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느낌이 들어 눈을 떴을때 방안은 이미 환해져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열기가 전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왕이 몸을 뒤척이자 예밍이 왕을 더 끌어당겨 안았다. 등 뒤로 빠르게 뛰는 예밍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 잘 잤어?
- 못 잤어
- 침대 불편하지.
- 내가 불편한건 침대가 아닌데요.
- 더웠어? 선풍기라도 틀걸-


예밍이 대답없이 왕을 더 끌어당겨 안았다. 더운데..라고 왕이 중얼거리자 예밍이 왕의 이마를 만져온다.



- 땀 나.
- 덥다니까.
- 그것 뿐?
- 배고파.
- 으음~~



예밍이 무슨 대답을 원하나싶어 잠시 생각을 하느라 입을 다물었다. 손을 뻗어 예밍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듯 만지작거리자 예밍이 손을 잡아온다. 기분좋은 손바닥의 느낌.



- 난 고백하고 차일 줄 알았는데.
- 왜?
- 소문이 엄청났으니까.
- 무슨 소문?
- 야오왕에게 고백하고 울지 않은 여자가 없다?
- 아...


이상하게 고백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틈을 보이는 것도, 여지를 준 적도 없는데 인턴 직원들부터 회사에 오래 다닌 직원들까지, 마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왕에게 고백해왔다.  누구도 넘어올 수 없도록 계속해서 벽을 쌓게 되는데는 그 고백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예밍이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던 틈을 찾아 두드려왔다.



- 차이면 회사 그만둬야 할것 같아서 엄청 고민했었다구.
- 그럼 양예밍 월급 절반은 내껀가?
- 하하. 그건 또 무슨 논리야.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를 침대에 누워서 하고 있는 기분이 좋았다. 혼자라서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둘이라서 좋은 기분이 들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심장이 뛰는 진동. 목 뒤로 느껴지는 목소리의 울림. 아, 이렇게 좋은 기분이었구나.



- 배고파
- 아침 먹으러 나갈까?
- 응. 집에 먹을 거 없어.
- 뭐 좋아해?
- 다 잘 먹어.
- 음식 가리는거 많이 봤는데.
  치즈. 쓴 야채. 신 과일. 오이. 당근. 생고기. 안 익힌 생선.



왕이 진짜로 가리는 음식들을 줄줄 이야기하는 예밍의 말에 놀랐다. 어떻게 알고 있는건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신기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 내가 말해줬었어?
- 지난 3개월간의 내 노.력.
- 하하. 너는 뭐 안 먹어?
- 매운거. 소고기.
- 우와. 두개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 먹을 수 없는건 아니야. 선택권이 있다면 굳이 선택하지는 않는거지.
- 그럼 소고기 먹으러 가자고 하면 먹을거야?
- 응
- 됐어. 고기는 다른 사람이랑 먹으러 가면 돼. 너가 좋아하는걸로 먹어야지.
- 다른 사람이랑 먹으러 가는게 더 싫을거 같은데.
- 그럼 따로 먹을까? 밥 먹고 만나도 되고.
- 그게 뭐야. 연애에서 같이 밥 먹는게 얼마나 중요한데




진하이는 해외생활이 길어서인지 서양식 메뉴를 좋아했다. 아침은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토스트. 이런 식이었고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류의 음식도 굉장히 좋아했다. 반면 왕은 아침을 굶는다면 모를까 먹는다면 무조건 밥이었다. 한번은 진하이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서 아침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던 적이 있었다. 진하이는 서양식 브렉퍼스트 메뉴가 있는 카페를 가리키며 들어가자고 했고 왕은 밥을 파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럼, 밥 먹고 만나. 전화해. 라고 진하이가 말했을때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을 참고 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진하이는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가보는 거리의 바람을 맞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 자꾸만 고개를 들게 됐다. 그렇게 올려다본 하늘은 뿌옇게 흐렸었다. 왜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다 베개를 적시고,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예밍의 팔에 닿았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예밍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왕을 내려다보았다.



-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 아니.
- 왜 울어-
- .....아무것도 아니야. 배고파서. 나 배고프면 짜증나서 그래.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지만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는지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진하이가 생각나서 그렇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왕은 급하게 눈가를 눌러 문지르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



- 여기 좋다. 단골이야?
- 단골까지는 아니고. 주말에만 가끔.
- 밥 먹고 쇼핑할거지?
- 응.


배가 고프다고 예밍을 끌고 나온것과는 무관하게 식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왜인지 모르게 가라앉은 기분에 미안해져서 웃어보여도 예밍과 눈이 마주치면 괜히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의욕없는 젓가락질에 겨우 삼켜넘기는 음식이 까칠한 느낌이었다. 체할지도 모르겠는 기분에 젓가락을 놓았다.



- 기분 별로야? 별로면 집에 갈까?
- 아니야. 쇼핑할거야. 너랑 카페도 가고, 산책도 할거야. 야근하느라 못한 거 다 해야지.



열심히 숨긴다고 한 기분을 들켜버려서 왠지 고집부리는 어린 아이같이 대답해버리고 왕은 조금 쑥쓰러워졌다. 버릇처럼 뺨을 누르듯 문지르자 예밍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계산대 앞에서 내가 살게, 아니야 내가 낼게- 로 잠시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왕은, 내 월급이 더 많으니까 내가 살거야. 라고 우겨보았지만 아까 월급 절반을 차압당하기로 한거니까 자기가 사는게 맞다고 해버리는 예밍의 고집이 조금 더 셌다.


식당을 나와 왕이 한걸음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향치. 길치인 주제에 직진본능만 살아서 잘못된 길로 빨리 걸어가는 재주만 있다고 자주 놀림을 당했는데 누구와 걷든 상관없이 그 버릇이 나와버린다. 어차피 근처 쇼핑몰이니까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겠지. 뭘 사야하더라...침대는 주문하면 다음 주말에는 배송되려나...생각하면서 걷는데 예밍이 어깨을 살짝 잡아오는게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
- 아, 미안.
- 집에 가자.
- 왜?
- 아니다, 잠깐 저기 들어가서 얘기해.



예밍이 이끄는 대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손님이 거의 없는 조용한 카페에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영화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1층에서 주문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가서 창가쪽 자리에 앉자 한산한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 너머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 맛있겠다.



점원이 가져온 레인보우 케이크의 색깔이 예뻐서 왕이 포크를 손에 쥐고 잠시 머뭇거리자 예밍이 손에 쥔 포크로 과감히 케이크를 한조각 잘라서 건넸다.



- 먹어야 맛있지.
- 너무 예뻐서. 근데, 생각보다 과감하네. 이 예쁜걸 그렇게 자르고
- 너가 더 예뻐.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왕이 급하게 커피잔을 잡아들었다. 뜨겁다. 커피잔도, 얼굴도, 예밍의 눈빛도.



- 무리하지 마
- 응?
- 속마음 말하는 성격 아닌것도 알고, 지금 무리하는 것도 알겠고. 그러니까 힘든거잖아
- 무리한 거 없어.
- 아무리 물어도 오늘 아침에 왜 울었는지 얘기 안해줄 것도 알아.
- ....
- 천천히 와도 괜찮아.



왕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흘러내려 탁자에 동그란 자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당황한 예밍의 표정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그러다 예밍이 왕의 옆에 와서 앉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내가 도대체 무슨 버튼을 누르는 건지..울지마, 응?
- 그래도 물어봐.
- 응?
- 얘기하고 싶어. 그러니까 물어봐.
- 알았어. 그만 울어, 내가 마음이 아파서 그래. 응?
- 몰라, 나 이렇게 우는 사람 아닌데,
- 나 때문이야, 알아. 미안해.


왕은 눈물을 닦다가 웃었다가 다시 눈물이 났다가, 도저히 이 알수 없는 감정의 기복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서도 아닌데. 눈물을 닦아내던 손이 젖어들자 예밍이 티슈를 가져와 닦아준다. 빨개진 눈가를 조심히 눌러서 닦아주는 예밍의 손을 잡자 예밍이 시선을 맞춰온다.




다정한 눈빛. 그제야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너랑 자고 싶어
- 어? 뭐...?
- 아, 내가 말하는 자고 싶다는 건 그러니까-
- 정말..진짜, 와...



갑자기 나와버린 본심이었다. 말해놓고도 지금 무슨 말을 했지? 싶은 기분에 따뜻하게 적당한 온도로 식은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 진짜 창피하다. 왕은 정말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서 예밍을 슬쩍 쳐다보았다. 예밍은 당황스러움을 숨길수도 없을 정도의 놀란 얼굴로 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 집에 가자.



왕이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예밍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왕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 야, 우리 케이크.
- 나중에 또 사줄게. 쇼핑은 내일 해도 되지?
- 천천히 오라며
- 이건 다른 얘기지. 가자.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케이크와, 따뜻한 커피가 놓인 탁자를 내려다보며 머뭇거리는 왕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예밍이 길을 재촉했다.



- 미안, 방금 내 귀로 듣고도 믿기질 않아서, 집에 가자. 가서 얘기해.
- 아까워. 커피 맛있었는데. 케이크도. 




하지만 대답할 여유도 없어보이는 예밍의 표정에 왕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 커텐..
- 응?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부딪쳐오는 예밍의 입술을 받아내는 것조차 버거운데 방안은 또 너무나 환했다. 커텐이라도 쳐서 어둡게 했으면 좋겠는데- 예밍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여서 왕이 예밍의 입술을 손등으로 막으며 커텐을 가리켰다.



- 너무 밝아
- 안돼?
- 싫어. 창피해.
- 이렇게 창피한게 많은 분이, 그렇게 대담한 얘기를 한거에요?
- 또. 또. 놀리면 재밌어?



입술을 삐죽. 내미는 왕을 보던 예밍의 눈빛이 다시 한번 변하는 게 보였다. 아, 이런 눈빛을 하는구나 싶어 쳐다보다 또 창피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 보고 싶은데, 안돼?
- ...안돼.



어쩔 수 없다는 듯 예밍이 아쉬운 표정으로 왕의 목에서 입술을 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커텐을 치는 예밍의 뒷모습을 보며 왕은 재빠르게 옷을 벗어내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예밍이 몸을 돌리기 전에 가까스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는지 예밍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도대체 창피한 기준을 모르겠는데
- 내가 창피하면 창피한거야
- 그 포인트를 알려면 몇개월 더 공부해야겠다.
- 이제 괜찮은데..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리며 왕이 중얼거리자마자 예밍이 이불을 걷어내는 게 느껴졌다.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당황한 왕이 몸을 일으키자 예밍이 침대위로 올라와 몸을 맞대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예밍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진지한 눈빛, 왕은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예밍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힘겹게 떳을때, 예밍의 옆 얼굴이 보였다. 손을 뻗어 얼굴에 가져가자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듯 하다가 예밍이 몸을 돌려 왕을 품안으로 당겨 안았다. 예밍의 가슴에 왕의 얼굴이 닿고, 머리위로 턱이 느껴진다. 목 뒤로 둘러진 팔과 여전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기억이 조금전의 일로 돌아가자 갑자기 모든 게 너무나 창피해서 딱-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느낌이었다.





- 머릿속 복잡한 건 알겠는데
- ...응
- 괜찮아?
- 아파.
- 아프게 해서 미안.
- 뭐가 자꾸 그렇게 미안해.



왕이 몸을 약간 빼고 고개를 들어 예밍을 올려다보자 약간 붉어진 얼굴로 예밍이 왕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왕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 아.....
- 이래서 미안.
- 근데 지금 또 하면...나 정말 힘들 것 같은데.
- 안되겠지?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곤란한 느낌의 예밍의 목소리에 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 지금 너무 귀여워서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데 몸이 너무 힘들어서.
- 누가 누구한테 귀엽대.
- 누구긴. 여기 있는 연하애인씨.



왕의 대답에 예밍이 두 손으로 왕의 뺨을 감싸고 입맞춰오기 시작했다. 짧은 입맞춤이 제법 긴 키스로 이어지다 다시 하면 힘들어질 것 같은 일로 이어지는 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 나는 또 무슨 버튼을 누른거야.
- 몰라도 돼. 알면 큰일 나.
- 알아야 다음에 조심하지. 죽을 것 같아.
- 미안. 내가 아직도 여유가 없어.






예밍의 여유와 함께 왕의 현실감이 사라진 주말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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