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하고 나면, 다음날부터 쌩쌩 날아다니는 센티넬과는 다르게 가이드들은 초주검이 돼요. 물론 평생 그렇다는 건 아니고 각인의 여파가 며칠간 나타난다는 말이죠. 솔직히 전 각인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건 누가 위고 아래고를 떠나 자신이 가진 그릇에 담겼던 것들이 옮겨지면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센티넬은 애초에 그릇의 크기에 비해 그 안에 담긴 것이 적어요. 가이드는 반대로 너무 담긴 것이 많아 흘러넘치죠. 그렇기에 둘이 함께여야 균형이 맞도록 설계된 것인데, 각인은 간단하게 말해서 그 평균 수위를 맞춰주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이드에게도 결과적으로는 이로운 일이에요. 다만 늘 넘치던 것이 그렇지 않게 되었을 때는, 하향된 수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각인을 하고 나면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의 목소리가 나에게







카마사키상, 들려요? 대답해요, 카마사키상!


아무리 무전에 대고 이름을 불러대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후타쿠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헤드셋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고장인가 싶어 예비로 두었던 다른 헤드셋으로 바꿨으나 여전히 귀에 들려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후타쿠치는 작업차에 설치된 기계에 대해서라면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빠삭했다. 게다가 기계의 상태에 대한 감도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기기에서 아무런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저쪽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소름 끼치는 침묵이 이어진다. 전파 방해가 있는지도 확인했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모든 게 멀쩡했다. 마지막으로 전달받은 보고 내용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어쩐지 열이 평소보다 빠르게 오르는 기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쾌활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절대 쾌활하지 못했다. 모니와가 우려한 그대로였다. 디버프에 걸린 게 분명했다.


각인하지 않은 이들에게 안전선은 없다.
이미 그들은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후타쿠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필드를 재확인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까지 그들을 감싸 안을 수 있도록, 조금씩 범위를 높여나간다. 


현장에 그나마 익숙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상위 등급이란 이유로 귀를 잡혀선 질질 끌려가 억지로 현장에 투입되었던 날들이 존재하기에 이렇게 조금이나마 대처할 수 있게 된 거겠지. 현장을 다녀올 때마다 이런 삶이 너무나 엿 같다며 당장 혀 깨물고 죽고 싶다고 엇나갔던 적도 많았는데. 설마 그 경험들을 다행이라 여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것이 숙명이려니 한다. 원치 않은 힘을 갖고 태어나,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특혜로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을 불균형하게 만들고 그것을 다시 균형으로 되돌려야만 하는, 시작부터 잘못 단추가 끼워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운명.




*




오이카와가 작업차 안에 들어섰을 때, 후타쿠치는 헤드셋을 낀 채로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었다. 내부를 확인시켜주는 감지기마저 다 꺼지기라도 했는지, 그가 보고 있는 새까만 모니터는 아무것도 비춰주지 않았다. 다만 필드 가이딩 라인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니터만이, 한없이 확장되는 빨간 선을 외롭게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켄지, 정신 차려."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리곤 마주한 얼굴에 오이카와는 눈을 크게 떴다. 후타쿠치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던 탓이다. 아무것도 안 들려요. 후타쿠치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신호가 안 잡혀요.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사람들인데, 숨소리도 안 들려요. 기계들도 너무 멀쩡해요. 고장 난 거면 고칠 텐데. 어떡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가이드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철썩-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에, 뒤늦게 따라 들어온 세미가 황급히 달려가 한 번 더 허공을 가르려는 오이카와의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간신히 잡아챘다. 이미 한차례 매섭게 후타쿠치의 뺨을 후려친 오이카와의 손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돌아간 고개 탓에 무참히 노출된 후타쿠치의 뺨은 그보다 더 무섭게 부어올랐다. 카게야마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무전을 통해 파열음이 들렸는지, 탁자 위에 놓인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이와이즈미의 목소리만이 작업차 내부를 가득 메웠다.


-별거 아냐, 하지메쨩. 미안한데, 일단 내부 상황부터 확인해줘.


생각보다 여기에 수습해야 될 일들이 좀 많네. 조금 전 자신에게 맞은 그대로 서 있는 후타쿠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이카와가 마이크에 대고 침착하게 응답한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이와이즈미는 작업차 내부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지만, 무어라 되묻는 대신 그래, 대답하곤 우시지마와 히나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작업차 내부의 일은 센티넬이 참견해서는 안 됐기 때문에.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세 명의 센티넬이 경계지대로 진입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뮤트 버튼을 눌렀다. 조금 누그러진 기색에 후타쿠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거 놔도 돼. 오이카와는 여전히 제 팔을 잡은 세미를 보며 차분히 말을 건넸지만, 세미는 불안감에 떨리는 눈을 한 채 놓지 않겠다 고개를 도리질 쳤다.


"이렇게 안 했으면 저거 수습 못 했어. 세미, 여기는 현장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우리에겐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거 알잖아.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서야 세미는 고개를 끄덕이곤 오이카와의 팔을 놔주었다. 급격히 피곤해지는 느낌에 오이카와는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리고는 후타쿠치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너 지금 힘든 거 알아. 그래서 도와주러 온 거잖아."
"..."
"말해봐. 언제부터 연락 안 됐어."
"...십오분 전쯤... 코가네가와가 보낸 무전이 마지막이었어요. 평소와 상태가 다르다고 했어요. 그 코가네가와가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더하겠죠. 그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말끝을 흐린 후타쿠치가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뺨을 쓸어내렸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으로 후타쿠치는 이미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무리하게 가이딩 범위를 넓힌 것에 대한 반동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번 모니터를 확인했다. 가이딩 영역을 표시하는 선은 본래 초록색이다. 그리고 그 영역을 펼친 주인의 컨디션에 따라 자동으로 색이 변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었다. 노란색은 가이드에게 무리가 갈 수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마지막으로 뜨는 빨간색은 위험신호다. 언제 가이드가 탈진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임을 알리는. 센터 내의 누구보다도 선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후타쿠치가 빨간 위험신호가 뜰 지경이 되도록 필드를 넓혔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다.


기술보안팀 센티넬은 게이지 총량이 높지는 않다고 했지만, 15분이면 그래도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돌아왔을 때가 문제였다.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가이딩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여느 때라면 자신들이 도울 수도 있었겠지만, 쉴 새 없이 현장이 투입된 게 벌써 3일째였다. 그나마 버틸 수 있을 만한 건 카게야마 정도였지만, 카게야마는 멀티가이드가 아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떴다. 결정을 해야 했다.


"...다들 멀쩡하게 돌아올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오이카와상."
"그런데 네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지."
"...그게 무슨."
"지금부터 네 필드는 전부 리셋하고 영역 다시 잡을 거야."


후타쿠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미 무슨 지시를 받은 것인지, 오이카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게야마는 빠르게 후타쿠치가 세팅해두었던 것들을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세미 역시 영역 계산 프로그램을 재가동시켰다. 그런 그들을 보고서야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알아챈 후타쿠치가 이를 악물고 오이카와의 멱살을 잡으려 덤벼들었으나, 오이카와는 그런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채며 빙긋 웃었다.


"켄지쨩, 솔직히 말해봐. 지금까지 뭐했어? 구조요청이라도 해볼 수 있었잖아."
"그건!"
"그래서 지금부턴, 아무거라도 할 거야. 네 동료를 살리고, 내 동료를 살게 하기 위해서."
"..."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해줄게. 그러니까 너도, 돌아올 이들을 위해 일단 쉬어."


유감스럽게도, 너희 팀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가이딩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너밖에 없어. 그런데, 그 상태로 버틸 수 있겠어? 빨간불 들어온 거 봤을 거 아냐. 오이카와가 턱을 치켜들며 하는 말에 후타쿠치는 분한 듯한 얼굴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없어 반박할 말이 없었다. 꼴사납지만 필드를 무작정 넓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서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다면 믿는 수밖에 없잖아. 고를 수 없는 선택지에 후타쿠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잘 생각했어."
"대신."
"응?"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해준다는 그 말, 꼭 지켜요."


나에겐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




-기술보안팀 센티넬 발견. 곧 히나타랑 이동할 거다.
-세 명 다? 상태는?


긴장감으로 인해 침묵으로 가득 찼던 작업차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쥐죽은 듯 화면만 바라보던 세 명의 가이드가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셋 중에 침착한 얼굴을 한 건 오이카와 뿐이었다. 헤드셋을 끼고 있지 않아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후타쿠치가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가볍게 눌러 제압하며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재차 그들의 상태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게, 지나치게 멀쩡하네.
-그래?
-너무 팔팔해서, 번거로울 지경이야.


실제로 이와이즈미는 눈을 찡그린 채였다.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카마사키와, 과할 정도로 의욕이 충만한 얼굴로 눈을 빛내는 코가네가와는 순순히 센터로 돌아갈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이중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건 아오네 정도겠지만, 워낙 말이 없는 타입인 데다 저래 보여도 나름 같은 기술보안팀이라고 속내는 나머지 둘과 다른 것도 없다고 들었다. 골 때리네. 이와이즈미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교대라니,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해. 이제 좀 할만해 졌는데."
"저희의 1차 임무는 그쪽들이랑 교대하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왜 굳이 너희랑 교대해야 하냐고."


같이 하는 쪽이 당연히 더 효율이 높지 않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카마사키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한다. 아까부터 같은 대화의 반복이었다.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통에 답답해진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쉬며 셋의 상태를 다시 한번 살폈다.



오이카와에게는 적당히 둘러댔지만, 솔직히 입바른 말로도 절대 셋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기에 멀리서 봤을 때는 괜찮아 보였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멀쩡한 게 문제랄지. 마치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빛나는 형광등과도 같은 상태였다. 조금만 나아가도 무너지기 직전이란 소리였다. 아마도 한계까지 쏟아부은 가이딩이 그들의 폭주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거겠지만. 하지만 이대로는.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은 것 같군."


이와이즈미가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히나타와 함께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돌아온 우시지마가 세 명의 센티넬을 아래위로 훑어보곤 한마디 툭 내뱉는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늦지는 않은' 상황. 가벼운 어투였지만 우시지마 역시 이와이즈미와 같은 판단을 내린 듯했다. 차이가 있다면, 알아서 돌아가도록 설득해보려는 의지를 가진 이와이즈미와 달리 우시지마는 여차하면 무력이라도 쓸 인물이라는 정도일까. 예컨대.


"히나타 쇼요. 좀 더 서두르는 게 좋겠다."
"네, 우시지마상."


바로 지금처럼.


"어이, 뭐하는 거야. 우리 안 갈 거라니까?"
"...세 분 무전은 어쩌셨습니까?"
"아, 그거? 조금, 건드렸지."


그렇잖아, 여기 꽤 시끄럽고, 초반엔 위험하기도 했으니까. 후타쿠치가 들으면 곤란할 것 같아서.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던 카마사키가 이내 호쾌하게 웃어버린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와이즈미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구겨져만 갔다. 가이드가 들으면 곤란해서 무전을 제멋대로 잘랐다니, 도대체 이 단세포 멍청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셔야 하는 겁니다."
"...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센티넬. 그저 곤란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기다리고 있을 가이드는요?"
"...아."
"아, 가 아닙니다. 가이드 생각은 합니까? 애초에 당신들 기존 영역에서 이 정도 벗어났는데도 지금 지나치게 멀쩡하죠.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이와이즈미의 일갈에 그제야 카마사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버린다. 방방 떠다니던 코가네가와는 당장에 말뜻을 깨닫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인지 멍하게 멈춰섰다. 아오네도 아차 싶었는지 한숨을 내쉰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를 배려한답시고 했던 일이 도리어 그를 걱정하게 만들고 있었을 줄은.



그사이에 이동 준비가 완료된 것인지 히나타가 저 멀리에서 사인을 보내왔다. 이와이즈미는 멍하게 선 셋을 둘러보았다. 가시죠. 그저 둘러본 것이라 하기엔 저들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그가 내뿜는 위압감이 너무 큰 탓에, 셋의 기세는 단박에 수그러들었다.


"우리가 생각이 짧았네.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아셨으면 됐습니다."
"...그래, 그럼 뒤를 부탁해."


차례로 이와이즈미와 우시지마에게 악수를 건네고는 얌전히 히나타의 뒤를 따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와이즈미는 과거를 떠올렸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끔찍한 나날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아무것도 몰랐겠지. 지금이야 다 아는 척 말하지만 기다리는 이들의 심정에 대해 생각하기까지 그 또한 얼마나 오래걸렸는지 모른다.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전부 알기까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할 일은 더더욱 명확해진다.


"우리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지."


우시지마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남은 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가능한 한 가장 멀쩡한 모습으로 웃으며 돌아가는 것.


부디, 운명의 신이 우리에게 가호를 내리기를.




*




"왔네요."


경계지대를 비추는 모니터에서 희미한 빛이 감지되었다. 히나타였다. 수인을 맺은 채 눈을 감고 선 히나타의 뒤를 이어 익숙한 모습의 셋이 차례대로 나타난다. 팔로 눈을 가린 채 반쯤 드러누워 있던 후타쿠치가 카게야마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니터에 달라붙을 듯 가까이 서서 셋의 모습부터 확인한 후타쿠치의 눈엔 답지 않은 조급함이 묻어있었다. 당장 상부에 하차 허가 요청 넣어줘요. 흥분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아까 이미 넣었거든? 그 대답이 무색하지 않게 바로 초록 불빛이 작업차 안을 가득 메운다.


문이 열리자마자 후타쿠치는 계단 하나도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날려 뛰어내렸다. 저러다 넘어지지. 발이 꼬였는지 아니면 어딘가 헛디디기라도 한 건지, 순간 휘청이다 다시 빠르게 균형을 잡고 내달리는 후타쿠치의 엉망진창인 뒷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쯧, 혀를 찼다.


"그럼, 우리도 잠깐 내릴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 셋의 하차 허가 신호도 떨어졌다. 누구 한 명이라도 차에 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남는 인원이 자신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세미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도 돌아온 이들의 상태를 확인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한편, 카마사키는 저 멀리서 달려오는 후타쿠치를 보며 뒷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느긋하게 걸어와서는 잔뜩 빈정거리기 바빴을 텐데. 역시 무전을 끈 건 좀 너무했나 싶었다. 코가네가와는 이와이즈미의 말뜻을 이해한 이후로는 잔뜩 풀이 죽은 채였다. 아오네는 그저 심각한 얼굴이었다.


소리와 화면을 전부 꺼버리겠다고 생각한 건 디버프에 걸렸다는 걸 눈치챘을 무렵이었다. 빠르게 차오르는 열감, 흐려지는 눈앞. 현장에 자주 나오지 않았던 터라 어찌 대처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기계실에만 처박혀있었네. 역시 가끔은 현장에도 나왔어야 했나. 하지만 현장에 차출되어 도살장에 끌려가듯 억지로 동원되는 후타쿠치의 뒷모습을 보는 모니와의 표정을 보면 차마 자신들 또한 현장에 나가겠노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걱정이라도 줄여주는 것.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지 않는 것이 후타쿠치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쉴 새 없이 뛰어온 탓에 숨을 고르느라 바쁜 후타쿠치를 바라보며 카마사키는 여실히 깨달았다.


"당신들 제정신입니까?"


차마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셋을 한참 노려보던 후타쿠치가 빽 소리를 질러버린다. 지은 죄가 있어 다들 고개만 숙인 채 대꾸도 못 한다. 후타쿠치는 대답 없는 셋을 빠르게 훑었다. 카마사키, 이상 없음. 코가네가와, 이상 없음. 아오네, 이상 없음. 현장에 나가만 당연히 주렁주렁 달고 오게 마련인 자잘한 생채기들을 제외하면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모두 멀쩡하게 두 발로 제 앞에 서 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무리했다면 그대로 끝이었을지도 모르는 게이지의 상태는 죽도록 욕을 해도 모자랐지만.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후타쿠치."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꾹 참으며 후타쿠치는 한 발짝 더 가까이 섰다. 그리곤 팔을 크게 벌려 셋을 한꺼번에 감싸 안았다. 커다란 남자 셋이 그들보다 조금 작은 후타쿠치의 팔 넓이에 맞춰 몸을 구기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다소 우스운 꼴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에겐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어서 돌아가요. 모니와상이 기다려요."
"그래."




*




기술보안팀에게 내부 상황을 전달받은 뒤, 후타쿠치와 셋을 보내고 다시 작업차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계단을 오르려 발을 뻗은 자세 그대로 휘청이는 바람에 무너지기 직전의 세미를 뒤따라오던 카게야마가 황급히 팔을 뻗어 부축했다.


"세미상, 괜찮아요?"
"...아, 괜찮아."


겨우 계단 위로 올라와 벽을 잡고 서서 숨을 몰아쉬는 세미를 보며, 카게야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계속 정신이 없었다. 몸에 기운이 다 빠져있다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일이 휘몰아친 탓이다. 어쩐지 계속 우시지마가 손을 놓지 않는다 했다. 본래 센티넬의 상태를 체크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가이드의 일인데 반대가 됐음을 깨닫고 세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날의 일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하는데. 세미는 차오르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처음이잖아요."
"토비오쨩이 어쩐 일로 기특한 소릴 다 하네. 말 들어, 세미."


애초에 너희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으니까. 무리할 필요 없어.
옆에서 괜히 입술을 삐죽이며 오이카와가 말을 거든다.



전날 둘의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하긴 했지만, 설마 거기서 각인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워낙 우시지마가 강경하게 굴었던 탓이다. 게다가 그렇게나 현장에 오지 못하게 막았던 세미가 있는 것을 발견한 우시지마의 얼굴이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감정이 그렇게나 묻어나 있는 것도 생소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것에 체념한 상태로 일관하던 우시지마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얼마나 그 둘을 걱정했었는지. 세미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가이드였다면 당연히 버티지 못하고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둘 중 어느 한 사람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는데. 



다행히도 가장 큰 문제는 해결되었다. 걱정했던 일도 괜찮아졌다. 이제 남은 건 평소처럼 잘 끝내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뿐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흐트러진 작업차 안을 재정비한다. 아까까지 후타쿠치가 버티고 있던 자리에는 오이카와가 앉았다.


패드 위로 뚝뚝 떨어진 눈물 자국을 지워낸다. 세상에 무엇에도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누구나 갈구하는 것이 있고 감내하는 것이 있고 지키고 싶어 하는 게 있는 법이다. 모두가 똑같이 원하는 것을 똑같이 바라는 것뿐인데 왜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목숨줄을 담보로 건 채 절박하게 빌어야만 버틸 수 있는 것일까. 운명이라 해도 너무 가혹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스를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조금 멀리 돌아가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양옆에 자리 잡고 앉은 카게야마와 세미를 본다. 덤덤한 표정의 카게야마도, 입술을 질끈 물고 버티는 세미도.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각자의 사정을 안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겠지.


오이카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잠시 뮤트 버튼을 풀고 헤드셋의 마이크를 당긴다.
다들 듣고 있지? 오늘은 조금 늦었지만. 믿고 있어 너희들. 웃으면서 보자.




*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문제는 세미였다. 카게야마가 연신 괜찮냐고 물을 정도로 세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까의 후타쿠치와 다를 바가 없을 지경으로, 세미는 온몸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간신히 버티고 앉아있었다. 각인의 여파였다.



미야기 센터는 파트너를 맺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등급 차이가 한 단계 이상 나지 않을 것을 권고했다. 특히 가이드가 센티넬보다 등급이 낮은 경우를 지양했다. 가이드에게 무리가 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세미는 S+급 가이드로 SS급 가이드인 우시지마와의 등급 차이는 두 단계였다. 심지어 세미가 더 등급이 낮다. 게다가 우시지마는 SS급이라고 단순히 정의하기엔 너무나 유례없이 강한 센티넬이었다. 또한 오래도록 하나의 가이드에 정착하지 못했던 탓에, 약물 주사에 익숙해져 게이지가 망가져 버린 심각한 상태이기도 했다.


센티넬의 망가진 게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파트너 가이드가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체력을 가이딩에 쏟아부어야 했다. 세미가 우시지마의 가이딩을 마치고 난 뒤 다른 이들보다 몇 배로 피곤해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우시지마를 가이딩하는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떨어진 게이지를 채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나 세미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시지마와 세미의 관계에서 스가와라가 간과한 것, 오이카와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 카게야마는 알 수가 없었던 게 바로 그거였다. 세미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것.


가이드로 발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센티넬이 정해지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틈도 없이 그것도 교육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가이딩을 시작해야만 했다. 다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알려주어야 할 모두가 입을 다물고 둘을 재촉하기에 바빴으니까. 그토록 몰아세워진 탓에 도리어 세미는 자신이 느린 편이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였다. 주변에 비교군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물며 전날엔 각인까지 한 터였다. 이 또한 특별한 준비도 없이, 이미 몸이 지친 상태에서 단지 서로의 갈구에 의해 불현듯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핀치에 몰려버린 세미가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사실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초조함으로 물든 눈동자가 모니터를 향한다. 중간에 무전으로 전달받은 상황 보고에 의하면, 게이트는 진작에 발견했으며 곧 닫힐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을 기다리는 사이 세미의 필드를 표시하는 가이딩라인은 노란색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곧 있으면 빨간색으로 변하겠지. 자꾸만 감기려 하는 눈을 애써 치켜뜨며 세미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야만 한다. 네가 무탈하게 돌아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별일 없었다고, 다들 무사하다고, 이제 괜찮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모니와와 스가와라에게 전할 수 있을 때까지는 눈을 뜬 채로 있고 싶었다.


제 손을 마주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긴장으로 식어버린 체온 탓에 더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세미가 일그러진 얼굴로 자꾸만 자신의 손을 주무르는 걸 본 오이카와가 손을 뻗는다.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버텨. 안심시키듯 꽉 잡아 쥐는 손의 감촉에 세미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과 달리, 자신의 손을 잡은 오이카와의 손이 무척이나 뜨겁고 축축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오래 있었어도, 눈감고도 알 수 있을 지경이 되었어도, 이곳에 있는 한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외롭지 않아서, 너의 목소리가 나에게 닿는 곳에 내가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세미는 생각했다.




*




왜 진작 각인을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종일 온몸이 가벼웠다. 세미를 만난 뒤에는 한결 나아졌고, 점점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던 이유 모를 중압감도 완전히 사라졌고, 머릿속을 메우던 희뿌연 장막 같은 것이 모두 걷힌 것처럼 정신이 맑았다. 굳이 제어 도구를 빼지 않아도 가뿐한 낯선 감각에 우시지마는 도리어 미간을 찌푸렸다.


전날 각인을 마친 직후부터 세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열이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으나 순간순간 초점을 잃었다. 아무래도 본인은 자각을 못 하는 것 같았지만, 남들 앞에서는 멀쩡한 척 굴면서도 우시지마와 둘만 남으면 제대로 버티고 서있지도 못했다. 몇 번이나 쉬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세미는 듣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뭐라 말하는 대신, 무너지지 않도록 옆에서 잡아주었다. 그게 그를 위한 최선의 배려였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잡아줄 수도 없는데, 아마 너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겠지. 자신이 이토록 컨디션이 좋은 것은 세미가 가진 것을 나눠 받았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사실이 뼈저리게 와 닿는다.


"빨리 끝내고 가자."


우시지마의 전에 없는 재촉에 이와이즈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게이트는 반쯤 닫혔다. 남은 건 이곳에 남은 잔챙이들을 처리하고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






"다 끝났어?"


센터의 문을 열고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미가 손을 흔들었다. 차에 있으라고 했는데 왜 나왔어. 우시지마가 타박하듯 묻자 세미는 뾰로통해져선 입술을 쭉 내민다. 계속 실내에만 있어서 갑갑했단 말이야. 시무룩한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그저 웃어버렸다.


그럴 만도 했다. 세미는 그날 우시지마가 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날듯이 달려와 놓고선, 그의 상태가 멀쩡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다행이다, 한 마디만 남기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다들 난리였다. 세미의 상태가 안 좋은 건 알았지만 설마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상태를 알고 있던 카게야마조차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 오이카와 역시 당황해서는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이와이즈미가 황급히 구조차를 부르고서야 혼란은 겨우 수습되었다. 그길로 세미가 입원을 한 건 당연한 처사였다.



쓰러진 이후 세미는 약 3일간을 깨어나지 못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었다. 원인은 당연하게도, 피로 누적이었다. 물론 푹 쉬면 깰 수 있을 거라 했지만,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상부에 진정서가 쏟아져 들어갔다고 했다. 평소에 불만이 많았던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의기투합한 것은 물론, 후타쿠치와 모니와도 가세했다. 사람을 자원으로만 보고 현장에 대해 탁상행정으로만 일관하는 걸 더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이만큼이나 괴롭혔으면 충분한 거 아니냐며,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제 더는 센터를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알아서 잘하라는 협박조는 덤이었다.


결국, 상부에서는 백기를 들었다. 주축이 된 이들이 결코 그들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인력이라는 것이 한몫했을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현장 지원 업무의 무리하지 않은 로테이션은 물론, 동원된 이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기술보안팀에는 가이드를 한 명 더 붙여주겠다는 내용까지 붙었다. 과연 실제로 지켜질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답을 얻어냈다는 것만으로도 당장은 충분했다.


공문이 내려오자마자 오이카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듯 이와이즈미의 손을 잡고 당장 센터를 나섰다. 듣자 하니 여행을 갈거라고 했다. 부르면 달려오는 개처럼 일하느라 여태 어디 한 번 제대로 길게 놀러 가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기에, 팀에 주어진 특별 휴가는 물론 그동안 쓰지 못한 휴가까지 전부 써서 죽도록 놀고 올 거라고 했다. 그 말에 혹한 우시지마가 마침 깨어난 세미에게 우리도 여행이라도 갈까 제안했지만 세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것보단 그냥, 데이트 하고 싶어."
"데이트?"
"응. 그냥 평범하게."


우리 지금까지 가이딩말고는 만나서 특별히 한 게 없었잖아.




퇴원을 했다고는 해도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어서, 휴가를 받고서도 당분간은 계속 외출도 하지 못한 채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것도 집에 있는 내내 세미는 마치 고양이처럼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만 자며 보냈다. 우시지마 역시 그 옆에 머물렀다. 이토록 게으른 날들은 처음이라 낯설고, 우습게도 조금은 불편하기까지 했지만 세미가 옆에 있으니 상관없다고,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에 잔뜩 풀어진 얼굴의 세미를 지켜보던 우시지마가 세미의 앞에 선다.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 오는 세미의 머리칼에 고개를 묻고 입을 맞추자, 간지럽다는 듯 어깨에 대고 나른하게 뺨을 부벼온다.


"어디부터 갈까."
"음, 글쎄... 아, 가구점?"
"가구점? 뭐 살 거라도 있나."
"응."


네 집, 너무 까매서 싫더라고. 전부 바꿔버릴거야.
장난스럽게 웃는 세미에 우시지마의 몸이 바짝 굳는다. 왜, 싫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불안해진 세미가 고개를 들고 갸웃거리자 우시지마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저기, 와카토시, 왜 그래, 응? 


재촉하는 말에 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입술이었다. 어어어... 갑작스레 겹쳐 든 입술에 당황하던 세미는 이내 눈을 감으며 좀 더 바짝 우시지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거 안 해도 돼."
"응?"
"같이 살자."
"...어?"
"나랑 평생, 같이 살아."


눈을 똑바로 보며 건네는 우시지마의 망설임 없는 고백에 세미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응.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세미가 먼저 우시지마에게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둘이 다음에 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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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무슨.. 해를 넘겼군요.

그래도 우시세미데이에 완결을 올릴 수 있어서 넘나 감개무량합니다.. 내가.. 내가 완결이라니....!!!!!


솔직히 태어나서 처음 써보는 장르(..SF?)라서 허술한 게 참 많았을 텐데..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 너무 감사하고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ㅠㅠ

우시세미 많이 사랑해주세요..


덧) 이 글을 쓰게 된 건 6편에 나온 대사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오이카와같은 가이드가, 아니라서 그런 건가?"

↑ 이 대사 하나를 쓰고 싶어서 제주도 숙소에 누워서 플롯을 짜던 날이 잊혀지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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