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라는 규범적 도식이 견고하게 자리잡은 사회에서, 여성의 '여성애'는 존재해도 자각하기 어렵고, 어정쩡하게 자각한 후에도 제대로 된 형태가 되어 겉으로 나타나지 못한다. 설령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느끼게 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못한다. (만약 두 사람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그것은 헤테로섹슈얼의 '연애' 도식을 따르는 정도이다. 아직도 퀴어판에서는 부치-펨의 구분이 통용되고 있으며, (헤테로)연애 규범이 레즈연애에까지 적용된다.) 친구이자 여성동지인 사람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키스하거나, 때로는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다른 종류의 성애와 크게 구분되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성을 배제하고 '여자들끼리의 관계'를 찾는 움직임에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의 본질이 온전히 포함된다.


나는 은희가 영지선생님을 껴안으면서 말했던 '저 선생님 진짜 좋아해요' 에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은희는 집에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애비와 '나를 개 패듯이 패는' 오빠를 두고 있으며, 실제로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당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믿고 털어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단짝친구에게는 허망하게 배신당해버렸다. 은희의 주위에는 현재 기댈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 은희가 불시에 찾아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영지였다는 점에서, 나는 은희가 그에게 '우정(나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 지숙을 일시적으로 대신하는)'이나 '의지됨'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은희는 성적순으로 반을 나눠 수업을 하는 학교에 다니며 '노래방 대신 서울대를 가자' 를 큰소리로 몇 번이나 외치게 하는 담임을 두고 있다. 집에는 머리 좋고 공부 잘 하는 오빠가 있고, 그 오빠도 서울대를 가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서울대에 다니는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는 은희에게 경외와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은희의 오빠충이 서울대 캠퍼스 투어를 다녀온 날, 개비는 즈그아들이 샤대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우리아들 이대로 서울대 가면 되겠다'고 좋아하는데, 옆에서 묵묵히 밥만 먹던 은희가 '우리 한문학원 선생님도 거기 다니는데.'라고 말한다. 서울대에 갈 거라고 떠받들리는 성격 더러운 연년생-중3 오빠를 보면서, 진짜 서울대에 다니는 멋지고 신비로운 어른 비밀친구(?)를 떠올린 은희의 기분은 어땠을까?

게다가 영지선생님은 수술때문에 입원한 은희를 문병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은희에게 "너 이제 맞지 마, 어떻게든 맞서싸워"라며 든든한 편이 되어준다. 자세한 과거는 극중에 등장하지 않지만 어딘가 상처 많아보이는 영지가 여성 청소년인 동시에 폭력의 피해자인 은희에게 보내는 말에서, 나는 자매애와 여성간 연대의식을 읽어냈다.

그리고, 은희가 영지를 생각하는 여러가지 감정 안에 '성애적 감정'이 끼워져 있는지 아닌 지는 온전히 추측의 영역이지만, 나는 다음과같은 이유로 감독이 중학생-제자인 은희와 대학생-스승인 영지의 관계 속에서 아주 작은, 코딱지만큼의 '섹슈얼리티'를 독해할 수 있도록 의도했다고 생각한다.(나는 결코 이 10살 이상의 나이차이가 날 것 같은 성인과 미성년자의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먼저 나는, 은희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오는 유리의 대사-저 언니 진짜 좋아해요-는 레즈비언 성애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볼뽀뽀도 한다. '가족보다도 친구들보다도 언니가 더 좋다'는 말은 유리가 가진 성애적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저 선생님 진짜 좋아해요' '저 언니 진짜 좋아해요' 라는 두 대사의 모양이 비슷한 것이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관계 모두에 '성애'을 읽어낼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에 관해 고찰할 때, 걷는 도중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갑자기 멈추게 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레즈비언 영화'가 아닌 벌새에서, 심지어 남자친구를 사귀고 키스도 하는 여자 중학생 은희에게서 '레즈비언 성애와 결이 같은, subtle한 감정'을 읽어낼 건덕지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워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가장 최근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 우정이자 자매애이자 여성연대이자 성애적인 감정을 읽었었는데, 그것과 재질이 비슷한 감정선이 <벌새>안에서도 느껴졌다는 점이 좀 신기했다.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에는 언제나 동경, 우정, 자매애, 연대의식, 그리고 성애적 감정(신체접촉을 하고싶다든지)이 서로 떼어낼 수 없는 모양으로 섞여있다. 특히, 여성 개인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려고 할 때, '여성으로서 같은 처지를 공유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 이와 같은 양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은희는 왜 입원준비를 하면서, 자신이 일주일동안 쓸 소지품을 챙기는 것보다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챙기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리고 왜, 선생님께 자신의 입원소식을 알린 후에 선생님을 충동적으로 껴안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좋아한다고 말했을까? 왜 하루종일 계단에 앉아서 영지선생님을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알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을까? 여성과 여성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는 그저 '우정100%' 또는 '성애100%'라고 잘라서 말하기 힘든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김보라 감독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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