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장하는 인물, 지명, 회사 및 단체는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 지명, 회사 및 단체 등과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 15세 미만의 청소년이 열람하기에 부적절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일부 표준 맞춤법을 따르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눈에띈애는 일단 조각달의 의견대로 저주 완화 세공석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제작하기 위해 일어서자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조각달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 긴장에 온몸을 굳히고 있던 조각달이 제작하러 떠나고, 남은 사람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코스모스 사제 출신이면 신성 계열인데, 루치페로 스킬을 쓰면 암흑 계열이잖아요. 그러면 신성이랑 암흑이 거의 안 먹힌다는 소리 아니에요?”

“와, 아까 눈애 님이 보셨다던 그 스킬이 진짜 이단심문관 스킬인 거 아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파티에는 자연이 많아서…. 아, 호가 형. 아크 네이처도 자연 맞지?”

“그럴걸.”

“생각해 보면, 상대 팀이요. 걔네 거의 신성 아니면 암흑이잖아요. 걔네가 왔으면 진심 좆될 뻔.”

 

잠시 B팀의 앞날을 응원하는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그렇게 한참을 대화하다가 음, 하고 잠시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여휸이 해답을 내렸다.

 

“아무래도 화랑이 질서라 내가 상성이 별로일 거 같은데. 내가 멘탱 보고 형이 딜을 하는 게 낫겠다.”

“화랑 우질서 아니에요? 우질서나 자연이나 그게 그거일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요.”

“호가 님 자분 쓸 수 있던데, 제 생각도 호가 님이 딜로 빠지는 게 나을 듯요.”

“그리고 우리 팟이 근딜이 좀 많거든요. 신스 님 근딜로 오지 말고 원딜로 계속 남아 계시고.”

“……저, 죄송한데.”

 

여휸이 정리를 하는 사이에 지금껏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낙지가 조심히 손을 들었다. 어찌나 조용했는지, 애호가는 오늘 내내 그가 채팅이 아닌 음성 채팅하는 걸 처음 들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런 말도 없던 낙지가 입을 열자 전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잠시 당황한 눈을 하던 낙지가 조심히 입을 열어 의견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번 보스가 디버프 보스인 것 같은데, 그러면 저는 버프 쪽으로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스핏파는 파티 버프나 디버프 해제가 많으니까.”

“딜이 될까요? 즉사 디버프 깐다고 레전드 난이도가 된 건 아닐 텐데.”

 

딜보다 서포트에 집중하겠다는 낙지의 말에 히아신스가 난색을 보였다. 그사이 조각달이 제작을 끝내고 돌아왔기에, 우선 낙지의 의견대로 진행해 보고 딜이 부족하면 다시 조정하자는 식으로 의견이 모였다.

세공석 하나당 저주 디버프 다섯 번을 버틸 수 있었는데, 그 다섯 번이 리트 두 번째에 끝났을 땐 한숨만 나왔다. 이젠 저주 디버프 때문에 레전드 난이도가 됐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베리테는 시작과 동시에 저주 디버프를 중첩으로 깔아 즉사를 만들고, 10초 뒤에 한 번 더 깔아 즉사를 또 만들고, 30초 뒤에 새로운 디버프를 깔아서 ‘천형’ 스킬로 즉사를 만들었다. 그것까지 버티면 사제 직업과 PVP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다시 던전 앞으로 밀려온 그들은 말없이 머리만 감싸 안았다.

 

“와 미친, 마력통 존나 커.”

“아니, 왜 때려도 힐을 계속하냐고요. 선딜 존나 짧고 힐을 무슨 무빙으로…. 하, 이거 잡을 순 있어요?”

 

문제는 유저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사제였다는 것이다.

허탈한 대왕핏짜와 슬슬 열받은 게 느껴지는 히아신스가 나란히 한탄했다. 베리테는 똑같은 인간형 레이드 보스인 트라움보다 더 인간형 보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저 방식과 비슷했다. 그러나 사제 계열이었기에 공격 스킬이 많지 않다는 건 다행이었다.

디버프만 깔지 못하게 하면 전반적인 대미지는 무척 약한 쪽에 속했다. 그저 쿨타임이 없는 것만 같은 장판 디버프의 향연을 감당할 수 없을 뿐이다.

 

“일단 장판을 어떻게 해야겠는데.”

“범위가 너무 넓어요. 환수 움직이면서 봤는데 뭐 거의 던전 전체 수준.”

“……그런데 처음에, 근딜들이 봤을 때 장판 안 보였잖아요. 그럼 베리테 뒤로는 장판 안 깔리는 거 아닐까요.”

“오?”

“발상의 전환?”

 

여섯 번째쯤 되니 다들 게임 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최고의 원동력은 분노였다. 여휸은 조각달이 새로 제작해 온 세공석을 받으며 정리했다.

 

“첫 장판은 답이 없으니 그냥 맞든 보호기를 두르든 하고, 두 번째는 보스 뒤로 피합시다. 천형은 보호기로 버티고. 원딜들 간격 두지 말고 앞에 몰려있다가 무조건 뛰어요. 기본 공격은 약한 보스니까 한 대 맞아도 피가 심각하게 까일 것 같지도 않고요.”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니 생각보다 잘 풀렸다.

입장과 동시에 깔리는 디버프는 세공석으로 넘기고, 두 번째는 약속했던 대로 다들 줄행랑치듯 베리테 뒤로 몸을 숨겼다. 낙지의 추측대로 베리테는 제 앞쪽으로만 디버프를 깔았다.

그런데 베리테는 디버프가 끝난 이후에도 등을 돌리지 못하고, 제 뒤에 있는 유저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다들 의아해하면서도 때를 노려 열심히 치고 있을 때, 그들의 뒤에 있던 새까만 검이 불쑥 땅에서 뽑혀 유저들에게 칼침을 놓았다. 역시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새까만 검은 즉사기가 아닌지 체력을 갉아먹는 선에 그쳤다. 파티원들은 후다닥 앞으로 달려갔다. 혹시 모를 디버프를 대비해 원딜도 달려갈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다.

즉사 디버프를 잡으니 베리테는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원래 사제 계열이 공격 스킬이 적기도 했고 ―드루이드는 이름만 사제이므로 제외하고― 레이드 보스인 베리테 역시 광역기가 이단심문관 스킬인 ‘천형’ 하나뿐인 듯했다.

이렇게 끝날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을 눈치챘는지, 부지런히 자힐을 반복하던 베리테가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트레일러와 마찬가지로 보이스가 없으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가느다란 보이스가 흘러나왔다.

 

[아, 안돼…. 그 사람을 살려줘. 그 사람을……!]

 

[베리테가 악몽에 사로잡힙니다.]

 

떨리는 보이스 다음으로 떠오른 로그에 다들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엠즈스톰이 또 레이드 보스로 유저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분명 잘못한 건 엠즈스톰인데 떨떠름해지는 건 유저였다.

그러나 레이드 보스의 신파는 신파였고 날아오는 전멸기는 답이 없었다. 여휸의 ‘구사일생’이 쿨타임에 걸렸기에, 애호가는 제가 지닌 파티 보호기 ‘상생’을 사용했다.

악몽에 사로잡힌 베리테는 공격 불가인지 공격할 수 없다는 로그가 떴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다른 곳으로 타깃 지정이 됐다. 이게 뭔지 파악하기도 전에 베리테의 전멸기가 날아왔고, 놀랍게도 스킬을 전부 무시한 채 그냥 죽여버렸다. 이거야말로 즉사기였다.

파티는 다시 던전 입구로 밀려 나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재정비를 하고 있자니 히아신스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뭔가 참 어렵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짜증 레전드 난이도.”

“하 씨, 저 온청군 이후로 이렇게 빡치는 레이드 처음이에요.”

“온청군이 광역기가 많아서 그렇지, 착한 애였네. 적어도 이렇게 빡치진 않았잖아요.”

 

대왕핏짜가 히아신스를 위로하며 정비를 마무리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애호가는 공격은 안 되는데 계속 타깃이 잡히던 걸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던 애호가는 눈에띈애의 “형?” 하는 부름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되돌렸다.

다른 파티원들은 어느새 준비가 끝나 애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호가가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자 파티는 곧바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악몽 패턴이 왔을 때, 유심히 지켜본 결과 제 타깃 설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았다.

 

“원딜 타깃 전부 뒤로 해주세요. 검 계속 타깃 걸립니다!”

 

애호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든 원딜의 공격이 새까만 검에 처박혔다. 곧 뒤쪽에서 히아신스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저거 계열 영향받는 듯요! 강력한 대미지는 줄 수 없답니다!!”

“저도 계열이요.”

“악, 잠깐, 자자자잠깐잠깐요!!! 빡딜, 조각달 님 우린 할 수 있어요 빡딜!!”

 

자연 계열 마딜러 대왕핏짜가 조각달을 부르짖으며 미친 듯이 환수를 움직였다. 공격형 영수는 한 마리만 소환할 수 있는 영수술사와 달리, 환수술사는 유형 관계없이 세 마리인지라 대왕핏짜의 눈은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 가장 바쁜 게 바로 대왕핏짜일 터였다.

 

“자리 이탈합니다!”

 

결국 어그로가 상대적으로 덜 끌린 낙지가 처음으로 큰소리를 내며 새까만 검을 향해 내달렸다. 뒤이어 시야 한쪽에 10초 남았다는 로그가 떠올랐다.

대왕핏짜가 피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목소리로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사이 낙지가 도착했다. 두 명의 마딜러와 한 명의 물딜러가 10초 동안 정신없이 딜을 했다. 계열 상성으로 대미지는 낮아도 다들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딜을 한 결과, 10초가 지나기 전에 타깃이 사라졌다.

 

[베리테가 슬픔에 잠깁니다.]

 

“으악!!!”

 

날아온 건 프리스트의 공격 스킬인 ‘빛의 화살’이었으나, 단일 디버프까지 받은 대왕핏짜는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견디지 못해 끝내 빈사에 빠졌다. 최고 딜을 갱신한 대가였다.

 

[파티] 대왕핏짜 : 쳐다보지마요 뭐해요

[파티] 대왕핏짜 : 빨리 쳐 치라고 쳐!!!1

[파티] 대왕핏짜 : 딜하라고 이사람들아

 

바닥에 누운 대왕핏짜는 “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라며 채팅으로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부활 스킬이 있는 히아신스만 대왕핏짜에게 다가갔고, 나머지는 부지런히 딜에 집중했다.

슬픔에 잠긴 베리테는 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새까만 검만 쳐다보았다. 분명 잘못은 엠즈스톰이 했으나 죄책감은 유저의 몫이었다.

이윽고 되살아난 대왕핏짜가 딜에 가세하니 베리테의 체력이 죽죽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베리테의 체력을 40% 정도 깎아내자 드디어 2페이즈가 시작되었다.

 

[베리테의 슬픔에 반응해 어둠이 눈을 뜹니다.]

 

그런 로그를 띄운 베리테는 곧 공격 불가 판정이 났고, 베리테의 새하얀 로브가 끝자락부터 검게 물들었다. 불길함을 느낀 여휸이 “아니 잠깐, 이건 아니지.” 하고 중얼거릴 때였다.

 

[포우가 괴로워합니다.]

 

어느새 검게 변한 로브를 뒤집어쓴 보스의 손에 들린 건 새까만 검이었다. 애호가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고, 조금 전까지 새까만 검이 박혀있던 곳에 새하얀 지팡이가 박혀있는 걸 발견했다. 때마침 여휸과 다른 몇 명도 그걸 발견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짜증 섞인 애호가의 시선이 곧 보스의 체력을 향했다. 파티원이 느낀 불길함은 새로운 방향으로 다가왔다. 40% 정도 깎은 체력이 100%까지 꽉 차 있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와 씨발…….”

 

뒤에서 공격 준비를 하던 히아신스가 짧게 감탄했다.

 

[바엘……!]

 

포우의 검이 높이 올라왔다가, 곧 바닥을 쿵 내리찍었다. 불길한 보이스와 함께 파티의 앞에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 나타났다.

마딜러의 천적, 악마숭배자의 소환 악마 바엘이었다.

 

“……미친…….”

 

대왕핏짜의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모든 마딜러의 딜이 봉인된 것과 동시에 파티는 전멸했다.

또다시 던전 입구로 밀려 나온 파티는 가만히 머리를 감싸 안았다. 무슨 레이드 보스가 교체형이란 말인가. 여느 가상현실 게임에 하나쯤은 있다는 소문이야 들었는데, 설마 크로노스 네임까지 장악했을 줄은 몰랐다.

얕게 한숨을 내쉰 애호가는 내구도를 살피며 혀를 찼다.

 

“베리테는 마딜, 포우는 물딜 위주네요. 이러다 3페는 둘 다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죽었나?! 하면 다 산다고요.”

“저 왜 아크 네이처가 물마딜 하이브리드로 나왔는지 알았습니다. 얘 잡으라고 그런 거네.”

 

뒤이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휘저은 여휸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포지션 재배치 갑니다. 멘탱 여휸 섭탱 해충박멸, 고정 딜러 애호가. 1페 딜러진 대왕핏짜, 조각달, 서폿 낙지, 눈애띈애. 2페 반대로. 신스 님은 적당히 눈치 보다가 딜, 서폿 왔다 갔다 해주세요. 일단 이렇게 가고 3페까지 전부 보면 재배치.”

 

그래도 지난 최초 클리어를 이끌었던 여휸은 경력직답게 척척 분배를 끝냈다. 히아신스가 3페이즈까지 다 보면 왜 재배치인지를 묻자, 여휸은 담담하게 눈에띈애를 턱짓했다.

 

“3페까지 다 보고 클리어 확실하면 눈애 스탯 제한 해제하고 덤빕니다. 그땐 마딜 멘딜 피자 님, 물딜 멘딜 눈애로 보고 마지막까지 달려야 해요. 호가 형은 페이즈 무시하고 무조건 섭딜이라고 생각해.”

“가끔 서폿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지금 서폿 부족할 텐데.”

“영수 힐량 세니까 걱정하지 말고. 달아, 2페 시작하면 넌 그냥 무조건 힐만 한다고 생각해. 피자 님은 2페부터 죽어라 버프만 돌리시면 됩니다.”

“네, 아, 으응.”

“네엡. 저 버프 잘 돌려요.”

 

잠시 조각달과 눈에띈애의 제작 시간을 가진 뒤 파티는 다시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장판 디버프만 피하면 별거 없는 베리테를 파훼하고 금방 2페이즈로 돌입하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포우가 다시 바엘을 소환했다. 이번 레이드 보스는 PVP 위주인지, 베리테와 마찬가지로 유저보다 월등히 나은 스킬을 가졌다는 것만 빼면 포우 역시 검을 든 악마숭배자였다.

그 모습을 보던 히아신스가 “아.” 하고 뭔가를 깨달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B팀 걔네가 우세했으면 아크 네이처 대신 저거 나올 예정이었던 거 아니에요? 악숭 전승으로.”

“어, 그럼 저 직업 없어진 거?”

“아무래도요? 아크 네이처랑 너무 겹치니까?”

 

그러자 버프를 돌리던 대왕핏짜가 “아깝다.” 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기껏 만들어 놓고 다시 구상해야 하는 게임사를 동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그 중심이 된 애호가는 어색하게 웃으며 포우를 살폈다. 악마숭배자의 전승이었을지도 모를 포우의 직업은 아크 네이처와 비슷하긴 했으나 허공에 뜬 마도서가 없었다. 그래도 전승은 무조건 하이브리드이니 아마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검을 휘두르면서 어쩌다 제 대척점이 된 포우를 물끄러미 살피던 애호가는 곧 뒤에서 들려오는 불퉁한 목소리에 입술을 씹었다.

 

“형이 더 잘 어울리는데요.”

“와 씨,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온다고?”

“팔불출도 저 정도면 정성추 드립니다…….”

“너희 형 잘생겨서 저런 오글거리는 직업 모션도 잘 어울리는 거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라.”

 

그간 며칠을 시달렸던 여휸이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그러나 한없이 억울한 눈에띈애가 그렇게 많이 말한 적 없다면서 투덜거렸다. 어쩌다 화두로 던져진 애호가는 그냥 말없이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한순간 눈에띈애의 자랑 아닌 자랑으로 잠시 집중력이 흩어지기는 했으나 우선 랭커답게 다들 금방 정신을 다잡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1페이즈의 베리테도 그렇고 2페이즈의 포우도 그리 어려운 보스는 아니었다. 특히 PVP에 익숙하다면 더욱 쉽게 느껴졌다.

 

“오, 우리 2페는 그냥 원턴으로 넘겨요?”

 

해충박멸이 신나게 외쳤을 때였다. 대왕핏짜가 멀리서 “아 그런 플래그 말하지 마세요!” 하고 외치기가 무섭게, 포우가 검을 높이 치켜들더니 파티 전원을 뒤로 밀어냈다. 낙지가 다급하게 파티 보호기를 둘러보았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텅 빈 앞쪽을 검으로 쿵 내리찧자마자 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뒤로 밀려나며 스턴이 걸린 파티는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포우는 느리게 검을 뽑더니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검은색 로브가 펄럭이는 잔상만 보이더니, 곧 새까만 검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즉사기였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즉사기 개많아.”

 

던전 입구로 밀려 나오자마자 대왕핏짜가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호가 님은 저런 스킬 없어요?”

“없어요.”

 

히아신스가 안타까워하건 말건 애호가는 애써 그들의 반응을 무시했다. 안 그래도 모션 때문에 시선 끌려서 죽을 것 같은데, 저런 오버 모션까지 있었다면 애호가는 차라리 게임을 접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방금 스턴, 보호기 씹었죠?”

“네. 스턴 자체를 아예 못하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와중에 여휸과 낙지는 현실적인 시선으로 레이드를 보고 있었다. 눈에띈애는 현실적인 쪽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호기 중에 스턴 전용 보호기 있을걸요.”

“너한테 없으면 우리한테도 없어.”

“여휸 님한테 없으면 누구한테 있는데요.”

“야 윤눈애 이 새, 아오 진짜.”

 

한 대 치고 싶다는 얼굴로 눈에띈애를 쳐다본 여휸은 이를 박박 갈며 포기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걸 레이드 보스로 낼 리 없었으니, 눈에띈애의 말이 맞긴 했다. 게다가 다른 직업과 달리 전승은 1인 1개로 한정이었기에, 아무리 눈에띈애여도 전승 직업은 지금의 직업 외에 가진 게 없다.

결국 이곳에 모인 전승 직업은 평소 잘 쓰지 않는 스킬까지 모두 탈탈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겸사겸사 애호가도 아직 어색한 전승 스킬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나 애호가는 갑자기 원딜이 근딜이 된 상태라 제 스킬의 절반 정도만 제대로 사용하는 수준이었기에 더더욱.

사실 이번 메인 스토리가 배우자 미션이 아니었다면 애호가는 여기까지 올 일이 없었다. 그럼 적어도 눈에띈애가 괜한 말은 듣지 않게 해야지.

원거리 딜러가 한순간에 근거리가 된 탓인지 아크 네이처는 화랑 못지않게 전승 스킬이 많았다. 그렇게 한참 스킬을 살피던 애호가는 가볍게 턱을 문지르다가 목덜미를 문질렀다.

 

“음, 휸아, 일단 미안해.”

“뭐가.”

“나한테 있네. 그 보호기.”

“야, 윤눈애. 너희 형한테 있다잖아.”

“네.”

 

당장에라도 나한테 그러던 것처럼 해보라는 얼굴의 여휸을 향해 눈에띈애는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결국 재차 한 대 치고 싶다는 표정을 하게 된 건 여휸이었다. 두 사람은 참 어떤 의미로 상극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애호가의 손길에 얌전히 앉아 스킬을 확인하던 눈에띈애가 살짝 시선을 돌렸다. 무덤덤한 눈빛 아래에 호기심이 가득 깔려있었다.

 

“왜?”

“스킬 다른 건 뭐 있어요?”

“이번 레이드 끝나고 공유해줄게.”

“네.”

 

그사이 조각달은 새로운 세공석을 제작해 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왕핏짜는 “이거 세공석 때문에 제작러 넣은 거 아니에요?”라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했다. 내심 조각달도 그렇다고 여겼는지 대답 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조각달이 건네는 세공석을 받은 눈에띈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각달을 올려다보았다.

 

“허기 채우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영술이랑 환술은 허기 떨어지는 거 빠르잖아요.”

“와 귀신이네. 체이서는 원래 그런 거 다 외워요?”

“제가 체이서 몇 명 봤는데 쟤가 유별납니다.”

 

대왕핏짜의 말에 여휸이 오만상을 지은 채 대꾸했다. 그러자 곧 죽어도 말은 해야 하는, 설령 상대가 누구이건 한마디도 지지 않는 눈에띈애가 심드렁하게 조각달을 향해 말했다.

 

“여휸 님은 필요 없어요. 화랑은 허기 떨어지는 거 느린 모양이던데.”

“아 윤눈애 저 새끼가.”

 

결국 여휸이 분노를 참지 못해 조각달의 앞인 것도 잊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평소라면 조금쯤 놀랐을 조각달도 이젠 익숙해졌는지, 강아지 두 마리가 아르릉거리는 걸 지켜보는 듯한 흐뭇한 눈으로 요리했다.

눈에띈애가 조각달을 돕기 시작하자 8인분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모닥불을 중간에 두고 다 같이 허겁지겁 허기를 채운 후에 심기일전해 다시 던전 안으로 몰려갔다.

이제 익숙해진 베리테는 쉽게 넘기고 대망의 포우로 넘어가며 곧바로 마딜이 봉인됐다. 직전까지 딜에 열중하던 대왕핏짜와 조각달이 소환된 환수와 영수를 해제하고 새로운 소환수를 꺼냈다. 베리테와는 반대로 뒤집힌 딜 체제였으나 다들 비교적 익숙하게 대응했다.

포우의 시야를 자연스럽게 끌어낸 여휸이 안정적으로 어그로를 잡았다. 힘을 합쳐 착착 체력을 깎다 보니 어느새 문제의 즉사기 타임이 다가왔다.

 

“일단 지금은 타이밍만 본다고 생각합시다.”

 

여휸이 실패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며 포우를 유심히 관찰했다. 포우가 검을 높이 치들었을 때 애호가가 보호기를 둘렀고, 곧 검으로 바닥을 쿵 내리찧어도 뒤로 밀려나긴 했으나 스턴이 걸리진 않았다.

바닥을 내리찧은 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천천히 검을 뽑은 포우가 훌쩍 뛰어올랐을 때였다. 검은색 로브가 펄럭이는 잔상이 보일 때 애호가는 다급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혹시 온청군 때처럼 바닥에 표식이라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바닥은 여전히 물이 찰박거리는 모습 그대로일 뿐, 디버프처럼 문양이나 표식 자체가 없었다. 아마 다들 애호가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한결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일단 주변으로 퍼져보자며 자리를 이탈하자마자 죽었다. 사인은 중독이었다.

그러나 모두 죽은 건 아니었고, 죽은 건 상대적으로 멀리 갔던 원딜과 위치가 좋지 않았던 애호가와 히아신스 정도였다. 어그로 때문에 멀리 벗어나지 못했던 여휸과 해충박멸은 살짝 체력이 깎였을 뿐이다.

물론 곧바로 떨어지는 새까만 검에 결국 전멸했다.

 

“아, 일정 거리 넘어가면 장판 디버프가 있나 보네요.”

“베리테 장판이 검은색이더니 포우 장판은 흰색인가 보네요. 도무지 보이질 않네.”

“역시 부부라서 그런가, 장판 존나 사랑하네…….”

 

한탄을 흘리면서도 마땅한 힌트가 없었기에 파티는 다시 무작정 돌입했다. 힌트라도 발견해야 해답이 있는데 그냥 아무것도 없으니 발견할 때까지 들이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포우의 즉사기 타임에 돌입했다. 어디까지 가야 죽는 건지 실험하기 위해 여휸과 히아신스를 제외한 근딜들이 천천히 거리를 벌려 확인했고, 원딜들은 일단 꼼짝도 하지 않기로 했다. 곧 해충박멸이 사망한 것을 확인해 보니 포우를 기준으로 100m 정도인 듯했다.

곧 검은색 로브가 펄럭펄럭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들 또 죽겠거니 하며 체념한 마음가짐으로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혼자 포우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눈에띈애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무효화 선언.”

 

본인이 스킬을 사용하면서도 ‘이게 정말 되나?’ 하는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확신하지 못하니 말꼬리가 은근히 올라가서 왠지 레이드 보스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그 미묘한 말투에 해충박멸을 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히아신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항은 고통을 키울 뿐이야…….]

 

그러나 새까만 검을 기다렸던 파티의 예상과 달리 포우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눈앞으로 내려왔다. 머리 위로 떨어져야 했을 새까만 검은 포물선을 그리며 포우의 손으로 떨어졌다.

 

“……? 뭐야?”

“일, 단 때릴까요?!”

 

의아하게 중얼거린 여휸의 말을 대왕핏짜가 이으며 버프를 둘렀다. 히아신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충박멸을 살린 다음 뛰어갔다. 그렇게 열심히 패턴에 대응하고 있으려니 간신히 포우의 체력이 40%까지 내려갔다.

 

[베리테가 몸부림칩니다.]

[포우가 절망합니다.]

 

갑자기 두 로그가 동시에 떠오르더니, 해당 로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곳에 새로운 스크립트가 떠올랐다.

 

[당신은 바다가 검게 물든 이유를 알고 있나요?]

 

그리고 최초 클리어 특전 중 하나인 짧은 영상이 재생됐다.

눈 앞에 펼쳐진 건 눈에띈애가 말한 적 있는 바닷가였다. 새하얀 신전이 하나 세워진 바닷가에는 멀리 새까만 신전도 하나 보였다. 하얗고 까만 두 남녀는 손을 맞잡은 채 다정하게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다정한 시선이, 누가 보더라도 가까운 관계였다.

 

[파티] 대왕핏짜 : 와 저 이런거 위튭 같은데서만 봤는데

[파티] 대왕핏짜 : 진짜 레이드 중간에 이럴줄은..ㅇㅅㅇ;

[파티] 히아신스 : 꼭 레이드 중간에 신파극을 쓴다니까요..ㅡㅡ

 

정작 괜히 잡기 미안하게 만든다며 불만을 토로한 히아신스가 영상에 가장 몰입했다. 새하얀 여자가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지자 1차로 비명을 질렀고, 새까만 남자가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자 2차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는 히아신스를 보며 웃어대던 사람들도 뒤이어진 영상에 하나같이 말을 잃었다. 심의에 걸릴 걸 예상했는지 엠즈스톰은 상황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정황상 이러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확신은 줄 수 있도록 영상을 제작했다.

한밤중에 새하얀 로브를 입은 여자는 혼자 남은 바닷가에 앉아 제 지팡이가 아닌 새까만 검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새까만 로브를 입은 남자가 홀로 바닷가에 앉아 새하얀 지팡이를 붙잡은 채 하염없이 애틋한 눈을 했다.

바닷가가 서서히 물에 잠겼다. 신전은 부서졌고 어디에도 인기척은 느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한때 섬이었을 그곳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들과 함께 가라앉은 신전의 잔해만이 피와 부정을 머금고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

그사이 푸르렀던 바다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우리는 함께하고자 했으나, 하나가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영상의 말미에 떠오른 스크립트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곧 눈앞에 새로운 모습을 한 레이드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은 새하얗고 반은 새카맸으나 그 중간이 물에 번진 듯 흐려서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눈코입이 없으니 당연히 이목구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성별은커녕 형체만 인간이지, 한없이 기이한 형태를 한 보스의 머리 위로 ‘무덤지기 그라우’라는 명칭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영상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그라우는 앞서 40%씩 깎은 게 반영되었는지 정확히 40%의 체력이 비어있었다. 이걸 정말 페이즈로 보는 게 맞을지에 대한 고민은 일단 지우고, 나머지 60%를 깎는 게 3페이즈의 목표인 듯했다.

 

“평타가 잘 안 먹히는데요. 강력한 대미지를 줄 수 없다고.”

“그거 저도 그럼. 질서나 혼돈이나 둘 다 이러는데 자연 분들은 어떠신지?”

“아무것도 안 뜨긴 해요.”

“이번 보스는 나투라, 드래고 계열이 잘 먹히나 본데요?”

“존버는 승리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왕핏짜가 신나서 외쳤다.

이건 눈에띈애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온청군은 용종이라 애호가처럼 딜로 무장하지 않으면 자연마법 대미지가 잘 안 나왔다. 쿠론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트라움이 질서 계열이었으나 그쪽은 공격 방식 자체가 계열을 바꿔가며 해서 의미가 없었다.

대미지 안 나온다고 구박받았던 그간의 서러움을 토로한 대왕핏짜는 날아다녔다. 장비를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애호가는 어쩔 수 없었으나, 여휸이나 히아신스마저 대왕핏짜의 딜을 따라가지 못했다.

다행히 앞선 상황에서는 물딜과 마딜을 가리거나 PVP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던 이번 보스도 3페이즈까지 오니 그런 느낌이 없었다. 대체 뭔지 모를 것에서 드디어 평범한 레이드가 됐다.

안정적으로 체력을 깎던 히아신스가 곧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님들 바닥에 장판!”

“저 쿨이요.”

“제가 할게요.”

 

여휸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마자 애호가가 그 말을 받았다. 다들 무슨 디버프인지는 몰라도 보호기는 두르고 일단 한번 맞아보자는 입장이었다.

애호가가 파티 보호기를 사용하고 조금 후 바닥에서 빛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당장에라도 스킬이 쏟아질 것 같았던 장판은 한참을 빛만 올리다가, 파티 보호기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확 솟구쳤다. 두 개의 보이스가 뒤섞인 그라우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같이 놀까? 높이, 높이!]

 

뒤이어 쾅, 소리와 함께 파티는 깔끔한 전멸을 맞이했다.

눈떠보니 또다시 던전 입구였다. 다 같이 밀려 나온 파티원은 그래도 3페이즈를 봤다는 희망 때문인지 짜증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아, 생각하지도 못했던 시간차 전멸기.”

“그런데 눈애 님, 포우 마지막 패턴 때 사용한 그거 뭐예요?”

“……스킬 상쇄요. 피빕 하는 거 같다고 하시길래 해봤는데 진짜 될 줄은…….”

“판단 좋더라. 잘했어.”

 

본인이 하고도 본인조차 왜 통했는지 모르는 눈에띈애의 얼떨떨한 반응에, 애호가는 살짝 볼을 두드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칭찬이 들어와서인지 손이 닿은 곳부터 발갛게 물이 들었다. 금세 귓불까지 붉어진 것도 오랜만이었다.

당장 어젯밤에 침대 위에서 왜 하면 안 되냐고 불퉁하게 있었던 녀석이. 어이가 없고 황당해도 그게 귀여워서 재차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저를 놀리는 건 귀신같이 깨닫는 눈에띈애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 비명을 질러야 할 히아신스도 이제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순항 중인 레이드 덕분에 너그러워졌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사이 조각달은 다시 세공석을 만들었고 여휸은 돈을 거둬갔다.

잠깐의 제작 타임이 끝나고 다시 재정비 중에 여휸이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에 막패까지 본다고 생각하고 임합시다. 보니까 패턴 자체가 어려운 보스는 아니에요. 그저… 장판이 뒤지게 많고 3페는 너무 아플 뿐입니다. 신스 님이랑 달이 둘 다 저 힐만 하다가 레이드 끝나겠어요. 화랑이 방어가 높은데 이 지경이면 뭐, 거의 프리 필수 던전이네요.”

“여휸 님 피 줄어드는 거 진짜 기적 수준이던데요. 완전 종잇장처럼 흔들려서 볼 때마다 조마조마하고 웃겼어요…….”

“피자 님이 몰라서 그러는데, 화랑이 방어가 높은 직업입니다. 팔라 다음으로 높아요.”

“헐 미친.”

“일단 아까 그 부분 타이밍 숙지하고 다시 가죠.”

 

대왕핏짜의 기겁에도 여휸은 태연하게 대답한 다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애호가도 제 옆에 얌전히 앉은 눈에띈애를 쓰다듬으며 영상을 돌려보았다.

아무래도 제가 지닌 보호기의 유지 시간으로는 빛이 올라올 때가 아니라 올라오고 나서도 조금 더 지나야 할 성싶었다. 보호기 유지 시간이 가장 긴 건 스피릿 파이터여서, 되도록 낙지가 사용하기로 하고 안 되면 그때 상황에 맞추기로 합의를 보았다.

외에도 포우의 특수 패턴은 눈에띈애가 막지만, 만약 안 될 때는 마찬가지로 스킬 상쇄가 있는 해충박멸이 하기로 했다. 현재까지는 그라우의 전체 패턴을 모르니 일단 이대로 가기로 한 뒤 파티는 다시 던전으로 들어갔다.

여휸의 말마따나 패턴 자체는 어려운 보스가 아니어서 비교적 쉽게 3페이즈까지 돌입했다. 안정적이던 여휸의 체력이 휘청이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저는, 딜을, 포기, 했습니다! 휸 님!!”

 

힐을 할 때마다 말을 끊어서 내뱉는 히아신스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분명 악마사냥꾼은 딜러였으나 지금 이곳에서 그는 힐러였다.

 

“사제가 딜을 하고 사냥꾼이 힐을 하는 건에 대하여.”

“닥쳐요 좀.”

 

버티지 못해 다시 딜러로 기용된 해충박멸이 낄낄거리며 깐족대자 히아신스가 냉큼 반응했다. 조각달은 힐과 버프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보다 더 정신이 없을 대왕핏짜는 우는소리를 내며 딜, 힐, 버프를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바쁜 건 분명 대왕핏짜였다.

 

“제가 환술로 지금까지 겜하면서 이렇게 바쁜 레이드 처음이에요!!”

“힘냅시다, 피자 님. 할 수 있습니다, 피자 님.”

“아 여휸 님은 포션 좀 먹고요!”

“놀라시겠지만 먹어서 죽지 않고 버티는 거예요.”

“아니 미친?”

“저 예감이 옵니다!! 여기서 신 장비 아이템이 나온다에 제 손목을 걸게요!!!”

“안 나오면 돌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이를 악문 히아신스의 장담에 드물게도 낙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반응했다. 사실 애호가도 여기에서 장비 제작 아이템이 나오겠거니 하긴 했었다. 무려 눈에띈애가 모르는 아이템이 제작 아이템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휸의 체력이 휘청이는 걸 보고 있으려니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랑이 저 지경이면 어지간한 직업은 버티기 힘들 테고, 이 레이드에서는 프리스트가 완벽한 귀족 직업으로 떠오르게 되겠지.

하, 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애호가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이에 몇 시간 동안 이러고 있으니 힘드네…….”

 

진한 회한이 담긴 목소리에 파티는 침묵했다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결심을 했는지 해충박멸이 정중하게 물었다.

 

“……애호가 님 올해로 춘추가 어떻게 되시길래…….”

“서른하나입니다.”

“어, 음. 그… 노고가, 크십니다.”

 

그 대답으로 해충박멸이 꽤 어린 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자 뒤에서 대왕핏짜가 우는 듯 웃으며 동의했다.

 

“와, 애호가 님 저희 동갑? 진짜 와, 그 마음 너무 이해된다. 앞자리가 바뀌니까 진짜 2일 때랑 다르더라고요.”

“좀 그런 게 있죠.”

 

두 사람의 대화에 20대들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20대 후반인 여휸만이 “아니, 벌써 애들 기를 죽이면 어떡합니까….”라며 황당해했다.

 

“아, 여휸 님이 아직 모르시네. 이 나이가 되잖아요? 가족이고 친척이고 다들 그런다고요. 결혼은 언제 할래, 게임하는 여자 누가 좋아한다고, 게임은 그만하고 이제 결혼해야지! 그놈의 결혼, 결혼, 결혼!!!”

 

때마침 치명타가 터지며 그라우의 체력이 훅 줄어들었다. 애호가는 대왕핏짜의 성별을 지금 막 알게 됐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닌 듯했다.

적어도 결혼 독촉 같은 건 받지 않는 애호가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메리 이즈 다이!!!”

“……죄송합니다. 진정하시고 저 힐 좀 주세요.”

 

여휸의 생존 구걸에 대왕핏짜는 “옛다, 20대!”라며 힐을 적선해 주었다. 여휸은 애호가에게 형이라고 부르니, 자연스럽게 그가 저보다 연하라는 해답에 도달한 듯했다. 뒤이어 조각달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힐을 주며 이야기를 건넸다.

 

“저, 저희 누나도 클넴 하는데, 괜찮다고 생각해요.”

“누님이 클넴 하세요? 예뻐요?”

“네? 그게, 닮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럼 미인인데?”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여휸의 대답에 해충박멸이 “소개해 주세요!”라고 소리쳤다가 즉시 사망했다. 히아신스가 구박하며 살려주자, 해충박멸은 얌전히 딜에 충실해지기로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작년에 결혼한 유부녀라는 이야기를 듣더니 “신은 없어.” 같은 소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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