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아니었음을



“예,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길었던 통화를 마치고 우성은 쿠션 하나를 껴안은 채 소파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연애 프로그램 출연 제의라니. 생각지도 않았던 연락이었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평범한 연애 프로그램이라면 국내 리그 복귀에 도움이 되겠다, 생각하며 흔쾌히 출연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고 비즈니스적으로 대했겠지만. 만나는 사람도 없으니 마음에 걸릴 것도 없었겠지.

그런데 환승 연애라니. 이미 헤어진 연인과 함께 출연하는 것이라니. 처음 연락이 왔을 땐 자신과 명헌이 형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놓고 알린 것은 아니었지만,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구태여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명헌이 형도 고작 그런 것으로 서로를 멀리하기엔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자신이 미국 NBA에서 국내로 복귀한다는 소문이 돌고 장난치듯 스팸 연락을 보낸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새로 런칭하는 프로그램일 줄이야. 그것도 명헌이 형은 출연을 승낙했다니… 이제는 잊은,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이 퐁퐁 솟아올랐다.

명헌과는 퍽 오래도 만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부원들과 잘 섞이지 못하던 자신을 명헌이 형과 다른 형들이 잘 챙겨주어 산왕고 농구부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명헌에게 반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명헌은 겉보기에 조금 특이해 보이고 무뚝뚝해 보여도, 세심한 구석이 있었고 늘 자신을 바라봐 주고 있었으니까.

그 시선을 의식한 순간, 농구를 할 때와는 다르게 심장이 울렸다. 명헌이 나를 보기만 해도 좋고 때때로 에이스라며 추켜세워 주는 것도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성은 명헌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주장을 향한, 그리고 선배이자 형을 향한 동경의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지만.

마음을 처음 자각하게 되었던 계기는 언제였을까. 이제는 오래되어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느새인가 명헌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정우성은, 자신은 그걸 오래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고 싫음은 분명하게 밝혀야 했고 그때는 어려서 그런가, 더 했다. 지금은 나이도 먹고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좀 나아졌다만.

아마 합숙을 하던 날이었던 것 같다. 명헌이 형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날이. 명헌이 형이 거절하면 어떡하나,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줄을 몰랐다고 하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였다. 막상 눈앞에 두고 나니, 차마 입이 안 떨어져 그냥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지껄이며 어색하게 웃었던 기억이 났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서 맴맴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귓가를 윙윙 어지럽히는 벌레 떼에게 습격을 받으면서도 명헌은 우성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우성이 하고픈 말을 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는 듯. 이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짧은 정적을 지나, 우성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멋없고 촌스러운 고백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멋진 말로 꾸며 고백하고 싶었는데 막상 나온 건 눈물이었다. 아니면 울음을 먼저 터뜨렸던가. 이제 와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자니, 왠지 스스로 흑역사를 발굴해 내는 것 같아 으으,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마 눈물을 흘리며,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를 꾸역꾸역 참으며 좋아한다고, 나 좀 봐달라고 애써 말했던 것 같다. 그때 명헌이 형의 표정이 어땠더라…? 가로등 아래에 서 있어서 표정이 훤히 보였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오래됐나. 절대 잊지 않겠다고 했던 걸 잊어버릴 정도로.’

 

우성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저편에 넣고 잊고 살았는데 되살아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우성은 쿠션을 껴안은 채로 휴대폰 화면을 껐다가 켜기를 반복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명헌이 형이 고치라 했던 버릇이었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쩍 일어나 안고 있던 쿠션을 저 멀리 집어 던졌다.

유일한 사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사랑은 특별한 거라고. 그러니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헤어지게 될 거란 생각조차 하지 말자고. 미국에 오던 날 공항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 무슨 오만함이었을까.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그냥, 농구를 좀 좋아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을 뿐인 평범한 사람인데.

미국과 한국의 시차는 두 사람의 관계에 치명적이었다. 시차가 정반대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연락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성이 막 일어난 아침에 연락을 하면 명헌은 훈련이나 시합을 마치고 막 잠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타지에, 그것도 비행기로 족히 14시간은 타고 와야 하는 먼 곳에서 의지할 사람 한 명 없이 업계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아직 어렸던 우성에겐 퍽 어려운 일이었다.

의연하게, 그렇게 보이고자 어떻게 어떻게 잘 버티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성은 서서히 명헌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계가 오고 있었기에. 또한 명헌에게 그런 걸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명헌에게는 명헌의 일이 있었으니까. 명헌은 대학에 가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그 스스로도 힘든 일이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선택으로 온 미국행에서 힘들다고 형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칭얼거릴 수 있을까. 그런 자잘한 상황이 쌓이고 쌓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별을 맞이했다.

휴식기를 맞이해 귀국했을 때, 우성은 직감했다. 이번 한국행에서 명헌과 진정 이별하게 될 거라고. 평소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들어간다고, 보고 싶다고, 얼른 봤으면 좋겠다고 문자를 남겨 두었지만, 전화 통화는 하지 않았다. 명헌도 ‘알겠다 뿅.’ 정도로 간결하게 답을 보내온 것이 전부였다.

부모님 댁에 가서 짐을 풀고 시차 적응을 위해 저녁까지 억지로 눈을 뜨고 있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 마치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잠들었다. 명헌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걸 느끼지 못했다는 자신에게 놀라지조차 않았다. 올 것이 왔다… 하는 느낌이었을까.

오랜 연인 관계에서 오는 평범한 권태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명헌이 형에도, 자신에게도 각자 서로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생긴 것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산왕 농구부 선후배, 동기들이 한국엔 언제 왔느냐고 보내온 연락 가운데 명헌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밖에서 밥 먹으라고 소리치시는 어머니의 음성을 들으며 우성은 명헌에게 연락을 보냈다.

 

> 형. 우리 만나요. 자주 가던 카페에서, 오늘 두 시에.

< 그래.

 

답장은 꽤 빨리 왔다. 우성은 잠시 눈을 감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오랜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내내 우성의 곁에는 명헌이 있었고 그건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명헌은 우성에게 좋은 연인이기도 했지만, 좋은 스승이자, 친구, 형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에 이젠 정말 우린 끝이라고 도장을 쾅, 찍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우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정말 현실로 다가오니 가슴이 술렁거렸다. 명헌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정말 이대로 헤어지는 게 맞아?

자신에게 끝없이 되묻고 되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지지부진한 관계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명헌이 형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린 이미 끝이 난 관계라고.

밖에서는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밥 먹으라고 닦달하는 소리에 우성은 다닥다닥 붙어 있던 감정을, 생각을 털어내곤 마른세수를 두어 번 한 뒤 넉살 있게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이야, 우리 엄마 요리 솜씨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아들의 넉살 있는 말에 엄마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서서히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젯밤에 제대로 풀지 않은 캐리어를 뒤져 가장 깔끔하고 괜찮은 옷을 꺼내 입었다. 그간 꽤 자란 머리도 단정하게 정리하고 입에 입 냄새 제거제까지 뿌렸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명헌을 만나고 싶진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멋진 상대가 되고 싶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싱숭생숭한 것이 약속 시각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조금 이르게 집에서 나왔다. 익숙한 거리를 걸으며 우성은 자연스럽게 명헌과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여기서 형이랑… 저기서는 또 형이랑… 아, 저거 형이랑 먹었을 때 맛있었지.

문득, 명헌과 함께 한 추억이 참 많다고 느꼈다. 이대로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붙잡을까. 아직 형 많이 좋아한다고, 나랑 계속 만나달라고, 그렇게 질질 붙잡을까.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하는 동안 마음이 수십 번은 더 바뀌었다. 우리는 이대로 끝내는 게 맞아, 싶다가도 그동안 추억에 마음이 아파서,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서 붙잡을까 싶기도 했다.

어느덧 카페가 눈앞에 보였다.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명헌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음료를 하나 주문하고 조금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음료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인터넷 서핑 좀 하다가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돼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카페의 문이 열렸다.

명헌이 들어왔다.

우선은 손을 들어 명헌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알렸다. 명헌은 우성을 한번 보고는 카운터에 가서 음료를 주문한 뒤 우성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오랜만이에요, 형.”

“그러게 뿅.”

“잘 지내셨죠? 선수 생활은 좀 어때요?”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미국에 간 초반에는 대학교 방학 때나 미국으로 날아오기도 했는데, 얼굴 못 본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전화 통화나 영상 통화를 한 것도 손에 꼽았다.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고 해야 할까. 연인이라기엔 그만큼 서로에게 소홀했다.

신변잡기에 가까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명헌도, 우성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놓인 음료만 홀짝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체감상 순식간에 흘러간 듯했지만, 족히 1시간은 지난 후였다.

 

“저기,”

“우리…,”

 

우성과 명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명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성. 미국에서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뿅.”

“형도 대학 농구부에서 활약하시던데요. 이번에 주장 되셨다고 들었어요.”

“……울지 마.”

 

명헌이 돌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우성에게 티슈 몇 장을 들어 건넸다. 우성은 명헌의 그 다정한 행동에 더욱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의연하게, 담담하게 보내줄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이별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이 꼴사나운 모습을 명헌에게 보이기 싫어 우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뻗어 명헌이 건넨 티슈를 받아들었다.

여러 장의 티슈를 겹쳐 눈가에 대었다. 여러 장을 겹친 덕에 꽤 두툼했는데도 눈물이 어찌나 나는지, 금방 젖어서 흐물거렸다. 우성은 흐끕 흐끕 울음과 눈물을 삼키며 겨우 진정한 뒤 명헌을 보았다. 명헌의 눈가도 붉어진 게 보였다. 잘 티 내진 않으려 하지만, 이 사람도 나와 끝나는 게 아쉽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성은 겨우 울음을 멈춘 뒤 일어서서 명헌에게로 다가가,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도장을 찍듯, 입술을 겹친 뒤 꾹 누르고 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명헌이 가만히 굳어있는 게 느껴졌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우성이 명헌의 입을 틀어막아 멈추었다.

 

“그게 뭐든, 지금은 하지 마요. 그냥… 이대로 갈 수 있게 해주세요.”

 

명헌은 우성에게 입을 틀어 막힌 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은 그대로 명헌을 스쳐 지나가, 카페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우성은 다시 터져 나온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생각보다 더 아프고 힘들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미 끝이 난 관계이기에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무렇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금방 아무렇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아팠다. 가슴이 미어졌고 목구멍이 조여오며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덩치 큰 사내가 엉엉 울면서 길을 걸으니,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우성에게는 닿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우성은 자신의 감정을 돌보기에 바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별을 맞이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것이다.

그동안 우성은 유학 생활을 거쳐 NBA에서 훌륭한 선수로 자리매김했고 명헌 또한 대학 졸업 후 국내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국내로 복귀한 뒤 명헌과 마주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업계에 있는 만큼 시합으로든, 어떻게든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된다니. 어떤 얼굴로 보아야 할까, 반갑게 맞이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모르는 척, 무뚝뚝하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성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명헌은 이미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왔으니, 남은 건 자신의 결정뿐이었다. ‘환승 연애’라는 프로그램 이름처럼 전 연인이 함께 출연하는 것이니만큼 자신이 출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다면 명헌과 이런 식으로 재회하지 않아도 된다.

핑계는 많았다. 곧 국내 리그로 복귀하니만큼 앞으로의 일정에 집중하고 싶다고, 혹시 경기력에 무리가 갈 수 있는 활동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되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에이전시를 통해 말만 한번 전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조금 전 전화를 마친 제작진 측에서도 정우성 선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고 또 일정에 무리가 있다면 거절해도 된다고 말해온 참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명헌이 먼저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온 이유가 궁금했다. 명헌은 꽤 단호한 면이 있었다. 한번 끊어진 인연을 다시 붙잡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는 않더라도 명헌에 대한 생각을 붙잡고 있지는 않았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이따금 흔히 말하는 썸을 타기도 했다. 그 이상으로 관계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하… 어떡한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던 우성은 결정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한국에 귀국한 후 따로 만나보기로 했으니 그때 확실하게 결정해도 될 것이다. 당장 출연 여부를 결정하기에 우성의 마음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취지는 다양한 이유로 이별한 커플들이 모여 지나간 사랑을 되짚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가는 연애 리얼리티였다. 혹시나 명헌이 자신을 핑계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요동을 쳐댔다. 벌렁벌렁 뛰어대는 심장을 주체하기가 힘들어 우성은 후드를 확 눌러쓴 채 그대로 집을 달려 나갔다. 런닝이라도 좀 하고 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러갔다. 어릴 땐 느리게 흘러갔던 것 같은데. 역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제작진이 한 번 더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우성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하루에 수십 번씩 명헌의 전화번호를 휴대폰 화면에 띄웠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연락처는 이미 지웠는데, 그의 전화번호는 아직 뇌리에 남아 있어서 다시 누르는데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미련 넘치는 놈이었던가, 싶어서 다시 지우고 또다시 버튼을 누르고. 그렇게 반복한 게 수백 번이었다. 결국, 전화 한번 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연락해볼까. 왜 환승 연애에 나가려는 거냐고 캐물어 볼까. 무수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방송에 출연하는 것.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질러보자!

우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명헌이 형도 출연하겠다는데, 내가 못 할 게 뭐야. 내가 바람피워서 형이랑 헤어진 것도 아니고 내가 형한테 뭔 쓰레기 짓 한 것도 없고. 오히려 좋게 잘 헤어지지 않았나. 그러니 출연해도 나한테 문제 될 거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고민이 언제였냐는 듯 싹 사라졌다. 내내 술렁거리던 가슴도 잠잠해졌다. 이렇게 간단한 걸 그게 뭐라고 끙끙 앓고 있었을까.

우성은 바로 제작진에게 연락해,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역시나 기다리고 있었던지, 제작진 쪽에서는 우성의 출연을 매우 반기는 눈치였다. 포맷 자체가 일반적인 연애 예능 프로그램은 아니다 보니, 유명인의 출연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바로 사전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명헌과의 인터뷰는 이미 마쳤다고, 우성 선수님만 인터뷰하시면 전 출연자 인터뷰는 끝이라는 말에 우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전 인터뷰도 하고 규칙이나 프로그램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해주겠다는 말에 알겠다고 답한 뒤 통화를 끊었다.

우성은 소파에 길게 늘어진 채 몸부림을 쳤다. 미국에 넘어간 후 키가 더 커서 190cm가 넘는 거구의 몸이 버거운지 소파가 끼익 끼익 옅은 비명을 토해냈다. 결정을 내리고 사전 인터뷰까지 하기로 했는데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번에 명헌이 형을 보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어떤 얼굴로 보아야 할까 싶어 고민되었다.

그런 우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아주 착실하게 흘러가 사전 인터뷰 날이 되었다.

인터뷰는 꽤 길게 이어졌다. 명헌과 인터뷰를 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는지 둘 사이에 대해 꽤 자세하게 알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해서 차츰 깊고 자세한 이야기까지 들어갔는데 사람이 불쾌하지 않도록 잘 조절해주어서 우성은 별 어려움 없이 답변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마지막에 받았던 이별하게 된 이유에 대한 질문에서는 잠시 답변을 머뭇거렸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말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우성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PD와 작가 또한 그런 우성을 배려해, 답변을 종용하지 않고 충분히 생각한 후 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무래도… 장거리 연애가 쉬운 건 아니잖아요. 같은 한국에 있어도 사는 지역이 달라지면 힘든데, 한국과 미국은 시차도 다르고 물리적인 거리도 더 멀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이별이 다가온 것 같아요. 누가 잘못했다, 누가 더 잘했다 그게 아니라 자연스럽게요. 서로 이대로는 안 된다고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그냥,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럼 전 애인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감정은 어떠셨나요?”

“음… 사실 저는 꽤 담담할 줄 알았거든요. 제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만나서 헤어졌는데, 이미 예견한 일이기도 했고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딱 느껴지더라구요. 아, 이번에 헤어지겠구나. 근데 막상 만나서 얼굴을 딱 보니까 눈물부터 났어요. 제가 너무 울어서, 저한테 울지 말라면서 휴지를 막 줬거든요. 근데 그 행동이 너무 다정한 거예요. 그래서 더 울어버렸죠.”

 

긴 답변을 마치고 우성이 머쓱하게 웃었다. 말을 너무 주절주절 늘어놓은 건가, 싶었다. PD와 작가의 표정을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듯했지만.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PD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하더니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이 적힌 종이를 몇 장 건네주었다.

 

“우선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환승 연애’는 각자 다른 이별을 맞이한 커플들이 나오게 될 거예요. 출연자들 전부 함께 생활하게 될 거고 입주 규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엑스, 그러니까 전 애인을 밝히거나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입주 첫날에 한 명씩 입주하게 될 건데 그때 이명헌 선수와 둘만 있게 되더라도 모르는 척, 전 애인이 아닌 척하셔야 합니다.”

“아, 네. 그건 알겠습니다. 근데 저랑 명헌이 형이 같은 고등학교 농구부 출신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 그런 것도 모르는 척해야 하나요?”

“그런 것까진 아니구요. 선후배 관계라는 친분은 드러내셔도 괜찮습니다. 두 분 관계만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으시면 돼요.”

 

우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과연 명헌이 형을 보고 과연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 관계인 척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으로 우성의 생각은 나래를 펼치며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성의 표정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출연하기로 해서 마음이 편안해진 건 좋은데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본 촬영 전에 둘이 따로 촬영하는 시간도 마련된다고 했다. 촬영이라고 해도 단둘이 보게 된다니. 그것도 이런 연애 프로그램을 통해서. 생각만 해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명헌이 형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설레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했다.

설렘과 두려움에 찬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촬영 날이 기다려지기도 했지만, 이대로 그냥 도망쳐 버리고도 싶었다. 천하의 정우성이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이 계속 갈팡질팡했다.

그러는 와중, 대망의 촬영 날 아침이 되었다. 우성은 새벽같이 일어나 몸 구석구석 꼼꼼히 씻고 나와, 옷장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어 침대에 늘어놓았다.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거의 한 시간을 고민하다가 고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촬영 장소까지 가는 길은 또 왜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건지. 차가 막히지도 않아서 더욱 그런 듯했다. 그 때문에 우성은 명헌과의 재회에 마음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촬영 장소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출연진의 몰입도를 위해 스텝들은 몇 명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부분 다른 곳에서 촬영을 지켜본다고 했다. 카메라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색할까 봐 걱정되는데, 카메라까지 많으면 어쩌나 했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어서 우성은 먼저 제작진이 배정해준 자리에 앉았다.

촬영 장소는 언젠가 함께 가보자며 이야기를 나눴던 카페였다. 촬영을 위해 전체를 대관한 건지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그런 곳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마음 한쪽이 영 이상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입구 쪽이 어수선해졌다. 명헌이 도착한 것이다. 우성은 앞에 놓인 음료로 입을 축이며 긴장감에 매우 뛰어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터벅터벅.

익숙한 발걸음 소리. 이어서 명헌이 우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멀리서 촬영 시작하겠다는 조감독의 말이 윙윙거리며 귀를 울렸다. 촬영이 시작됐는데도 두 사람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스텝 몇 명이 사고 난 거 아니냐고 끊었다가 다시 가야 하냐, 묻는 것이 들렸다.

우성은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음료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씁쓸한 커피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젠 커피 마시네 뿅.”

“……네. 저도 이제 이십 대 후반이잖아요.”

“벌써 그렇게 됐나 뿅.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몸도 많이 커졌네 삐뇽. 키도 큰 거 같고 뿅.”

 

말끝마다 붙는 특이한 어미가 왜 이렇게 반가운지. 우성은 그 순간, 자신이 명헌을 많이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자신을 속였을 뿐이라는 것 또한 알아챘다. 이따금 명헌을 떠올렸던 것이, 자신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명헌을 다시 봐서 반가움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결국 우리는 헤어진 사이라는 게 다시금 피부에 닿아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우성이 뚝뚝 눈물을 흘리는 동안 명헌은 그런 우성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런 다정함이 그리웠다. 짓궂게 굴 때도, 타박하고 강하게 몰아붙일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 안에 감추어진 다정함이 그리웠던 거다. 후회됐다. 그때 왜 이별을 입에 담았을까. 그때 왜 이별을 생각했을까. 그날, 그대로 카페를 나가는 게 아니라 형을 붙잡아야 했던 건 아닐까. 무릎을 꿇어서라도 나랑 더 함께해달라고 애원해야 했던 걸까.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명헌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미국에 유학을 가서 NBA에 입성할 때까지 내내 옆에 있던 명헌이 아니었던가. 비록 연애 시절의 대부분은 장거리로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다.

 

“울지 마, 뿅.”

 

그날처럼 명헌이 우성에게 티슈 몇 장을 건넸다. 우성은 눈물을 애써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명헌이 건네준 티슈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명헌을 똑바로 보았다. 그때보다 머리가 더 자라 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형은 항상 자신과 비슷하게 빡빡 깎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긴 머리칼을 보니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이제야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게 억울했다. 결국, 이별을 먼저 입에 담은 건 자신인데도 멍청한 선택을 했던 과거의 자신에게로 가서 뺨을 때리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윽박지르고 싶어졌다. 새삼,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명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인생을 허송세월하게 되었을 테니까. 명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명헌을 그리워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우성은 그저 입술만 꾹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다짐을 했다. 반드시, 이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동안 반드시 명헌을 다시 제 곁으로 오게 만들겠다고. 그래서 앞으로는 명헌과 함께 길을 걷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명헌을 보지 못하는 게 손해처럼 느껴져, 우성은 눈을 똑바로 뜨고 명헌을 보았다.

명헌이 작게 웃고 있었다.

 

“왜, 왜 웃어요?”

“그새 눈 부었다 베시. 어쩜 넌 달라진 게 없냐 뿅.”

 

우성이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 위로 명헌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우성은 다시 고개를 들고 명헌이 웃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왜 여기 나오겠다고 생각했어요? 섭외 연락받고 바로 결정했다고 들었어요.”

“그냥… 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뿅.”

“그래요?”

 

우성이 실실 웃었다. 명헌도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 같아 괜히 좋았다. 물론 추억에 잠겨 그저 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네. 하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어서 좋겠다. 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성은 명헌이 자신의 어느 부분을 좋아했는지 잘 알았고 그 매력을 한껏 이용할 자신도 있었다. 이번 촬영에서 반드시 명헌을 다시 꼬여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욕을 다시금 불태웠다.

 

“촬영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아요. 본 촬영은 다음 주에 시작해요. 위치나 시간은 따로 연락드릴 겁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하도 울어서 부은 눈두덩이 위에 물티슈를 얹고 있던 우성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옆에서는 명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명헌 또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가만히 서 있다가 우성이 자신을 흘깃 보자 카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우성은 명헌의 뒤를 따라 그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정리하는 스텝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어수선한 카페를 벗어나서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큰 도로가 나왔다.

고민했다. 붙잡을까, 아니면 이대로 보낼까. 어차피 다음 주에는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이대로 보내도 괜찮겠지만, 같이 커피라도 한 잔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촬영이 너무 빠르게 끝이 난 것처럼 느껴져서 이 순간이 너무 아쉬웠다.

 

“배고프면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뿅.”

“……네, 네! 좋아요!”

 

결국, 정적을 가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명헌이었다. 우성은 명헌의 말에 환히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명헌은 그런 우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워서 우성은 명헌이 손을 떼어내고 나서야 명헌의 행동을 자각했다. 우성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향한 곳은 근처 맛집이었다. 점심시간을 살짝 비껴간 덕분에 유명한 맛집인데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식당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식사는 매우 조용했다. 안 그래도 손님이 우르르 빠져나간 후라, 조용한 가게 안에서 두 사람은 매우 조용히 식사했다. 우성은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물쭈물하는 우성의 어깨를 명헌이 툭 치고는 다음 주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우성은 멍하니 멀어지는 명헌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붙잡을 염치가 없어서 그냥 떠나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우성은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우며 택시를 잡아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성은 옷장을 뒤져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명헌에게 최대한 잘 보일 수 있도록, 언젠가 명헌이 사주었던 선물도 잊지 않고 챙겨 넣었다. 거창한 건 가져가지 못하겠지만, 팔찌나 시계 같은 건 은근히 내보일 수 있을 테니까. 우성은 명헌의 선물과 편지를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예쁜 상자에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찾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본 촬영 당일이 되었다. 우성은 제 덩치만큼 큰 캐리어를 끌고 미리 불러둔 택시에 올라 촬영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한남동의 한 단독주택.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방에서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통창이 달린 큰 단독주택이었다.

미리 연락받은 장소로 가자, 스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레일러가 여러 대 있는 것을 보니 다들 따로 대기하고 있는지,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명헌도 왔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작가 한 명이 다가와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우성 선수는 세 번째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저기 골목에서부터 입주하시는 것까지 촬영할 거니까 어색하지 않게, 혼잣말 조금씩 해주시면 됩니다. 숙소 안에는 관찰 카메라가 곳곳에 달려 있어요. 사각지대는 화장실이니까 그것만 생각해주시고요. 나가시는 건 제가 이따 와서 다시 알려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말 촬영이 시작되는 것 같아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우성은 메이크업팀에게 간단히 메이크업을 받으며 연신 심호흡했다. 이제 곧 있으면 본 촬영의 시작이다. 우성이 떠는 게 느껴졌는지, 메이크업 담당자가 작게 웃으며 팬이라고, 응원한다고 말해주었다.

 

“정우성 씨! 지금 출발할게요!”

 

트레일러 바깥에서 스텝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마침 메이크업도 다 마친 우성이 트레일러를 나서자, 스텝이 자신을 따라오라며 그를 데리고 숙소까지 이어진 골목으로 데려갔다. 여기에서 저 앞까지 캐리어 끌고 걸어가시면 되고 대문과 현관은 열려 있으니 편하게 들어가시면 된다고 안내해주었다.

우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걷기 시작하자, 담당 VJ가 우성이 걷는 모습을 따라 찍기 시작했다. 우성은 긴장된 숨을 내쉬며 연신 심호흡하고는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캐리어를 번쩍 들고서 계단을 올라 현관을 여니, 집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캐리어를 현관 안쪽에 들여놓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이 먼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퍽 어색한 분위기를 가르고 우성이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중, 명헌이 있었다. 우성은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는 반가운 듯 웃으며 명헌을 향해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형.”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스러울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흔들리거나 울음이 섞여 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촬영을 망쳐버릴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우성이 그런 것처럼 명헌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정말 오랜만에 후배를 본다는 듯한 얼굴로 우성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우성은 쓴웃음을 삼키며 명헌과 함께 있던 여성 출연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우성에게 인사를 받은 여성은 어깨를 움찔 떨며 고개를 숙여 마주 인사해왔다. 우성은 명헌과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이 어색하기도 하고 아직 감정이 다 다스려지지 않아,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감정이 다 터져 나오면 어쩌나, 싶어서 그냥 잠자코 앉아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지나갔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둘이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던 거 같은데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적당히 시간 텀을 두고 출연자들이 한 명씩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원은 총 여덟 명. 즉, 네 커플이 출연하는 것이다. 명헌이 형과 자신처럼 남남 커플도 있지만, 여여 커플도 있는지, 출연 인원은 남자 넷, 여자 넷으로 딱 맞았다. 그냥 보기에는 누가 누구와 전 연인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리송했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누가 하실 건지 결정해볼까요?”

 

남성 출연자 중 가장 활발하고 밝아 보이던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몇 년간 미국에서 본의 아닌 자취 생활을 하긴 했지만, 요리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주로 사 먹거나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기 때문에 우성이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달걀 프라이나 라면 정도가 전부였다.

그때, 명헌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성 출연자 한 명도 손을 들었다. 우성이 몸을 움찔 떨었다가 이내 진정하고는 남몰래 볼 안쪽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우성은 손을 뒤로 쓱 빼어 주먹을 꾹 쥐고는 명헌과 여성 출연자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져 왔지만, 방송을 망칠 수는 없었기에 우성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컥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애써 참아냈다.

식사 당번이 정해지고, 다들 우르르 일어섰다. 거실과 주방을 기점으로 남자 방과 여자 방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성 출연자들과 여성 출연자들은 따로 떨어져 양쪽으로 나누어 복도를 걸었다.

방은 총 두 개가 있었다. 2인실인지, 침대가 두 개씩 놓여 있는 걸 보고 우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면 방은, 두 분이 같이 쓰실래요? 이미 친분도 있으시고.”

 

활발한 남성 출연자가 말했다. 그 말에 우성은 저도 모르게 명헌의 눈치를 살폈다. 명헌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우성과 함께 쓰는 게 좋을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쓰는 게 좋을지 가늠해보는 듯했다. 우성은 명헌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선수를 치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 명헌이 형이랑 저랑 둘이 방 쓰겠습니다. 대신 2층 침대가 있는 방을 저희가 쓸게요. 형 괜찮죠?”

“……알겠다 뿅.”

 

어릴 때부터 해 온 기숙사 생활로 2층 침대 생활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방을 둘이 쓰게 배려해주었으니, 조금의 불편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성은 명헌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캐리어를 열어 짐을 정리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하기도 했고, 어쩐지 명헌이 화나 보이기도 했다.

 

“우성. 나랑 같이 방 쓰고 싶었어용?”

“……네. 우리 고등학생 이후에 같이 방 쓴 적 없었잖아요.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요. 형이랑 지내는 게 더 편할 거 같아서요. 왜요…? 저랑 지내기 싫어서 그래요?”

“……아니다 뿅. 잘했다, 우성.”

 

명헌의 말에 우성이 히힛, 웃었다. 명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살짝 얼어붙었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어졌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우성은 마저 짐을 다 정리하고 보란 듯이 명헌이 선물해주었던 시계를 손목에 찼다. 명헌의 시선이 손목에 닿은 듯했지만, 확실하진 않았으므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없었던 눈치는 오랜 타지 생활로 생겨났다.

짐 정리를 마친 명헌은 요리를 위해 먼저 방을 나갔다. 열어둔 방문을 통해 밖에서 달그락거리며 요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 침대로 올라가서 잠시 휴대폰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우성은 슬쩍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이 요리하는 걸 보니 배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질투심에 눈이 돌아버릴 것 같아서 우성은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거실로 나와 슬슬 부엌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뭐 도와드릴 건 없어요?”

“없어용. 방해되니까 저기 가서 쉬고 있기나 해용.”

 

명헌이 장난스럽게 우성을 밀어냈다. 명헌이 밀어냈다는 생각에 조금 속상하기도 했지만, 우성은 곧 헤실헤실 웃었다. 명헌의 행동과 말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밀어낸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성은 눈치를 보며 슬쩍 두 사람을 도와주었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메인 요리사는 명헌과 다른 여성이었지만, 결국, 이 집의 모든 사람이 함께 요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음식은 곧 완성되었다. 다들 찬장에서 식기를 꺼내 음식을 옮겨 담고 테이블에 쭉 늘어놓았다. 첫날이어서 그런지, 다들 십시일반 움직이는 게 보기 좋았다. 누구 한 명 투덜거리는 일 없이 식사 준비를 마치고 남성 출연자와 여성 출연자가 각각 마주 본 채 앉았다.

특히 자신의 옆자리에 명헌이 앉아 있어서 우성의 기분은 최고조로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어느 정도 마쳤을 때쯤, 제작진 쪽에서 연락이 왔다. 전 연인이 써 준 소개서를 각자 읽는 것이었다. 우성의 표정이 굳었다. 명헌이 대체 무슨 말을 썼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 연인이 써 준 소개서라니. 듣기만 해도 먹은 게 얹히는 기분이었다. 첫 순서는 여성 출연자 쪽에서 시작됐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민영이 떨리는 손으로 소개서를 꺼내 읽었다. 길지 않은 소개였지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소개를 마쳤다.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졌다. 이어서 그 옆에 있던 여성 출연자가 소개서를 읽었다.

그렇게 순서가 지나, 명헌의 차례가 왔다. 우성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명헌을 보았다. 명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명헌이는 첫인상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따뜻하고 섬세한 남자예요. 연애하는 동안 명헌이는 저를 성장시켜 주었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특이한 말투 아래에 감추어진 단호함이 때때로 저를 힘들게 했지만, 저를 많이 배려해주고 저의 부족함을 채워준 최고의 연인이었습니다.]

 

명헌은 담담하게 소개서를 읽었다. 목소리의 흔들림도 없이, 표정의 변화도 없이 느릿하게 읽어 내려가는 명헌의 모습에 우성은 제가 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식탁 아래로 내린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우성은 물을 마시며 감정을 애써 다스리고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소개서를 꺼내 들었다.

 

[우성이는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열정적이며 그 모습이 멋있기도 해요. 연애하는 동안 우성이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또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감정이 풍부해서 애정 표현도, 낯간지러운 말도 서슴없이 해서 때때로 저를 부끄럽게 해주었지만, 그게 참 좋았습니다.]

 

결국, 우성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당황한 듯한 얼굴로 우성을 보았다. 특히 맞은편이 앉은 여성 출연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더 울 것 같은 눈으로 우성을 보는 게 느껴졌다. 그때, 명헌이 우성에게 티슈 몇 장을 건넸다. 명헌의 앞에서 우는 게 몇 번째인지.

그런 자신이 꼴사납게 느껴져, 우성은 이를 악물며 흐르는 눈물과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아냈다.

 

“여기 물 마셔용.”

 

명헌이 우성의 물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우성은 명헌에게 한번 웃어 보이고는 그가 따라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니 감정이 한결 가라앉았다. 나머지 두 남성 출연자도 소개서를 다 읽고 난 후 적막이 흘렀다.

여전히 훌쩍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감정을 가다듬는 사람도 있었다.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명헌도 우성도 아직 배가 다 차지 않았는데 입맛이 뚝 떨어져서 무언가를 더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진 않았다.

슬금슬금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가 잡혔다. 한두 명이 일어서기 시작하자, 다들 일어서서 빈 식기를 가지고 싱크대로 향했다. 싱크대에 빈 식기를 넣고 우성이 고무장갑을 꼈다. 그러자, 옆에 명헌이 섰다.

 

“형, 가서 쉬세요. 요리도 하셨잖아요.”

“나는 내가 알아서 해 뿅.”

 

명헌의 행동에 우성은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눌렀다. 명헌과 함께 설거지를 마치고 우성은 주변까지 깨끗하게 정리한 뒤 굽혔던 허리를 쭉 폈다. 190cm가 넘는 우성에게 싱크대는 너무 낮았다. 그건 명헌도 마찬가지인지 불편했던 몸을 이리저리 늘이며 스트레칭을 하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우성은 2층 침대의 2층으로 올라갔고 명헌은 그 아래층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명헌에게 무어라 말이라도 걸까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미국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잡담을 할까 하다가, 시차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우성과 명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제작진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여러분의 입주를 축하합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입주자는 누구인가요? 문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세요.

*문자는 상대방에게 익명으로 전달됩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우성은 메시지를 보고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내밀어 명헌을 살폈다. 하지만 침대 매트리스에 가려, 명헌은 보이지 않았다. 우성은 휴대폰만 부여잡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우성의 눈에는 오직 명헌밖에 보이지 않았다. 명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말은 곧 오늘 자신을 설레게 한 사람이 명헌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우성은 잠시간의 머뭇거림 끝에 명헌을 선택하기로 했다. 별로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온 사람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억지로 선택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우성에게 제작진으로부터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울지 말아요.]

 

우성을 선택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역시나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익명으로 보내온다니 예상은 했지만, 자신에게 연락을 보내온 사람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했다. 그리고 부디 그 사람이 명헌이기를 바랐다. 이대로 끝인가 싶어 다시 누우려는데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울렸다.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희열이 가득 찼다. 그렇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입주 조건상 X가 누구인지 밝힐 수가 없어서 명헌에게 달려가 그에게 안길 수 없다는 게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 아쉬움에 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명헌도 자신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을 테니, 분명 자신이 선택했다는 걸 알게 됐겠지. 그 사실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다른 방을 선택할 걸 그랬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감정의 홍수를 제어할 길이 없었다. 오늘이 촬영 첫날인데, 이걸 어떻게 더 버틸 수 있을까. 과연 명헌이 형도 쭉 나를 선택해줄까. 초조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성은 숨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아직 시간은 있다. 첫날부터 명헌이 형이 나를 선택해주었으니, 시작은 좋은 셈이다.

그렇게 되뇌며 우성은 술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명헌이 자신과의 추억의 장소를 다른 사람과 갔을 때는 애타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데이트를 마치고 왔던 날,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들어온 명헌과 그 상대를 우성은 거실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휴대폰을 하는 척, 잠이 안 와서 거실에 나와 있던 척하긴 했지만, 자신은 보지도 않고 바로 들어가 버린 명헌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보이지도 않은 걸까. 나와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좋은 시간이라도 보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술렁거려,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그날은 명헌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명헌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우성은 답답한 마음에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어 놓은 채 울었다.

그리고 그날 밤, 명헌은 그날도 우성을 선택했다.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 메시지 하나에 우성의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명헌이 자신을 선택한 게 좋았지만, 그럴 거면 왜 나를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선택을 하는 날.

우성은 챙겨온 옷 중 가장 깔끔하고 멋있는 옷을 차려입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명헌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줄까. 마지막 그 장소에 명헌이 나와 있을까. 직접 운전하며 메시지로 연락이 온 장소로 가는 길. 우성은 괜히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애써 꾹 참아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차를 멈추자, 명헌이 와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명헌이 있는 걸 알고 온 건데도 그가 앉아 있으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나를 받아줄까. 형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때 왜 이별을 입에 담았을까. 후회되었다. 섣부른 선택으로 몇 년간 명헌의 곁에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 자신의 곁에 명헌이 없었다는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우성은 그저 가만히 서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우성이 자신을 보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자, 명헌이 우성을 향해 손을 뻗어, 멈추어 선 우성의 손에 티슈를 쥐여주었다.

명헌과 함께 또 다른 상대에게로 가는 길. 도착하기까지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명헌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30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우성은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명헌을 놓치게 된다면 자신은 평행 후회 속에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형… 나랑 헤어진 거 후회한 적 있어요?”

“…….”

“솔직하게 말해줘요.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

“……있어. 그때 너를 그냥 그렇게 보내지 말 걸, 하고.”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춰 세웠다. 우성은 그 틈을 타, 고개를 돌려 명헌을 보았다. 자신은 보지 않고 있는 명헌의 옆모습에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우성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명헌의 손과 마주 잡았다.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숨을 들이마셨다.

30분쯤 달려, 상대가 있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잠시 멈춰 서 있는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X가 차에서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대로 출발해 주시면 됩니다.]

 

우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명헌에게 읽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헌의 휴대폰이 울리며 상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우성은 자신이 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부릅뜬 채로 앞만 보았다. 차마 명헌을 볼 수가 없었다.

그냥 미련 없이 차에서 내려버릴 것 같아서.

 

“네, 여보세요.”

 

명헌이 전화를 받았다. 당장 저 휴대폰을 빼앗아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명헌의 곁에는 오직 자신만 있을 수가 있었다. 명헌은 상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명헌이 거절을 입에 담았다. 명헌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발끝까지 떨어졌던 심장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저 멀리 상대가 고개를 숙이며 휴대폰을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떨구는 것이 보였다. 우성이 명헌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우성은 벌써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고 있었다.

우성은 안전벨트를 풀고 그대로 명헌에게로 가까이 가서 입술을 겹쳤다. 명헌 또한 그런 우성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돌아, 두 사람은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글 작업하고 있습니다.

나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