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토 코타로는 졸린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실 오늘부터 휴일은 아니다. 어제는 밸런타인데이이고, 오늘은 그저 평범한 2월 15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필 보쿠토는 무언가의 특수성 때문에 오늘부터 휴일이라는 설정이 붙어버렸다.

그 무언가의 특수성이 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특수성이란 말이 맞기는 한가. 분명히 들을 때에는 납득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잊어버렸다.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이고 슬리퍼를 찾았다. 그런 길고 어려운 말은 아카아시 같은 애나 기억하지. 난 힘들어. 보쿠토는 똑똑함의 대명사 같은 한 살 연하의 애인을 떠올렸다. 히죽 웃음이 터졌다.

보쿠토가 애인을 생각하며 실실대는 동안 그 똑똑하다는 아카아시 케이지는 뭘 하고 있었냐 하면은, 이불에 머리를 처박고 이를 갈았다.


"……휴일이면, 잠을 자야 할 거 아냐."


아카아시가 아는 휴일은 온종일 퍼져서 늘어져라 잠이나 자도 괜찮은 날이었다. 이렇게 새벽 별도 채 지지 않은 시각에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날이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며칠 전에 들었던 무언가 되지도 않는 소리를 떠올렸다. 원작 대비 비국적 연성인의 시간적 특수성이랬다.

들을 때도 생각했지만 참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일단 원작이 무엇인지부터 차치하고 보더라도, 비국적 연성인 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언어였고 그나마 알아들을 만한 말은 시간적 특수성뿐이었다.

더 자세한 설명은 대충 이러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국가 설정과 그것을 구현하는 사람의 국가가 다른 탓에 시간대가 어그러졌다고. 그래서 일시적이지만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휴일이라고 했다. 물론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빠져나갔다.

아카아시는 낮은 한숨을 쉬고 베개에 파묻은 얼굴을 들었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두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보쿠토가 봤더라면 금세 귀여워하며 볼을 문질렀을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눈도 뜨지 않고 적당히 발을 대충 들이밀어 슬리퍼를 꿰신었다.

그와 동시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알람을 맞추진 않았으니 전화다. 아카아시는 짜증을 내며 시끄러운 전화기를 들었다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아카아시는 멀쩡한 척 내숭을 떨었다.


"여보세요?"

"아카아시! 깼어?"

"보쿠토 선배 덕분에 깼어요. 전화 감사합니다."

"헤헤, 아카아시 목소리 듣고 싶어서 걸었던 건데 말이야."


선배도 참. 아카아시는 수줍게 고개를 떨어트리며 귓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방금까지 눈으로 쌍욕을 하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태세전환이었다. 물론 보는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카아시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저도 일어나자마자 보쿠토 선배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흐으, 아카아시 목소리 진짜……."

"제가 뭘요."


그리고 아카아시는 낮게 웃었다. 45%는 노리고 한 수였다. 보쿠토는 유달리 아카아시의 웃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리고 특히나 밤중에, 서로 침대에 있다고 아는 중이라면 더했다. 아카아시는 한 살 연상의 어린애 같은 애인이 침대 위에서는 얼마나 짐승 같아지는지 잘 안다. 이 정도 부추김은 약간의 놀이였다.

아카아시가 채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장난을 치는 동안 보쿠토는 이미 벌떡 일어나 옷을 거의 갈아입은 후였다. 계속 침대에 걸터앉았다간 이대로 전화 너머의 아카아시랑 뭔 일을 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아니, 알긴 하지만! 보쿠토는 새해 첫날부터 그렇고 그런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하는 것도 좋다마는 적어도 전화 너머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 선택한 일이 옷 갈아입기였다. 보쿠토는 대충 청바지를 주워입고 후드를 찾느라 서랍을 뒤적였다. 유구한 운동부답게 서랍장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 거기서 거기인 옷더미 안에서 나름 괜찮은 그거를 찾아낸 보쿠토는 한쪽 귀에 휴대전화를 끼고 요령껏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난 지금 나갈 건데, 아카아시는 어떻게 할래?"

"저는 좀 졸립니다."

"그럼 내가 거기로 갈까? 아, 졸리댔지! 그럼 더 자!"

"안 해요……."

"엥?"

"저도 보쿠토 선배 볼 거란 말예요."


필살의 애교를 떨자 수화기 너머의 보쿠토가 숨을 들이켰다. 아카아시는 소리 나지 않게 주먹을 말아쥐고 승리 포즈를 취했다. 보쿠토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를테면 배구부의 레귤러 선배들이 봤다면 금방이라도 어제 먹은 것이 올라온다는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겠지만 지금은 보쿠토만 듣고 있으니 괜찮다.

아카아시는 나른한 얼굴로 대충 이불을 걷어찼다. 금세 추위가 밀려와 다시 덮고 싶어졌지만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보쿠토를 바깥에서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아카아시는 굼실거리며 대놓고 옷 갈아입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저도, 곧, 나갈게요. 보쿠토는 마땅한 대답도 못 찾았는지 그저 낮은 목소리로 "응." 하고 대꾸했다.

대충 들리는 소리로는 벌써 집을 나선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집 근처를 지도로 떠올리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집안은 조용했다. 당연한 시각이다. 벌써 새벽 1시를 훌쩍 넘겨버렸으니 잡다한 소리가 나지 않아야 했다. 아카아시는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 금세 찬 바람이 분다. 아카아시는 코트 깃을 세워 목을 푹 묻었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오자 눈앞에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어라, 어디서 봤는데. 시선을 올리자 그곳에는 보쿠토가 웃고 있었다.


"진짜 빨리 나왔네."

"보쿠토 선배. 어떻게 벌써……."

"아카아시 졸리다는데 괜히 나왔다가 감기 걸리면 어떡해. 콜택시 불러서 타고 왔지."


기사 아저씨는 이미 퇴근하셨다고! 보쿠토는 밤중에도 변함없이 쾌활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얼마나 기다렸는지 두 볼이며 이마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카아시는 서둘러 목도리를 풀어 보쿠토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일찍 나오실 거라면 좀 따뜻하게 입고 오십쇼. 보쿠토 선배가 감기에 걸리면 그거야말로 더 곤란한 일이잖슴까."

"아카아시가 나 따뜻하게 해줄 거잖아?"


명치에 직격타를 맞았다. 아카아시는 틈을 찔린 것마냥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헤 벌렸다. 보쿠토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얌전히 놀림받고 당해줄 만큼 마냥 다정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얻어맞은 게 있다면 돌려줘야 했다. 보쿠토는 이걸로 전화 너머의 아카아시가 친 장난을 갚아주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건 보쿠토의 세터님 역시 마냥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는 점이었을까.

아카아시는 언제 당했냐는 듯이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엷은 미소는 1학년 레귤러 후배가 보았다면 덜덜 떨며 두 팔을 쓸어내릴 정도로 오싹했다. 그러나 보쿠토는 아카아시 앞이면 시력이 단숨에 0.45가 되는 인간이라 마냥 예뻐 보였다.

아, 오늘도 내 애인 완전 예뻐.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있자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둘러준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순순히 이끌려간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입술이 열리자 무심결에 마른 침을 삼켰다. 이렇게 붉었던가? 등줄기에 근지러워진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왼쪽 귀에 대고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럼, 저희 집에 들어오시면 더 따뜻하게 해드릴 수 있는데."

"갈래."

"개소리하지 마시죠. 부모님 계십니다."


즉답하자마자 유혹이 무색하게 아카아시는 싸늘한 태도로 보쿠토를 내쳤다. 보쿠토는 아직도 얼얼한 왼쪽 귀를 감싸 쥐고 억울하게 외쳤다. 아, 왜! 아카아시는 언제 다정했냐는 듯이 차가운 얼굴을 짓고는 대놓고 혀를 찼다. 그걸 믿으십니까? 아니 그럼 믿지 말라고 하는 말도 있나. 보쿠토는 상처 입은 부엉이 같은 얼굴로 울망울망한 눈을 지었다.

185.3cm였던 마지막 기록이 벌써 1년 전이다. 그새 더 큰 게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저런 눈을 할 때마다 아주 작고 소중한 어린 새를 보는 기분이 되곤 했다. 하지만 속아선 곤란하다. 저건 이미 반쯤 짐승이었다. 아카아시는 진심으로 보쿠토 손을 잡고 어디든 뛰고 싶은 심정을 억누른 채 느릿느릿 말했다.


"안됩니다. 장난친 거예요. 그보다 여기까진 왜 오셨어요, 보쿠토 선배. 우리 만날 약속도 없었는데."

"없으면 오면 안 돼? 내가 내 애인 좀 보겠다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하는 소리죠. 제가 갑자기 새벽 4시에 찾아오면 아무리 보쿠토 선배라도."

"난 안 놀라. 나도 아카아시를 보고 싶었을 테니까."


턱 말문이 막혔다.


"난 네가 몇 시에 찾아와도 놀라지 않을 거야. 그 시각이 언제든 나는 늘 아카아시를 만나고 싶어 할 거니까. 내가 널 그리워하지 않는 순간은 없어, 아카아시."


보쿠토는 그러고도 더 입을 틀어막고 싶은지 쐐기를 박았다. 아카아시는 두 무릎 아래가 완전히 풀리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운동부 부주장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다리는 튼튼하게 잘 버텨줬다. 사실은 다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른 척 풀렸더라면 이 틈을 타 보쿠토의 품에 뛰어들었을 테니까.

아카아시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익숙한 구두 앞코는 반질반질해서 아카아시의 그림자가 비쳤다. 단순한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끝은 가볍지 못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그랬다. 마음이 깊어지는 순간 모든 가벼웠던 것들은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되어 마음을 사정없이 찢어놓곤 한다. 아카아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고개를 떨어트린 아카아시의 앞에 선 보쿠토는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두 손을 뺐다. 언제라도 아카아시를 끌어안을 준비였다. 비록 가죽장갑 하나만 낀 손가락은 끝부터 천천히 감각이 사라졌지만, 껴안을 순간을 놓치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리고 보쿠토는 타이밍을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이었다. 코트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보쿠토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아카아시를 와락 껴안았다.




@stock_Hellhound

 설 연휴라고 생각해서 쓰고 있었는데 깨닫고 보니 오늘이 스티 생일이더라고요. 장난으로 시작한 글이 갑자기 무거워져서 여기서 커트.

예쁘고 쓸모없으며 달콤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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