카 #카나페

 Seal_ong25 혼술하시게요?

 Jae_0527 @Seal_ong25 오늘 좀 그러고 싶어서요 ㅋㅋ

 Seal_ong25 @Jae_0527 같이 마시고 싶다 ㅠㅠ

 Jae_0527 @Seal_ong25 오늘은 혼자 마시기로 정했어요 ㅋㅋ

 Seal_ong25 @Jae_0527 다 센 술만 꺼내셨네.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내일 골 때리니까... 해장은 콩나물국으로 하시구... 좋아요 1개


  좋아요 5개

 늦은 밤 작업실에서...

 #연어롤 #미츠야 #야식 #야근 #밤샘

 Seal_ong25 야식으로 연어롤... 부럽다...

 Jae_0527 @Seal_ong25 뒤에 태그를 보세요... ㅠㅠ

 Seal_ong25 @Jae_0527 크흑 밤샘... 저도 어제 밤샘... 아 근데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좋아요 1개

 Jae_0527 @Seal_ong25 언제 물어보시나 기다렸습니다 ㅋㅋㅋㅋ 저는 음악 감독이에요ㅋㅋ 좋아요 1개

 Seal_ong25 @Jae_0527 정말 진짜 대박 리얼 완전 헐... 멋있어요... 좋아요 1개

 Jae_0527 @Seal_ong25 아직 멋있으려면 멀었습니다 ㅋㅋㅠㅠ 더 노력해야죠. 좋아요 1개

 Seal_ong25 @Jae_0527 그 마저도 멋있어요 ㅠㅠ!! 최고!!bbbb 좋아요 1개

 

좋아요 35개

 제 생일인건 어찌 아시고 이런 선물을 ㅋㅋ 어쩐지 작업실 주소를 물어보시더라니...ㅋㅋㅋㅋ 잘 받았고 잘 쓸게요!

 #생일 #안개꽃 #슈어 #인이어

 Seal_ong25 깜짝 선물 준비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들키는 줄..... 좋아요 1개

 Jae_0527 @Seal_ong25 근데 제 생일이 오늘인거 어떻게 아신거예요?

 Seal_ong25 @Jae_0527 아이디 뒤에 0527인거 보구요! 설마 모를거라 생각하신거예요?

 Jae_0527 @Seal_ong25 아.....ㅋㅋㅋㅋ 좋아요 1개

 Seal_ong25 @Jae_0527  ㅋㅋㅋㅋㅋ다른 사람한테는 잘 숨겨봐요! 좋아요 1개


  나 그 음악 감독한다는 전에 사귄 애. 걔한테 결혼식 음향 맡기려고. 갑자기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내밀어 눈만 깜박거리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성우의 얼굴을 굳히게 했다. 고등학교 때 동창의 실로 뻔뻔한 언변이었다. 야, 그럼 재환씨는 괜찮대? 같이 모인 동창 중 한 명이 물었다. 걔 이제는 친구라서 괜찮아. 성우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저의 동창은 생각보다 많이 인성을 포기한 자였다. 성우가 재환이 이 결혼식 주인공 중 한 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걸 알게된 지는 불과 일주일이 되지도 않았다. 누군가와 오래사겼다 헤어졌다는 얘기를 지나가듯 했었지만 그게 재환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성우가 건너건너 전해들은 동창의 연인일 적의 재환은 자신의 일에 항상 열정적이고 윗 사람, 아랫 사람 모두에게 평판이 좋은 그러니까 딱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그 결혼식에 가서 비참함을 느껴야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인스타로 종종 주고받는 답글만 봐도 재환은 가진 커리어에 비해 훨씬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우는 오랜만에 사람을 엿 먹여 보기로 마음 먹었다. 먼저 웃긴 짓을 꾸민 건 그 쪽이니까. 성우는 미래에 벌어질 상황이 벌써 흥미진진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재환씨. 결혼식에 사용될 음향을 체크하고 있는 재환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자 재환을 기다리고 있는 건 파란 수국 꽃다발이었다. 난데없는 꽃다발에 재환은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했다. 지금 나한테 주는 건가? 재환이 꽃다발을 받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있자 성우가 꽃다발 뒤에 숨어있다가 얼굴을 빼꼼했다. 뭐해요, 안 받아요? 이걸 왜 저한테... 저 재환씨가 감독한 뮤지컬 보러 간 적 있었거든요. 얼마전에 상 받으신 창작 뮤지컬. 재환은 성우를 처음 보는게 당연했다. 물론 성우도 재환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성우는 언변의 달인이었고 그를 말로 누를 자는 없었다. 재환이 어정쩡한 자세로 꽃다발을 받아들고 서 있자 재환의 전 애인이자 성우의 고등학교 동창이 한껏 얼굴을 굳히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뭐야. 얘한테... 그나저나 너 얘 알아? 응. 김재환 음악 감독님. 유명하잖아. 나 뮤지컬 자주 보러 다니는데. ...그거랑 이 꽃다발... 이게 무슨... 내가 만들어 달라 한 꽃다발은? 이미 갖다 줬는데. 그럼 이건 뭐야. 뭐라니. 얼마전에 김 감독님께서 상을 받으셨거든. 그래서 축하드린다는 심정으로 드리는 건데 왜? 그걸 왜... 지금 줘? 성우의 동창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는게 눈에 보였다. 그에 따라 성우는 어정쩡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재환의 자세를 고쳐세웠다. 그러게. 나도 왜 지금 주는지는 모르겠네. 성우는 어린 악동같은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이거 식장 뒤쪽에... 두면 돼. 급격히 싸늘해진 분위기에 재환이 한 품에 딱 맞게 들어오는 꽃다발을 안고 뒤쪽으로 향하려 했다. 어어어! 그거 꽃다발 상당히 크게 만든 거라 바닥에 두면 모양 망가질텐데... 그냥 안고 계세요! 너... 옹성우... 왜. 불만 있어? ...너 나중에 얘기하자. 수국의 꽃말 아세요, 재환씨? 성우는 뒤 돌아 다시 식장안으로 향하려는 동창에게 다 들리게 재환에게 질문했다. ...파란색 수국은 거만. 뭐에 홀린 듯 재환은 성우가 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역시 김 감독님은 대단하시네요! 모르시는게 없으시네. 성우는 한껏 빙글거리며 밝게 웃었다. 그에 동창이 분노에 찬 얼굴로 성우에게 다가오려다가 주변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보고 쿵쾅거리며 식장안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재환은 식전부터 식이 완전히 마무리 지어질 때 까지 잘 만들어진 파란색 수국 꽃다발을 껴안고 있었다. 둘 곳도 마땅치 않았고 내려둘라 치면 빤히 쳐다보는 성우의 시선에 재환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재환은 전 애인의 결혼식에서 친구 명목으로 사진을 찍을 때 조차 파란색 수국 꽃다발을 안고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재환의 전 애인의 배우자의 표정이 매우 썩어들어갔지만 재환은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억지 웃음으로 사진 찍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자 재환은 기분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유쾌상쾌통쾌를 제대로 맛 본 기분이었다. 전 애인이 재환을 노려보는 눈빛을 보낼 때 처음에는 피해야하나 싶었는데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모르겠지만 재환은 그 눈빛에 똑같이 응수했다. 애초에 엿 먹어보라고 결혼식에 초대한 걸 어쩌다보니 되갚아줬을 뿐이었다. 전 애인이 재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그 때 큰 손이 재환의 손을 잡아왔다. 성우였다. 성우는 재환의 손에 깍지를 끼고 주차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재환과 성우의 이름이 미친듯이 불리는데도 달리기는 멈출 줄 몰랐다. 재환씨, 지금 당장 먹고 싶은거 없어요? 물회요! 재환은 성우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고민도 없이 답했다. 좋아요, 속초 갑시다! 재환의 손을 꽉 잡아오는 성우의 손이 편안했다.




----------------------------------------------------------------------------------

전도연 배우와 한석규 배우가 나오는 영화 접속을 봤는데 채팅창으로 얼굴과 이름도 모른채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그래서 씰탐으로 한 번 써보면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쓰게 되었네요.

인스타 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인스타로 정했는지 자료 조사하느라 시간이...... ㅋㅋ.......




만두집전기저항 @P_i2r_jjan

저항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