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이었나 10살이었나.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고작 스쳐 지나간 수준의 그때 그 애들은 성조차 기억이 안 날 만큼 별 의미 없는 존재거든. 조금 전 와카토시가 나 대신 죽여준 벌레와 다를 게 있다면 벌레는 죽었고 그들은 나 모르는 곳 어디선가 알아서 숨 쉬며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 정도? 그네들의 흐릿한 존재감이야 개구리밥처럼 내 머릿속을 부유하다 금방 사라지겠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끔찍하다.”


으깨진 벌레 사체를 처리하기 위해 슬리퍼 바닥을 티슈로 닦아내는 와카토시의 표정은 벌레를 죽였을 때와 별반 다를 것도 없이 무덤덤해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 공포? 에이, 내가 와카토시를 무서워할 수가 있을까, 벌레도 아니면서. 고민하며 턱을 쓰다듬을 새도 없이 새로운 추측이 나왔다. 벌레가 달라붙은 슬리퍼 바닥이 새빨개서일지도 몰라. 죽어버린 벌레와 눈이 마주쳐서일지도 모르고. 정말이야? 나는 벌레를 보는 것도 끔찍이 여겨서 지금까지 계속 와카토시 얼굴에만 눈을 고정하고 있었잖아.

그래, 사실은 아니야. 벌레에게 내뱉은 내 모욕을, 아무런 잘못도 생각도 없이 내 귀찮은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어 벌레를 죽여버린 와카토시의 잔인함을 후회해.

나는 대단히 똑똑하고 생각도 많은데 가끔 이래. 벌레를 향했던 증오가 지금 내 반 토박도 안 오는 과거 애새끼들의 지껄임으로 변태해 나에게 돌아와 명치께를 갉아먹는 이유도 모르겠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다만 머릿속에 가득찬 생각은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의미없는 절망감. 매일 오늘을 사니까 그렇다며 의연하게 넘길 수도 있는데, 실은 그렇지도 않은 거지. 스스로 의식하지 않았더라면, 깊숙한 구덩이에 파묻고 생매장했더라면 굳이 안 받을 수도 있었던 상처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가 내뱉은 말로 마음이 후벼 파였어.


아직 쪼그려 앉은 와카토시의 정수리는 참 단정하다. 검지 손가락으로 그 꼭대기를 콕 찔러볼까? 생각했지만 나는 알아. 굳은 결심이 아니고서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정말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란 걸. 욕망은 찰나의 순간보다 빠르다. 생각하는 순간만큼은 퀵실버가 되어 나는 1초 안에 높이 점프를 하고, 공을 막고, 후배를 괴롭히고, 친구에게 농담을 던질 수도 있어.

그렇다면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짓거리들은 내가 진정 원하지 않는가? 말도 안 돼. 내가 원하지 않아서 그간 가만히 있었겠어.

단합이니 융화니 그딴 건 나중에 실력 좀 괜찮은 애들이나 만나면 생각해볼게요. 쟤네랑 어울렸다가 저까지 멍청해지면 어떡해요. 내가 끔찍해? 괴물 같다고? 정말 끔찍한 건 니네 배구 실력이지 멍청이 괴물들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 끔찍하게 어둡고 무거웠던 과거를 반복하는 한이 있어도 그 허접들에게 꼭 내뱉고 싶은 말이 있거든. 어렸다고 해서 원하지 않았을 리가 있을까. 지금의 나는 예전의 어린 나와 별반 다르지도 않은데. 나는 아직도 어린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꾸며 기를 쓰고 머저리들 공을 막아대는 일로 겨우 숨겨냈던 우울함이, 어딘가로 사라지지도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자리 잡고 앉아 내 목울대를 쳐대는데.


기척도 없이 일어난 와카토시는 한참을 말없이 눈만 끔뻑인다. 뭔가를 말해주길 기다리는 눈치지만 나는 조금 힘이 빠져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다. 어제의 오늘과 똑같은 우리는 특별할 거 없는 일상을 보내놓고서 왜 나만 특별히도 기울인 감정에 매몰돼 이렇게 자신을 스스로 몰아세울까.


“연습 가자 와카토시.”

“그래.”


토해내듯 내뱉은 말에 와카토시는 말 잘 듣는 아들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다. 벗어둔 슬리퍼 한 짝을 마저 신은 와카토시를 나는 참 좋아해. 내가 아직 완벽하게 막아낼 엄두도 못 내는 아름다운 스파이크를 때려서이기도 하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서 ‘기분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같이 멍청한 질문을 하지 않는 성정을 가져서야. 좋아할 것투성인 나의 동료, 친구.

온종일 붙어 다녀놓고서 갑자기 나에게만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혼자 울적해져 뭉근하게 구는 이유가 너에게는 뻔하지 않겠지. 속사정을 알 수 없을 때면 똑똑한 와카토시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한다. 나를 이해해주려고. 그러나 어려울 거야. 와카토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누구든 내가 아니니 이 우울함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내가 앞으로 남은 하루 동안 할 일은 괜히 여럿 거슬리게 만들기 전 묵직한 기분을 훌훌 털어버리며 연습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매점에 들려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가볼까. 지각은 간신히 면할지도.

 

 

 



[텐도시라] 간담상조




“텐도 그만하고 멤버 바꿔.” 


실패다. 오늘 하루를 점수 매겨보면 와카토시 수학 성적만도 못하겠지.

시험 시간 내내 수식들 빼곡히 적힌 시험지를 진지하게 풀어보려고 애쓰던 와카토시를 지켜봤다는 하야토는 그가 참 이상하다고 말했어. 종료 5분 전에야 엉터리 풀이법으로 답안 작성을 마치고서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재검토까지 했다더니, 정작 발표된 성적은 뒤에서 순위권을 다투던 와카토시. 왜 괜한 에너지만 써? 그럴 시간에 잠이라도 자지.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덕인지 조금 부은 것 같다는 눈두덩이에 힘을 주고 물었더니 와카토시 왈, 아무리 못해도 학생은 주어진 시험을 열심히 봐야 하고 잠은 밤에 푹 잤으니까. 나는 웃기지도 않은 그 말에 코웃음을 참느라 질식할 뻔했지. 너 그래봤자 수업은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며.


와시조 감독은 바짝 열 올려 화내지 않고 조용할 때가 더 무섭다. 직시할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싫은 의사에 반해 까딱까딱 손짓하는 와시조 감독에게로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인다. 감독님과 나 사이 거리가 짧아 괴로워. 다리가 짧으면 이 길을 걸어가는 시간이 조금은 더 길어질까? 예전에 한 마디 던져봤더니 본인 얘기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찔린 하야토가 얼마 차이도 안 난다며 씩씩댔었는데. 그날은 운이 참 좋아 세미가 한 마디 덧붙이다 시라부에게까지 불똥을 튀겼다.

하야토, 너도 작은 키 아니면서 왜 이럴 때 꼭 발끈하니. 시라부는 가만히 있잖아. 안 해도 될 말로 기어코 둘을 쌍으로 열 받게 만들었어. 세미는 예전부터 종종 저도 모르는 사이 시라부 화를 돋우곤 했다. 깔깔거리는 내 웃음소리는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냐며 그러는 선배도 저랑 얼마 차이 안 난다 쏘아붙이는 시라부의 대꾸에 묻혔어. 다들 두어 마디 덧붙여 순식간에 와글와글해지던 체육관의 하이라이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카와니시가 뜬금없이 내뱉은 '시간은 상대적이잖아요. 코끼리와 개미의 시간이 다른 것처럼?’ 말에 결국 폭발한 시라부가 너 잘 걸렸다, 어디 한 번 개미한테 빛의 속도로 맞아보라며 발길질을 하던 순간이었고.


“표정을 보니까 코트 밖에 나온 게 기쁜가 보구나.”


혼나기라도 열심히 혼나야 하는데 무에타이 고수처럼 이를 악물고 발차기를 날리던 시라부 생각에 그만 웃고 말았나. 와카토시 신발 밑창을 생각하며 겨우 무표정을 유지한 채 죄송하다 대답해낸 뒤에 코트 밖으로 쫓겨났다. 대타로 교체된 후배에게 고맙다 산뜻하게 인사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애 표정은 겁에 질려있어서 음, 솔직히 말하면 힘이 빠졌다고.




나야 어차피 오늘 연습은 종쳤기 때문에 워밍업 존에서 벗어나 강당 벽에 기대어 앉은 거지, 이 사나운 2학년 후배는 무슨 생각으로 곁에 와 수고롭게 드링크를 직접 건네나 했더니, 눈치를 보아하니 예삿일은 아니다. 


“텐도상, 이것 좀 드세요.”

“연민이나 걱정은 아니고.”

“뭐요.”

“너도 감독님한테 쫓겨났어? 동질감 형성이야?”

“제가 텐도 상도 아니고 쫓겨나긴 뭘 쫓겨나요.”


너는 평소엔 무슨 말을 해도 심드렁하니 잘도 무시하다가 어느 때엔 바락바락 성질을 부리곤 한다. 정말 깜찍한 후배야. 지금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에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시라부. 그렇지만 오늘은 피곤해서 더 장난치고 싶은 의욕이 안 생기거든. 미안, 다음에 놀아줄게.


“아니면 말지, 그래도 쫓겨난 사람한테 너무 매서운 거 아니야 시라부?”


안 놀아주면 서운해 가버릴 줄 알았는데 드링크를 마시는 사이 시라부는 옆에 조심스레 주저앉는다. 경기도 보고 싶고 음료 마시는 내 눈치도 보고 싶은지 요리조리 굴리는 눈알에 내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경기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를 뛰는 우시지마에 집착하는 편력은 알았지만 지금 나는 왜? 어떤 점이 너의 흥미를 일으켰어? 궁금해져 드링크를 내려놓는다.


"시라부 연습 경기는?"

"잠깐 빼달라 요청했어요."

"뭐? 너 시라부가 아니구나. 누구야 너. 내 후배 돌려줘 이 괴물아."

"아 진짜 선배!"


빽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코트 근처 사납게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입을 틀어막은 시라부는 눈치를 보더니 드디어 용건을 꺼낸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요.”

“문제?”

"오늘 종일 연습하면서 문제 있는 사람처럼 구셨잖아요. 고시키가 너무 시끄러웠습니까? 제가 저 자식 좀 조용히 시킬까요?”


귀여운 후배는 책임감도 대단하시지. 재주도 좋고 꽤 똑똑한 데다가 제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능히 실천으로 옮긴다. 큰 그림을 볼 줄도 알고 말이야. 그래도 사령관보다는 책사에 가까운 타입이다. 뒤에 눈이 더 달리지 않았다는 흠 때문에 전장이라도 나갔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썰려 나갈 수 있으니까. 제 이름이 나오자마자 웜업 존에서 폴짝이던 츠토무가 귀를 쫑긋쫑긋 세우더니 슬금슬금 다가왔는데도 눈치를 못 채잖아.


“시라부 상, 저 부르셨어요?”

“넌 뭐야! 안 불렀으니까 저리 가 좀!"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입을 비죽 내밀며 다시 웜업존으로 떠난 츠토무의 뒷모습을 가만 살펴보다가 시라부는 아까보다 한층 작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면, 쟤도 문제가 아니라면.. 제 토스가 문제입니까? 말해주시면 최대한 고치겠습니다.”

"맙소사 시라부. 너무 황당해서 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말해요."


우시지마는 좋아할 이유가 잔뜩인 놈이라고 말했지만, 또 너도 너 나름의 그 이유가 많은 후배라서 내가 너에게 말해도 될지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네가 내 속을 봤다가 비위라도 상하면 어쩌지 겁부터 나는걸. 망설이는 걸 보더니, 얘도 아까 츠토무와 똑같이 입을 비죽거리기 시작한다. 말 안 하시면 저 진짜 그냥 들어갑니다? 재촉에 속는 척 넘어가줄까, 생각했어. 그래서 한번 말이나 던져보자 했지.


“시라부는 내가 무서워?”

“그게 무슨 개.. 말도 안 되는 말이에요?”

“금방 개 같은 소리라 말하려고 했지?”

“아 진짜.. 아무튼 그게 뭡니까.”

“내가 괴물 같아?”


이제야 좀 문제가 뭔지 알아차린 시라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나에게 질렸을까, 실망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싫어졌을까? 징징거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며 영원히 내가 끌어안고 살아야 할 어린 괴물. 보듬어주지도 못하고 밀어내지도 못할 이 걸리적거리는 게 역설적이게도 내가 소중히 여겨야 하고 또 나만 아껴줄 수 있는 작은 나라서. 이런 나를 마주하는 너의 반응을 지켜보기가 솔직히 무서웠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힘없이 감았다 뜬 눈앞에 시라부가 보인다. 놀랍게도 심드렁한 표정이라 턱근육이 사라진 사람처럼 입을 떡하니 벌렸더니 좌시하는 얼굴이 예술이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굳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지 않나? 아주 조금 고민하는 듯한 시라부는 불쑥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라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 이거지 너. 아무렇지 않은 척이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는 왜 상처가 되지 않는지, 나도 여전히 내 속을 모르겠어.


“당연하죠.”


괴물 같다는 순순한 인정도 지금만큼은 이상하게 달갑거든. 그런 생각을 왜 했냐, 왜 그렇게 생각하냐, 구구절절 온갖 따스한 표정을 지어내어 위로하려는 것들보다 이게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방면으로는 생각이 또 짧지. 잔뜩 겁먹어 껍데기를 깨지도 못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노른자 속에나 파고들려는 겁쟁이. 그 속에서 질식할 것도 모르고서. 처음 호흡해본 사람처럼 힘이 쭉 빠지며 몸 전체를 유영하는 혈액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느껴진다.


“막상 인정받으니까 그냥 그렇네?”

“스스로 상처주며 단련하기 연습이라도 하세요?”

“아니 그냥. 시라부가 지금 나 무시하는 걸 보니까 무섭진 않나보네.”

“무서워할 구실이 있어야죠. 제가 선배에 관련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선배가 체육관 바닥에 허구한 날 흘리는 아이스크림이 유일합니다.”

“아이스크림 괴물..”


초등학생이나 지을 법한 별명이다. 그렇지? 묻는 말은 또 무시하고 얘는 제 할 말만 한다. 요즘 같은 때에 쓰레기통 두면 벌레 끓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강당 쓰레기통도 치워둔 건데, 선배는 맨날 간식 사 먹고 쓰레기만 그대로 가져오구.. 또 아이스크림 흘리면 대충 닦아내고 끝이잖아요. 그게 얼마나 끈적이고 기분 나쁜지 아세요? 후배 핍박에 못 살겠어 내가, 아이고 내 팔자야. 우는 소리에도 씩씩대다 결국 다시 짜증 내는 시라부 귀 끝이 조금 빨갛다.


“근데 괴물이 뭐가 어때요. 우리 팀에 괴물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 정도는 돼야 이 학교 들어와서 공 좀 만지죠.”


화가 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솔직하게 그런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어.


“근데 시라부 넌 그 정도까진 아니잖아.”

“전 대신 공부도 잘하잖아요.”

“완전 멋있어..”


그래서 내가 좋아했지.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덜 대단하지만 공부까지 잘하고, 바락바락 대들며 못 하는 소리가 없는 시라부.


“장난은 그만 치시고요.”

“나는 언제나 진심이지.”

“말이나 못하면.”


와카토시에 시비 거는 세이죠 친구들에게 중지를 척 세우며 앞으로도 쭉 그렇게 계속 발악하세요, 그래봤자 니네는 절대 전국 못 가. 비아냥대던 시라부. 저 팀 빨간 머리 애 진짜 이상한 새끼였는데 시라토리지와 감독 눈에 들었다고 팔자 뜯어고친 것 좀 봐, 쟤 중학교에서 어땠는지 알아? 작게 말할 의지도 없이 떠들어대던 놈들에게 공을 날리고서는 성의없이 사과하던 시라부. 돌아서서는 더 세게 던졌어야 했다며 웨이트를 빡세게 해야지 원. 혀를 차던 시라부.


“진심으로 진심이야 시라부.”

“됐어요. 하여간, 선배가 특이한 타입인 건 맞아요. 가늠 안 가고 제멋대로라 적응하기 힘드니까요.”

“그래도 된다며?”

“네. 언젠가 익숙해질 테니까요. 솔직히 아직 완전히 선배한테 적응한 건 아닌데,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까 이젠 상관없어요. 그리고 사정은 달라도 이 배구부 들어와서 다행인 애들, 선배 말고도 꽤 돼요.”

“그래?”

“독종끼리 알아서 잘 모였다고 생각해요. 다들 어디 다른 곳 갔더라면 이렇게 못 지냈을걸요. 고시키만 봐도 뭐.”

“츠토무?”

“1학년 부원들이 쟤 벅차대서 레귤러 연습 코트로 넘어왔잖아요.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선배들 사이 한자리 차지하고 연습하겠어요. 혼자 튀니까 차기 주전들 밸런스 무너지기 전에 비슷한 그룹으로 보내진 거죠. 입부 하자마자 저 정도로 훈련 소화하고 추가 연습까지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그런 거 보면 쟤도 딱히 정상은.”


이번에도 귀신같이 제 얘기하는 중임을 눈치챈 츠토무. 다가오는 발걸음마다 즐거움이 뚝뚝 묻어나는데, 아서라. 너 이러다 시라부에게 또 욕이나 먹지. 말리려고 했지만 그전에 츠토무가 먼저 외친다.


“시라부 상! 감독님이 거기서 계속 놀거면 퇴부하고 실컷 놀라고 하셨어요!”

“야 고시키 이 프락치야. 노는 거 아니었다고.”

“프락치가 뭐예요? 그대로 감독님께 전달하면 돼요?”

“이게 돌았나. 너 진짜 저리 안 꺼져!”

“아 알았어요. 진짜 맨날 성질이야.”


너 뭐라고 했어! 외치는 말은 은근히 무시한 채로 돌아서 다시 가버리는 츠토무를 향해 나중에 죽었어 진짜.. 이를 갈더니 시라부는 그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는 양 잔뜩 투덜댄다.


“저 이젠 진짜 코트 들어갈래요. 선배 때문에 망했어요. 왜 자꾸 웃어서 감독님 오해하게 만들어요.”


내가 웃고 있었어?


“아무튼 저 때문에 이러시는 게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그것만 아니면 됐어요. 오늘 연습 내키지 않으면 계속 땅굴 파세요. 뭐, 가끔은 아닌 날도 있는 거죠.”

 “정말 한 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매정함이구나 시라부.”

“선배가 예상을 잘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배구하는 거고.”


은근슬쩍 간지러운 칭찬까지 해주는 친절은 어디서 배웠는지, 황송해 계속 웃는다. 당신이 웃든 울든 이제 볼 일 없수다 시큰둥한 시라부는 운동화 매듭을 확인하더니 일어나 콩콩 뛴다. 한 박자 늦게 팔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인사를 하는 것 같다. 그래 안녕!


“그러니까 얼른 원래 페이스 좀 찾으세요. 선배도 나름 우리 팀에 중요한 전력 아니십니까. 선배가 없어서 솔직히 블로킹이 엉망진창이에요.”

“..라며 켄지로가 능숙히 깎아내리는 팀의 또다른 미들블로커이자 조금 전까지 절친한 친구였던 저. 퇴부 신청서 내고 다른 학교 배구부에 입부해도 괜찮을까요? 타도 시라토리자와의 선방에서 서서 직접 옛 친구를 꺾어주고 싶군요.”

“깜짝이야.”


이 팀은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와 사람 놀래는 데에 재주 있어? 본의 아니게 흉을 본 것이 머쓱했는지 아무 말이나 내뱉는 시라부의 정성은 갸륵했으나, 어느샌가 그 뒤로 다가온 카와니시는 봐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서운해 서운해 엉터리 멜로디를 붙여 시라부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카와니시는 감독님의 말씀을 전언한다.

 

“딴짓한 죗값으로 이따 운동장 열 바퀴 뛰라는 감독님 좋은 말씀 전하러 왔더니, 옛 친구 흉이나 보는 중이었네. 배신이야 켄지로.”

“이 날씨에 무슨 열 바퀴야. 감독님은 죽으라는 말을 돌려서 말씀하시네. 그리고 흉본 거 아니거든? 텐도 상이 뭐라 얘기 좀 해봐요.”

“사실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건 세 바퀴고요. 괘씸죄로 제가 조금 추가했답니다.”

“선배 보셨죠. 이런 미친놈을 우리 학교 아니면 어느 학교가 받아주겠어요.”

“미야기 현 절대왕자 자리를 위협하는 최강의 대항마 아오바 죠사이는 어떨까요?”


이건 좀 웃겼는지 피실피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시라부가 웃는다. 카와니시도 보며 씩 웃고, 나도 따라 웃고. 우리는 이제 공범자야. 감독님이 지금 저쪽에서 노려보고 계시거든.


“받아다 그대로 화형 시킬지도.”

“우시지마 선배를 공략할 백 한 가지 비법을 훔쳐 왔다고 한다면?”

“무슨 맛집 특공대세요?”


이제 그만 웃어야지 했는데 두 귀염둥이의 싸움에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지 뭐야. 체육관에 있던 모두를 집중시켜 결국 부글대던 감독님 속을 터뜨렸다.


“카와니시 이젠 너까지 거기서 노닥거리냐! 셋 다 이리 와!”


망했어. 진짜 망했어. 짜증내는 시라부와 덩달아 혼나게 생겨 억울해 죽으려는 카와니시를 앞세워 감독님께 끌려가 잔소리를 듣는 내내 나는 세계 모든 나쁜 사건 사고와 재앙을 떠올려야만 했다. 안 그랬다간 계속 깔깔대며 웃을 것만 같아서.

노력도 다 헛수고였는지 오늘 왜 이러냐는 질책에 변명이나 사과 대신 저 한 대 때려주실래요? 헛소리나 내뱉고 말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국 감독님께 머리를 한 대 맞은 뒤 잡소리할 여유 생겼으면 코트에나 들어가라는 불호령에 웜업존으로 들어간다.


“이건 악몽이야..”


방실방실 웃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시라부는 끝까지 투덜댄다. 나는 그 모습이 더 깜찍해 더 큰 미소를 보낸다.


“웃어 시라부, 웃으면 복이 온대잖아.”

“저주받은 것 같아요. 끝나고 또 언제 운동장을 돌아요. 돌겠네.”


들러붙어 어깨동무를 하니 쳐내는 매정함까지는 또 없어 그대로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이 코트로 들어가주는 시라부를 보며 나는 또 생각해. 너무 먼 미래 언제일지도 모르는 낙원의 도래를 예언하느라 여태껏 눈앞의 지금을 보지 못했지. 돌이켜보면 죽음보다 비참한 삶이었을까 과거를 마주할 자신도 없었고. 그래도 이제는 어쩌면.. 어쩌면 괜찮을 것 같아.

랠리가 끝나고 휘슬 소리와 함께 코트 안에 있던 후배가 나온다. 수고했다 인사하며 제자리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시라부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번에도 머리통 위에 얹어진 무게감을 감히 쳐낼 생각조차 없어보이는, 매정한 사람 중에 제일 다정다감할 너는 나의 후배, 동료, 유일한 존재. 시라부.


"이번엔 좀 잘해요 선배."

"응. 그럴게."


누구 말씀이신데. 웃으며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선다. 좀 쉬었어? 묻는 레온에게 방긋방긋 웃어준다. 편한 곳, 즐거운 공간, 내가 있어야할 자리. 돌아왔구나. 안락하다.

휘슬 소리가 울리고 몇 초 뒤에 건너편에서 서브가 올라온다. 와카토시의 리시브로 공은 깨끗한 선을 그리며 시라부에게 간다. 그 공의 예상 속도에 맞춰 그간 수없이 합을 맞춰본 대로 네트 바로 앞쪽에 다가선 나는 크게 점프한다. 시라부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공이 다가온다.

하이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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