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우레가 연이어 들렸다. 기와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또한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바깥 날씨에 동연전東連殿의 궁인들은 습관처럼 말을 아끼고 발소리를 죽였다. 그러나 정작 모두의 명命줄을 쥐고 있는 사내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황실을 상징하는 모란 수繡 위에 비스듬히 누운 사내의 분위기는 매우 기묘했다. 우아하다 못해 찬연한 낯의 미인임에도, 너른 가슴팍을 내보이는 야장夜裝이나 권태로이 늘어져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자였다. 그것이 지나치게 귀한 사내의 신분 때문인지, 타고나길 나태한 성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때 아닌 여름비는 좀처럼 잦아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침부터 열려있던 창문으로 비가 새어들자 사내의 눈치를 보던 환관이 손을 뻗을 때였다.



“ 열어둬.”



낮은 목소리로 나른히 끝맺는 어투는 언뜻 고아하게 들렸으나 궁인들은 그를 듣자마자 파랗게 질린 낯을 했다. 바닥에 꿇어앉은 환관의 굽은 등이 벌벌 떨고 있었다.



“ 높으신 황태자 전하께 사죄드리옵니다.”

“ ... ... ”



황태자, 하 예藝는 제 앞에 납작 엎드린 환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보라색 홍채는 보석처럼 아름다웠으나 온도 없는 시선이 더해지니 도무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이었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첨언 없이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환관이 닫으려 했던 그 창窓이었다. 바람이 거세어 얇은 옷자락이 아무렇게나 나부꼈다. 궁인들의 마음도 그처럼 요동쳤으나 감히 누구 하나 나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천라가 그리 좋으셨는가. 석별惜別조차 요란해.”



창밖으로 배꽃 같은 손이 뻗쳤다. 손에 잡힐 것 같던 빗방울은 당연히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버렸다. 그 위태로운 광경에 귀하신 몸, 혹여 고뿔이라도 걸릴까 봐 궁인들만 전전긍긍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즈음, 객이 찾아들었다.



“ 황태자 전하. 2황자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손을 거두어들인 사내의 시선이 유유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객을 들이라는 윤허는 없었다. 옹기종기 모여 선 지밀나인들이 초조한 낯으로 문을 응시했으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굳게 닫힌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한 황자가 먼저 움직였다.



“ 송구하오나 시급한 일입니다. 이 아우, 무례를 범하옵니다.”

“ 황자, 아니 되십니다!”

“ 감히 어느 누가 내 앞을 가로막느냐!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라.”



격앙된 목소리와 달리 문을 젖히는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엄중한 황가의 교육을 받은 티가 나는 것이다. 쓸데없이 성실한 아우 덕에 오늘 처음으로 예의 입술이 휘었다. 그도 잠시뿐이었지만.


문이 열리자 다른 배를 빌어 태어난 형제의 시선이 부딪혔다. 각자의 모친을 닮은 외양만큼이나 시선의 온도 차도 확연했다. 먼저 움직인 쪽은 허락 없이 들이닥친 황자였다. 비장한 얼굴로 황태자에게 다가선 그가 예를 갖췄다.



“ 천라의 2 황자, 하 염. 높으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 염이 제 쪽으로 뻗어진 손끝에 입 맞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 아무리 황가의 방식이 뼛속 깊이 새겨졌대도 그렇지, 네 피가 묻을 손에 입 맞추다니.”

“ 이런 착한 아우님을 보았나.”



말투는 나긋하고 우아했으나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염의 얼굴이 수치로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해본 일이 없으니 수치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릎을 꿇은 염이 갑자기 제 이마를 바닥에 내리찧기 시작했다. 쾅. 쾅. 다시 한 번 . 갑작스러운 황자의 자해에 긴장한 궁인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제 주인이 어찌 반응할지 감히 예상도 가지 않아서다.

혈흔으로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무미하게 내려다보던 예가 염의 머리칼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억지로 들린 얼굴은 깨진 이마에서 흐른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 이런, 아우님 꼴이 말이 아니군.”

“ ... 저 하나로 끝내주십시오.”



어머니만은 살려야 했다. 그분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없어도 살 수 있을 테지만, 유약한 자신은 그녀의 보호 없인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 ... 제발, 형님!”



피를 흘리며 간청하는데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얼굴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차라리 광기라도 묻어있다면 그나마 사람 같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리 건조한 낯을 한단 말인가. 바짝 잡힌 머리칼이 더는 아프지 않았다. 그보다는 생리적인 공포가 먼저였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듯, 염이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 부디 성총을 베푸소서!”

“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부황께서 승하하신 모양이지.”



느긋하게 끌리는 목소리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에 물든 아우의 얼굴을 찬찬히 감상하던 예가 그 머리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 좋았나?”



의미 모를 물음에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예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머리칼을 쥔 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 ...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 내 벗에게 안겨 앙앙, 잘도 울어대던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순한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 그것을 어찌,”

“ 설마 황궁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모를까. 답지 않게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예가 쥐고 있던 머리칼을 내던지며 팔을 뻗었다. 곧은 손가락 끝이 벽에 걸린 검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방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몹시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검집도 없이 거기 걸려 있었다.



" 분에 넘치도록 욕심을 냈으니 벌을 받아야지?"



할 말을 잃은 아우를 지켜보던 예의 입매가 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청수한 웃음이었다.



“ 너 하나로 끝내 달라 하였나.”

“ 유언이라면 들어줄밖에. 그것이 형제의 정 아니겠어.”



황태자의 윤허 없이 이곳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최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가 내 목을 베어야 한다고?

비척비척 일어나 걷는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두렵고 황망하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염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용기가 나질 않았다. 염은 마지막 지푸라기를 쥐어 잡듯, 예에게 간청하였다.



“ 겁 많은 이 아우를 도와주십시오.”

“ 염아.”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겁에 질려있던 낯에 일말의 기대가 떠올랐다. 그런 아우를 응시하던 예가 제 눈을 아려하게 휘어 접으며 속삭였다.



“ 희헌이 건넨 산제散劑(*가루약)를 어찌했지?”



영명한 염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희망의 빛은 완전히 사그라지어 이제는 절망의 기색만이 완연했다. 바들바들 떨리던 검 끝의 움직임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연심에 눈이 멀어 부황을 죽였으니 어찌 살길 바라겠는가.

감았던 눈을 뜨자 저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권태로워 사람 같지 않은 눈이었다.



“ 부디 영원을 누리소서!!!”



목소리를 낼 때마다 깊게 베인 목이 붉은 피를 뿜었다. 저주에 가까운 축원이었다. 생生이 꺼져 이제는 몸뚱이에 불과한 것이 딱딱한 바닥에 둔탁하게 부딪혔다. 참혹한 광경이었으나 그를 지켜보는 예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것의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여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을 뿐이다.



“ 선황先皇께 갈 것이다.”



황태자가 걸음을 옮기자 동연전의 궁인들이 줄지어 뒤를 따랐다. 죽어 나자빠진 황자의 시체를 정리하는 것보단 제 주인을 따르는 쪽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부산한 발소리가 멎은 이후, 동연전은 원래의 고요를 되찾았다. 굳어버린 핏물이 닦이고 사체가 치워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




천라 104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여름날. 7대 황제, 연제然帝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황망한 죽음이었다. 빗물에 미끄러져 돌계단에 머리를 부딪친 뒤, 다시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약소국에 불과했던 천라를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키워낸 역사의 성군조차 죽음을 피해갈 순 없었다. 황제의 자리가 갑자기 공석이 되었으니, 황위는 자연히 황태자가 승계했다. 비록 연제가 승하하기 몇 년 전부터 황태자와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다른 황자를 새로운 후계로 점찍어 놓았더라도.

백성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신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새로운 황제를 맞이했다.


마침내 천라 107년의 수선화 피는 봄날, 천라국 제8대 황제가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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