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린 소서리스 모험가, 이름 고정. 호감도 신뢰 단계, 스토리 스포일러 딱히 없음. 


  "…역시 좋아."

  오랜만에 루테란 성으로 귀환한 뒤 짧은 휴식 시간을 즐기던 시아라가 집무를 보고 있던 실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차 싶었는지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늦었는지 실리안이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방해해서 미안. 그, 실리안의 머리칼이 예쁜 금색이라 좋구나, 하고.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 해."

  아아, 저질렀다. 작게 말했다고는 해도 사람들이 있는 알현실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시아라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커다란 대리석 기둥 뒤로 숨었다. 그나마 호사가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성내에 핑크빛 소문이 퍼질 뻔했다.

  드물게 사고 쳤다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시아라의 반응을 보고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 실리안은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얌전히 입을 닫았다. 루테란의 재건만으로도 벅찬 지금, 아직 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나돌아서 좋은 것이 없었다. 일단 입막음은 해 둘까 싶어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바라보며 서 있던 하셀링크에게 쓴웃음으로 돌려주며 눈짓했다. 그는 현명한 자이니, 문제가 없도록 도와주겠지. 이 일에 관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천천히 신중하게 진행하고 싶었다.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사람들 시선에 노출되는 일은 꽤 익숙해졌지만,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특히 찔리는 일이 있을 때는 더욱더. 따라붙는 시선이 사라지자 그제야 마음을 놓은 시아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주제는 당연히 실리안. 아직은 신뢰하는 친구 사이일 뿐이기 때문에 제대로 전부 말할 수 없었지만, 사실은 머리칼 외에도 좋아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커다란 손과 널찍한 등, 웃을 때 조금 가늘어지는 눈,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만날 때마다 반겨주는 환한 웃음, 심지어 그가 불러주는 제 이름까지.

  "시아라."

  그래, 지금처럼. 멍하니 생각하고 있다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휙 돌아본 시아라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시, 실…리안?"
  "자네에게 꼬리가 달린 줄은 몰랐네만."
  "……으아."

  몸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삐죽 튀어나온 옷자락이 보였던 모양이었다. 창피한 마음에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왕의 기사가 다 뭐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의식만 하면 이렇게 숙맥이 되는데. 아직 친구로서 있을 수 있도록 마음을 더 철저히 숨겨야 했다. 제발 붉어진 얼굴만큼은 들키지 않기를. 시아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태연한 척 웃었다.

  "일은 다 끝난 거야?"
  "그래, 시급한 건 없군. 굳이 말하자면 왕의 기사에게 근황을 듣는 일이 남았지. 이야기해 주겠나? 바깥 공기를 쐴 겸 산책이라도 하면서 말일세."


  왕궁을 벗어나 광장까지 산책을 즐기며 그간 있었던 일을 실리안에게 전해 주었다. 동물이 말을 하는 신기한 섬의 이야기, 외딴섬에 홀로 사는 소녀의 이야기, 다른 대륙의 정세와 새로이 만난 인연들, 때로는 실리안이 미처 다 돌보지 못한 루테란 이곳저곳의 이야기들까지. 보고서는 종종 보내고 있었지만 역시 얼굴을 보고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건성으로 듣는 일 없이 언제나 적절한 맞장구와 함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좋은 청자이기도 했고 말이다.

  "최근에는 오랜만에 해무리 언덕에 다녀왔는데, 그곳의 해바라기밭은 여전히 멋지더라. 노을이 지니까 온통 세상이 금빛으로 물들어서 좋았어."
  "자네가 좋아한다던 내 머리카락 색처럼 말인가?"
  "……실리아안."
  "하하, 나도 자네의 머리칼을 좋아해. 자네의 머리카락을 보면 물결치는 바닷빛 같다는 생각이 드네."

  시아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버렸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실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짓궂게 웃고만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래?'라고 대꾸해야 했는데. 새빨개진 얼굴로 이제 와서 뻔뻔하게 대답하기에는 이미 늦었겠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흘겨보면서 입술을 삐죽이자, 그가 쿡쿡 웃더니 시아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의 그런 모습은 제법 새롭군. 자네가 내게 장난을 치는 이유를 알겠어. 좋은 것을 배웠네,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지."
  "이런 건 배우지 말아줘, 깜짝 놀란단 말이야."
  "시아라 자네가 먼저 그만둔다면 고려해 보겠네."

  자연스레 한 발짝 물러난 이의 곁에 다가서면서 '그건 싫어.'라고 대답하고 피식 웃었다. 이런 사소한 순간도 좋았다. 좋아하는 것이 참 많은데,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혹자는 그런 것 정도는 친구 사이에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하지 못하는 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친구 이상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아라는 언젠가 솔직히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아직은 비밀로 소중히 간직해 두기로 했다. 별의 개수만큼 많은 '좋아하는 것' 중에 최고는 너라는 그 말을.


*

  "이제 슬슬 돌아갈까. 미한이 찾고 있을 것 같군."
  "좋아."
  "그 '좋아'는 어떤 '좋아'인가?"
  "……실리안, 정말!"


드림러. 글 씁니다.

홍목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