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계속될 이야기


우중충했던 하늘이 며칠간 비를 내리며 가지고 있던 무채색을 다 빼냈다. 하늘이 맑은 색으로 가득했고 들이마시는 공기는 꼭 박하향 같이 시원하다. 하늘을 보며 거실에 누워있는 태형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 함께 누워 있는 석진을 본다.


잔다.


야 아무리 소꿉친구여도 그렇지, 남자친구 옆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고 있기 있냐. 면박조로 생각하고 있는 태형이지만 석진을 흘겨보는 표정엔 한가득 미소가 걸려있다. 태형은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 자는 석진의 품을 파고들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발코니 창을 열어둬 박하와 같은 가을바람이 온 집안에 가득했다. 서늘한 공기에 따끈한 석진의 체온만큼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태형은 석진의 가슴께에 얼굴을 기댔다. 뺨과 가슴이 닿은 자리에 따스한 체온이 피어올랐다.


“으음….” 


웅얼대며 몸을 태형 쪽으로 돌린 석진이 자연스럽게 제게 안겨있는 태형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닿은 면적이 늘어나며 체온이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둘 사이에 머물러있는 체온이 특히 그렇다. 석진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태형은 볼을 더 세게 눌렀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석진과 손을 잡고 맞이 하는 첫 계절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 에필로그 외전 - 마음이 닿는 자리  auteur BINE.





1. 손잡기(1)


“야.”

“어. 왜.”

“우리 꼭 이러고 가야 해?”


석진이 난감해하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이 꽉 잡혀있다. 새로운 계절엔 새로운 마음으로. 그렇지만 일상은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있다면 석진은 지금 태형에게 잡혀있는 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이…. 손 잡는 거 알겠는데 이건 너무…. 석진은 의외로 부끄럼을 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 손을 잡은 날에 석진은 등교하는 내내 거의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곁눈질로 석진을 확인하면서도 태형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저 빨개진 석진의 귀를 보고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일주일 내내 태형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석진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낸다.


‘손.’

‘내가 개야?’

‘빨리 손.’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더니 끙 소리를 내며 참던 석진이 마지못해 태형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린다. 이제 어쩐지 태형은 여유로워 보인다. 오늘 아침도 같은 패턴이었다. 석진은 도무지 태형의 손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잡고 걷다 보면 놓기 마련인데, 석진의 손이 빠져나갈까 몇 번을 다시 고쳐 잡고 학교 앞까지 가곤 했다.


“석진아.”

“왜에….”

“아직 학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다이….”


또 석진이 스멀스멀 손을 빼려고 했다. 아 낯간지러워 죽겠다고! 빼액 소리를 치려다가 심드렁한 태형의 표정을 보고 입을 합하고 다문다. 아침부터 또 혼자만 얼굴이 빨개져 있는 석진을 보고 태형이 멈추어 선다.


“?!!?!”


그리고 휙하고 잡은 석진의 손을 위로 들어 올린다. 갑작스럽게 위로 당겨지는 팔에 석진이 태형의 앞으로 끌려왔다. 눈은 휘둥그레져서. 태형은 큰 눈의 석진 앞에 잡은 석진의 손을 들이민다.


“찐아. 이거 보이나.”

“뭐어.”


태형은 진지한 얼굴이다. 석진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마음이 한 곳에 닿으니 어쩐지 위세가 뒤집힌 느낌이다. 태형은 다시 쥐고 있는 석진의 손을 들어 올려 시선과 위치를 같게 했다. 김석진은 잡힌 제 손을 뚫어져라 본다. 단지 느끼는 건 태형이 손을 꽉 잡아 이제 손이 덥다는 것.


“넌 매번 내가 손 달라고 하면 위에 올려놓더라.”

“손 달라며.”

“공주님 하고 싶어?”


태형의 말에 석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태형은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친다. 눈치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맹탕일 거라곤. 근데 또 지기 싫어서 땍땍거리는 모습은 귀엽다. 다시 태형이 잡은 석진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석진도 다시 잡힌 제 손을 본다. 보다 보니…. 어쩐지 잡은 모양새가 요상하다. 손을 잡은 게 아닌 정확히 잡힌 모양새였다. 태형이 석진의 주먹을 쥐고 있었다.


태형이 손을 달라며 손바닥을 내보이면 석진은 말 그대로 그 위에 손을 올려놨다. 그대로 손을 잡는다. 정확히는 김태형이 잡았다. 몇 발자국 못 가고 석진은 틈만 나면 손을 빼내려고 꿈틀댔다. 그걸 고쳐잡은 건 김태형. 잡은 손에 땀이 차 미끄러져도 다시 고쳐 잡는 건 김태형. 순순히 협조를 안 하는 건 김석진. 학교에 도착할 무렵이면 석진은 주먹을 쥐고 있다. 태형은 그 주먹을 쥐고 온다. 뭐야 이게, 주먹다짐해?


“넌 왜 내 손 안 잡아?”

“자, 잡았어!”


태형의 말에 당황한 석진이 재빨리 엄지를 움직여 제 주먹을 쥐고 있는 태형의 엄지를 꾹 눌렀다. 지금 붙인 거 모를 줄 아냐. 태형이 코로 숨을 크게 내뱉었다. 짝사랑 중일 때는 행동이 다 여우 같더니, 곰이다. 곰.


“넌 내가 손 안 컸으면 어떡할 뻔했냐.”

“뭘!”

“주먹 쥐는 거 어떤 사람이 다 감싸 잡아 줘.”

“아, 아, 안 그래도 되거든!”


필요 이상으로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태형이 점잖은 표정으로 입술을 모았다. 쉿, 조용히 좀 말해. 그 제스처에 석진이 턱을 아래로 내렸다. 올려다보는 것 같은 난감한 표정이 귀여웠다. 왜 혼자 열 내고 있어. 일주일도 더 지났는데. 태형이 석진의 손목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제 다른 쪽 손바닥을 쫙 펴 보인다.


“잘 봐.”


그 한마디와 함께 태형이 펼친 제 손바닥 위에 석진의 손바닥을 제대로 맞댔다. 확연히 보이는 손 크기의 차이에 두사람의 표정 차이도 극명하다. 제 손에 석진의 손을 잘 가져다 붙인 태형이 그대로 손가락을 굽혔다.


“앞으로 손 달라고 하면 이렇게 해줘.”


석진의 눈앞에서 단단히 깍지를 낀다. 손바닥이 완벽히 맞닿았다. 한 손은 깍지가 끼인 채로 석진이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태형은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그리고 석진의 손가락까지 제 손에 모두 잘 붙도록 손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지듯 눌렀다.


“같이 잡아 줘.”


다시 학교로 걸음을 옮기기 전에 태형이 묻는다.


“그럴 거지?”


석진은 말 없이 깍지낀 태형의 손을 꼬옥 쥔다. 단순 등굣길인데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뛴다. 익숙해져야 할 텐데.


“석진아.”

“왜… 또 뭐….”

“우리 사귀는 거야.”


다시 또 석진이 얼굴을 푹 숙였다. 목덜미까지 빨개져 있다.




2. 사귀는 사이


사귀는 사이가 된 뒤로는 하루하루가 설렜다. 특히 석진은 심장이 과하게 뛰고 있음을 자주 느껴 제 건강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다. 왜 이래…. 심장아 나대지 마. 여전히 쉬는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초침속도보다 심장이 더 뛰는 것 같았다. 태형이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아… 나 진짜 돌았나.


종치기 오분 전. 선생님 몰래 손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십 분마다 보는데 왜 매번 기다려지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친…구 였을 때도 매 쉬는 시간마다 봤나. 골똘히 생각하니 아니,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석진이 책상에 턱을 대고 눈을 깜박였다.


사귀는 사이…라서 그런가.


갑자기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은 기분에 석진이 몸을 일으켰다. 괜히 헛기침을 한다. 오십 분마다 보는 사이. 혼자 빨개진 얼굴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것 같다.


어쩌지. 계속 봐도 좋았다.




3. 평소와 같이


“찐아.”

“웅?”


석진이 뒤돌자 태형이 자연스럽게 석진의 입에 물려있던 쭈쭈바를 빼내 물었다. 아래를 꾹 눌러 쪽쪽 야무지게도 빨아 먹는다. 석진은 그걸 얌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먹을 만큼 얻어먹은 태형이 다시 쭈쭈바를 석진의 입에 물렸다. 다시 아이스크림 튜브를 질겅거리면서 석진은 핸드폰 보기에 열중했다.




4. 오해(1)


매점에 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던 석진은 불현 걸음을 멈췄다. 지나가고 있던 태웅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두사람은 비가 세차게 내린 당일에 헤어졌다. 밤늦게 걸려온 석진의 전화에 태웅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전화를 받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자신을 부르는 석진의 목소리를 듣던 태웅의 첫마디는 ‘괜찮아?’ 였다. 석진은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만 태웅은 정중하게 석진을 만류했다. 머뭇거리던 석진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태웅은 말이 없었다. 딱 한 번. 자신의 가망성에 관해 물어보곤 태웅은 말했다.


‘그냥 네 얼굴이나 한 번 더 볼 걸 그랬네.’

 

그리고 온화하게 석진의 사과를 받았다.


좋은 관계로 남은 건 아니었지만 딱히 나쁜 관계도 아니었는지 태웅이 먼저 목례를 했다. 석진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웅의 뒷모습을 보면서 석진은 잠시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좋아해.’


빗속에서 태형의 등을 끌어안고 고백을 했을 때, 태형은 정말 제가 비구름이라도 된 것마냥 울었다. 서러워하는 소리에 석진이 태형을 더욱 꽉 껴안았다. 정말로 미안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용기 내서 조금만 더 빨리 말할 걸. 친구 사이가 틀어질까 봐 억지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간이 미안했다.


울다 자신의 허리를 두른 팔을 더듬어 잡은 태형이 석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맞닿아 뜨거웠던 자리가 다른 온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팔이 잡힌 채로 더 가까워지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미 실컷 운 태형의 눈가와 코가 붉은색을 띠었다. 석진은 그게 안쓰러우면서도 내심 사랑스러워 울상을 지으며 웃었다.


‘나도, 흑, 나도 너 좋아해….’

‘알아.’

‘흐엉, 흑, 그냥 말할게. 나 너 많이 좋아해어어어엉….’


석진이 태형을 달래기 시작했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나도 널 많이 좋아해, 태형아. 직접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래봤자 빗물에 소용 없었지만 손으로 꼼꼼하게 눈물을 밀어낸다. 어느 정도 진정된 태형이 느릿느릿 말했다. 참 멋없는 프러포즈였다.


‘우리 그냥 사귀면 안돼?’


눈은 붓고, 코는 빨개져서 나에게 양 볼을 잡혀놓고서는….


지금 생각하면 잔뜩 귀여웠던 그때 태형의 얼굴을 떠올린 석진이 작게 미소 지었다.


아까부터 석진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태형이 그 미소를 보고 인상을 쓰며 태웅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5. 언제부터?


“근데 넌 날 언제부터 좋아했어?”

-음… 나는 꽤 오래됐는데. 좋아한 건 유치원 때부터인 것 같고, 더 좋아진 건 초딩 때, 엄청 좋구나 하고 느낀 건 중학교 2학년 때, 너 미국 갔을 때… 그리고….

“…뭐가 더 있냐.”

-진짜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좋아진 건 작년부터인 것 같은데. 너 지금 귀 빨개졌지.

“…….”

-만날래?




6. 데이트 (1)


데이트라는 명목을 내세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주중엔 스케줄들이 워낙 빡빡하신 몸들이라 남들처럼 외출은 무조건 주말이다. 태형은 주말마다 석진을 불러냈다. 그리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물론 같이 어딘가를 다녔지만 장소가 좀 달랐다.


석진은 자리에 앉아서도 눈치를 봤다. 도저히 남학생 둘이 들어와서 밥 먹고 갈만한 분위기가 아닌데…. 밥을 먹고 나서도 고민할 거 없이 장소 이동이 일사천리다. 석진은 반대 없이 응한다. 그도 그런 게 대부분 석진의 취향과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실 태형과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상관은 없었고.


“딸기 스무디 마시까. 저기 괜찮은 데 있어.”

“그래. 내가 사줌.”


태형이 말하자 석진이 덥석 물었다. 태형과 보내는 주말이 지극히도 만족스럽다는 말이다. 


태형이 데려간 카페는 공원 근처였는데, 마치 숲속 별장에 있는 듯한 인테리어의 카페였다.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주문한 메뉴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쩐지 석진도 발코니에 난 자리에 앉고 싶어졌다.


“야 이거 쓸데없이 예쁜 거 아니야?”

“그러게 먹기 아깝다.”


같이 시킨 와플이 쓸데없이 예쁘다면서 눈이 반짝거리는 석진을 보고 태형이 웃음을 참았다. 너 이런 거 좋아하는 구나. 와플을 잘라 겨우 한 조각 먹고도 볼이 크게 씰룩인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생딸기 장식이 올라간 스무디를 쪽 빨아대는 석진을 보면서 태형은 감회가 새롭다.


“태형아,”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은 석진이 생글생글한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데 데려와 줘서 고마워.”


태형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말아 물고 그저 끄덕거릴 뿐이었다. 뺨에 딸기물이 들었니. 귀엽게 올라간 입꼬리의 석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았다.


석진이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태형이 고개를 푹 숙였다. 포크로 와플의 크림을 의미 없이 휘저으면서 잔뜩 올라간 광대를 내리려고 애썼다.




7. TMI


사실 태형은 세계 사진 보도전에 다녀온 날 서진과 헤어졌다. 여러 종류의 짝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지할 수 없는 마음에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태형은 종종 서진에게 미안해져 코에 주름을 만든다.

 



8. 너 포인트가 이상해


- 석진아 넌 내가 왜 좋아졌어?

“왜 좋아졌냐니. 내가 언젠 널 싫어했냐.”

-뭔소리야, 봄부터 나 피해놓고….

“…아니 그건…사실… 뭐, 그래! 네가 나 좋아한다고 말했었잖아.”

-언제.

“언제? 언제에? 네 생일에, 나 아팠던 날. 너 나 낚으려고 밑장 빼지 마라. 분명 내 손 잡고 말해놓곤!”

-......내 생일에? 헐 그걸 들었어?

“어. 나 다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좀… 생각해보게 됐지. 나도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널….”

-뭐? 그럼 내가 멋있어서 반한 게 아니었어?!

“…….”




9. 우리 사이


만남은 자연스레 이뤄졌다. 매일 봐도 재미있었다. 이건 연인으로 발전하기 이전부터 그랬다. 서로가 제일 재미있고 편했다. 석진을 만나면서 태형은 뭔가 하나를 깨달았다. 데이트에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 매번 새로운 곳에 데려가야 한다는 부담이 줄어듦과 동시에 신기했다. 내 공간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익숙한 공간들에 석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또 우리 구석구석에 서로가 있는 것 같은 그 점이 미치도록 좋았다.


등교할 때도, 학교에서도, 하교할 때도 계속 같이 있었으면서도 밤에 또 만났다. 태형의 집 6층. 석진의 집 8층. 그 사이의 비상계단에서.


고등학생들은 한 계단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남학생 둘에겐 역시 넓지 않은 공간이라 어깨가 맞닿았다. 이건 달랐다. 매번 서서 대화만 하다 위, 아래로 흩어졌었는데. 


“밀지 마.”


태형이 붙은 어깨로 작게 석진을 밀었다. 어? 옆으로 밀려 찬 벽에 어깨를 찧은 석진이 다시 태형을 밀었다. 작게 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러다 서로 밀리지 않으려고 끙 소리까지 내가며 버틴다. 태형이 먼저 힘을 풀며 물러나자 석진의 몸이 태형에게 쏟아졌다.


“어?”


제 쪽으로 기운 석진을 태형이 놓칠 리가 없었다. 태형은 그대로 석진을 내리눌렀다. 윽! 버티려는 시도도 못해본 채, 석진의 가슴팍이 세운 태형의 무릎에 닿았다.


“까불지 마라.”

“아 비켜!”

“찐아.”

“우씨 안 비켜?”


석진이 태형의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태형은 비스듬히 엎드린 석진의 위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그 말에 아래서 용쓰던 석진의 움직임이 멈춘다. 그래 뭐…. 그렇게 불편한 자세도 아닌 것 같고…. 금세 온순해진 석진이 이제 태형의 허벅지에 붙어 누웠다. 한동안 서로 말이 없다. 어색해질까 봐 서로 무어라 말을 던지는데 죄다 단답이 오갔다. 태형의 허벅지 위에서 석진은 난데없이 가슴이 뛰었다. 아, 이거 다리로 느껴지면 어떡하지.


움직임이 없자 센서 등이 꺼졌다. 삽시간에 어둠이 들이찬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은은한 어둠이 되레 오갈 데 없는 시선을 감춰주었다. 허공을 응시하다 태형이 넌지시 석진에게 묻는다.


“나 뭐 물어봐도 돼?”

“뭔데.”


태형의 다리에 뺨을 기댄 석진 역시 곱게 허공을 응시한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마음이 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왜 나한테 미안하다고 그랬어?”

“언제?”


석진이 살짝 고개를 들어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잘 보이지 않아 다시 태형의 다리에 얼굴을 기댄다.


“비 온 날. 내가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미안하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대꾸가 없자 석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두운 공간이 조곤조곤하게 말 할 용기에 도움을 주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보니 알겠더라고.


“너한테 뛰어가면서 내내 네 생각했어.”

“뛰어왔어? 나한테?”

“어…. 너 안 보여서. 튼간 그때 그랬어. 부정했지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으니 뭐… 이제 네가 다른 사람한테 아예 가버린다 생각하니까 진짜 죽겠는 거야. 울 뻔했지. 울진 않았다. 오해하지 마라.”

“울었구만. 그래서?”


석진이 말을 늘리며 꼼지락 거렸다.


“어… 그래서… 미안했지…. 너도 나같이 느꼈을 테니까. 내가 용기 내서 조금만 더 빨리 좋아한다고 말했더라면… 우는 네 곁에 있을 사람이 나였을 텐데. 널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내가 되지 못해서 미안했어. 아니 널 울리지도 않았겠지….”


석진이 말을 마치자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석진은 아차 싶었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고개를 들려는 찰나에 태형이 석진의 위에 엎어지며 우는소리를 했다.


“아 나 그때 진짜 거절 당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아….”

석진은 어렵게 팔을 접어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센서 등이 켜졌다.




10. 등교


“찐아.”

“왜.”

“또 손에 힘 풀리네.”




11. 거짓말 좀 해봐


대부분의 데이트는 일상의 평범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냥 둘이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데이트임을 석진도 알았다. 태형처럼 그걸 또 신기해했다. 그렇다고 항상 집 근처만 돌아다니는 건 아니었다. 태형은 종종 석진과 새로운 장소에 갔다.


“와 진짜 맛있었어. 분위기도 좋고.”

“완전 괜찮지.”


석진이 만족스러워하자 그제야 태형이 가게에서 나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생 용돈이라 비싼 곳은 자주 못 가도…. 혼자 생각에 빠진다. 오랫동안 연애하면 돈 벌면서 더 좋은데 데려갈 수 있겠지. 왠지 너랑은 헤어질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너 이런 곳 되게 잘 안다.”

“…….” 

“혹시 전 여친이랑 온 곳은 아니겠지.”

“…….”

“……야.”


석진이 멈춰 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태형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설마 거기도?”

“…….”

“야.”




12. 첫 다툼


“거짓말이라도 해라. 거짓말이라도!”

“아… 석진씨 쿨하지 못하시네요.”

“쿨? 쿠울? 쿨몽둥이로 맞아볼래?”

“지난 일로 뭐라고 하지 맙시다.”

“씨….”

“혹시 질투해?”

“…….”

“아 귀엽네. 나도 너 윤태웅이랑 간 거… 야! 어디가!”




13. 화해


별거 아닌 걸로 다퉜다. 아니 정확히는 한 쪽이 토라졌다. 연애가 이런 거지 뭐. 태형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되레 여유 있게 석진을 달래고 기다렸다. 어쩐지 자신 있었다. 그간의 시간으로 든든하게 쌓인 애정에 기반한 자신감이었다. 게다가 삐진 석진마저도 태형에겐 귀여워 보일 정도로 연애가 너무 달았다. 진짜 연애가 이런 건가 봐.


석진은 꼬박 하루를 토라졌다. 태형은 옆에서 계속 석진을 달랬다. 뭐, 절절맨다기보다 거진 꼬시는 투였지만.


석진아. 미안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진짜 미안해. 전부 다 서진이랑 간 건… 아, 알았어. 알았어, 전 여친. 전 여친이랑 간 곳은 아니고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찾아본 곳이 더 많은데 하필 거기가 걔랑 갔던 곳이었어. 아, 석진아. 아이이이이이 석진아아.


사실 혼자 풀리기는 빨리 풀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삐질 일도 아닌데 혼자 괜히 감정이 격해졌음을 자각한 것이었다. 이미 화낸 걸로 상황이 흘러 가버려 풀 타이밍만을 보고 있었다. 아 사실 혼자 삐진 게 창피하잖아….


결국 석진은 태형 앞에서 심기 불편한 표정을 풀었다. 태형의 애교에 이어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겠다는 말에 냅다 화해했다.




“준비됐지?”

“마 사나이 노빠꾸다. 드루와.”


석진의 집에서 태형이 제 가슴을 팍팍 치며 거드름을 피웠다. 집이 빈 토요일 점심 경이었다. 계절 탓에 둘 다 긴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석진이 벙벙한 크루넥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였다. 태형은 석진의 요구를 거리낌 없이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지금 걱정이 한 바가지다.


‘너도 앞머리 자르자.’

‘뭐, 뭐?’


김석진이 앞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났던 때가 떠올라서 태형이 침을 삼켰다.


사실 석진은 말만 하고 놀리다 넘길 생각이었는데, 입을 앙다물고 결의에 찬 표정의 남자친구를 보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졌다. 아 쟤도 한 귀여움 할 것 같은데.


“야 후드 때문에 수건이 안 묶여. 후드 벗어봐.”


석진의 요청에 태형이 입고 있던 후드를 훌렁 벗었다. 얇은 면티 하나 나오니 으슬으슬 춥다. 수건까지 목에 묶었고, 부엌 가위도 가져왔으니 이제 자르면 된다. 되는데….


“언제 자르는데.”

“기다려… 봐.”

“목 아파.”


최초의 계획은 욕실에서 자르는 것이었다. 문제는 둘 다 서 있다 보니 높이가 맞질 않아 가위질이 쉽질 않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태형의 앞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어 앞으로 당긴 석진이 계속해서 앞머리만 판판하게 당겨왔다. 안 그래도 댕강 잘릴까 무서워 죽겠는데 앞에서 망설이니 더 무섭다. 석진아, 망설이지 마라…. 고심한 게 더 무섭다.


“안 되겠다. 거실에서 앉아서 하자.”


그런다고 잘 잘릴까…. 석진이 먼저 욕실을 나갔다. 태형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다. 턱받이를 한 것처럼 수건을 목에 두르고 눈썹 아래로 내려와 있는 앞머리를 가진….


“여기 앉아.”

“바닥에?”


석진이 태형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어깨를 잡아 눌렀다. 일단 시키는 대로는 한다만…. 약속했던 기세와 달리 김태형은 괜히 불안하다.


“조금만 잘라야 한다, 진짜.”

“형님만 믿어.”


양반다리를 한 태형이 석진을 올려다봤다. 태형의 앞에서 석진이 걷어붙인 소매를 더 위로 올렸다. 태형이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정면에 석진의 뽀얗고 마른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반바지 입고 있는 건 많이 봤지만 이런 시야는 처음이다. 몰랐는데 무릎이 귀엽군.


“헉.”

“왜 놀라?”


석진이 태형의 앞에 쭈그려 앉으면서 코 앞에 다리 대신 얼굴이 나타났다. 석진이 다시 태형의 앞머리를 잡았다. 야… 혀 집어 넣어라. 혀 내밀고 집중하지 마…. 거리가 모호해 불편했는지 석진이 뒤뚱대며 태형의 앞으로 다가왔다. 석진이 태형의 앞머리를 붙잡아 당기자 자연스럽게 태형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무릎이 보였다.


반들반들하고 뽀얀 무릎. 접어 앉아있으니 도드라지고 붉은 기가 돌았다. 태형은 생각 없이 검지로 드러난 석진의 맨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석진은 어느 위치를 잘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데에 집중하는 듯했다. 태형은 석진의 무릎 위에 그림을 그리듯 검지를 움직였다. 간지러움에 반응한 석진이 사뭇 진중하게 말했다.


“하지 마라. 형 집중한다.”


태형이 웃음을 터쳤다. 정말 진지한 목소리에 처지를 잊은 태형이 이제 양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놀렸다. 아씨…. 결단이 어려운지 석진이 혼자 센 소리를 내며 태형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이대로 허리 잡아 끌어당기면 너 내 품에 안길 텐데. 석진이 가위를 들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아쉽지만 접는다.


“조금만 잘라. 조금만.”


앞머리를 자르는데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집중하느냐고 한마디도 없는 탓이다. 태형은 이제 생각을 비웠다. 귀여운 무릎 덕분이었다. 다시 무릎에 두 손을 뻗는다. 이번엔 다섯 손가락을 이용해 무릎을 간지럽혔다. 최대한 미세하게 간지럽도록 닿을 듯 말듯.


“아. 아. 하지 마라. 간지러워. ”


가윗날 사이에 태형의 앞머리가 들어가 있었다. 그걸 몰랐던 태형이 장난스레 무릎을 간지럽히다 불시에 잡았다. 그 충격에 석진은 그만 예정했던 위치가 아닌 곳에 가위질을 하고 만다.


“아씨… 간지럽다니ㄲ…!” 

싹둑.


싹둑…?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던 태형의 눈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내렸다. 석진의 무릎을 잡은 채로 길이를 확인한다. 이거 손가락 한마디는 넘겠는데…. 확 드는 정신과는 달리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위로 치켜뜬 눈동자에 드러난 흰자가 서늘했다. 석진이 꼴깍 침을 삼킨다.


“…야.”




14. 두 번째 다툼


아무리 제가 무릎을 잡아서 그렇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댕강 잘라. 거울을 보는 태형의 표정이 풀리질 않는다. 몇번이고 앞머리를 아래로 내리눌러 본다. 석진은 그 옆에서 미안해했다. 근데 막상 얼굴을 보니 샐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석진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이번엔 김태형이 토라졌다. 




15. 데이트 (2)


어느덧 계절의 중간이었다. 태형의 앞머리도 조금, 아주 조금 자란듯하다. 앞머리가 잘리고 태형은 등굣길에도 계속 앞머리를 털어댔다. 석진이 먼저 팔짱을 끼지 않았더라면 언제 풀릴지 모를 일이었다.


“보여줄 거 있어.”

“뭔데?”

“씻고 이따가 계단에서 만나.”


뜬금없는 석진의 말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진은 뭔지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6층에서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으며 태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다시 저녁에 7층 비상계단에서 만났다. 오늘도 층계 하나를 나눠 앉았다. 이 자식은 어깨가 매일 자라나…. 둘이 붙어 앉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오늘 유독 어깨가 맞닿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둘 다.


“보여줄게 뭐야?”

“별 건 아니고…. 이거 진작 줬어야 하는 건데.”


석진이 캥거루처럼 후드 앞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은하게 펄감이 느껴지는 파란색 뚜껑의 틴케이스다. 태형은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뭔질 모르니 일단 틴케이스를 흔들어본다. 뭔가 뭉탁하게 철제 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터 하나씩 샀었는데, 낱장으로 못 주고 쌓아놓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 말에 태형이 석진을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틴케이스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석진의 방 냄새가 났다. 생각지도 못한 틴케이스 속의 물건에 태형이 잠시 행동을 멈췄다. 센서 등이 꺼지자 다시 팔을 휘저어 켜고 내용물을 꺼냈다.


“엽서를… 모은 거야?”

“사진도 있고, 뭐…. 전시회에서 네가 좋다고 했던 사진들이랑 비슷한 것만 샀어.”


태형이 꾸러미를 한 장 한 장 들춰보았다. 석진은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턱을 괸 채 켜켜이 쌓인 기억들이 들리는 걸 말 없이 지켜본다.


“와, 이건 뭐야?”

“이거 작년에 미국 갔을 때 산 거야. 멋지지. 너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았어.”

“푸하핫, 내가 뭘 좋아하는 줄 알고.”

“풍경 사진 좋다고 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그 있어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야.”


거대한 토네이도와 몰려드는 구름, 벼락 등이 찍힌 거대한 자연의 순간이었다.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 석진은 엽서를 뒤집어 작은 글씨를 손으로 짚어 주었다. 석진이 가리킨 건 작품명과 연도, 작가명이었지만 태형은 그 옆에 조금 더 크게 쓰여 있는 석진의 글씨를 봤다. 언제, 어디에서, 김석진. 앞서 넘긴 엽서들의 뒷면도 본다. 같은 글씨체로 있다. 무려 몇 년 전이다.


“여기 있다. 미치 도브라우너래. 기념품 점에서 찾았어.”

“찾아봐야겠다. 근데 고른 거 진짜 마음에 들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히히. 풍경 사진인데…. 날씨는 자연의 기분이라 그런가, 어쩐지 기분이 느껴져서….”

“그래서 내가 좋아할 거 같았어?”


석진이 멋쩍은지 뒷머리를 만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 뭐…. 네가 나한테 좋다고 한 사진들은 대부분 감정이 느껴지더라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 왜 이 엽서를 샀는지에 대해 석진이 쫑알거리며 설명을 붙였다. 태형은 너무 벅차서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각기 다른 장소, 다른 날짜에 산 엽서는 생각보다 많았는데 전부 이유가 있었다.


겨우 엽서 한 장으로도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비상계단에 좁게 모여 앉아서.


“네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록펠러 센터의 건설 노동자들 Lunch atop a Skycraper,1932의 모습 한 명 한 명까지 같이 뜯어본 후 석진이 태형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며 말했다. 태형은 마른 코를 훌쩍였다. 엽서와 사진이 몇 장 남지 않았을 때 나타난 엽서에 태형은 멈칫했다.


“이거 그때 산 거야.”


석진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들렸다. 우리 같이 봤던 키스하는 연인들의 사진. 뭔가 생각난 듯 석진이 태형에게 기댔던 몸을 떼어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이거 두 장이다.”

“왜 이건 두 장이야?”


석진이 쑥스럽다는 듯 태형의 눈을 피하며 그 손에 들린 엽서를 빼냈다.


“나도 마음에 들었거든.”


태형은 제 손에서 엽서를 빼내어 내려다보는 석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쩐지 곧 울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괜스레 코를 훌쩍이며 태형이 엽서를 내려다봤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석진을 따라 하듯 나긋하게.


“이거 실제 연인 같아?”


일상 속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사진 속 인물 모두에겐 삶이 있었으며 각자의 사정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에게 당연한 일상 속의 장소다. 태형과 석진이 항상 다니는 길과, 지금 있는 이 장소처럼.


“배우지망생들이래. 로베르 두아노가 섭외해서 연출한 사진이야.”


그 안에서 사랑이 피어났다.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진 속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들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두의 일상 속에 사랑이 있었다.


“연출인데도… 진짜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태형의 말에 석진이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


“그러게…. 진짜 커플인 줄 알았는데. 실제 커플이라면 어땠을까.”


태형이 고개를 들어 석진을 봤다. 석진도 말간 눈으로 태형을 본다. 둘은 잠시간 말이 없다. 태형은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사진을 함께 보러 간 날엔 여러 말을 골랐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할 말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 말을 꺼내기에 큰 용기가 필요한 듯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태형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석진아, 키스 해봤어?”


맹한 얼굴의 두 눈이 점차 크기를 키웠다. 이 친구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쪽도 갑자기 심장이 뛰기는 마찬가지. 거세게 뛰는 만큼 석진의 귀가 눈에 띄게 달아올랐다. 태형이 눈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아 뭐라 대꾸를 해야 했지만 작게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심장이 쿵쾅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 귀가 멍멍했다.


용기를 낸 태형이 천천히 석진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가오는 얼굴의 시선이 제 입술에 고정되어 있는 걸 바로 보며 석진은 몸을 뒤로 뺀다. 야… 너 여기서 더 다가오면 우리…! 석진의 눈이 더 크게 뜨인다.


벽에 등이 닿았다.


태형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선이 아래에 고정 되어있기에 이미 내리깔린 눈이 석진의 심장을 걷잡을 수 없이 뛰게 했다. 거의 벽에 밀착하면서 석진은 숨을 참았다. 코 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태형이 살짝 고개를 틀었다. 이러다가 진짜…!


“야 너 앞머리 웃ㄱ…!”


윽.


보송한 두 입술이 닿았다. 석진은 목덜미가 싸해짐을 느꼈다. 태형의 입술은 필요 이상으로 간지러웠다. 살짝 닿고 떨어진 입술이 심장을 더 자극했다. 한 번 더 태형이 입술을 맞대왔다. 이번엔 떼지 않고 한참을 맞대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석진의 입술은 훨씬 말캉하고 보드라웠다. 촉감이 너무 달아서 태형은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심장이 어마무시하게 뛰는 것도 잊고 계속해서 입술을 눌렀다. 진짜로 달았다. 태형이 입술을 살짝 벌려 석진의 아랫입술을 물자 석진이 고개를 틀었다.


딸각!


계단에 따뜻해진 금속 케이스가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태형이 두 손으로 피하려던 석진의 뺨을 감싸 쥐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이 빠르게 태형의 손을 잡았다. 떼어내려 했지만 눈앞에 꼬옥 감은 두 눈을 보고 저도 눈을 질끈 감기를 택한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술이 입술을 계속해서 베어 물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또 부드럽게. 빠르게 뛰어 미칠 것 같은 심장과는 반대로 흘렀다.


움직임이 없자 센서 등이 꺼졌다. 센서 등을 피해 두사람의 입술만 끊임없이 달싹이며 움직였다. 자꾸만 아랫입술과 윗입술 안쪽에 닿는 태형의 혀 때문에 석진은 현기증이 났다. 그 간지러운 느낌이 너무 황홀해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몰랐던 경험에 비해 태형은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너무 달았다.


보송했던 두 입술이 촉촉해지고 나서고야 태형이 살짝 입술을 떼었다. 입술이 달아올라 있어서 그런지 사이로 끼어드는 공기가 차가웠다. 센서 등이 꺼진 은은한 어둠 속에서도 둘은 서로의 눈빛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되레 눈이 더 반짝였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 보다 태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석진에겐 그 소리가 제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짜릿하게.


“석진아.”

“…응.”

“너무 좋은데 한 번만 더 하자.”


다시 석진의 얼굴을 쥐고 태형이 입술을 맞대왔다.




16. 첫 키스


혀가 들어가야 키스라며.


“나 연습해왔어.”

“뭘?”


태형이 혀를 작게 내보이며 제 윗입술을 핥았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17. 다가오는 계절에도


저녁 시간, 두 사람은 테니스 코트 앞 스탠드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석진은 이번에 컵 아이스크림을 샀다. 이제 추워지는데 무슨 아이스크림이냐며 태형이 말렸지만 석진은 아이스크림이 좋았다. 아이스크림은 꼭 석진만 샀다. 생각해보면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 같다. 컵이나, 튜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손이 차가워졌는데, 이제는 다 먹고 나면 손이 차갑다며 태형이 석진의 손을 꽉 쥐어 녹여주었다. 태형에 의해 금세 따뜻해지는 손을 느끼며 석진은 종종 궁금해했다. 너는 전에도 이렇게 내 손을 잡고 싶었을까.


“한 입만.”

“좀 사 먹어.”


석진만 아이스크림을 샀다. 태형은 항상 그걸 빼앗아 먹는다. 사 먹으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석진은 스푼에 가득 아이스크림을 올려 태형에게 내밀었다. 그럼 그냥 받아먹으면 될 것을, 태형은 꼭 숟가락을 쥔 석진의 손을 한 번 더 잡고 입을 벌렸다.


“잘 먹는다 내 새끼.”


아이스크림을 받아먹고 오물거리는 태형을 석진이 귀여워했다. 그 추임새가 우스워 태형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석진은 아이스크림이 바닥날 때까지 태형에게 제 아이스크림을 나눠주었다. 나 한 입. 너 한 입. 마지막은… 너 한 번 더 먹으련. 싹싹 긁어 스푼을 태형의 앞에 내밀자 태형이 입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삼키며 또다시 석진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 끌어 스푼을 제 입에 넣는다. 


이번엔 우물대면서도 태형이 석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 삼킬 때까지도. 석진은 이제 이게 당연한 듯싶었다. 해가 지며 조금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침을 여러 번 삼킨 태형이 잡은 석진의 손을 제 쪽으로 당겼다.


“석진아.”

“왜.”

“사람 없다. 뽀뽀 함 하자.”

“돌았냐?”





18. 손잡기(2)



“으…. 추워.”


등굣길에 진짜 찬바람이 불었다.


“동복 입어야겠다. 그치.”


태형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오며 말했다. 의식하지 않으며 석진이 그 손을 금세 깍지로 바꿔 낀다. 입김을 보며 말한다.


“겨울 오나 봐.”


맞닿은 손바닥의 체온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태형은 겨울이 오면 이 손을 제 주머니에 넣을 생각을 한다.


“겨울도… 함께 보낼 거지?”


그렇게 많은 계절을 같이 보내놓고 새삼스레 묻는다. 맑았던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는 중에서 두사람은 익숙하게 손을 맞잡고 걸었다. 더운 여름엔 알 수 없었던 따뜻한,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이게 네 마음의 온도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너의 체온이 더 파고드는 계절이 온다. 


“무슨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석진이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태형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도 따스함이 서려 있다. 

마주치는 시선 그 찰나도, 전부 서로에게 기억될 마음이 닿는 자리였다.




the heart between us, Fin.



19. 다시 입을 맞추며 미소 지을 때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 속 입 맞추는 연인들.

태형은 나중에서야 그들이 실제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진짜 사랑이었다.





Kiss By the Hotel de Ville, Paris, 1950, Robert Doisneau


별거 아닌디... 메시지랑 댓글들 보고 공개 발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찐눈물) 진짜 고맙습니당! 10월에 뵈어요! 



소장용 결제창 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 텍스트 7 공백 제외
5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