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집의 번외 1. 하이르네 연애조작단 ∼푸른 달이 뜨는 밤.


 

“그래서, 지금 전하께서 아가씨 곁에서 주무시고 계신다고?”

왼쪽 눈가에 큰 흉터가 있는 장년의 남자, 북부 검은 숲을 지키는 높바람 사슴 기사단의 사령관 카일락 룬이 무시무시하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해의 소지가 가득한 표현이로군요. 전하와 아가씨의 명예가 걸렸는데 정확하게 말씀하셔야지요. 소파에서 잠든 아가씨가 불편해 보여서 어깨를 빌려주시다 잠깐 잠드신 거라고.”

단안경을 쓴 노년의 남자, 공저의 집사인 알프레드 진이 살벌한 어조로 그 말을 정정했다. 눈가의 흉터를 사납게 꿈틀거린 카일락은 그렇지 않아도 낮은 목소리를 더더욱 낮추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요. 모든 일에는 순서와 방법이라는 게 있는데.”

카일락과 알프레드가 서로 사납게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본, 붉은 오소리 부대의 대장 레이 칼슨이 한 손을 번쩍 들었다.

나 할 말이 있소! 열렬한 몸짓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카일락과 알프레드는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가 여자와 한 침대에 들었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지. 나는 전하를 난봉꾼으로 기른 기억이 없네.”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전하와 아가씨께서 잠든 곳이 침대가 아니라 소파인 점도 있고, 의도하신 뜻의 잠자리는 정혼 이후에나 가능한 일 아닙니까.”

“당연한 말을.”

“그러니까 정혼부터 해야지요. 언제까지 저렇게 손만 잡고 자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북부산 흑단을 여기까지 가져와 손수 조각한 침대가 언제까지 주인을 찾지 못하고 대공비 전하께서 쓰실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청소는 하루하루 잘하고 있나?”

“물론이지요.”

“그럼 당장 두 분을 옮겨버리면 될 일 아닌가.”

“순서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어쨌든 약혼이라도 먼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언뜻 싸우는 것 같은 분위기지만 그냥 둘 다 말투가 안 좋을 뿐. 세상 둘도 없는 한 쌍처럼 죽이 척척 맞아 헛물을 사발로 들이키는 중이다.

그 사실을 아는 칼슨은 허허허 웃었다.

안 되겠다. 이러다 아가씨가 알면 이분들 팔다리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잘라야지.

“저기요. 사슴 장군님, 참매 영감님.”

둘 다 들을 때마다 질색하는 별칭을 부르자 살벌한 시선이 돌아왔다. 저 눈빛의 의미가 어디 상급자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어?! 라는 것을 아는 칼슨은 양손을 들어올렸다.

“진정들 하시고. 전하와 아가씨 의견은 묻지도 않고 옆에서 이래봤자 역효과만 난다고요. 연애 한 번도 안 해보신 분들처럼 왜 이리 급하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던 칼슨은 칼날처럼 변하는 눈빛들을 보며 아차 했다. 하이르네 검은 숲에서도 북부라 일컬어지는 하이른 사람에게 있어서 일생에 연애 상대라고는 반려자뿐이었다. 그러므로 연애는 약혼 혹은 혼인하고 나서 하는 것이었다.

자기 사람도 아닌 여자에게 마음을 써주며 애정과 연정을 바쳐야 할 이유도 없다고 굳게 믿는 이 남자들에게 약혼 이전의 연애 운운은 한 마디로 잡소리였다.

이러니 그 녀석이 남자든 여자든 곁에 가까이도 못 오게 하지.

칼슨은 쯧쯧 혀를 찼다.

“제가 근래 아가씨를 보필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가씨 의중을 이것저것 여쭈어보고 답도 들었는데요.”

본론을 꺼내고 나서야 사나운 눈빛들이 좀 가라앉았다.

“그전에 장군님하고 영감님에게 확인받아야 할 게 있습니다.”

미심쩍은 얼굴을 한 이들이 생각보다 진지한 눈을 하고 있는 칼슨을 보고는 말해보라는 허락을 내렸다.

“진짜, 아가씨가 여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언뜻 이상하게 들리는 질문이라는 것은 칼슨도 알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말씀하시라는 듯 알프레드가 카일락을 향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카일락은 그에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전하께 보통 사람처럼 잠들고 깨어나는 평온한 아침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면, 그 상대가 어떤 이라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알프레드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께서 오신 이후로 전하께서 명확하게 안정되시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버릇없는 짐승 새…… 크흠흠, 노아 젠을 확실히 제압하신 분이신 터라.”

매사 점잖은 알프레드의 입에서 악의가 철철 넘치는 단어 하나가 스치듯 지났지만 카일락과 칼슨은 모르는 척했다.

이 공저에서 노아 젠을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 하고 외치면, 알프레드가 제일 먼저 앞으로 뛰쳐나가 손을 들려고 하는 모든 이들을 쳐내며 양손 들고 나요! 하고 외칠 것이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노아 젠이 대공의 목에 남긴 상처를 하나하나 돌본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이기 때문이었다.

울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으니 혀끝 꾹꾹 씹어가며 버틴 세월을 끝내준 이가 바로 푸른 달이 뜬 어느 날 갑자기 공저의 벽을 허물며 나타난 ‘아가씨’였다.

알프레드는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불꽃처럼 용맹하신 그분께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카일락은 그러한 알프레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역시나 진지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 된 칼슨은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아가씨는 붉은 오소리 부대의 부대원들이 경애를 표하며 애교 섞인 주접을 부릴 때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질색하는 표정치고는 마치 말썽부리는 강아지를 보는 듯 너그러운 구석이 있어서 마음 놓고 응석을 부리는 것도 있지만.

실상 이 사슴 대장과 참매 영감이 오소리들보다 더 극성이라는 것을 알아줘야 할 텐데.

뭐, 그날 아가씨는 그럴 만했지.

칼슨은 저도 모르게 카일락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그날’, 푸른 달이 뜨던 어느 날 밤을 나란히 떠올렸다.

대공의 측근들에게 ‘푸른 달이 뜨는 밤’은 일 년에 두세 번, 언제라고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주기로 찾아오는 끔찍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가용 인력이 부족한 수도에서 푸른 달이 뜨면, 설원 늑대 기사들 중 반이 부상으로 쓸려나가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며 운이 나쁠 경우에는 은퇴해야 하는 상처를 입는 경우도 발생했다.

차라리 북부에 있다면 풀어놓고 경계하면 될 일인데, 장소가 수도라 상황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마수 사냥에 특화된 훈련을 받는 붉은 오소리 부대까지 불려왔다. 그리고 붉은 오소리 부대가 합류했는데도 대처가 되지 않을 만큼 점점 악화되었다.

이러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주군을 잃게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목까지 차올랐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기사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위험이 닥치면 몸이라도 던져서 방패라도 되어야 하는데, 그 짧은 방패 역할도 하지 못할 만큼 무력한 자들이 되어 보내야 하는 오늘 하루가 길고도 끔찍했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기에 설원 늑대 기사단과 붉은 오소리 부대가 연계하여 미쳐 날뛸 짐승 하나를 잡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은퇴할 만한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죽지만은 말자며 피 말리는 밤을 맞이하던 그때.

높다란 소리가 들렸다.

분에 넘쳐 내지르는 비명인 듯, 슬픔에 질려 부르짖는 울음인 듯.

듣는 것만으로 뒷목이 쭈뼛 서고 등줄기가 움츠러드는 소리였다. 검은 숲의 상급 마수를 사냥하는 자들에게도 공포를 느끼게 하는 괴성이 이 밤을 온통 검고 붉게 물들일 것이다.

일러도 늦어도 안 되는 진압 시기를 가늠하며 긴장으로 등줄기를 뻣뻣하게 굳히며 기다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괴성이 그쳤다.

얼어붙은 것 같은 침묵이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쾅!

공저의 벽 한쪽이 큰소리와 함께 허물어지며 파편과 함께 날아든 무언가가 정원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허물어진 공저 벽 안에서 누군가가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하, 이게 웬 오지랖인지.

새까만 암행복으로 몸을 감싼, 호리호리한 체형의 소년…… 아니 소녀? 목소리는 살짝 낮지만 맑은 미성이었다. 목소리만으로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데, 찢긴 복면을 아무렇게나 걷어내는 손길을 따라 드러난 얼굴은 더더욱 모호한 느낌이 들게 하는 앳된 얼굴이었다.

불꽃 같은 붉은 머리칼과 휘광이 어린 금빛 눈동자.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미지의 감각은 위기감을 불러오고, 위기감은 반사적인 대응을 불러왔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무기를 들었다.

오랜 세월 몸에 익힌 훈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쉿.

그자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며 내는 낮은 바람 소리에 온몸이 굳었다. 눈은 정면을 향했고, 무기를 든 손에는 힘이 빠지지 않았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인하여 드는 압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이른 방벽으로 다가갈수록 마수는 더더욱 커지고 강력해지기 마련.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전부 그러한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 공포를 이겨내는 법을 배운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는 몸을 굳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를 이겨내고 앞으로 달려 나가도록 훈련받은 이들을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고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을 본 그자는 눈가를 휘며 웃었다.

-너희는 저 멍청한 짐승을 손보고 난 후에 이야기하지.

그것으로 설원 늑대 기사단과 붉은 오소리 부대에게서 관심을 끊어내는 자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 바로 지척에 무릎을 굽히며 앉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금발을 우악스럽게 잡고 들어 올렸다.

휘광이 흘러넘치는 금빛 눈동자가 저를 올려다보는 광기 어린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거 봐라. 그대로네?

엷은 웃음소리를 흘리는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잔혹했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선현의 말씀이 있어요. 아직 덜 맞았으니까 눈이 이 모양이겠지? 그럼 더 맞아야지.

그토록 호리호리한 몸으로 저보다 더 큰 사람을 들고 내던지는 게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따지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과 빠르기였다.

아무리 한 번 제압을 당했다 하더라도 ‘저’ 노아 젠이 방어에만 급급했다. 그것도 부족해 일부러 빗맞히는 공격에 번번이 방어가 풀리고 나뒹굴었다. 걷어차이면 허공을 날고 멱살 잡히면 먼지가 나도록 땅바닥에 메쳐졌다.

다들 눈을 의심했다.

노아 젠, 설원 늑대 기사단의 말단 기사.

하지만 대공을 모시는 자들은 그 누구도 노아 젠을 설원 늑대 기사단의 기사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하이른 방벽 너머에서 건너온 마수였다.

푸른 달이 뜰 때마다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 껍질을 벗어던지고 짐승답게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는.

전설 속에 존재하는 마수가 마치 맥없는 사냥감처럼 누군가에게 차이고 잡혀 내던져지고 있었다.

-이야. 튼튼하다, 너?

그 말 그대로, 노아 젠은 해가 지날수록 이빨도 발톱도 날카로워지고 온몸이 단단해졌다. 북부 하이른 장벽을 지키며 어떠한 마수가 닥치더라도 앞서 나가 죽이도록 훈련을 받은 자들이 막아내는 것에 급급하여 사상자가 나올 만큼.

물론 대공의 기사들도 마냥 허수아비는 아니었기에, 노아 젠을 죽이고자 했다면 목숨 여럿 버려가며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아 젠이 하필 검은 숲의 수호수라서.

검은 숲의 숲지기가 일생에 한 번, 죽음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한 맹약자라서.

-저만한 인도자가 피 흘려가며 재련한 수호자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말이야.

퍽! 발길질 한 번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널브러진 이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머리 곳곳을 돌아가며 집중적으로 후려치는 타격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단단해도 편석으로 다듬은 정원 바닥을 일격에 부수는 힘으로 얻어맞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보다 키가 큰 이의 뒷목을 잡아 들어 올리는 이의 몸짓은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두드려 맞고도 찢기거나 멍든 구석 하나 없는 노아 젠의 얼굴을 들여다본 금빛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저 미련한 남자는 저딴 수식어를 달고도 인도자랍시고 수호자를 이끄는 본분을 지키려고 최소한의 반격도 하지 않고 버티는데.

분명 손바닥으로 후려치는데도 부대 자루 터져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너는 수호자라는 놈이, 그런 인도자를, 죽이려고 들어?!

쾅! 쾅! 쾅! 말에 맞추듯 있는 힘껏 머리를 내리찍는 동작이 이어지고 나서야, 핏방울이 몇 개 튀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굴을 마주 확인한 이는 하, 하고 긴 숨을 내쉬고는 노아 젠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형편없이 나뒹군 노아 젠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죽어가는 목소리에 깃든 것은 분노였고, 서러움이었다.

-그냥 두어도…… 죽어. 그 끔찍한 것들에 휩싸여서, 끝도 없이 고통스러워 하다……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그래서. 편히 죽여주고 싶었다?

하하하, 높다란 웃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침묵이 사위를 뒤덮었다.

-네 주인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주인…… 아니다.

-주인 아니면. 친구고, 형제잖아.

휘광 어린 금빛 눈동자가 칼날 같은 미소를 그려내었다.

-더 나빠, 개새끼야.

그동안 그들이 수도 없이 생각하고 되뇌며 곱씹었던 말들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입밖으로 내뱉는 것마저 죄스러웠던 말들이었다.

-아직 입이 나불거리는 걸 보면 덜 맞았다. 더 맞아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간결하고도 강력한 손속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그 심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표현뿐이었다.

물론 다음은 너희지? 하고 돌아오는 시선에 심장 멎을 뻔했지만.

일제히 회상을 끝낸 이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 아가씨가 우리도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공격하셨으면 방어 대형으로 한 번은 막고 다음 타에 죽었겠지.”

“훈련을 잘해두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본인들의 감상을 줄줄줄 늘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설원 늑대 기사단과 붉은 오소리 부대는 하이른 방벽 바로 앞에서나 발견할 법한 최상급 마수를 상대로 하는 방어 대형을 만든 상태였다.

의지가 무력화되었으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고 무기를 놓지도 않았으며 다음을 대비하는 이들을 확인한 후에야 금빛 눈동자에 깃든 분노가 살짝 풀렸다.

너덜너덜해져 결국 정신을 놓은 노아 젠을 한 손에 쥔 이가 다른 손을 까닥였다.

-영감님.

이 영감님은 알프레드였다.

-여기서 영감님이 책임자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을까. 감으로 찍은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공저의 집사직을 맡고 있다지만 알프레드는 하이른 방벽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순찰대, 하얀 참매 부대의 전대 수장이었다. 이런 식의 마수 사냥이라면 설원 늑대 기사단도 한 수 접어주는 게 당연했다.

갑작스러운 지목에 몸이 풀린 알프레드는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위압감에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공저의 집사, 알프레드 진입니다. 공저가 부산하여 손님을 환대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분이시네. 밤손님도 손님으로 쳐주십니까?

맑은 미성에 깃든 웃음기는 진심으로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든 알프레드는 그 얼굴을 보며 방금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아 젠을 후려갈기던 이가 정말 어린 소년 혹은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웃는 게 무척이나 예쁜.

사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심한 손길로 품 안에 든 약병 하나를 던져주며 저 안의 미련한 남자에게 먹이면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좋지 않을 수가. 게다가 이 멍청한 개도 앞으로 푸른 달이 뜰 때 전처럼 날뛰지 않을 것이라 듣기 좋은 장담까지 해주는 상황이 아닌가.

귀인이다.

이 사람을 잡아야 한다.

잡지 못한다면 엎드려 애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알프레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급하게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냐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귀인은 그야말로 밤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손에 든 약병과 너덜너덜해져 정신을 잃은 미친개 한 마리, 그리고 뻥 뚫린 공저의 벽과 그 안에서 십여 년 만에 푸른 달이 떴는데도 편안하게 잠든 대공이었다.

꿈에서도 그리지 못했던 평온이었다.

이후 이 귀인을 찾아내기 위해 돈과 노력을 얼마나 퍼부었는지는 대충 생략하겠다.

아마 당사자가 들었다면 ‘그 돈을 나 준다고 했으면 내가 알아서 넙죽 나타나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백 번도 외쳤을 텐데!’하고 머리를 쥐어뜯을 만큼은 될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회담의 마지막 참석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설원 늑대 기사단의 단장인 에린 시안 발렌틴이었다.

“노아 젠을 묶어두느라 늦었습니다.”

어딘지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본 세 사람은 안타까이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심심한 위로에 발렌틴은 이내 표정을 풀고 부드러이 웃어 보였다.

“그래도 오늘은 아가씨께서 근처에 계셔서 수월했습니다.”

이게 무슨 제어 토템 같은 말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아가씨가 있고 없고에 따라 노아 젠이 크게 날뛰냐 아니냐가 갈렸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자라난 마수에게도 매가 약인 법이다.

“전하께서는 아가씨와 함께 계십니까?”

“집무실에서 같이 주무시고 계시지.”

오, 짧게 한 마디를 내놓은 발렌틴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집무실 근처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삼중으로 세우겠습니다.”

설원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이 전부 점잖다고 생각하는 아가씨가 이걸 봤어야 하는데. 칼슨은 아가씨가 오소리들을 볼 때마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는 얼굴을 하는 것도 제법 친근해서 좋지만, 저 늑대들을 볼 때 짓는 은은한 미소도 제법 탐났다.

하지만 욕심내서 다 가질 수 없는 일이니 적당히 해두기로 하고.

“그럼 올 사람 다 온 건가.”

“발렌틴 단장에게는 묻지 않으십니까?”

카일락과 알프레드의 눈총을 받은 칼슨은 전에 이미 답을 받았다고 답해주었다. 눈치 없으면 죽어야 하는 설원 늑대 기사단의 단장은 오늘의 의제를 떠올리고는 약 3초의 고찰 끝에 그때 했던 답을 고스란히 읊었다.

“저는 그저 아가씨를 정식으로 대공비 전하라 부르며 모시게 될 날을 마음 깊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저게 정석이지. 칼슨은 물색없이 굴었다가 아가씨한테 머리 쪼개질 뻔한 제 부하를 떠올리고는 킬킬 웃었다.

“제가 아가씨랑 이것저것 대화하다가 아가씨의 정체가 뭔지 약간 짐작 가는 부분을 찾았거든요.”

무슨 소리냐는 칼 같은 시선이 단박에 돌아왔다. 하지만 칼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답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못을 박았다.

“확실시되면 말씀드리고. 하여간 중요한 건 하나예요. 모든 것보다 우선해서 아가씨가 그어놓은 ‘내 사람’이라는 선 안에 우리 전하를 밀어 넣어야 합니다. 짠하고 안타까워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키워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 이거죠.”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발렌틴은 그럴싸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전형적인 북부 하이른 사람인 카일락과 알프레드는 미간에 금을 그었다.

남자가 짠하고 안타까워 보이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대체 그 덩치에 그만한 무력에 그러한 직위에 권력과 재력을 다 가지고 있는 데다가 매사 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짠하고 안타깝게 보이게 만드는 게 가능한가? 하는 원초적인 의문에 사로잡힌 것이다.

물론 본인들 눈에는 이토록 안타깝고 아픈 손가락이 세상 둘도 없을 터이나, 그야 대공이 조그마할 때부터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고.

“그거, 어떻게…… 가능하긴 한 건가?”

“길고양이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내가 키워야겠다, 이게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칼슨은 희한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어조로 답했다.

“돼요. 암요, 되고 말고.”

사고방식이 완고한 구석이 있는 장군님과 영감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야 했다.

“우리 조카가 보기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거든요. 아가씨가 본인 입으로 데리고 살 남자는 귀여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허술하게 보이면 충분할 겁니다.”

저거 또 저런다는 힐난의 시선이 싸늘하게 이어졌지만 칼슨은 꿋꿋했다. 내 조카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귀여웠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오래된 주장이었다.

도끼눈을 뜨는 하이른 남자들과 달리 발렌틴은 다른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보다 그냥 대공저에 황금으로 탑을 쌓아두고 오시면 드리겠다고 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다 쓰면 떠나실걸요. 그리고 아가씨, 돈 쓰는 법을 많이 알아요. 얼마가 쌓여 있어도 사흘 내로 다 쓸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럴법하여 발렌틴은 의견철회를 했다.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만 그만큼 빠르게 태워버리는 아가씨의 기행을 가까이서 봤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전하를 반려자로 염두에 두지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발렌틴은 상식적인 의문을 꺼내었다. 그러자 하이른 남자 둘과 조카 고슴도치는 머리를 갸웃했다.

어떻게 우리 전하를 마다할 수가 있지?

그런 의문이 가득 담긴 몸짓에 이 자리의 유일한 여성이자 그나마 대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인물은 약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한 사람의 인물로 봐도 대공은 여러모로 잘난 사내이며 경애하는 주군이기는 하지만 남편감으로는, 글쎄. 어쨌거나 발렌틴의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 입장은 애걸복걸하여 매달려서라도 아가씨를 붙잡아야 하나 아가씨에게 우리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아가씨가 그어놓은 선 안에 전하를 밀어 넣자는 칼슨 대장의 말에 동의하지만, 적당히 해야 합니다. 발목 잡을 듯이 매달렸다가는 구해준 은혜를 모르는 몹쓸 것들이라며 털어내실 수 있어요.”

가감 없는 표현에 세 남자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가씨는 수완이 보통이 아닌지라 수틀린다 싶으면 가진 것 다 던져 버리고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삶을 새로 시작해도 별로 부담이 없었다. 너무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질린 나머지 떠나야겠다 마음먹으면 붙잡을 정당한 연유가 없는 바였다.

역시 약혼. 역시 혼인. 빠르게, 빠르게.

세 사람이 동시에 떠올리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린 발렌틴은 울분의 주먹을 쥐었다가 애써 풀었다.

“아가씨가 전하 곁에 머물 이유가 될 만한 다른 것들을 생각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침묵.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의견을 발의한 발렌틴마저도 막막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칼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아가씨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당장은 아무런 여유도 나지 않아 거절하실 수도 있어요.”

정확하게는 이 ‘아가씨’는 아니지만. 뭐, 둘 다 본인이면 맞나? 맞겠지? 칼슨은 본인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누굽니까?”

“그건 모르고.”

지금 그걸 의견이라고 꺼냈냐며 부라리는 시선이 세 쌍이었지만 여전히 당당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든 그 사람 찾고 나면 시간이 남을 것 아닙니까. 그때 북부로 가주십사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죠. 이 인물은 정에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애착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봐주는 범위가 제법 넓어요. 우리 전하를 최우선으로 밀고 나머지는 아무나 정을 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일단 쾌활하고 웃긴 우리 애들이 밀착해서 주접과 애교를-.”

“기각!”

“아, 왜요! 아가씨가 우리 애들을 제법 귀여워하는데!”

“붙으려는 정도 떨어진다. 기각!”

카일락과 칼슨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발렌틴이 알프레드를 향해 말을 걸었다.

“집사님.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은 파악하셨습니까?”

“예. 견과를 가득 넣어 구운 쿠키를 오늘 세 접시나 드셨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전에 간식류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들리시는 제과점을 파악해보라 했더니, 디저트는 대개 잘 드신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알프레드는 발렌틴이 줄줄이 늘어놓는 음식 종류를 귀 쫑긋 세우며 새겨들었다. 호탕하게도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으나 개중 선호하는 게 매운 기가 살짝 있는 음식이라는 말에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야 북부 음식들이 대체로 그러하니 제국 사람들에게 낯선 향료를 쓰는 경우만 조금 맛을 순화해서 드리면 되겠군요.”

“예. 음식이 입에 맞아야 오래 머물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제가 좀 더 알아본 바로는…….”

설원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 고급 인력인 설원 늑대 기사단을 염탐꾼으로 쓰는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전직 하얀 참매 부대의 수장이었던 집사는 그저 잘했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검은 숲의 마수들을 척살하는 높바람 사슴 기사단의 사령관과 붉은 오소리 부대의 대장은 서로 마주 보면서, 장군님도 내 조카라고 나이 어린 숙부가 주장하는 바에 어디 명령체계 헷갈리게 항렬을 들고 오느냐고 나이 많은 조카가 불호령을 토해내며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홉 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죽은 낯빛으로 대공의 관을 받들던 아이는.

작은 손으로 손가락을 잼잼 쥐어주던 조카였고, 험악한 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님이라 부르며 반겨주던 육촌 동생이었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주군이 신신당부를 하며 맡겼던 어린 손자였고, 훈련용 칼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고 있던 옆집 꼬마였다.

그런 아이가 본인이 짓지도 않은 죄를 무거운 관과 함께 머리에 쓰며 그들의 주군이 된 순간부터, 운이 좋아 대공저에 있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그들은 그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끔찍했던 기억을 잊고 평온해지기를.

잠조차도 깊이 들지 못하는 주군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그 말 하나를 그토록 기원했다. 1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소리 내어 내뱉지도 못했던 바람을 이룰 수 있는 단서를 잡았으니 무엇이든 다 하리라.

그들은 오늘도 머리를 맞대며 불꽃 같은 의견들을 표출했다.

그 의견들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지 하지 못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바이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주군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며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등장인물 여러분.

앞서 설명 1.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글은 유혈 19금 스릴러 판타지물의 배경.

사실 유혈 19금이라고 놓고 유혈도 별로 많지 않은 내용을 봐서 아시겠지만.

이 글에는 R도 L도 없음을 공표하는 바입니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_-*

 

 

==========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편으로 뵙겠습니다.(__)


이라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