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든 건 아침에 가까운 깊은 새벽이었지만 눈은 비교적 일찍 뜨였다. 나는 어제의 일을 되짚어 생각해보았다. 술을 퍼먹고 굴렀으면 상처라도 남았을 것이고 주먹질을 했으면 멍이라도 들었을 텐데, 내게는 어제 있었던 일의 조각 끄트머리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현실감 없이 멍했다. 어쩌면 집 비워달라는 것부터가 다 꿈이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의찬아 매니저님인데 사장님이 오늘 정상출근 하라고 하시네?>
<혹시 대타 필요한 거니?>


두 줄짜리 메시지에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여전히 집을 비워줘야 하는 세입자였고 자존심 세우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그런 주제에 그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가게에 출근해야하는 근로계약서상 을이었다. 차라리 호기롭게 그만 나가겠다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지금 형이 나를 자르지 않은 것 만 해도 감사한 지경이었다. 뭘 기대해서 이런건지, 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삼키고 핸드폰을 두드렸다.


<아니에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이건이 형은 나를 자르는 대신 매니저님을 통해 계속 출근해도 좋다는 뜻을 전해왔다. 거기서 오는 간격이 낯설어서 도리어 이게 우리의 정상적인 거리였음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내 마음이야 어떻건 조그만 창 너머로 이른 해가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형을 무슨 얼굴을 하고 보아야 하나 머리가 빠지도록 사흘 간 고민 한 끝에 난 결론은 그런 걱정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실버라이닝에서는 윤이건은 커녕 윤이건 할아버지의 머리카락 한 올 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형이 다가오지 않으면 스칠 수 조차 없는 관계였음을 매일매일 재확인 하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악 심장 터질듯>
<저도요 형>
<폭격기 씨쁠각?>


혹여나 어딘가에서라도 연락이 올까 조심스레 카운터 밑에 가져다 놓은 핸드폰에는 성적발표를 삼십분 앞 둔 이석원 이하 셋의 말풍선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텍스트로도 오두방정이 전해져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기숙사라는 나의 실낱같은 희망이 그대로 훨훨 날아갈지 말지가 이번학기 성적에 달려있었으니까.


<정의찬왜아무말도안함?>


띄어쓰기 좀 하지….


<저침묵은자신감의침묵이다>
<헐… 형 진짜요?>
<현개야 우리학번에는전설이있어>
<정의찬 과탑의 전설이라고>


얘는 자기 성적도 아닌데 거의 고정레퍼토리다 저게.


<24학점 올전공 4.5만점>
<허얼...>
<탈인간>


인정이니 뭐니 현우와 이석원이 주거니받거니 남이야기를 면전에서 해댔다. 나는 그 뻔뻔함을 지적하는 대신 성적조회 페이지의 새로고침 버튼을 느리게 반복해서 눌렀다. '조회기간이 아닙니다' 하는 팝업창이 앵무새처럼 떠올랐다가 닫힌다.


형은 도대체 어쩔 생각일까. 언제까지 안 나올 심산일까. 작업실 처럼 쓰려고 차렸는데 나 때문에 못 오면 무슨 의미가 있지. 나 지금 너무 뻔뻔한가. 그만둔다고 해야 하나.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 날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이 덩치를 불리고 명치를 지그시 죄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봐야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몇 번을 그 순간을 다시 마주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미안합니다, 하던 형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했다. 웃긴 건 그런 형을 생각하면서도 또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근데 그 날처럼 또 정의찬씨, 하고 부르면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 나도 알 수가 없어서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열심히 깜빡대는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바에 기대 애꿎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닦았다. 그러니 이번엔 등 뒤에서부터 내 손을 잡고 따뜻한 우유를 따라내던 지난 봄의 형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이상했고 저것도 이상했고 하여간 다 이상했다. 어디를 봐도 환상처럼 윤이건이 있었다. 실버라이닝 곳곳에 형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


“관둬야하나….”


해야 할 일 목록에 새 아르바이트 찾기를 추가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번뇌를 하며 몇 분 남지 않은 다섯 시 정각을 기다리는데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형인가?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문을 돌아보았다. 그 앞에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는 사람은 이건이 형은 아니었지만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경준이 형…?”
“진짜 오랜만이네.”
“형이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봐. 이석원이지 뭐.”


미안하고 반가운 사람이 잘 지냈어?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합격 축하드려요 형. 진짜로.”


지금의 형이 멀끔한 정장차림이라는 것만 빼고.


“너도 제대 축하해.”


서로에게 늦어도 한참 늦은 축하 인사가 오갔다. 그러다가 결국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웃고 말았다. 새삼 말로하기에 민망할 만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음만큼은 편했다. 그게 경준이 형의 장점이었다. 나는 형에게 메뉴판을 띄워놓은 패드를 건네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계세요. 형 지금도 다방 아이스커피 좋아하세요?”
“여기 그런 것도 해?”
“메뉴판엔 없는데, 스페셜 오더로 주문하시면 됩니다, 손님.”


가게 찬장 안쪽에는 그래도 가끔 이게 생각 날 때가 있다며 매니저님이 가져다 놓으신 임직원용 스틱커피가 상시 구비되어 있었다. 스틱 두 개 찢어 넣고 설탕 두 스푼 더. 이등병 시절 죽어라 타댔던 레시피는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박제가 되어있다.


“서비스가 좋은 가게네.”


형이 씩 웃으며 내게 태블릿을 돌려주었다.


“근데 나 이제 그거 끊었어.”
“진짜요?”

“앉아서 일하잖아. 배 나올까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네가 먹고 싶은 거.”


그렇게 말한 형이 카드를 내밀었다.


“형!”
“나 이제 사회인이야. 커피 한 잔 못 사 줄까 봐서?”


한 번의 실랑이를 더 하고 결국 형은 자기 카드를 긁고야 말았다. 형 몫의 아메리카노 한 잔과 내 몫의 아이스티 한 잔을 타서 형과 마주 앉았다. 익숙한 장소에 낯설지만 낯익은 사람이 있으니 괜히 기분이 이상하다.


“제법 알바 티가 나네.”
“석 달 째니까요.”
“할 만 해?”


사실은 그만 둬야 하는 건지 고민 중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경준이 형에게는 못할 말이라 적당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요? 공무원 어때요?”
“그냥 네가 상상하는 대로? 사실 양복 아직도 적응 안 돼.”
“잘 어울려요.”


멋쩍게 웃는 형에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형이 나의 불안하고 막막했던 시기를 지켜보았듯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막 행정고시를 치겠다고 덤벼들던 때의 형을 안다. 대로변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직장인들과 똑같은 차림새로 내 앞에 앉아있는 경준이 형에게서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기껏해야 서너 살 차이인 형이 어른처럼 보였다.


“전 언제 졸업하고 취직할까요. 빨리 형처럼 돈 벌고 싶어요.”


장난 7할에 진심을 3할 정도 섞어 한숨 쉬듯 푸념을 했다.


“양복도 입고?”
“양복도 입고요.”
“그래. 좋은데 가. 좋은데 취직해서, 돈 많이 벌어. 많이 벌어서 짜장면 말고 간짜장 곱빼기 먹어.”
“그러고 싶어요.”


경준이 형의 저 말은 뭐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진심이다. 형의 좁은 자취방에 얹혀살던 때에, 월세랍시고 푼돈 오만원을 내밀면 형은 꼭 그 중 두 장을 따로 빼놓고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형이나 나나 주머니가 빈약하긴 마찬가지라 메뉴는 늘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에 미니탕수육이 붙은 2인 세트 1번이었다. 한창 바쁠 건장한 청년 둘에게는 한참 모자랐던 그 때가 생각났다.


“의찬아.”
“네,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 이만 가 봐야겠다.”
“바쁘시면 가셔야죠.”


나는 남은 커피를 비우는 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이야기는 주말에 술 마시면서 할까.”

“좋죠. 저 번호는 그대로예요.”
“알아.”


경준이 형은 왔을 때와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다. 짧은 회포를 푸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다섯 시를 한참 넘겼다. 카운터에 뒤집어 놨던 핸드폰을 주워드니 빨간색 알림이 삼백 개가 넘게 밀려있다. 그 중 대부분은 단체 대화방에 그득한 배현우의 절규였고 세 개가 이석원, 나머지 두 개가 수영이에게서 온 것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갱신 중인 단체 톡방은 잠시 미루어두고 나는 이석원의 개인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성적 뜸>
<어떻게 됨?>
<왜 말이 없냐>


이석원 나름의 걱정이었다. 나는 경준이 형이 가게로 오셨다는 짧은 대답을 해주고 인터넷 창을 켜서 아까 수십 번도 더 새로고침 한 성적열람페이지를 띄웠다. 조회 버튼을 누르는 손이 조금 떨렸다. 결과는 A+ 다섯 개에 B+ 하나.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기숙사를 기대하긴 힘든 숫자였다. 혼자 축 쳐진 과목은, 형 집에 병문안을 갔던 그 다음 날에 중간고사를 쳤던 그 과목이었다. 속이 쓰렸다.


“연애하면 성적 떨어진다더니….”


아니 그 때는, 연애도 아니고 그냥 좀 이상한 사이였을 뿐인데…….
이미 B에 플러스가 붙어있으니 교수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진다 한 들 소용이 없을게 뻔했다. 오히려 건방지다고 붙었던 플러스가 떨어지는 역효과가 날지도 몰랐다. 구간 별로 나누어진 알파벳을 바꿔달라고 하는 건 더더욱 어불성설이었고.


<비쁠 하나 있어>
<알바 새로 구할까>


이석원과의 대화창에 소식을 전하고 수영이의 메시지를 열었다.


<오빠 덕에 에이쁠 떴어요. 진짜 감사해요!>


이미 들었던 과목을 수영이가 듣는다기에 필기노트를 빌려주었었다. 성적페이지를 캡쳐 한 사진이 함께 도착해있어서 영혼 없이 축하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경준이 형을 다시 만나고, 성적이 뜨고, 후배는 고맙다는 인사도 했다. 나는 무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제 자리에 가만히 버티고 서 있을 뿐인데 세상은 봐주지 않고 바쁘게, 그리고 멀쩡하게 돌아갔다.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짧은 현기증이 눈앞을 흩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BL을 씁니다. Be happy(완결) 실버라이닝(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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