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zziquai - After love (Female version)







집중호우

천국을 데려와










조금 기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 빗속에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윤기의 품에 안겨있던 여주가 조심스레 윤기를 밀어냈다. 너와 나 사이에 공기 스밀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여주를 꽉 끌어안고 있던 윤기는 의외로 쉽게 밀려났다. 




"오늘 미안해. 이제는 정말 찾-"




아직 윤기가 들고 있는 제 가방을 달라고 여주가 손을 뻗었지만 윤기가 그 손을 피해 가방을 제 몸 뒤로 숨겼다. 이젠 정말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려던 여주가 그런 윤기의 행동에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유치원생이 제 물건 뺏기기 싫어 하는 것도 아니고. 




"안 돼. 못 줘."




생떼 부리듯 단호하게 구는 윤기를 보며 여주가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긴 하루였고 방금까지 탈진할 듯 울어댄 탓에 피곤했다. 침대에 누우면 주말 내내 죽은 듯 누워있다가 깨어날 수도 있을 만큼. 더는 윤기와 실랑이도 할 기운도 없어서 윤기를 노려봐도 그 애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나랑 같이 병원 가."

"민윤기."

"싫으면 우리 집으로 가든지."

"... 미쳤어? 내가 너희 집엘 왜 가."

"내가 네 집 가는 건 불편할 거 아니야."

"지금 무슨 소리를, 너희 집도 불편하거든? 그만하고 가방 달라니까."




처음엔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가끔 뜬금없이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커피라도 마실래? 오늘도 번호 줄 생각은 없나. 하고 물어보던 것처럼. 그러나 장난기 하나 없는 저 뻔뻔한 얼굴에 여주가 아연실색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너희 집을 왜 가.




"아무것도 안 할게. 너 괜찮은가 보기만 할게. 제발 여주야. 내가 어떻게 이대로 너를 보내."




내가 뭔데 너희 집엘 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너 이러는 거 오바야. 여주는 말하고 싶었다.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민윤기 표정이 너무... 너무 안쓰러워서 여주는 차마 말을 하지 못 하고 삼켰다. 여주는 더는 윤기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게 말이 되나. 여주는 윤기의 차에 타고 윤기 집에 가는 순간까지도 수백 번을 고민하고 후회했다. 내가 이 차를 왜 탔을까. 차라리 그냥 택시 타고 간다고 할걸. 눈앞이 캄캄했다. 민윤기는 비싼 외제차 가죽 시트가 다 젖는 것 따윈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이 저를 옆자리에 태웠다. 차에 흐르는 적막이 어색해서 여주는 밖을 보는 척 창문만 보고 있었다. 빗물이 흐르는 창문에는 윤기의 옆모습이 비쳤다. 여주는 이 상황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이게 꿈인가 싶었다. 한국에 와서 너를 다시 만나고 내가 네 차 옆자리에 탈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윤기 집 앞에 도착해서도 여주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맞다, 얘 지금 엄청 잘나간댔지. 연예인만 잘 버는 줄 알았더니 작곡가도 되게 많이 버나 보네. 들어오는 입구 보안부터 철저한 아파트의 위용에 잠깐 주춤대는 사이 윤기가 그새 뒤돌아서서 안 오느냐는 듯 여주를 채근했다. 윤기를 따라 들어간 집은 이 전과 비할 데 없이 크고 좋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여주는 어쩐지 집이 여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무채색투성이인 가구들도, 딱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진 무심한 인테리어도. 꼭 민윤기네 집이라고 이름표를 써붙여놓은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그 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이게 민윤기의 집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여주는 생각했다. 


현관까지 들어와서도 여전히 주춤대는 여주와 달리 분주하게 이 방, 저 방을 들렀다 나온 윤기가 여주에게 옷과 수건을 한가득 안겼다. 




"비 맞았으니까 저기 화장실 가서 씻고 나와. 이건 옷이랑, 수건이랑 칫솔이랑. 필요한 거 더 있으면 말하고."

"아, 아니. 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머리만 좀 말리고 집에 갈게."




어림도 없다는 듯 여주 말을 무시한 윤기가 거의 여주를 화장실로 밀어 넣다시피 했다. 




"저기 서랍 열면 드라이기도 있어."




화장실 문이 닫히고 여주가 화장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집중호우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덩치는 작지 않은 데다가 평소에 옷을 넉넉하게 입는 윤기의 옷은 여주에게 너무 컸다. 샤워를 마치고 헐렁한 윤기의 옷을 입은 채 거울을 보던 여주가 세면대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부끄럽기도 했고, 윤기의 옷을 입고 있으니 괜히 몇 년 전 윤기와 함께하던 그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 복합적인 감정에 얼굴이 벌게진 채 나가지도 못 하고 망설이기만 하던 여주가 이내 다짐한 듯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다른 방 화장실에서 씻고 나와 머리가 약간 덜 마른 윤기가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다가 여주가 나오는 소리에 뒤로 돌았다. 제 옷을 입고서 멋쩍은 듯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는 여주를 한참이나 바라본 탓에 민망해진 여주가 헛기침을 했다.




"저기..."

"앉아 있어. 금방 돼. 내가 집에서 밥을 잘 안 해먹어서 냉장고에 든 게 없네."




애써 뒤로 돈 윤기는 당황해서 하마터면 프라이팬에 소금 대신 설탕을 집어넣을 뻔 했다. 내 집에 한여주가 내 옷을 입고 서 있는 풍경은 너무 아찔했다. 예전에는 익숙하고 당연했던 그 장면에 윤기는 정신을 차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조금만 보여도 저 한여주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것 같아서 윤기는 애써 침착한 척을 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햇반, 레토르트 반찬들, 그리고 계란 후라이. 어쩌면 힘들게 자취하던 시절보다도 훨씬 못한 식단을 보며 여주가 눈만 깜빡였다. 너 이렇게 먹으면 죽어도 삼백 년은 안 썩겠다. 방부제 때문에... 옛날이었으면 그렇게 타박했을 여주는 그저 말없이 햇반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얻어먹는 주제인 데다가 이미 눈앞에 민윤기가 민망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민윤기, 나 이건 진짜 아닌 것 같"




벌써 스무 번도 넘게 했던 말을 반복하는 여주의 몸 위로 두꺼운 이불이 덮였다. 윤기는 꼼꼼히 이불을 펼쳐주고는 일말의 여지도 없는 사람처럼 돌아섰다. 방의 불을 끈 윤기가 다시 뒤를 돌아 제 침대에 누운 채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째려보는 여주와 눈을 마주쳤다. 자 얼른. 꼼짝없이 윤기의 침대에 누운 여주는 오늘로 백번째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 여주를 한동안 보고 있던 윤기가 문을 한 뼘 정도 열어 둔 채로 방을 나갔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왜 헤어진 전 남자친구 집에 와서 씻고 저녁을 먹고 그 애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 이 낯선 방에 나를 두고 어떻게 자라는 거지?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누적된 피로는 여주에게 잠을 몰고 왔다. 절대로 잠들지 못할 거라는 제 예상과 달리 여주가 잠이 드는 데에는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은 나와서 집에 가겠다고 고집이라도 피우는 건 아닌가 각오 아닌 각오까지 하고 있던 윤기는 이상하게 한참이 지나도록 기척이 없는 방문을 슬쩍 열었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윤기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자란다고 너는 진짜 자네. 대단하다 한여주. 한편으론 더 말씨름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너무 태평한 한여주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방을 가로질러 여주에게 가까워질수록 윤기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암막 커튼을 치지 않아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달밤의 주황 불빛이 여주 얼굴을 비췄다. 그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은 윤기의 손이 차마 잠을 깨울까 건드리지 못하는 여주의 얼굴 근처를 맴돌았다.


아까 내 눈앞에 주저앉아있던 너를 보는 순간엔 정말이지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그 절망과 공포에 여주에게 억지로 떼를 썼다. 오늘만이라도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니까. 너를 이렇게 보내면 나는 밤새도록 뜬눈으로 불안에 떨어야 할 테니까. 기어코 이렇게 내 침대에 너를 눕히고 곤히 잠든 숨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진정이 되었다. 


나처럼 잘 지내지 않았기를 바랐다.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파서 나를 잊지도 못 하고 그리워했기를 바랐는데 막상 눈으로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을 했던 스스로의 입을 찢고 싶었다. 내가 아팠던 것보다 네가 아픈걸 보는 게 나를 더 무너지게 했다. 애간장이 다 녹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자는 여주를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윤기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고민하던 손가락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집중호우








여주가 눈을 떴다. 푹신한 침구와 그 침구에서 나는 익숙한 체향에 거짓말처럼 그 어느 때보다 단잠을 잤다. 그런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여주는 누운 채로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힘쓰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잔 거야? 민윤기 집에서? 어떻게 잠들 수가 있지? 어떻게 사 년이란 시간이 아예 없었던 일처럼 이렇게 한순간에 적응을 할 수가 있어? 그 애 없이 괴로워하던 시간을 이렇게나 쉽게 메꿔버리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 밖은 깜깜했지만 몸은 개운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살피지도 못 했던 방을 둘러봤지만 방의 주인은 없었다. 침대 옆에 놓인 제 핸드폰을 확인하니 새벽 세시였다. 아까 민윤기가 한 열 시부터 저를 방에 밀어 넣었으니 못해도 네 다섯 시간은 잔 모양이었다.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야에 침대에서 내려온 여주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작은 스탠드 조명 하나만이 켜져있었다. 거실에도, 주방에도 윤기는 없었다. 혹시 윤기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나 싶어 저는 이제 그만 집에 가야 할지, 아니면 다시 윤기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던 여주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너 담배도 피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윤기가 뒤를 돌아봤다가 여주를 확인하곤 불에 덴 듯 급하게 담배를 지져 껐다. 한껏 당황한 표정을 한 윤기가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어, 아니 안 피우고 그냥 가끔. 더 자지 왜 나왔어. 새벽엔 쌀쌀한데 소파에 가디건이라도 걸치고 나오지."




서른이나 먹은 민윤기가 담배를 피우든 말든 제가 뭐라 말할 처지는 못되어서 그저 입을 다물긴 했지만 놀랍긴 했다.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민윤기의 모습이라. 민윤기가 당장에라도 거실로 들어가서 가디건을 들고올 기세이길래 여주가 제 등 뒤의 베란다 문을 닫았다. 아까부터 저를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며 여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왜 안 자고 있어."

"......"




윤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잠 못 이루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쉽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아까 네가 그렇게 쓰러지는 걸 봤는데, 네가 내 방 침대에 누워있는데, 손만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이렇게 네가 있는데 내가 잠이 올까.




"나 때문에 못 잔 거야? 너 눈이 빨개."




여주는 그런 윤기의 충혈된 눈이 못내 걱정됐다. 처음엔 잠을 못 자고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 거 아니야. 작업이 좀 남아서." 




다시 만난 후로 어떻게든 계속 저와 눈을 맞추려던 평소의 모습관 다르게 제게서 고개를 돌려 피하는 윤기를 보곤 여주가 천천히 그 애의 뺨에 손을 올렸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 애의 고개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제게로 향했다. 제 뺨에 닿은 온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너 혹시 울었어? 물으려 했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다시 보니 눈두덩도 붉었다. 그런데 물을 새도 없이 거짓말처럼 그 애 눈이 점점 더 붉게 충혈되고 눈물이 차올랐다. 만나면서도 그 애가 우는 걸 본 게 손에 꼽았다. 여주의 얼굴이 윤기의 얼굴을 따라 찡그려졌다.




"윤기야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그 다정한 목소리에 눈에 고여있던 굵은 눈물들이 후두두 떨어진다. 그걸 보는 여주는 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린애처럼 저를 보면서 눈물만 떨구는 그 모습이 애달팠다. 왜 그래... 응? 윤기야 왜 그래... 한참을 제 손에 볼을 부비며 소리도 못 내고 울던 그 애가 등을 돌렸다. 




"나, 나 손 좀 씻고 올게. 추우니까 들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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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가 잠든 사이, 혹시나 여주의 잠을 방해할까 봐 테라스로 나온 윤기가 잠시 망설이다 호석의 번호를 눌렀다. 늦은 밤인 걸 알았지만 차마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주에게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호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정호석씨."

- 아 예 피디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짜증스러울 만도 한데 호석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윤기에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 옆에 저 다정한 사람이 있었어서 다행이라고. 네가 힘들 때면 그 옆에 누군가가 있어 줘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피디로 전화한 건 아니고."

- 네?

"...... 여주가..."




주먹을 꽉 쥔 윤기가 잠시 숨을 골랐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 여주 누나요?

"여주가 아까 쓰러졌......습니다."

- ......




역시나 알고 있는지 놀라지도 않고 아무런 대답이 없는 호석에게 윤기는 물어야 했다. 




"정신을 잃은 건 아닌데 당장에라도 그럴 것처럼 숨을 잘 못 쉬고... 온몸을 떨면서... 여주는 처음 있던 일이 아니라던데 아는 바가 있습니까."

- 그건 여주 누나에게 직접 물어보셔야죠.

"......말해."

- ......

"한여주가 비 오는데 아무도 없는 길바닥에서 혼자... 혼자 그러고 있었다고.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손 놓고..."

- ......




아까 그 일을 다시 떠올리려 하기만 해도 윤기는 온몸이 차게 식고 속이 울렁였다. 잘게 떨리려는 손으로 핸드폰을 더 꽉 쥐었다. 아무것도 못 했어 내가. 그러니까...




"부탁합니다. 정호석씨."






"얼마나 자주 그래?"




여주의 잔에는 술 대신 물이 따라졌다. 넌 약 먹었으니까 술 안 돼. 그런 윤기를 어이없다는 듯이 보던 여주가 제 두 다리를 의자 위로 올리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았다. 




"많이 괜찮아졌어. 정말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가끔 사람이 너무 많거나 긴장을 하거나 하면...  요즘 약을 깜빡 잊고 안 챙겨 먹어서 그런 거야. 진짜야."




정말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인 여주가 제 앞에 놓인 물잔을 홀짝거렸다. 그 모습에 윤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윤기야 나 열나는 거 같아. 응? 이마 만져봐. 뜨겁지. 나 아파. 빨리 안아줘.

회사에서 박대리가 나한테 일을 다 미뤘다니까? 진짜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월급은 나보다 더 많이 받고!!!

윤기야 있잖아. 나 또 아빠랑 싸웠어. 진짜 아빠 너무하지 않아? 내가 몇 번이나 싫다고 했는데!






여주와 만나던 시절 여주는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 내게 털어놓곤 했다. 아프면 내게 가장 먼저 달려와서 어리광을 부리고, 힘든 일이 있으면 내게 전화를 걸어 다 쏟아내곤 했다. 그럼 나는 그런 한여주를 끌어안고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게 좋았다. 너도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 네가 내게 그런 것처럼 나도 너에게 유일한 의지고 안식인 것 같아서. 그런 네가 내가 없던 곳에서 몇 번이고 아팠다고. 넘어졌다고. 무너졌다고. 






- ...... 공황 장애였어요. 한 번씩 발작이 오면 그래요. 숨을 잘 못 쉬고, 몸을 떨고, 주변을 잘 인식을 못 하고, 어지럽거나 식은땀을 많이 흘리기도 하고. 불안함을 느끼면 의식하지 못 하고 종이를 막 찢거나 주먹을 세게 말아쥐어요. 손바닥이 까질 만큼 세게. 약 먹으면서 많이 좋아져서 최근에는 거의 그런 일이 없었는데...

"......"

-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나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서 생긴 거라고 했는데 그 이유까지는 저는 모르죠. 누나는 힘들면 말도 안 하고 울지도 않고 다 속으로 삼키니까.






정호석의 이야기 속의 한여주는 너무도 낯설었다. 잘 웃고, 잘 울고 표현에 거침이 없던 너.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쉴 새 없이 내게 종알대던 너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 윤기는 호석과의 전화를 끊고 한참을 흐느꼈다. 여전히 나는 또 네 옆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해서.


가만히 제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던 윤기의 시선이 여주에게로 향했다.




"한여주."

"......"

"누나."

"뭐야 갑자기,"

"나는 너랑 헤어지고 난파선 같았어. 그래서 옆에서 불어오는 풍랑에도, 잔잔한 파도에도 흔들렸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도, 쨍쨍한 햇볕에도 부서져 내렸어. 그렇게 끊임없이 나는 가라앉기만 했어."

"......"

"이런 게 사랑이면 다신 사랑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어."

"......"




애써 웃고 있던 여주의 입매가 굳어졌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죄어왔다. 제게 버림받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윤기를 볼 자신이 없어서 물잔을 쥔 손에만 힘이 들어갔다. 너 때문에 아팠다.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신이 없어서 여태 내내 피해왔는데 도망칠 곳도 없이 민윤기에게 직접 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너무 두려웠다.




"어떻게 꾸역꾸역 흘러는 가는데 언젠가 다 가라앉을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야. 근데 멈출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어서 어떻게든 그렇게 굴러가던 그런 일상이 거짓말처럼 네가 들어오니까 정상궤도를 찾아."

"민윤기."

"안 괜찮았어. 나 하나도 안 괜찮았어."

"......"

"괜찮아질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런 척했는데 난, 난 하나도 안 괜찮았어. 매일 네가 조금씩 희미해져서 미칠 뻔했어."

"윤기야."

"그러니까 한여주,"

"제발 그러지 마."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내젓는 여주의 손을 윤기가 그러쥐었다.




"내 옆에 있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를 용서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다시 네 옆에 있으라 해."

"용서? 내가 뭐라고 널 용서해. 넌 잘못한 게 없고 난 너 원망한 적 없어."

"......"

"말했잖아. 우리가 헤어지면 난 너를 놓친 나를 원망할 거라고."

"윤기야 모르겠어? 그때 내가 널 떠난 건 네가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네가 돈이 없어서도 아니었어. 내가, 내 배경이 너를 힘들게 하고 네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걸 견딜 수가 없던 거야. 나 때문에 음악을 포기하겠다는 너를 볼 수가 없어서 떠났던 거야. 널 위해서 떠난 게 아니야. 네 옆에 있을 자신이 없던 나 때문에 떠났던 거야."

"그럼 이번엔 날 위해서 와."

"너 바보야? 넌 자존심도 없어? 왜 내가 잘못한 게 없어. 왜 나를 원망한 적이 없어!! 왜!! 내가 어떻게 너를 다시 만나. 네가 제일 힘들 때 너를 떠나놓고, 어떻게 내가 너 잘됐다고 다시 돌아와서 너를 만나. 내가 보란 듯이 잘 살라고 했잖아. 네가 왜 힘들어해. 영원 같은 건 안 믿는다며. 그랬으면 다른 사람 만나서 잘 살지 바보같이 왜 이러고 있어 왜!!!"




어떻게 너는 나를 보면서 벌써 사랑을 말해. 나 때문에 네 인생이 난파선 같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나한테 돌아오라는 말을 해. 몸을 뒤틀며 우는 여주에게 다가간 윤기가 여주를 끌어안았다. 




"나는 알았거든 너 보자마자. 사 년 만에 뉴욕에서 너 보는데 알았어. 아, 나는 너 없으면 안 되는구나. 사 년 동안 널 잊고 산 게 아니고 그저 나는 널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때 너를 붙잡을 수가 없는 나를 죽이고 싶었는데, 그런 너를 다시 만났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놓겠어."

"......"

"여주야. 나는 다 해."

"......"

"나는 네가 하라면 다 해."

"윤기야."

"네가 헤어지자 그래서 헤어졌고, 네가 무너지지 말래서 못 무너졌고, 네가 성공하라 해서 죽어라 아득바득 올라갔어. 그러니까 네가 직접 말해."

"......"

"너를 사랑하라고. 너한테 돌아오라고."

"...... 미쳤어."

"지금 당장 그게 안 되겠으면 기다리라고 해. 그럼 나는 기다릴 테니까."




빨개진 눈으로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 여주를 보며 윤기가 웃었다.




"......"

"난 이제 아무것도 포기 안 해. 한여주."




사 년을 자신을 할퀴고 상처 내던 죄책감을 민윤기는 나의 탓이 아니라 했다. 차라리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서 내내 벌주던 나를 끌어안고 너는 또다시 내게,




"만약 다시 너희 아버지가 반대하시면 인정해주실 때까지 내가 더 노력할게. 무릎 꿇고 빌라면 빌어. 네가 도망가자면 난 네 손 잡고 어디든 가. 네가 옆에 있으면 나는 다 해. 그러니까 여주야."

"......"

"나한테 사랑하라고 해. 그럼 나는 그렇게 해."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모든 선택권을 넘긴다. 날 좀 예뻐해 줘. 사랑해줘. 아껴줘. 기꺼이 내 손에 고삐를 넘기고 당기라 한다. 너를 품어달라고, 너 좀 봐달라 애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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