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정보 : Photo by Mika Baumeister / Unsplash (저작권 프리사이트)




골방이다. 둥글게 웅크리고 굳어가는 시간이 있다. 문틈으로 쏟아지는 불빛이 동공을 찌르면 지친 눈꺼풀은 내려앉는다. 자다 깨다 볼펜똥 같은 눈곱만 네 번을 떼자 창밖은 저녁이다. 해질녘도 끝물인데 끈덕진 잠결은 방구석을 떠나질 않는다. 수면 중에 뱉어댄 한숨의 냄새는 눅눅하게 고여 온몸을 감싼다. 퀴퀴한 온수에 잠길수록 순간은 무거워진다.

어두운 방에서 시야가 뿌옇게 번질 때면 책상이고 장식장이고 정든 윤곽마다 부유물이 희끗 달라붙는다. 속눈썹에 매달려 노는 마린스노우를 털어낸다. 기면이 갇힌 눈을 비빈다. 뻑뻑한 눈동자가 갈라지고 주륵 흘러내린다. 손목에 거멓게 묻은 야밤이 졸린 새벽을 끌어온다. 까만 꿈결에 수장당하고 바다눈들과 먼지 쌓인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불의 감각은 점차 옅어지고 네 번째 잠과 다섯 번째 잠을 가르는 경계에 눕는다.

                                                 툭 

                                                              툭 

                                                                           툭

다락방이었다. 석양이 차오르는 구석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알록달록 길쭉한 알약을 굴리며 노는 아이가 보였다. 캡슐마다 다음 시간대로 건너갈 무렵의 하늘이 흘렀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저녁에서 밤으로. 약을 하나씩 넘기면 쌉싸름한 꿈밖으로 밀려 나갔다. 약발이 몰아치기 전에 서둘러 수다를 떨었다. 어스름 드는 다락만이 유일하게 아이한테 허락된 공간이었다.

빨갛고 노란 캡슐약을 만드신 분도 늦은 오후를 좋아했을까요. 캡슐에 그어진 선은 저녁놀이랑 아프도록 닮았다니까요. 아마, 우리랑 비슷한 사람일지도 몰라. 주황빛을 입에다 담아 마른침이랑 꿀떡 삼키면 나도 밤이 될 수 있을까요. 꿈과 내일이 가득한 낮시간에 닿기 위해 나는 기꺼이 밤이 될래요. 에이, 낮이랑 밤은 떨어져 있는걸. 노을이 팔을 쭈욱 뻗으면 이렇게 만나잖아요. 낮하고 번갈아 가면서 하루하루를 색칠할 거예요. 낮이 떠난 자리를 내가 검게 채우고, 내가 떠난 자리를 낮이 파랗게 채우고. 하늘에서 돌고 도는 숨바꼭질을 하는 거죠.

 

아이를 새기는 시선이 흔들린다. 숨어 있는 눈들이 움직인다.

 

아이의 언어는 귓가에 닿자마자 멀어져 갔다. 힘주어 눈뜨면 아이와 함께 저물고 까맣게 잊힐 이야기 파편. 희미하고 연약해서 줄곧 가느다란 초침. 부서지고 흩어지다 결국 지나가는 분침. 그럼에도 사무치게 따스한 시침. 그 모든 일분일초를 그저 붙잡다가 차츰차츰 식어갈 온기에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이는 다시금 홀로 기나긴 밤이 되어야 하니까. 나는 다시금 모두가 있는 낮으로 떠나야 하니까.

석양은 짧았다. 우리를 둘러싼 향기는 한밤의 물기처럼 쿰쿰해지고. 구석에서 피어오른 마린스노우는 다락방을 어지럽히고.

 

살결을 지나는 감촉이 깨어난다. 포근한 이불이 목에 닿는다.

 

이제 구석을 안아줄 차례였다. 그림자 묻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기댔다. 졸음에 찌든 냄새가 훅하고 끼쳤다. 아이가 자정을 가둔 쇠구슬을 손에 쥐어주었다. 제 몫의 밤을 나눠주며 아이는 울었다. 아무리 낮이 흐려도 맑아질 때까지 기다려줘요. 밤을 견디는 내내 낮이 오길 바랐던 마음을 간직해 줘요. 미안해.

우리는 마른 바닥에 축축한 밤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사방에서 자꾸만 모여드는 눈들이, 다락에서 둘만의 시간을 떨구는 눈들을 덮었다. 넌 손끝에 맺힌 우울이야. 구슬에 이름을 붙여주고 아픈 자정을 삼켰다. 안아주던 구석이 무너지고 바다눈에 휩싸여 떨어졌다. 아이는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툭

                                                              툭

                                               툭

골방이다. 휴대폰 시계가 깜빡깜빡 새벽을 알린다. 절반인가 충전한 폰으로 노래를 듣는다. 새벽에 녹아든 건지 도망친 건지 이어폰 고무캡은 멋대로 사라진다. 드러난 스피커가 귓구멍을 긁는다. 벌겋게 부어오른 자리에서 여린 존댓말이 들린다. 뽑아낸 이어폰에는 아이가 사랑하던 노랫말이 아직 묻어 있다. 여전한 마린스노우 사이로 키 작은 잔영을 본다.

시곗바늘은 평소처럼 도는데 뻐근한 머리만 느리게 돈다. 무거운 머리로는 책도 칫솔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 밤에서 새벽으로 번져가는 하늘을 담아둔 잉크병이 떨어진다. 두통이 뇌를 꿍꿍 걷어차면 다시 비틀대고. 다락방의 아이는 나를 부축하지 못한다. 갈 데 없는 의문투성이 섬어(譫語)를 허공에 늘어놓는다.

오늘의 잠은 어디 즈음에 머물까. 도주한 고무캡이 하나둘 모여 가사를 공유하면 어떤 노래가 나올까. 떨어져나간 일부와 일부가 모이면 새로운 하나가 태어날까. 깜빡 졸다가 모서리에 긁혀 떨어진 살점은 왜 줍지 못할까. 아파도 간직해야 하는 것들이 있기는 할까?

똑똑. 우울을 길들이는 방법이 도착한다. 목구멍 반쪽이 부어오른다. 달군 쇠구슬을 품고 열이 오른 목으로 꿈조각 하나 뱉어본다. 잊었던 목소리가 혀를 타고 올라온다. 눈꼬리에 흐르는 잠이 눈곱으로 굳어갈 시간마다, 눈가에서 털어낸 바다눈이 수면의 미궁을 누빌 시간마다, 그런 잠꼬대를 앓는 시간마다 목에는 구슬이 잠든다.

 

오늘도 비바람에 창문이 떨리는 골방을 안다. 낯익은 습기를 온몸에 코팅하고 창문을 열어젖힌다. 부유하던 마린스노우가 창밖으로 쓸려나간다. 빗방울이 미몽의 식은땀과 손목에 묻은 심야의 잉크를 씻어준다. 안구에 물기가 돌고 바스라졌던 동공이 뭉치면 꼭 갈증이 난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구석에 기댄다.

그 애, 지금쯤 밤이 되었을까.

-2019.12.12. ~ 2020.10.5.

어둠을 헤매는 자에게 글로써 작은 빛줄기라도 비추어 그들이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돕고 싶다. 세간의 병든 운석이 나를 상처 입히려 해도 나만은 이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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