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진영아, 일어나서 좀 들어봐!”

“......”

“정말 중요한 소식이래두?”


또 시작이다. 옆에서 울 어머니가 주무시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늦은 시간에 창호지 너머를 기웃거리며 나를 부르는 향숙이의 목소리를 듣고도 모른 체 했다. 이런 밤중에 함부로 남의 방에 찾아와 민폐를 끼치다니. 앞뒤 안 가릴 정도로 순수하고 날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는 애란 걸 알기에 밉진 않았다. 다만 오밤중에 잠에서 깨어 허풍과 과장이 섞인 수다를 들어주는 건 아무리 참을성 있는 나라도 견디기 힘든 일이다.


“너 안 듣고 자면 후회한다!”

“하...”

“민현 도련님에 대한 얘기라구.”


눈이 번쩍 떠졌다. 아니 뭐,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야 날 밝고 들어도 되는 거지. 그런데도 나는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베개에 문댔던 머리칼이 벌써부터 잔뜩 새집을 짓고 있었다. 하루 종일 가사에 시달려 곤히 잠든 어머니께서는 미동이 없었다. 창호지에 비친 내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까르르 웃은 향숙이가 어서 나오라며 손뼉을 쳤다.


“너는 잠도 없냐.”

“아무리 졸려도 이 말은 전해야 쓰겠거든!”


눈을 비비며 조용히 문을 열고나선 내 팔뚝을 잡아채더니 막 당긴다. 신도 챙기지 못한 채 끌려갔다. 맨발로 거친 흙바닥을 밟으니 열불이 나서 아 쫌! 하고 작게 항의했다. 짐짓 진지한 표정이 된 향숙이는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대며 쉿, 하고 지껄였다.


“대체 무슨 얘긴데 그래. 아침에 밥 지으면서 해줘도 될 걸.”

“나 드디어 도련님이 혼인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아냈다.”

“뭐?”

“직접 말씀하시는 걸 들었으니 분명한 거야. 절대 거짓말이 아니란다.”


시골아이다운 투박한 억양으로 신나게 말하곤 내 귓가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댄다. 뜬금없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했지만 긴장한 목울대가 저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고 하셨는데?”

“그게 말이야...”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콩닥콩닥 가슴 속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말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세상에 도련님이... 고자란다!”

“에?”

“고자. 고자란 말이야. 그래서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주인어른께 호통을 치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듣고 오는 길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향숙이는 여전히 진지했다. 내 팔을 놓아주지 않으며 너 이거 정말 비밀이다. 우리끼리의 비밀!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나는 죽은 목숨이야! 하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비밀이면 애초에 말을 전하지 말던가. 얼빠진 나를 보고 만족스러웠는지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은 향숙이가 등을 퍽퍽 때렸다. 손이 너무 매워 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쑥하신 도련님께 그런 비밀이 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그럴 리 없는데...”


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저 혼자만의 상상을 펼치다가 아차, 얼른 안자면 내일 밥 짓는 시간을 놓치겠다! 하며, 왔던 것과 똑같이 제멋대로 가버렸다.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섰다.

놀랐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도련님이 고자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저 주인어른과 싸우시는 소리를 잘못들은 향숙이가 허풍을 섞은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도련님이 나를 품에 안을 때마다 등허리에 닿아오는 단단한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야?









愛之重之









피도 눈물도 없는 적국의 습격을 받아 잘나가던 배씨 일가가 몰살당하고 피로 범벅이 되어 머리칼이 다 밀린 막내아들만 등에 업은 채 멀리 도망 오신 어머니. 오밤중에 찾아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모자를 품어 식구로 들여 준 황씨 어르신은 평생을 헌신해도 모자랄 만큼의 은인이다.

고을 전체를 대표하는 황씨 집안에 뿌리 모를 외지 사람들이 들었다고 하니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천 한 조각 쥔 것이 없는 우리를 믿어주셨다. 덕분에 고을 사람들도 우리를 받아들였다. 떵떵거리던 양반 집안에서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처한 우리는 어르신 댁의 소유가 되었다. 한 마디로, 황씨 집안을 모시는 노비가 되었다는 얘기다. 아버지와 누이를 잃은 슬픔을 되새길 틈도 없었다.

몸져누운 우리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의원을 불러다 돌봐준 어르신 댁 가족들을 앞에 둔 어머니는 수십 번 머리를 조아렸다. 꽤 충격을 받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멍하니 그런 꼴을 지켜봤다. 억지로 함께 무릎을 꿇자 인자한 어르신은 우리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일을 시작하려면 깨끗한 몰골을 해야 한다며 본인도 여전히 멍들고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어머니가 나를 먼저 떠밀었다. 이곳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산골 너머이고 조금만 걸어 나가도 숲과 계곡이 즐비한 아름다운 산의 풍경이 보인다.

혼자 씻으러 가라니. 씩씩하게 나서긴 했지만 아직 낯선 환경이 두려웠다. 겁이 난 나는 최대한 가까이에 보이는 계곡으로 향했다.

낡아빠진 옷은 버리고 새로 받아온 옷을 집어 들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지은 것이었다. 몸을 다 담그진 않으며 얼굴과 상체에만 물을 뿌렸다. 꾀죄죄했던 꼴을 벗어나자 맑은 계곡 물 위에 겁에 질린 나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짧게 잘린 머리칼과 얼굴에서 찬 물방울이 떨어졌다. 얼른 돌아가야지. 숲에는 흐르는 물소리와 가끔씩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만이 울렸다.


그 때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군사들이 쫓아왔을 리는 없는데. 자꾸만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로 인한 충격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은 키가 큰 남자였다.


새하얀 얼굴에 비단 옷을 입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나의 도련님.


“난 정말 어여쁜 사슴이 마을 가까이에 내려온 줄 알았다니까?”

“네에...”

“당장 잡아다 집안에서 키우려고 마음먹었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슴을 닮은 남자애였지.”


도련님은 항상 똑같이 그 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꼭 제 무릎에 나를 앉힌 채로.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이는 내 입에 간식으로 차려온 꿀떡을 밀어 넣고 뺨을 살살 꼬집는다. 이제는 도련님의 낯간지러운 손길이 꽤 익숙해져 담담한척 할 수 있게 되었다. 떡을 넣어주는 손을 피하자 이번에는 새콤한 산딸기 열매를 집어 드셨다.


“도련님 드시라고 가져 온 건데요.”

“나는 진영이가 먹는 걸 봐야 배불러.”


평소엔 점잖은 투로 하는 말씀이 꼭 나와 둘이 있을 때만 형제를 대하듯 편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싫진 않았지만 왜 굳이 이러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도 간식 상만 두고 후다닥 나가려다가 손목이 잡힌 것이 화근이었다. 가끔 글에 몰두하면 잡지 않으시는 날도 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작정하고 기다리신 모양이다.


“조그만 입으로 우물우물 먹는 게 어쩜 이렇게 귀엽지?”

“맨날 귀엽다고만 하고. 절 놀리는 게 재밌으신가요.”


괜히 뾰루퉁하게 시선을 피했다. 웃음이 터진 도련님은 나를 끌어안으며 머리칼을 만지셨다. 전에 적군에게 억지로 밀려 엉망이 되었던 짧은 머리칼을, 도련님은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상투하나 틀 수 없는 더벅머리인데도 개의치 않고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지분거리며 뒷덜미까지 손을 내려 목과 등을 어루만져 주시곤 한다. 따끈한 감촉에 흠칫 놀라면 더 재밌어 하시는 것 같다.


“놀리는 게 아니야. 정말 좋아서 그러는 거지.”


나와 다섯 해 차이가 나면서도 훌쩍 어른인 도련님은 유독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것이 바로 힘을 키워 궂은일을 하는 머슴 무리에 끼어야 했을 내가 이렇게 한가로이 도련님의 간식 시중을 들고 있는 까닭이다.


형제들은 죄다 과거에 합격하고 혼인을 해 수도로 상경한 뒤 막내인 도련님만 고향에 남아있다. 도련님은 무척 머리가 좋아 글과 시를 쓰는 것에 능하다. 다정한 목소리로 글 읽는 소리를 훔쳐 들을 때면 어쩐지 가슴에 쿵덕거리는 장단이 울린다. 거기다 길쭉한 몸과 햇살같이 빛나는 얼굴까지.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은 완벽한 어른이시다.

고을의 모든 처녀들은 도련님을 짝사랑했다. 다른 고을에서 정혼을 요구해오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련님은 과거시험이나 혼사에 관심이 없으셨다. 그것은 온 집안사람을 넘어 우리 고을 전체의 의문이었다. 황씨 어르신 댁 막내 아드님은 대체 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야?


도련님은 그게 다 나 때문이라고 했다. 참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이다.


어린 내가 서툴게 일을 배우는 것을 멀찍이서 지켜본 도련님은 몸종인 향숙이에게 주어진 일을 진영이에게 주라고 명했다. 아침저녁으로 세숫물을 가져다 드리고 간식과 식사를 챙기는 소일거리였다. 덕분에 귀찮은 일을 덜어낸 향숙이는 틈만 나면 구석에 엎어져 낮잠을 잤다. 드르렁 코까지 고는 꼴이 참 편해 보였다.

도련님의 방으로 들어가면 한참 동안은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당최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련님은 나를 무릎에 앉히는 것을 좋아하신다. 어화둥둥 어린 아기를 달래듯이 어루만지고 최근에는 뺨에 입을 맞추기까지 하신다. 그럴 때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해가 꽤 넘어 나도 많이 자랐는데. 얼굴이 빨개져서 버둥대는 건 오래전에 그만뒀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언제 놓아주실 것인지를 가늠하는 게 다다.

도련님에게는 어린 동생이나 강아지 한 마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토록 껴안아 소중히 하는 이가 왜 하필 나일까? 어머니는 내가 그런 편애를 받고 있다는 걸 알고 무언가 트집이 잡힌 게 아닌가 걱정하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도련님의 애정을 내심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 아들이 어르신 댁에서 예쁨을 받으니 한시름 놓아 속 편히 잘 수 있겠다고 하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왔던 어머니의 손과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새겨졌다.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도련님이 나를 애지중지 한 다는 것은 이미 온 집안 식구들이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도련님. 저 이제 가봐야 해요.”

“어딜.”

“마당 청소도 하고 주방 일손도 돕고... 할 일이 많아요.”

“조금만 더 있다가.”


시무룩해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도련님의 품에 폭 안겨버렸다. 이제껏 능글맞게 손장난을 치던 도련님의 몸이 갑자기 굳었다. 이렇게 먼저 안기리라고는 예상을 못하신 모양이다. 도련님의 품에서는 늘 좋은 향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얼굴을 부비고 싶어졌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진영아.”

“네 도련님.”

“그냥 내 방에서 같이 살자.”


이것도 매일 지겹도록 하는 말장난이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도련님의 어깨를 밀어냈다. 간이 퉁퉁 부어터진 짓이다. 향숙이나 어머니가 본다면 놀라서 자빠질지도 모른다.


“쉬셔야죠.”

“그럼 한 번만 더 안고 보내줄게.”


내내 안고 계셨으면서. 기어코 손을 뻗는 도련님의 품을 향해 몸을 숙였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두르고 얇은 천 아래에서 긴장한 나의 허리를 살살 문지른다. 숨을 참았다. 아직 모자라다는 듯한 얼굴을 한 도련님이 쪽쪽, 남사스러운 소리가 날 정도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두 팔을 내밀어 요란스럽게 몸을 떼어냈다.


“밥 먹기 전에 또 들려.”

“시간이 나지 않을 텐데...”

“안 그러면 나는 굶어 죽을지도 몰라.”


대답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순순히 놓아주셨다. 도련님의 방을 나서며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도련님의 손이 닿은 곳마다 불에 지진 듯 따끔거렸다.


그래. 향숙이는 정말 거짓말쟁이에 허풍쟁이다. 도련님이 고자일리가 없다. 방금 또 단단한 몽둥이 같은 것이 내 허리에 닿았다고. 하마터면 나도 바보 칠푼이처럼 향숙이에게 달려가 외칠 뻔 했다.


도련님은 고자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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