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love - 악동뮤지션 






  “흐윽 ……”

  지민이 울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에 정국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헤드폰을 낀다. 벌써 네 번째, 아니 다섯 번째였나. 저렇게 길 잃은 아이처럼 울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이쯤이면 익숙해 질 법도 하건만 저렇듯 울어대는 지민의 모습은 도무지 익숙해 지지 않았다. 애초에 익숙해 질 생각 따위도 없었고. 정국의 입장에서는 정작 그 익숙함이라는 게 필요한 지민이 매번 이별을 겪을 때마다 저렇게 세상이 무너진 듯이 우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의 상처, 이별의 비탄. 그래 거기까진 좋다 치자. 청춘의 한 페이지에 그런 낙서 하나 없대서야 말이 안 되니까. 다만 지민은 무슨 빽빽이라도 하듯 청춘의 페이지에 그 상처만 가득 채워 넣고 나중에 누군가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는 사람 같았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경험으로도 이미 연애의 희로애락을 질릴 만큼 겪어본 정국으로선 스무 살이 넘어서도 매번 저렇게 모든 걸 다 바쳐 사랑을 하는 지민이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정국이 지켜 본 바로, 지민은 늘 첫사랑처럼 연애를 시작하고 늘 마지막 사랑과 이별하듯 헤어졌다. 마치 처음 그런 감정을 겪는 듯이 서툴게, 하지만 기어이 모든 것을 다 줘 버리는 연애. 그리고 더 이상 다음 사람이 없을 것처럼 처절하고 비극적인 이별. 도무지 학습력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만 좀 울어요.” 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어쨌든 아는 체를 한 번 하고 나면 매번 화를 내든지 아니면 달래주든지 어쨌든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 같아서, 정국이 그저 벽을 향해 돌아눕는 것으로 대신한다. 헤드폰을 낀 채 누워서 그런지 베개에 닿은 귀 쪽이 불편했다. 어서 다음 학기가 되고 방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국이 음악을 플레이 시켰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와 끈적한 R&B 곡이 뒤섞여 묘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지민의 울음소리가 마치 허밍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


  “박지민이 걸레는 아니지.”

  남준의 말에 정국이 반쯤 남아있던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남준을 쳐다본다. 남준의 자취방이 단순히 의식주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학교 앞에, 게다가 혼자 쓰는, 심지어 제법 넓기까지 한 남준의 자취방은 공공연하게 남준호프 라고 불리며 같은 과 학생들은 물론 때로는 다른 과의 애들까지 들이닥쳐서 술을 마시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남준이 제법 잘 사는 집의 아들이어서 언제나 냉장고에 술이 가득 차 있는 탓도 있겠지만 그렇게 놀 때는 당장 내일 입대하는 사람처럼 놀면서, 막상 또 공부 할 때는 귀신같이 파고드는 탓에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시험 기간이 아닌 때엔 술집으로, 또 시험 기간엔 독서실로. 어떤 때에도 남준의 집만큼 요긴하게 멀티로 모든 게 어울리는 공간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걸레가 뭐냐?”

  윤기가 정국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남준을 나무란다. 이미 술에 취해 우악스럽게 토한 뒤 화장실 문 앞에 쓰러져있는 지민을 끌고 와 구석에 곱게 눕힌 것을 보면 의외로 다정한 사람인가 싶기도 한데, 그렇게 눕혀 놓고는 또 못생겨서 술 맛 떨어진다며 신문지를 지민의 얼굴 위에 덮어둔 걸 보면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걸레가 뭐냐? 하고 뭐라고 해놓고선 그 뒤에 “아무리 저 멍청한 놈이 지 욕하는 줄도 모르고 자빠져 자고 있어도 그렇지.” 라고 덧붙이는 걸 봐서도 지민을 귀여워하는 건지 한심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박지민이 걸레는 아니라니까요. 얘는 늘 진지했어요. 상대가 드러웠던 거지.”

  또 한 번 박지민 걸레설을 부정하는 남준의 말에 정국은 속으로 그럴 주제나 되는 사람이면 다행이지 라는 생각을 했다. 보통 걸레라는 게 아무에게나 몸이고 마음이고 다주고 헤프게 구는 존재를 나쁘게 말하는 단어라는 걸 생각해 봤을 때, 지민이 만나는 상대마다 몸이고 마음이고 다 줘버리는 건 마찬가지이긴 했으나 지민이에게 그 상대가 아무나가 아니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차라리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면 저렇게 매번 죽을 것처럼 굴진 않겠지. 세상에 많고 많은 게 그 아무나니까. 지민은 언제나 자신의 연애가 세상에 다시 없을 로맨스이며 그 상대는 지구를 한 바퀴를 돌고나서야 겨우 만나진 사람처럼 얘기했다. 까만 눈을 반짝이고 가끔은 볼도 복숭아처럼 발그랗게 물들인 채 자신의 연애에 대해 자랑처럼 떠들어대는 지민을 보며, 정국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저래봤자 또 얼마나 가려고. 실제로 얼마 못 가 그 사랑은 처절하고 비극적인 형태로 끝이 났다. 아 물론 그 비극이라는 것도 지민의 입장에서나 그렇지 남들이 봤을 땐 상대의 바람, 잠수, 일방적인 이별통보 같은 한심하고 어이없는 방식이었다.

  “이번엔 또 왜 헤어졌대?”
  “차였죠 뭐.”
  “그건 이미 깔고 가는 거고. 왜 차였냐고.”
  “그 새끼 바람 났었대요.”
  “박지민이 겨우 바람 한 번 정도로 헤어질 만큼 인내심 없진 않잖아.”
  “뒹굴었대요.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랑. 그것도 여러 번.”
  “개새끼네.”
  “그렇게 말하긴 개한테 실례일 정도였죠. 박지민이랑 사귀면서도 다른 사람이랑 자는 걸 무슨 이어폰에 R이라고 적힌 쪽을 왼쪽 귓구멍에 쑤셔 넣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새끼였어요.”

  아. 이 얘기가 먼저 전제됐어야 하는 건데 깜빡했다. 지민의 상대는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신체 건강한 남자였다. 딱 한 번을 제외한 이유도 그나마 그 남자의 신체가 건강하지 않았다는 것 뿐, 지민의 연애 상대는 어쨌든 늘 같은 성(性을) 가진 남자였다. 어쩌면 그게 지민의 가장 큰 불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유로 지민의 연애가 늘 보잘 것 없는 형태로 끝이 나버렸는지도 모른다. 호모는 호모답게, 보통이 아닌 연애는 보통이 아닌 것 답게 몰래 몰래 비밀스러웠어야 하는 건데 지민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요즘 세상이 아무리 개방적으로 변했고 배꼽티에 미니스커트, 여자들의 담배 같은 것들이 단순히 기호나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해도 그 기호나 취향을 비난 하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대의 변화를 같은 속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로켓을 타고 달을 가는 때에도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지민에겐 일생일대의 사랑이라 해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동성애란 그저 뒤를 쓰는 섹스 같은 것만 떠올리게 하는 거였다. 그나마도 아주 어린 애들처럼 유치하게 대놓고 비난을 하거나 조롱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던 건 어쨌든 성인이고 타인의 성적 기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을 비지성인 취급하는 최근의 사회 분위기도 있으며, 무엇보다 박지민이라는 인간의 지나친 순수함 때문이었다. 어쨌든 소수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보고 숨기기도 하는 게 보통이건만 지민은 도통 그걸 숨길 줄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숨겨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는 사람 같았다.

   처음 커밍아웃을 했을 때도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를 하며 상대가 자신보다 10cm는 더 컸었단 얘기를 하길래 사람들이 박지민 저가 키가 작다고 모델 같은 여자 좋아하나보네 하고 놀렸더니, 남잔데요 하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해 거기 있던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민이 그 첫사랑을 어떻게 만났고 그 첫사랑이 얼마나 애잔했었는지를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날 술자리엔 별 다른 안주가 필요 없었다는 얘기도. 물론 정국이 봤을 땐 동성애에 대해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나 지민의 지나친 순수함 같은 것보다는, 지민이의 입장에선 로맨틱했을 그 연애가 대부분 개그나 아침 치정극 정도로 끝이 나 버렸던0 이유가 더 클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게이들의 진지하고 평범한 연애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도 지민의 연애에 대해 들을 땐 그냥 웃거나 심지어 재미있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서지 않게 된 한 남자를 만나 고생 고생 끝에 가운데 다리를 세워놨더니, 그러자마자 지민과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는 얘기는 지금까지도 구전되고 있는 박지민 연애사의 으뜸이었다. 물론 그 소문의 진상을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세 달 가까이 지민을 지켜본 바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박지민은 왜 이렇게 맨날 개새끼들만 만나냐.”
  “개한테 실례라니까요 글쎄.”

  남준의 말에 윤기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지민에게 고개를 돌린다. 못생겨서 술맛 떨어진다며 덮어뒀던 신문지가 동그랗게 안경 모양으로 젖어있었다. 꽐라돼서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안 자고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작고 동그란 어깨가 떨리는 게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윤기가 덮어두었던 신문지를 슬쩍 들추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민이 좀비처럼 흐어엉-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윤기의 무릎에 매달렸다. 저리 안 가? 윤기가 발로 지민을 밀어냈지만 지민은 기어코 윤기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윤기 형 저 바지 되게 아끼는 건데. 쟤 저러다 콧물이라도 묻히면 윤기 형 그 코 떼어내서 병뚜껑으로 쓸 거야. 그 와중에도 윤기가 제법 비싸게 주고 산 청바지를 걱정하며 남준이 새우깡을 집어 입에 넣는다.

  “개새끼라고 하지 마요. 그 사람 개새끼 아니에요.”
  “아직도 쉴드를 쳐주고 싶냐 병신아?”
  “개새끼 아니고 씨발놈이었엉!!!!!”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지민을 보며 정국은 아 그냥 먼저 숙사 들어갈 걸 하고 후회했다. 지민이 끼는 술자리에서 단 한 번도 지민의 사랑과 전쟁이 주제가 되지 않은 적이 없긴 했지만, 한심해 하면서도 지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런 새끼들만 만나지 좀 말라며 구박 겸 충고도 해주는 남준이나 윤기와는 달리 정국은 오롯이 지민이 한심하기만 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셋 중에 뭐가 가장 중요하냐 물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이라고 말할 것 같은 지민의 저 연애지상주의와 그런 것에 비해선 또 비극으로 갈무리되는 연애가 한심하다 못해 한 번씩은 화가 날 정도였다.

  “남준이 형. 저두 사랑받고 시퍼요-.”
  “윤기 형이 너 사랑해 주잖아. 그거면 되는 거야.”
  “얌마. 왜 갑자기 또 날 끌어들여?”
  “혀엉- 융기 혀엉- 저랑 사겨요오-.”
  “미쳤냐?”
  “이것 봐. 세상엔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암도 읍써…”
  “그럼 정국이한테 사랑해 달라 그래. 잘생긴 연하의 남자.”

  불똥은 갑작스럽게 정국에게로 튀었다. 이미 비어있는 소주병을 보고 냉장고에서 한 병을 더 꺼내올까 아님 그냥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자 그럴까 고민을 하던 정국이 남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남준과 윤기는 물론이고 윤기의 다리를 잡고 매달려있던 지민의 시선까지 모두 저를 향해 있었다. 지민의 성적 취향은 이미 신입생을 포함해서도 알려진 만큼 알려진 사실이고, 그래서 지민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을 대부분 꺼려할 때 정국이 “그럼 제가 그 방 들어갈게요.” 라고 먼저 얘기를 하며 정국도 같은 부류가 아닐까 의심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정국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과 동기 하나가 정국의 화려하고도 찬란했던 연애사에 대해 브리핑을 하며 금세 무마되긴 했지만. 어쨌든 정국의 입장에선 지민이 게이든 레즈든 그건 별로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개만 아니면 되지. 똥오줌 못 가리고 벽지 물어뜯는 것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똥오줌 잘 가리고 벽지를 물어뜯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은 이렇게 룸메라는 이유로 박지민 수거자의 역할을 맡아 이런 술자리에 자주 불려가는 일이 생길 것을 계산하지 못한 건 그래, 그게 실수라면 실수였지.

  “전정국은 싫어여.”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굴면 금세 사랑에 빠져버리는 지민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왜요.” 하는 말이 무심결에 나오려던 걸 참고 못마땅한 얼굴로 그저 쳐다만 봤더니 윤기가 대신 왜? 하고 묻는다. 윤기의 성격에 귀찮아하면서도 자신의 무릎에 매달려있는 지민을 떼어내지 않고 머리 같은 걸 툭툭 두드리듯 쓰다듬는 걸 보면 그래도 귀여워하는 게 틀림없긴 했다.

  “전정국 못돼써-.”
  “넌 양심이 없냐? 정국이가 너 길가에서 얼어 죽을 뻔한 걸 몇 번이나 주워갔는데.”
  “전정국 안 착해. 안 다정해.”
  “사귀면 다정해 질 수도 있지.”
  “그러니까요오. 원래 착했던 사람이랑도 헤어지면 이럿케 슬픈데에… 안착한 정국이가 사귀고 착해지면 헤어지고 나서… 아마 너무 슬퍼서 죽을 거예요 진짜.”

  착한 사람은 만난 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저 혼자 사랑에 빠져 상대가 세상에 다신 없을 착한 사람이라 착각한 것 뿐이지. 어쨌든 애초에 저렇게 누구를 만나도 끝나는 걸 먼저 전제하는 것 또한 지민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렇게 끝나는 걸 알면서도 매번 올인하는 건 글쎄, 멍청해서인가. 끝날 걸 알면서도 마치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고, 또 막상 끝이 나면 끝을 몰랐던 사람처럼 상처받고. 어쨌든 지민과 사귈 마음 같은 거 정말 조금도 없는데 또 지민이 먼저 저렇게 말하니 발끈하긴 한다. 화려한 연애 경력과는 무관하게 정국도 이제 겨우 갓 스무 살이 된, 아직 덜 여문 소년인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사귀자 그래도 사귈 마음도 없지만 사귀기 싫다니까 더 열 받네.

  “저 남자 싫어해요.”
  “알아. 정국이 예쁘고 늘씬하고 쭉쭉빵빵 여자만 좋아하지이-”
  “네. 형이랑 완전 반대.”
  “맞아. 그래서 정국이는 절대 나 안 좋아할 거야. 그래서 나도 너 안 좋아할 거야.”

  참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떡은커녕 콩고물 하나도 줄 생각 없는데 아주 김칫국을 독 째로 마시는구만. 정국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코웃음을 친다. 그리고 그때 소주병들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남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남준이 핸드폰을 들고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가서 뭐라 뭐라 통화하더니 다시 거실로 돌아와선 “성훈이 형이 지금 엠티 답사 겸 거제도 가는데 우리도 가자는데요?” 하고 윤기에게 전했다.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긴 해도 일단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을 이마에 새기고 다니는 성훈의 말을 안 들으면 앞으로의 인생이 더 귀찮아질 것 같아 윤기도 지민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러려고 해병대를 갔던 건 아닌데. 귀신은 안 잡고 왜 맨날 나를 잡아 그 형은.

  “니네는 어쩔래. 숙사 아직 문 닫히진 않았지?”
  “네. 한 시간 정도 남았어요.”
  “그래. 그럼 자고 가든지 숙사 가든지 알아서 해라. 저기 술병들이랑 대충 좀 치워놓고.”

  윤기가 구석에 구겨져있던 얇은 바람막이를 주워 입고 남준도 지갑, 핸드폰과 충전기 같은 것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과대가 따로 있음에도 마치 과대처럼 과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앞장서는 남준이 참 김남준답다고 한다면, 군 시절을 제외하곤 휴학을 한 적이 없는 게 신기할 만큼 무기력하고 아싸의 표본 같은 윤기가 그런 대소사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려 다니는 건 민윤기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건 저렇게 살다간 사회에서 도태되고 말년엔 독거노인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체로 발견될 게 뻔하다며, 남준이 굳이 그런 일에 윤기를 억지로라도 끌고 다니려고 하는 탓이 컸다.

  “정국아.”
  “네.”
  “갈 거면 걔도 데려가고, 여기서 잔다 그럼 너도 그냥 같이 자고 가.”
  “아… 네.”
  “지민이 잘 좀 챙겨줘.”
  “네.”
  “불쌍하잖아.”

  윤기가 먼저 나가고 남준이 뒤따라 나가면서 말했지만 솔직히 정국은 지금 여기에 자신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안락하고 편안한 자신의 기숙사 방을 두고 이렇게 남자 냄새 그득한 남의 자취방에서, 어지럽게 흐트러진 술 병과 그보다 더 어지럽게 엎어져있는 선배 한 명과 버려진 자신의 신세야말로 정말로 불쌍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 그저 네 하고 대답했고, 남준이 그때까지 엎어져서 저도 데려가라며 찡찡대는 지민을 두고 문을 열고 나간다. 삐리릭- 도어 락이 걸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지민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도 시장 통처럼 왁자지껄하던 방에 침묵이 내려앉으니 기숙사 방에 둘이 있을 때와는 달리 그 정적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지민은 바닥에 엎어져 누워있는 상태라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그래도 술병 같은 건 좀 치워야겠다 싶어 정국이 한 손에 두 병씩 빈 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엎어져 있던 지민이 정국아, 하고 불렀다. 발음이 제법 또렷했다. 방금까진 잔뜩 혀가 꼬여 안 그래도 웅얼대는 발음이 더 뭉개진 것 같았는데. 뭐야 이 형. 생각만큼 많이 취한 건 아니었던 건가.

  “왜요.”
  “숙사 가서 자.”
  “갈래요?”
  “아니- 너 혼자 가두 돼.”
  “남준 형 하는 말 못 들었어요?”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너도 나 불쌍하지.”
  “아뇨.”
  “그럼?”
  “한심해요.”
  “씨이… 거 봐. 못됐어 정말.”

  엎드려 있던 지민이 고개만 빼꼼 들고 정국을 흘겨보는데 눈 코 입이 땡글땡글 부어있는 얼굴은 배로 더 한심해서 하마터면 형 진짜 못생겼어요 하는 말이 나올 뻔했다. 정국이 빈 병을 현관 앞에 내놓고 먹다 남은 새우깡 같은 걸 봉지에 집어넣고는 티슈로 바닥을 대충 훔칠 때까지도 지민은 책상 위에 엎드린 여고생 같은 자세로 두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냥 저대로 잠이 들어주면 고마울 텐데.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흐으윽….”

  지민은 또 울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대체 어디서 저런 눈물이 매번 저렇게 솟아나는 걸까. 저 정도의 수분이 몸에 내재되어 있는 사람이면 아프리카에 가서 3개월은 물 안 마시고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보통 때처럼 자는 척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지민을 잘 챙겨주라는 남준의 부탁도 있으니 예의상 뭐라 한마디 해주긴 해야겠는데. 우는 사람을 달래는 재주는 정국에게 없었다. 울고 있는 사람을 더 울리는 재주라면 있지만.

  “왜 그렇게 연애에 목숨 걸어요?”
  “허으윽….”
  “인생에 중요한 게 연애 밖에 없는 사람처럼.”

  정국의 말에 좀 더 섧게 울던 지민이 킁 하고 코를 들이마시더니 스르륵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울기까지 해서 얼굴이 새빨간 게 진짜 무슨 갓 태어난 신생아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민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완전히 몸을 일으키더니 티슈를 뽑아 팽 하고 야무지게 코를 풀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훌쩍이는 소리만 내는 게 그나마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만 안달난 사람처럼 구니까 그걸 이용하려는 나쁜 새끼들만 만나는 거죠.”
  “알아… 나도.”
  “아는 사람이 그래요?”
  “잔소리 쟁이.”
  “형이 하는 게 한심하니까 그렇죠.”
  “이제까진 모른 척 했으면서.”

  아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고. 솔직히 방금 전까지도 모른 척 할 생각이었고 앞으로도 쭉 그럴 예정이었다. 어차피 연애라는 게 늘 끝 맛까지 달달할 수는 없는 거고, 지민이 누군가를 만났든 간에 결국 그 끝은 지금처럼 쓰고 아팠겠지. 어쨌든 그 또한 지민의 선택이고 책임이었다 생각했기에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이제까진 그랬었다. 그저 그만 울고 좀 잤으면, 이라든지 그렇게 계속 울 거면 어디 나가서 다 울고 들어왔으면 같은 생각은 했었지만. 그런데 지민을 보며 타인의 한심함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마저도 신경 끄면 그만인 일이긴 한데 왜 맨날 훌쩍 거려서 신경 쓰이게 하냐고.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요. 쓰레기 수거 그만하고.”
  “제대로 된 사람은 나 안 좋아해.”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 숱한 헤어짐의 반복과 상처 속에서 대놓고 아파죽겠다 티는 낼 지언정 자기비하는 한 적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쓰레기들만 골라 만나는 것도 그저 나쁜 남자들에게만 끌리는 여자들 심리 비슷한 거라 생각했지 자존감이 낮아서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차라리 취향이라고 생각할 때가 낫지, 그나마 자신에게 자신이 없어 그렇게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을 만나왔다 생각하니 지민이 몇 배로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형 좋아해 주는 사람이면 그냥 아무나 다 그렇게 좋아요?”
  “난… 사랑하고 싶어. 그리고 나도 사랑받고 싶어….”
  “아무나요? 아무나 한테요?”
  “걱정 마. 그래도 너한테 나 사랑해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뭔가 대화의 핀트가 약간 어긋나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정국이 빈정대니 거기에 마음이 상해 그냥 맞받아치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정말로 너한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며 상대를 안심시키는 듯한 말투. 애초에 그런 걸 염두에 둬 본 적도 없는데 이 사람 무슨 소리야. 괜히 가슴 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안 먹을 사탕이라도 “이거 너 안줄 거지롱.” 하고 약 올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나도 전혀 그럴 생각 없거든요?”
  “알아. 그러니까 넌 안 좋아한다니까.”
  “왜요? 내가 안 착해서?”
  “그래. 안 착한데도 좋았던 건 너 밖에 없었으니까.”
  “…뭐요? 뭐라구요?”
  “아, 아냐. 지금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옛날에. 옛날 얘기야 진짜. 지금은 아니야.”

  옛날이라고 해봤자 지민과 정국이 만나는 건 고작 넉 달 전이었다. 그 전엔 열아홉 살의 전정국과 스무 살의 박지민 사이에 접점이 있었을 리 없었다. 그 넉 달 만에 네 번의 연애를,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연애를 했던 지민이 옛날 언제 정국을 좋아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옛날이라는 게 정말 옛날, 그러니까 전생 같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정국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지민의 시선은 아까 윤기가 덮어뒀다가 구석으로 치워진 신문을 향하고 있었다.

  “나 좋아했었어요?”
  “옛날에. 진짜 엄청 옛날에. 지금은 아니야. 진짜.”
  “옛날이 언젠데요. 저희 대학 와서 처음 만났을 건데 그럼 그래봤자 네 달 전이잖아요.”
  “아냐. 만났었어. 너 중3 나 고1때.”
  “중 3때요?”
  “같은 학원이었어. 넌 몰랐겠지만.”

  알 리 있나. 그때도 제 앞의 박지민은 딱히 일진 부류도 아니었을 거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공부를 잘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통의 고등학생 이었겠지. 그러니 어여쁜 또래 중학생 여자아이들과 여고생 누나들, 심지어 학원 선생님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해서 그런 애정과 관심이 당연했던 열여섯 전정국에게 한살 많은 형 같은 거 눈에 들어왔을 리가. 정국이 잠시 학원 다니던 때를 떠올려 보지만 그 기억 속에 지민의 모습 같은 건 없었다.

  “혹시 형보다 10cm는 컸다던 형 첫사랑이 저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
  “맞아요? 그게 제 얘기였다구요?”
  “…어디서 들었어 또 그건.”
  “형이 술만 마시면 떠들어 댔다면서요.”
  “니가 내 후배로 들어올 줄은 몰랐으니까.”
  “어쨌든 그럼 형은 그러면서도 나랑 그동안 같은 방 쓰고 같이 잠들고 그랬어요?”

  정국의 말에 지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다. 그동안 지민의 연애사를 그저 재밌다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들만 만나왔던 건 아니었다. 뒤에서 씹어대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여자 선배 하나가 지민에게 같이 기도하면 괜찮아질 거라며 지민을 괴롭게 했던 일도 있었고, 또 마초를 자칭하는 남자 동기나 선배들은 앞에서 대놓고 징그럽다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이 이해한다고 해도 모두가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사회가 개방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해서 실제로 자신 앞에 놓인 문이 모두 열리냐 하면 그건 아니니까. 그저 문이 열릴 것 같은 분위기 정도라는 거지. 남준이나 윤기, 그리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지민을 귀여워하고 성적 취향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겨주고 있어 지민도 그런 걸 굳이 숨기려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방을 쓰는 정국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또 달랐다. 게이면 뭐 어때 나랑 상관도 없는데 라는 식의 입장을 취해왔던 정국에게 자신의 마음은 그야말로 민폐였다.

  “미안해. 숨기려고 했던 게 아니라. 굳이 내가 먼저 옛날에 그랬다고 얘기하기도 좀.
아… 근데 넌 기분 나쁠 수도 있지. 미안해.”
  “아니 뭐 나한테 미안할 건 없구요. 대단하네요. 나라면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랑도 한 방에서 같이 자고 그런 거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어?”
  “아 형이 먼저 막 뭔가를 하는 쪽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암튼 착하지도 않았다면서 그땐 저 왜 좋아했는데요?”
  “그냥… 잘 생겨서.”
  “저 지금이 더 잘 생겼는데.”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지민이 그냥 웃어버린다. 방금 전까진 무슨 세상이 끝날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있더니 뭘 또 저러고 웃어. 지금의 저가 더 잘생겼다는 말을 농담으로 한 게 아니었는지, 정국이 오히려 웃는 지민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게이라고는 해도 별로 여자처럼 생겼다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한 번씩 씻고 와서 젖은 머리를 한 채 등을 돌리고 서 있으면 아 저래서 남자랑 자기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그건 그냥 자신은 좋아하지 않는 반찬을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는 정도의 심정이랄까. 저게 저렇게 맛있게 먹을 수도 있구나. 그러니까 제 앞에 차려져 있는 거라도 그걸 집어먹을 생각 같은 건 해본 적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안 착하고 여전히 잘생겼는데 왜 이제 나 안 좋아해요?”
  “너 너무 제대로 된 애라서.”
  “쓰레기 애호가예요?”
  “못됐어 정말. 어차피 나 안 좋아할 거 아니까. 그러니까 나도 그런 거야. 나도… 사랑받고 싶다니까.”

  그 말에 정국이 가만히 지민을 쳐다본다. 답지 않게 오늘따라 말이 많은가 싶었던 정국이 입을 다물자, 지민이 정국을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숙인다. 괜히 손 끝이 달달 떨려왔다. OT 때 정국을 발견하고 지민이 얼마나 놀랐었는지, 그리고 또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마 정국은 모를 것이다. 누구에게도 선뜻 같은 방 쓰자고 할 수 없어서 곤란해 하고 있는데, 그럼 그냥 자기가 그 방 들어가겠다며 정국이 손을 들었을 때 지민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아마도 전정국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모르기를 바랐다. 네 번의 짙고 아픈 연애를 하면서도 첫사랑이었던 남자와 한 방을 쓰며 한 번씩 지민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정국은 그 방을 나가는 날까지 몰랐어야 했다.  

  “그럼 그 사랑 내가 주면 다시 날 좋아하게 되나?”
  “…뭐?”
  “물론 그럴 일은 없지만.”
  “…진짜 못됐다 너.”
  “다정했으면 좋겠어요? 뭐, 이렇게?”

  그러더니 정국이 갑자기 지민에게 다가와 지민의 얼굴 가까이로 제 얼굴을 들이민다. 주먹 하나 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거리였다. 갑자기 다가온 정국 때문에 놀란 듯 지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까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국의 얼굴이 웃고 있지 않아 무슨 생각에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었더라면 지민이 먼저 목을 끌어당기며 키스를 했을 것 같은 거리와 타이밍이었다. 마치 그런 지민의 생각을 안다는 듯 정국이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온다. 정말 코끝이 닿을 것 같았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아버린다. 딱히 정국이 정말 키스를 할 것 같아서는 아니었고 그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러다 잠시 후 눈을 슬쩍 뜨는데 정국이 “눈은 왜 감아요? 키스라도 할까봐?” 하며 웃더니, 지민이 뭐라 변명하려하자 슬쩍 자신의 입술을 지민의 입술 위에 겹쳤다가 떼어낸다. 지민은 놀라 얼어붙은 채였다.

  “왜… 뭐야 이거….”
  “그냥요. 기다리는 것 같아서?”
  “안 기다렸어!”
  “아 그래요? 난 또. 해달라는 얼굴이길래. 안 하면 형 민망할까봐서요.”
  “취했어?… 너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나쁜 남자 좋아한다면서요. 아 쓰레기를 좋아한다 그랬나?”
  “…넌 나 안 좋아할 거잖아.”
  “네.”
  “그럼 왜 이러는 거야.”
  “난 형 안 좋아할 거지만 그 이유로 형도 나 안 좋아하는 건 왠지 좀 열 받아서요.”
  “하… 너 진짜 이상한 애야.”
  “애라구요? 제가 애 아닌 증거 보여드려요?”
  “아냐 아냐. 하지 마. 너 무서워. 숙사 돌아가.”
  “계속 같이 자놓고 뭘 새삼스럽게.”
  “가. 너 여기 자고 가면 내가 너 정말 가만 못 둘 것 같으니까.”

  그 말에 정국이 웃음을 참는 듯 밑 입술을 깨물더니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난다. 제가 또 질척대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하고 얄미운 소리를 덧붙이며. 지민이 어이없어 죽겠다는 얼굴로 정국을 올려다보는데 정말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듯 구석에 뒀던 가방과 핸드폰을 챙긴 정국이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어가서 신발을 꿰어 신는다. 꿈인가. 술이 너무 취했나. 길가다가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지민이 넋이 빠진 얼굴로 그런 정국의 등을 쳐다보다가 정국아, 하고 부르자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방 바꿔도 돼. 사감님한테 말씀드리면, 아마 나 그런 거 아시니까… 바꿔 주실 거야.”
  “왜요? 저 별로 상관없는데. 옛날이라면서요. 저 좋아했던 거. 지금은 아니라면서.”
  “……,”
  “솔직히 대학생활 너무 시시하고 재미없어서 이번 학기까지만 다니고 군대나 갈까 했는데. 저 왠지 좀 재미있어 질 것 같은 기분 들었어요. 형 덕분에.”
  “놀리는 거야? 너 나 갖고 놀아? 재밌어?”
  “울어요?”
  “안 울어!”
  “왜 안 울어요? 맨날 그렇게 울어놓고.”
  “…내가 너 때문에 울면 좋겠어?”
  “솔직히 형 맨날 헤어지고 질질 짜는 거 한심하고 좀 짜증도 났었는데. 그게 나 때문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달래줄 생각은 없지만 재밌게 지켜볼 생각은 있어요.”
  “전정국!”
  “내일 봐요. 방에서 기다릴 테니까.”

  쾅, 하고 문이 닫히더니 이내 삐리릭 하고 도어 락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이상한 표정을 한 채 남겨진 지민이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가 아까 정국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도톰한 입술을 매만진다. 아, 어떡해. 또 사랑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그것도 이제껏 만나왔던 사람 중 가장 삐뚤어지고 못되고 이상한 애를.


***


  최근 지민이 조금 달라졌다. 천하의 술쟁이 박지민이 술을 끊었다는 소식보다 더 놀라운 것은 지민이 연애를 끊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그 아픔에 온 몸을 쥐어짜며 엉엉 울다가도 또 금세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며 해사하게 밝은 얼굴을 했었던 지민은 2주가 넘도록 새로운 사랑에 대해선 언급도 없는데다가 계속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윤기와 남준을 비롯한 친구들은 아무리 그래도 애인이 벌거벗고 다른 사람과 뒹구는 걸 목격했던 충격이 컸었나보다 라든지 아니면 그 개새끼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나보다 같은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지민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룸메인 정국이 이상해 졌다는 것. 그날 밤엔 그냥 정국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랬겠지, 취해서 그랬던 거겠지 생각했는데, 기숙사로 돌아온 날부터 정국이 작정하고 지민에게 이상하게 굴기 시작한 것이다. 괜히 지민이 있는 곳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고 갈아입는다든지 지금 목욕탕 비었던데 같이 씻으러 갈래요? 하며 은근한 눈으로 물어온다든지 향수 뿌렸냐며 괜히 지민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킁킁댄다든지 하는. 절대 평소의 전정국이 할 법하지 않은 행동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밤 일을 기억함은 물론이고 술에 취했던 것도 아니며, 앞으로 재밌어질 것 같다는 말도 진심이었다는 얘기였다. 그럴 때 도대체 너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물으면 제가 뭘요, 하며 한발 빼 버리는 것이 또 정국의 특기였으므로 지민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지랄 그만 떨고 밥 좀 먹어. 사랑이 뭐 대수냐. 그 개새끼, 아니 그 씨발놈 가서 패줄까?”

  그러니까 그게. 누구 입으로 밥이 들어가든 똥이 들어가든 별 상관없는 윤기조차 애가 하루가 다르게 푸석해져 가는 게 마음에 걸려 학식에 불러 앉혀놓고 연설을 할 정도였다. 물론 윤기도 전에 사귀었던 그 놈을 못 잊어 지민이 아직도 가슴앓이를 하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그런 놈의 새끼 하나 빨리 못 떨쳐내서 저렇게 무슨 가뭄에 시들어가는 벼처럼 구는 게 답답하긴 했지만, 어차피 연애란 게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땐 시트콤이어도 당사자에겐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더 절절한 것인데 뭐 어쩌겠는가.

  “아니에요. 그 사람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님 왜 그래? 안 그래도 똥강아지 같은 게 왜 신경 쓰이게 자꾸 낑낑거리고 있어.”
  “형… 저 오늘 술 한 잔 사 줄래요?”
  “이제야 술 마실 생각이 드냐? 술도 끊었다더니.”
  “몰라요. 꽐라돼서 퍼붓고 싶어요 진짜.”
  “해. 다 해. 대신에 그 새끼한테 갈 땐 꼭 남준이 데려가고.”

  김남준이 싸움 잘하는 건 아니지만 맷집은 셀 거야. 평소처럼 생각 없이 팔 휘두르다 운 좋으면 한 대 제대로 쳐줄 지도 모르고, 하며 윤기가 젓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는다. 차라리 아예 마음이 없으면 정국이 그러든 말든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어쨌든 생긴 건 기깔나게 잘 생겼으니 그렇게 잘생긴 연하의 남자가 장난이든 뭐든 치근대주면 고마울 따름이지. 같이 적당히 장난을 칠 정도로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 이유가 없었다. 씨, 그런데 전정국 너무 좋아. 개 좋아. 그동안 했던, 일생일대의 사랑이라 생각했던 그 연애들이 기억도 안 날만큼. 전에 사귀었던 사람들 트럭으로 와도 다 내리라 그러고 그 트럭에 정국이 태우고 싶을 만큼 좋아.

  지민이 그동안 인간으로 덜 된 것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던 건 어쩌면 그 사람들은 지민이 그들을 좋아하는 만큼 지민을 좋아해 줄 것 같아서였다. 제대로 된 사람들은 나 안 좋아해 라고 그날 정국에게 말했던 걸 보면 지민도 충분히 그걸 자각하고 있는 듯 했고. 지민은 사랑을 할 때만, 그리고 사랑을 받을 때만 자신이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연애를 오래 쉴 수 없었던 거고. 그런데 그날 밤 이후 단숨에 정국에게 빠져버렸다. 죽어도 저를 좋아해주진 않을 것 같은, 너무 제대로 된 남자를. 피가 안 마르고 배기겠는가. 그것도 매일 한 방에서 자고 깨는데다가 작정이라도 한 듯 정국이 자꾸 짙게 굴어오는데. 진짜 꽐라돼서 욕을 퍼붓든지 아님 진짜 내 쪽에서 옷 벗고 달려들어서 아예 그 입에서 먼저 방 바꾼다는 말 나오게 하든지 무슨 수를 내야겠어 진짜.


  “술 마시러 가요?”

  지민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려고 숙사로 돌아왔는데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정국이 물었다. 응 하고 대답하며 지민이 입고 있던 청바지를 벗어서 침대 위로 던지고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뒤에서 정국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왠지 지민도 괜히 오기가 생겨 저도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은 정국의 시선 때문에 목부터 등까지 저려올 정도이긴 했지만.

  “윤기 형이랑요?”
  “어떻게 알아?”
  “남준 형이 그러던데요. 형 다음 상대가 윤기 형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그 말에 지민이 기분이 상해서 들고 나가려던 가방을 침대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린다. 그 이후 해왔던 장난의 연장선이라기엔 이건 정도가 좀 심했다. 지민이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짓궂게 굴었던 건 그렇다 쳐도 윤기까지 끌어들이는 건 좀 아니었다. 못돼서 그렇지 얼마나 착한 형인데. 못되면서 착한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무슨 뜻이야.”
  “윤기 형이 형 좋아라 하잖아요.”
  “내가 게이라고 나랑 어울리는 사람들까지 다 게이 취급하는 건 좀 아니지. 그렇게 치면 같은 방 쓰는 니가 제일 억울한 거 아냐?”
  “그럼 형이 윤기 형 좋아하는 건 아니구요?”
  “…그래 나 윤기 형 좋아해. 어차피 너랑은 상관없잖아.”

  물론 좋아는 하지. 츤츤거리기로는 김첨지 저리 가라 하는 형이라서 쌍욕하면서도 나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 자기 레포트 같은 거 시켜놓고선 꼭 밥도 사주는 형인데. 헤어지고 나서 울면서 가면 뭐 그딴 새끼가 다 있냐고 욕도 해주는데. 물론 그런 새끼를 사귄 니가 제일 병신이라며 욕하고 때려서 그렇지.

  “자기 좋아해 주면 그냥 그렇게 다 좋은 거예요?”
  “…그래. 내가 그런 놈인 거 이제 알았어? 상관 마. 상관없다고 했던 건 너잖아.”
  왠지 괜히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지민이 침대 위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정국이 침대에서 내려와 그런 지민의 앞을 막아선 것이 먼저였다. 지민이 열었던 문고리를 먼저 잡고 소리 나게 도로 문을 닫은 정국이 문 앞으로 막아선다. 잠시 정국의 발 끝만 쳐다보고 있던 지민이 자꾸 시큰거리는 콧등을 찡긋대며 정국을 올려다본다.

  “왜 그렇게 윤기 형 좋아해요? 열 받게.”
  “…정국아. 부탁할 테니까 그만해, 이제 진짜.”
  “뭘요?”
  “모르겠어? 그거 꼭 너도 나한테 마음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거.”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날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좋아? 내가 너 좋아해서 니 말 행동 하나 하나에 반응하는 게 재밌어?”
  “그러니까 내가 좋은 거면 윤기 형이랑 붙어서 짝짜꿍 하는 거 관두라구요”
  “넌 절대 나 안 좋아할 거잖아.”
  “절대라고 까지는 안 했잖아요.”
  “…….”
  “절대라고 한 적 없어요.”
  “…나 너 좋아해. 너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니가 그럴 때마다 솔직히 좋아서 미치겠어. 심장 터질 것 같아. 넌 맨날 장난처럼 그러지만 난 니 손도 잡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또,”

  다음 말이 쏟아지기 전에 정국이 지민의 볼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춘 것이 먼저였다. 촉 하고 가볍게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잠시 지민을 내려다보던 정국이 한 번 더 지민의 입술에 입을 맞추더니 이내 좀 더 깊은 키스를 해왔다. 얼떨떨한 마음에 숨도 못 쉰 채 굳어 있던 지민을 보고 조금 웃는가 싶더니 손으로 지민 밑 입술을 슬그머니 당기고 혀를 넣어오는데 온 몸이 떨려서 이려다 정말 기절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민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대로 서서 정국의 키스를 받기만 했고, 정국은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바쳤다던 사람이 고작 키스에 뭘 이렇게 덜덜 떨기까지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온 몸에 힘이 빠져 지민이 저도 모르게 무릎이 접히려는데 그제야 입술을 뗀 정국이 지민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일으켜 세운다.  

  “목소리 좀 낮춰요. 복도에 다 들리잖아요.”
  “…아 죽겠어 진짜.”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실력이 별로였나 봐요. 고작 이런 걸로 죽겠다는 사람이 할 거 다 하고도 여태 살아있는 걸 보면.”
  “오늘 밤에 유서에 니 이름 써놓고 옥상에서 뛰어내릴 거야.”
  “나 누구 꼬시는 거 잘 못해요. 그동안에도 그냥 먼저 꼬셔서 사귄 거지 제가 먼저 뭐 어떻게 해본 적 없어요.”
  “자랑이야?”
  “그러니까 꼬시면 의외로 잘 넘어간 다구요 저.”
  “…내가 꼬시면 너 진짜 넘어올 생각 있어?”
  “글쎄요. 형 하는 거 봐서요. 아 참고로 저 야한 거 좋아해요. 야한 사람도 좋아하고. 야한 사람이랑 야한 거 하는 건 더 좋아하구요.”

  그러더니 정국이 한 손으로 지민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민의 귓볼을 살살 매만진다. 꼬시는 거 잘 못한다는 스무 살 전정국은 죄가 많았다. 이게 꼬시는 게 아니면 대체 뭐냐고. 있는 대로 스토익하게 생겨서 누가 위에 올라타고 움직여도 무표정일 것 같았던 전정국 맞아? 정말 금방이라도 빵! 하는 소리와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 “노력은 해볼게.”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지민을 보고 정국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한때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초속 30M의 비바람이 강하게 부는 때도 있었으나 21세 박지민, 오늘의 연애. 아무래도 당분간은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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