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의 기사가 피에 익숙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그것도 치사량의 피에 익숙해지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물론 피는 누가 흘리건 똑같은 피다. 어떤 이들은 왕족, 귀족의 피와 평민의 피가 다르다고 하지만 전장의 중심에서 일주일만 칼을 휘둘러 보면 그게 순수한 개소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뱅은 어떤 특별한 피가 있다고 여겼다. 그 자신의 피도, 지켜야 할 주군의 피도 아니다. 자신이 수없이 지키지 못한 한 사람의 피. 그것이 다시 한 번 실뱅의 눈 앞에서 흘러나왔다. 뒤쪽 어딘가에서 아무래도 아네트의 것 같은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따르는 비명들은 목소리가 온통 섞여 버려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처음에는 자신도 저렇게 비명을 질렀던가. 이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하며 뻗었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채 감지 못한 연녹색 눈이 굴러 실뱅을 향한다. 그래. 굴러왔다. 그것을 담은 머리 통째로. 차분하지만 생기 있던 눈동자 안에서 생명의 빛은 한순간에 꺼진다. 아니, 실뱅의 착각일까? 머리가 굴러올 때까지 생명이, 의식이 남아 있었을 리 없다.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인 편이 나을 것이다. 진짜라면 죽은 이에게는 지나치게 끔찍한 일이니까. 

이제 당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런 한가한 생각도 할 수 있군요. 실뱅이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그랬습니까? 왜 당신은 늘 나를 구하는 거야? 그러지 마요. 그건 구원보다는 저주에 가까우니까. 원망하게 되거든. 

배은망덕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뱅은 진심으로 제게 향하던 죽음을 대신한 벨레스를 증오했다. 그러나 그 직후 곧바로 손에서 창을 떨어뜨려 버린 것은 증오 때문은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고 달려오던 동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충격이나 허탈함 때문도 아니었다. 실뱅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병을 보면서도 창을 놓은 것은 창을 들고 싸우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저 얼간이가, 뭐 하는 거야! 창 들어”

펠릭스. 그렇게 소리칠 필요 없어. 나는 죽지 않거든. 싸우지 않아도 결코 죽을 일은 없어. 선생님이 지켜주니까. 실뱅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색과도 닮은 피를 뒤집어쓴 채 펠릭스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실뱅은 놀라지조차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 몇 번인가는 당황하며 날짜를 확인했으나 이제는 지금이 성신의 달 5일임을 안다. 장소는 분명히 프랄다리우스가의 병력과 연합해 제국군과 대치하고 있는 전선 근처의 막사일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변함없이 돌아온 시간과 장소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실뱅은 침대를 벗어나는 대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자신은 며칠 뒤면 5년 전의, 그러니까 이 시간대로부터 5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르그 마크로 향할 것이고, 그곳에서 디미트리와 벨레스를 다시 만날 것이고, 그들을 따라 싸우다가, 어느 순간 벨레스의 죽음을 눈앞에서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시점,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매번 아주 똑같은 시간들은 아니었다. 나누는 대화가 조금씩 달랐고, 혼자만의 기억을 가진 실뱅의 움직임에 따라 전황이 조금씩 달랐고, 죽음의 시기와 방법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 결국 맞이하는 결말이 벨레스의 죽음과 자신의 회귀라면. 

처음에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애증의 대상이기는 했으나 벨레스는 분명 실뱅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벨레스의 죽음은 그렌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 노력했다. 기억 속의 죽음을 뛰어넘었을 때는 기뻤다. 그러나 그런 실뱅을 비웃듯 날아온 독화살은 실뱅 앞을 막아선 벨레스의 몸에 명중했다. 

다음. 최초의 죽음을 피하고, 독화살 앞에서 벨레스를 끌어당겼다. 전투 후의 식사를 다 같이 모여 함께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뚝 멈추고, 불길한 예감이 정신을 휘감은 것은 그로부터 두 번의 전투 뒤였던가. 또다시, 자신에게 피를 뒤집어씌우는 사람의 돌아보는 시선을 마주했을 때 실뱅은 이 굴레가 다시 이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예상은 우스울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혹시, 하고 생각했다. 조금씩 지연되던 죽음과 회귀가 따듯한 봄이 되도록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비록 자신이 막지 못한 또 다른 죽음은 있었을지언정 벨레스가 4월이 지나도록 살아남고, 처음으로 디미트리가 깨끗한 눈으로 자신들을 향해 사과하고 말을 걸어 주었으니까. 실뱅에게는 그것이 어떤 상징으로 느껴졌다. 그 상징 앞에서 사실 오래 전에 묻어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희망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그렇기에 절망은 돌이킬 수 없는 무게로 쏟아졌다. 실뱅은 손에 들고 있던 희망이 그 절망 앞에서 쓸려내려갔음을 알았다. 

선생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라면, 이 짓을 계속해야 합니까? 

“이 시간까지 침대에 드러누워서 뭐 하는 거야. 일어나.”

거친 말투가 실뱅의 멱살을 잡고 절망 속에서 일으켜세웠다. 그러나 실뱅의 다리는 아직 그 끈적한 늪에 잠긴 채다. 그 상태로 펠릭스를 바라보자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뭐야. 어제 부상이라도 입었냐?” 

부상은 오늘 네가 입을 거야. 실뱅은 그렇게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제 어깨를 잡은 펠릭스의 손을 떼어냈다.

“몸은 멀쩡해. 일어나야지.”

“……부상이 아니라도 상태가 안 좋다면 의무병에게 가 봐. 그런 상태의 너 한 명 빠진 정도 공백은 메울 수 있다.”

조금 전까지 짜증을 내고 있었으면서 은근히 목소리에 걱정이 어렸다. 실뱅은 이 알고 보면 상냥한 구석이 있는 친구를 향해 고개를 저으려다가 이내 마음을 돌렸다.

“괜찮……아니, 그래. 미안. 오늘은 좀 쉬어도 될까.”

“의무병은.”

“부상도 아닌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펠릭스가 눈을 날카롭게 좁힌 채 실뱅을 살폈다. 확실히 부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역시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어지는 전투에 다소 지쳐 있기는 해도 이런 꼴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때로 사람은 멀쩡해 보이다가도 어떤 임계점을 넘는 순간 무너지기도 한다. 전장에서 많은 병사를 보아 온, 그리고 실뱅의 소꿉친구인 펠릭스는 상황을 전혀 모르면서도 실뱅의 상태를 거의 정확하게 읽어냈다. 자신이 억지로 의무병에게 끌고 가 봐야 신통한 결과가 나오진 않으리라는 것까지. 

출격 준비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펠릭스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말했다.

“그러면 막사에서 기어나오지 말고 쉬기라도 해. 네 꼴은 내가 보고할 테니.”

실뱅은 대답 대신 고맙다는 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어이, 펠릭스. 충고 하나만 하자.”

“죽을상을 한 놈이 충고는 무슨 충고.”

펠릭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막사 입구의 천을 잡은 손을 멈추었다. 실뱅이 웃음을 꾸며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런 펠릭스를 향해 말했다.

“너 난전에서, 적한테 박힌 칼 뽑은 뒤에 그대로 오른쪽으로 도는 버릇 있더라. 조심해. 내가 못 지켜주니까.”

“네놈이 언제 나를 지켜줬다는 거야.”

실뱅이 창도 아니고 검술로 펠릭스에게 조언할 만한 실력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펠릭스는 그렇게만 투덜거리고 휙 나가 버렸다. 실뱅은 다시 고요해진 막사 속에서 눈을 감았다. 

저녁 무렵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펠릭스는 피에 젖어 있었으나 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늘 이날 입고는 하던 왼팔의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도 그리 대수로운 부상은 아니었다. 하루이틀 정도의 치료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뱅이 매번 함께 출격하면서도 전장에서 떨어져 막지 못했던 그 부상이 없다. 그 사실이, 정신적으로 몰려 있던 실뱅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쨌든 시간의 고리를 수십 번 반복한 인간의 정신상태가 정상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실뱅은 펠릭스가 자신을 불렀을 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으니 아직은 괜찮은 건지, 역시 그렇지 않은 건지. 자가진단은 아마 별 소용은 없으리라. 실뱅은 자신이 말의 등에 얹어 놓은 짐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실뱅의 대답이 없자 펠릭스가 재차 물었다.

“탈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아, 그렇지. 이건 말하자면 탈영이다. 지금까지도 얼마 뒤면 진영을 떠났겠지만 그것은 늘 펠릭스와 함께였다. 좀 더 남쪽으로 가서는 잉그리트와 합류해 가르그 마크로 향하고는 했지. 분명 그 역시 탈영이었지만 공료곱게도 종착지가 디미트리 곁이었기에 한 번도 그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실뱅이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너, 아침부터 이상해.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냐?”

무슨 일은, 많은 일이 있었지. 끔찍할 정도로 많은 일이. 익숙해져 버릴 정도로 많은 죽음이. 

죽음의 시기와 형태는 모두 달랐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신을 지키려다가 맞이한 것이었다. 차라리 벨레스가 디미트리를 지키려다 죽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들의 원인은 분명 자신이었다. 어쩌면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떠나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일어나기라도 할 거란 말이냐? 어디서 점쟁이의 헛소리라도 들은 건가.”

점쟁이의 헛소리 같은 것보다는 확실한 예언이지. 직접 겪은 일이거든. 

실뱅이 표정이 계속 진지하자 오히려 펠릭스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풀렸다. 미심쩍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심이냐?”

“이건 굳이 보고 안 해줘도 돼. 너까지 한 소리 들을 테니까.”

실뱅은 자리에 누워 있지 않은 펠릭스의 멀쩡한 몸을 보았다. 어쩌면 이게 답일지도 모르지. 나로 인한 죽음이었다면, 내가 한번 떠나 본다면 모든 게 올바르게 돌아갈지도. 그렇게 되면 탈영죄로 쫓기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또 그때의 일이다. 다시 이날로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그 정도쯤이야. 차라리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너는, 대체…….”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보는 나는 어떻게 비치는 걸까. 펠릭스. 

실뱅은 펠릭스가 검을 뽑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리를 살짝 그어서라도 못 가게 하겠다고 말하는 펠릭스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펠릭스는 검 손잡이 위에서 손을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결국 그것을 뽑아들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냐?”

이 정도쯤은 대답해도 상관없겠지. 실뱅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 오랜 친구 사이에서는 말로 할 수 없는 이해도 오가는 법이었다. 

펠릭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실뱅이 말 위에 올라탔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펠릭스를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너는……약속 지켜라. 안 그러면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떠남으로서 펠릭스가 5년만의 만남을 잃는 것은 원치 않았다. 실뱅의 말에 펠릭스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약속.”

“알고 있잖아. 5년 전에.”

“넌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 같이 떠났던 주제에. 하지만 지금 그렇게 말하면 아마 화나 내겠지. 실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말을 출발시켰다. 멀어지는 펠릭스의 얼굴에서 입술이 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달싹였지만 결국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도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은 예상하고 떠났어야 했는데. 실뱅은 창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탈영 비슷한 형태로 전선을 떠나기는 했으나 그대로 안전한 영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하릴없이 남하하던 실뱅은 어느 순간 제국군을 마주쳤다. 전선이, 여기까지 북상해 있었던가? 

생각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스물다섯 살. 하지만 경험을 쌓은 나날들은 그보다 더 길었다. 혼자이기는 했지만 제국군의 포위를 따돌릴 수는 있었다. 

당신은 역시 선생님이 맞긴 하군요. 당신이 수없는 죽음으로 가르친 경험이 날 살렸으니. 젠장. 여기가 어디야?

추적을 따돌리는 동안 몰이사냥당하는 토끼나 되듯 도망치며 싸웠기에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왜 제국군이 그렇게 무언가를 쫓는 태세를 확실히 갖추고 있던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왕국군의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텐데. 아니, 허술하다 해도 탈영한 장수 하나를 그렇게 쫓을 이유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실뱅이 아니라 자신들이 놓친 적국의 지배자를 쫓을 이유가. 

실뱅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익숙한 풍경임을 깨닫고 아연해졌다. 펠릭스 같은 청사자 반 출신 다른 동기들에게는 실뱅에게만큼 익숙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그 성실한 친구들은 실뱅과는 달리 여자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이 먼 아랫마을까지 쏘다니지는 않았으니까. 

짜증 이전에 소름마저 돋았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어떻게 해서든 그 지긋지긋한 죽음을 지켜보고 회귀하는 짓을 반복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인 저항감이 말머리를 돌렸다. 떠나자. 그러나 그 결심은 말이 채 속도를 붙이기도 전에 깨졌다. 실뱅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갑옷이 철벅거리며 물을 튀겼다. 가르그 마크 앞을 깊게 패여 지나는 계곡은 이 아랫마을에 이르러서는 마을 옆의 숲을 흐르는 강이 된다. 그 강가에, 익숙한 연녹색 머리칼이 겨울 숲에 어울리지 않는 빛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선생님!”

겨울 강에 반쯤 잠겨 있던 몸을 끌어올린다. 차갑다. 흠칫 놀라 맥박을 확인한다. 뛰지 않는다. 황급히 목의 혈관이 아닌 가슴에 귀를 대어 봐도 마찬가지다. 왜? 당신은 오늘 여신의 탑을 올라, 그곳에서 전하를 만나야 하는 거잖아. 이런 곳에서 심장이 멎어 있는 게 아니라…….

“실뱅?”

낯익은 목소리. 실뱅은 경악한 얼굴을 숨기지조차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벨레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순간 뻗뻗하게 굳어 채 들지 못한 머리통이 기대 있는 가슴은 여전히 고요했다. 실뱅은 당혹 속에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심장이……?”

“아, 그건 원래 안 뛰어.”

도대체가 설명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실뱅은 일단 벨레스를 놓아주었다. 벨레스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실뱅은 원래 알던 것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도 쭉 이렇게 깨어나서, 가르그 마크로 올라가 전하를 만났던 거구나. 심장이 뛰지 않는 것 정도야, 젠장. 이 사람이 보통이 아닌 게 한두 가지였던가.

실뱅이 깨달음을 얻는 사이 벨레스는 작게 불을 피워 옷을 말리다가 실뱅의 차림새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여기는? 가르그 마크 근처 같기는 한데…….”

실뱅은 그 뒤에 따라나올 질문도 예상할 수 있었다. 쓰게 웃은 실뱅이 듣지 않은 질문을 포함해 대답했다. 

“그래요. 가르그 마크 아랫마을입니다. 그리고……당신이 사라진 뒤 5년 뒤이기도 하죠.”

“5년……그때 전투는……?”

“……한 마디로 끝날 설명은 아니긴 합니다만, 일단 그때의 방어전은 저희의 패배였지요.”

“디미트리는…….”

그 이름이 나올 줄 알았지. 지금이라도 알려주고 발을 빼는 것이 나을까. 그러나 실뱅의 입은 저도 모르게 움직여 대답하고 있었다.

“……만나고 싶은 거면 올라가죠. 참고로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이 천년제 날이거든요. 약속……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뱅은 벨레스만을 여신의 탑 위로 올려보내고 탑의 바깥벽에 등을 기대서서 두 사람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애초에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으면서, 쫓기는 바람에 벨레스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벨레스와의 재회가 조금 다른 형태였다는 것만으로, 죽음마저 다른 형태일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나? 아냐, 알 수 없는 거잖아. 

“실뱅……네가 왜…….”

디미트리의 목소리였다. 실뱅은 고개를 돌렸다. 퀭하니 그늘진 눈 안쪽으로 차가운 증오가 불타고 있는 모습. 수십 번의 루프 동안 실뱅이 보아 온 것은 쭉 이 모습이었다. 이제 정상적인 모습이 가물거릴 정도로. 마지막 회귀 전, 아주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단 며칠이었지만 디미트리는 분명 실뱅이, 펠릭스가 바라던 모습으로 돌아왔었다. 로드릭의 죽음이 계기였을지는 몰라도 벨레스가 그렇게 이끌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 디미트리는 모두에게 사과하고 모두가 바라마지 않던 왕도 탈환을 결심했다. 

어쩌면 그 뒤도, 그렇게 모두에게 행복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벨레스가 죽지 않았다면. 그 미래로 이어지는 길이 통째로 없던 일만 되지 않았다면. 

실뱅은 그 모든 생각을 얼굴 가죽 아래로 감춘 채 웃었다.

“여, 전하. 오랜만입니다. 여기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국군이 명백히 누군 쫓는 행색으로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거든요.”






“너, 멧돼지를 찾으려 했던 거냐?”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떠난 뒤로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마주한 펠릭스는 어딘지 찜찜한 표정으로 실뱅을 찾아와 물었다. 밤이었다. 가르그 마크의 폐허 한구석은 디미트리와 벨레스의 생존을 확인하고 다소 들뜬 이들로 차 있었지만 실뱅은, 그리고 그런 실뱅을 찾아온 펠릭스만은 그 분위기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뭐……결과적으로는.”

“너나 나나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비슷했을 텐데. 어떻게 안 거지?”

“글쎄. 왠지 그런 느낌이 늘어서.”

펠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런다 해서 실뱅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펠릭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한순간에 변해 버린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한 놈은 대놓고 미쳤고, 한 놈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은데 확신할 수가 없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디미트리의 곁에서 주저하면서도 말을 걸어 보려 애쓰는 잉그리트가 보였다. 하나라도 멀쩡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 사실에서 위안을 찾기란 어려웠다. 펠릭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실뱅도 그 착잡한 한숨의 의미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다. 다른 때라면 펠릭스가 질색하는 웃음이라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면 걱정은 금세 짜증으로 덮이고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결코 펠릭스가 둔하거나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실뱅 역시 펠릭스가 실뱅을 아는 만큼이나 펠릭스를 잘 알고, 거기에 더해 형이었으니까. 그것도 지금은, 펠릭스는 알지 못하는 시간을 수십 번은 더 살면서 그만큼 펠릭스를 더 겪은. 

그러나 실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금,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웃음에 펠릭스의 얼굴이 굳었다. 

“너…….”

“이제 전장의 중심은 여기가 되겠지……펠릭스. 혹시 공작님이 합류하게 되면 잘 지켜 드려.”

“……진짜 어디서 무슨 예언이라도 들은 거냐?”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반쯤 자포자기로 뱉은 대답에 펠릭스가 심사가 꼬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쳇. 그런 허황된 말에 매달리니까 나약해지는 거야. 나는 저 멧돼지 건사하기만도 바쁘다고. 너까지 챙겨 줄 여유 없으니까 그만 이상하게 굴어.”

역시 웃어넘기는 편이 낫겠다. 

“하하. 네가 언제 날 챙겨줬다고 그래? 내가 널 챙겼지.”

“흥. 헛소리 하지 마라.”

익숙한 대화 패턴. 실뱅은 펠릭스의 얼굴이 조금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일어나서 기지개를 폈다.

“나 화장실 좀.”

그딴 건 말하지 말고 그냥 꺼지라는 듯 휘휘 젓는 손을 뒤로하고 조촐한 연회 자리를 떴다. 시야 한쪽에서 어떤 대화에도 응하지 않고 필요한 음식만 섭취한 뒤 마찬가지로 자리를 뜨는 디미트리가 보였다. 그 뒤를 따라붙는 벨레스의 시선 역시. 어쩌면 자신은 그 시선을 확인하느라 여태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하. 당신은 아마 지금 대성당으로 가고 있겠죠.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복수를 다짐했습니까? 속죄의 기도라도 읊고 있었나요? 그렇게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뭐, 괴롭겠지만 어쩔 수 없죠. 나는, 우리는 당신을 그 어둠에서 끌어내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걱정은 안 합니다. 그래도 당신을 끌어낼 사람이 없지는 않더라고요. 확인하기까지는 꽤 여러 번이 걸렸지만. 선생님이 같이 있다면 당신은 아마 괜찮겠죠. 

그러니까 난 일단 한번 떠나 보겠습니다. 화내지는 말아 주세요. 당신이 화내는 건 아무래도 무서운데다, 이게 다 당신이랑 선생님을 위한 일이거든. 

가벼운 발걸음이 먼지 쌓인 가르르 마크의 폐허를 밟았다.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쳐 본다라.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이게 정답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데.

“화장실은 그쪽이 아닌데.”

“……선생님?”

실뱅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신도 감각이라면 꽤 단련되어 있는데 소리도 없이 다가온 벨레스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벨레스의 시선이 실뱅이 향하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구간 입구였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순찰을 돌려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아니, 전하를 따라간 것 아니었나요?”

분명히 디미트리에게 시선을 향한 채 몸을 일으키던 걸 봤는데. 

“쫓겨났어. 그리고 아침에 봤을 때부터 네가 영 이상해 보여서.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은데. 아까 펠릭스랑 예언이니 뭐니 얘기했지?”

귀도 밝지. 하기야, 생각해 보면 지금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옛날부터 이 사람은 유난히도 자신의 곤란한 모습을 자주 발견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곤란한데. 

“하하. 저야 원래 그런 헛소리나 주워섬기고 다니는 놈인 거,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알지.”

“우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즉답하시면 좀 상처받는데.”

이어진 벨레스의 말은 실뱅의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생각 없이 경박한 소리 하고 다닐 때랑 그게 아닐 때를 구분할 줄도……알고.”

실뱅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조금 덜 진해졌다. 여러모로 당신에게 향하는 감정은 애증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죠. 문장을 품고 자유롭게 사는 당신을 동경하며 질투했듯, 지금 내 꼴을 알아 주는, 나를 이 꼴로 만든 당신을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면서도 지켜 보겠다고 이 지랄을 떨고 있으니. 

“하하……선생님. 저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가요? 진작 말씀하시지. 저는 선생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거든요.”

이쯤에서 실뱅에게는 익숙한 경멸이 담긴 눈빛이나 남기고 가 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러지 않을 것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과연 벨레스는 태연한 얼굴로 다른 때에 들었다면 반겼을지도 모르는 말을 했다.

“그래. 그러면 데이트라도 할까.”

“네에? 선생님. 저야 원래 이런 놈이지만 선생님은 아니잖아요? 저, 당신 제자입니다만?”

한껏 능청스럽게 굴어 봐도 소용은 전혀 없었다. 제자라는 말에 벨레스가 스윽 뒤쪽을 돌아보았다. 가르그 마크는 폐허 상태에서도 장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건물이었다. 

“사관학교의 제자였지. 지금은 그 학교도 없고. 아니면,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

이 사람이 적어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디미트리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게다가 아직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자신이 행동을 조금 변화시킨 것만으로도 이렇게 달라지나? 

실뱅의 목소리에서 꾸며낸 웃음기가 사라졌다. 

“데이트는 그만두죠. 선생님 태도를 봐도 진짜 데이트는 안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뭘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까?”

실뱅의 질문에 벨레스가 잠시 침묵 속에 실뱅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뒤 천천히 흘러나온 대답은 실뱅으로서는 다소 맥빠지는 것이었다. 

“그건 잘 모르겠네.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정확히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거든. 예언이라는 건, 무슨 소리야?”

모르겠다고 하는 것치고는 꽤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다. 그 질문 앞에서, 실뱅은 어떤 충동을 느꼈다. 애써 그 충동을 삼킨 실뱅이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저 같은 놈이 하는 예언을 믿을 수나 있겠습니까?”

“응. 믿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히 나온 대답. 실뱅은 맥이 풀리는 기분마저 느꼈다. 

“……그렇게 간단히 대답할 문제인가요……어째서입니까? 분명 제가 그렇게 신뢰 있는 남자는 아닌 걸로 아는데요.”

“자기 평가가 낮네. 하긴.”

“……거기서 굳이 동조는 안 해 주셔도 되지 않나요.”

믿는 건지, 믿지 않는 건지. 벨레스는 실뱅의 작은 투덜거림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딱히 예언을 믿는 건 아니지만, 네가 그런 얼굴로 이상하게 구는 데에는 뭔가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는 믿어.”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말에 심장이 왈칵 조여 흘러넘친다. 입을 열면 그것들이 다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아 실뱅은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 벨레스는 입을 다물어 버린 남자 앞에서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심장을 진정시킨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실뱅은 그때까지도 가만히 서 있던 벨레스를 향해 조금 전의 충동을 다시 꺼내들었다. 

어차피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자신에게만 남은 채 없어질 대화가 아닌가. 그렇다면 말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만약, 아주 만약 달라진다면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일이 아닌가.

“……저는 당신이 가끔 증오스럽습니다.”

“그 얘기라면 5년 전에도 들었지.” 

“선생님은……왜 목숨까지 걸고 저를 구하려고 하는 겁니까?”

언뜻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먼저 해 버린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조심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모든 기억들이 자신이 미쳐서 본 환상일지도. 증거라고는 자신의 기억뿐이었으니. 

과연 벨레스는 실뱅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의 이유도 딱히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그런데. 일단 나는 그런 기억이 없어서.”

“……아뇨. 당신은 그랬습니다.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실뱅의 설명은 불친절했다. 벨레스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이상한 소리지만 태도만은 진지했다. 

다른 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벨레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그런 능력을 다루는 이의 마음속에서 어떤 의혹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언제 그렇게 되는데?”

기억에 대한 질문으로는 시제가 이상하다. 그러나 실뱅은 그것이 정확한 표현임을 알았다. 실뱅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선생님. 알고…….”

“짐작은 할 수 있지. 어떻게 네가 그런 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인 모양이지? 시간을…….”

“……제 의지가 아니에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그렇습니다. 전……선생님의 죽음을 봤어요.”

벨레스의 다음 질문은 실뱅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몇 번이나?”

“그건 어떻게…….”

“네가 증오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한두 번은 아니었을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말을 믿고, 거기에 더해 말하지 않은 것까지 입에 담는다. 실뱅은 허탈함마저 느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주 많이.”

아직,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시선.

“……아니, 사실은 정확하게 세고 있었습니다. 열세 번. 그래. 열세 번, 당신이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봤다고요! 나를 지키려다가! 한 번도 살리지 못했어. 어째서입니까? 하늘을 가르고 어둠에서 돌아오고, 죽을 수밖에 없는 계곡에 추락하고서도 5년을 넘어 살아돌아왔으면서, 왜 당신을 증오하는 사람을 목숨까지 던져 가며 매번 지키는 거냐고요!”

나직하게 시작한 말은 끝에 가서는 숫제 고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벨레스는 커진 목소리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겨울 공기에 식은 손가락이 실뱅의 눈가를 스쳤다. 그러나 피부가 마찰하는 사이에 습기는 없었다.

“……안 우는데요.”

“울어도 되는데.”

“안 웁니다. 울기까지 하면 꼴사나워서 제가 저를 못 참아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실뱅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떠나려고?”

“……혹시 모르잖아요. 선생님의 죽음은 지금까지 다 저로 인한 거였으니까. 혹시 제가 없으면…….”

“그건 그렇네.”

떠나려고 한 것은 자신이었으면서도 실뱅은 벨레스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벨레스는 실뱅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죽은 건 분명 너 때문이었겠지. 일단, 미안해.”

“……뭘……사과하는 겁니까?”

벨레스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너랑은 달리 조절할 수 있거든. 너……나를 구하려고 했지?”

당연히. 이 지긋지긋한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자신이 죽어서라도 이 반복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된 거라는 생각마저 할 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리도 번번히 실패했는지 실뱅 자신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저주가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실뱅의 끄덕임에 이어진 말은 그 전제부터 부정하는 것이었다.

“……성공했을걸. 아마 성공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한 질문은 사실 내가 던져야 하는 건데……왜 그렇게 증오하는 사람을 목숨까지 버려 가면서 구했지?”

벨레스의 말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반사적인 대답이 튀어나갔다.

“그야……당신의 죽음을 기점으로 시간이 반복되니까…….”

“맨 처음에는?”

맨 처음 같은 것은 없다. 벨레스는 그냥 자신을 구하고 죽었다. 그러나 벨레스는 확신을 담아 묻고 있었다. 실뱅의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모릅니다. 저한테는 없는 기억인데다, 그렇게 옛날 일 같은 건.”

“…….”

“……하지만, 아마……그냥, 젠장. 그래요. 그냥 몸이 움직여 버렸을 거야. 당신이 위험했다면.”

“왜?”

“거기까지 들었으면 다 아실 거 아닙니까. 저 그만 괴롭히세요. 그보다, 당신 말은 역시…….”

“응.”

벨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실뱅은 지독하게도 악취미적인 농담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벨레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벨레스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을 짚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어. 그렇게 길게는 아니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왜 자신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실패하지 않았다. 실패한 적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기억하지 못한 성공들은 전부 벨레스가 덮어씌웠다. 몇 번을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해내더라도, 아마도 실뱅 자신의 죽음 앞에서, 시간은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고리와 벨레스의 고리, 두 개가 서로 얽혀 영원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하하. 무슨 그런, 농담 같지도 않은 일이…….”

“……그러게. 전혀 예상도 못 했어.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뭐, 됐습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 두지요. 젠장. 진작 말할걸.”

잠시 투덜거린 실뱅이 무거운 시선을 들어 벨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선생님. 당신이 아무리 시간을 돌려 나를 구해도 다시 돌아갈 뿐이에요. 그러지 마세요. 당신은 전하와 함께 앞으로…….”

“싫어.”

“……제가 한 얘기, 이해하셨잖아요?”

실뱅이 거의 애원하듯 말했으나 벨레스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해했고, 싫어. 그리고 탈영도 허락할 수 없겠는데.”

“왜…….”

“모르고 있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 위험에 당하지는 않아. 실뱅.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

실뱅은 입을 다물었다. 기억한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동자에서 사라지던 생명의 빛, 이미 마비됐을 터인 후각을 자극하는 혈향. 손 안에서 사라지던 온기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열세 번의 죽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벨레스의 손이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말해 줘. 무슨 일이 있을 지 알고 있다면 대책도 있을 테니까.”

“……그러다 이번에도 실패하면요? 안전한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벨레스는 실뱅을 바라보았다. 열세 번의 반복 끝에 저런 소리를 하게 된 사람에게 자신이 할 말은 다소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벨레스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다시 알려 줘. 믿을 테니까.”

실뱅은 그 다시라는 말의 의미를, 믿겠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끔찍한 스케일의 제안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신의 힘을 다루는 사람이라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다시……라고요.”

“그래. 다시. 도와 줄 테니까.”

벨레스가 손을 내밀었다. 실뱅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행위다. 두 사람이 각각 가진 시간의 고리. 벨레스는 그것을 함께 맞물려 돌려 보자고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다.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나 실뱅은 저도 모르는 새에 손을 뻗었다. 

“……당신 앞에서는 늘 말이고 행동이고 제 마음대로는 안 된단 말이죠. 분명 후회할 것 같지만……좋습니다. 당신의 제안이니까. 그래도 가급적이면 한 번으로 끝내 주세요.”






실뱅은 벨레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남성이 여성의 방을 찾아가기에는 적절치 못한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선생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쉬고 있었던 듯 편한 옷을 입은 벨레스가 문 뒤로 얼굴을 내밀었다.

“실뱅? 할 말이라니?”

의아함만을 담은 얼굴을 향해, 실뱅이 씩 웃었다.

“당신이 전해 달라고 맡겨 놓은 얘기가 있어서요.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설명은 장황하지는 않았고 찻잔은 아직 따듯했다. 벨레스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그 온기를 느끼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 설명, 나한테 하는 거 몇 번쨰야?”

실뱅의 입가에 쭉 여유롭게 걸려 있던 미소가 진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실뱅이 그 웃음을 그대로 문 채 대답했다.

“선생님은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요. 그 이후로 세 번째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거든요. 아, 참고로 이 말은 이번에 처음 한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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