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아, 요즘은 왜 먹을거 안받아와?"


"먹을거?"


"거기 편의점 토끼 알바생이 이제 먹을거 안줘?"


뭔 말인가 했네. 느즈막히 일어나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데. 학교 갈 준비하던 태태가 묻는다. 안그래도 요즘 그 편의점, 거기 알바생 때문에 한창 신경쓰이던 중이었다.


처음엔 잘 몰랐다. 어느날 계산하는 그 알바생 손을 무심히 봤는데 손이 되게 예쁘게 생겼다. 나랑은 다르게 길고 남자다운 손가락, 손등에 힘줄. 별 생각없이 손을 따라 팔, 팔뚝, 그 위의 어깨, 그리고 얼굴. 여기까지 보다가 좀 놀랐다. 이렇게 귀엽게 생긴 얼굴은 또 처음이라. 


물론 내 베프 태태도 얼굴로 어디가서 안빠지고, 나는 이미 태태 얼굴에 익숙해서 웬만큼 잘 생긴 얼굴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근데 이 알바생은 그냥 잘 생긴게 아니라 되게 귀여워. 난 원래 귀여운 것들에게 약하다. 그래서 귀여운 고양이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하고 토끼도 좋아한다. 이 알바생은 땡그란 눈이 반짝반짝, 살짝 웃을 때 입모양이 진짜 토끼 같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뭐가 달라질건 없다. 그냥 귀엽다고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후로 그 편의점 자주 가긴 했다. 집 가는 길에 있으니까. 물론 집 가는 길에 편의점이 열 개 정도 있지만 맨날 거기만 가긴 했다. 귀여운 알바생은 내가 가는 시간대가 일하는 시간인지 항상 있다. 


그렇게 두어달이 지났다. 실기 시험이 점점 다가오고 나는 또 예민해졌다. 나를 잘 아는 태태는 실기 시즌에는 나한테 먼저 말도 잘 걸지 않았다. 예민해서 괜히 짜증 잘 내는거 아니까 아예 피하는거다. 실기 준비할 때 예민해지는 이유는 연습이 힘든 것도 있지만. 일단 잘 먹지 못해서 그렇다. 


나는 먹는걸 좋아한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제일 행복하다. 그치만 이때는 먹고 싶은걸 다 먹으면 안된다. 요즘 살도 좀 쪄서 안그래도 다이어트도 해야 하는데. 이런 말 하면 태태는 나를 유심히 본다. 대체 뺄 데가 어디냐고 그러는데, 나만 느끼는게 있다. 몸이 무거우면 동작이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편의점 토끼 알바생이 나한테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줬다. 갑자기 줘서 얼떨결에 받긴 했는데. 뭐지? 왜 줬지. 집까지 삼각김밥을 들고 가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다. 단골손님이라서 준다고는 하는데. 그전에 일상적인 인사 한마디 따로 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귀여운 애가 주는거니까 일단 받았지만 좀 난감했다. 집에 와서 냉장고에 넣어놨다. 안그래도 이 시간에 집에 갈 때 허기져서 오늘 하루만 딱 먹을까 말까, 매일 고민을 엄청 하던 중이다. 그때마다 내일 연습을 떠올리며 자제력을 짜내서 참고 있는데. 하필 이럴 때 친절을 베푸는게 마냥 좋지만도 않다. 나 먹으면 안되는데.




토끼 알바생은 내 맘을 모르는게 분명하다. 하긴 당연하지. 말도 안하는데 알리가 있나. 다음날도 편의점 갔는데 또 먹을껄 줬다. 그것도 내가 엄청 좋아하는 돈가스 도시락을 줬다. 하...진짜 먹으면 안되는데. 먹고 싶은걸 꾹 참고 또 냉장고에 넣어놨다. 어제 넣어둔 삼각김밥은 룸메이트 태태가 먹었는지 없어졌다. 


다음날 아침, 냉장고 속 돈가스 도시락의 정체를 묻는 태태에게 나는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곰곰히 듣던 태태가 말했다.


'그 알바생 혹시 너 중딩이나 고딩으로 생각하는거 아닐까.


'뭐?'


'용돈 없어서 못사먹는줄 알고 불쌍해서 챙겨주는거 아닐까?'


'내가 어딜봐서 그렇게 보여?'


'요즘 너 좀 그렇게 보여. 몸 짝아져서 뒷모습은 중딩, 앞모습은 고딩 같아.'


그것도 밥 굶고 있는 애.


태태가 그러는데. 밥 굶고 있는건 사실이긴 한데. 뭐야. 그럼 그 알바생 지금까지 나 불쌍해서 이것저것 줬던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팍 상했다. 딱히 뭘 기대한건 아닌데. 귀여운 애가 챙겨주니까 얼떨떨하면서 또 살짝 좋기도 했는데 사실 그게 불쌍한 애 같아서 그랬을거라고 생각하니까 화가 났다. 아무리 봐도 그 토끼가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혹시 나 놀리려고 그러나? 나쁜 애는 아닐 것 같지만 또 알게 뭐야. 생각할 수록 기분이 안좋다. 그렇다면 제대로 알려줘야겠다. 나는 너보다 형이고-아마도 그럴거다-돈이 없어서 못사먹는게 아니라고!


근데 막상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난데없이 뭔 소리냐는 반응일지도 모르고. 괜히 말꺼내면 나만 이상한 사람될 것 같고. 그래서 생각 끝에 술을 사기로 했다. 나는 당당하게 술을 살 수 있는 어른이고, 이거 살 돈도 있다는걸 보여주자!




그래서 맥주를 샀고, 그 날도 토끼 알바는 내게 먹을껄 줬다. 솔직히 그 냉동만두 엄청 좋아하는거라 순간 받고 싶었지만. 요즘 안빠지는 살 때문에 스트레스 받던 중이라 동시에 또 화가 나버려서. 괜히 그 알바생에게 뾰족한 소리를 했다. 내가 날카롭게 대답하자 좀 놀랐는지 그 자리에 굳어버리는걸 보면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짜증도 나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마침 태태에게 전화가 오길래 그 핑계로 그냥 나왔다. 맥주캔 따서 마시면서 집에 가는데 좀전에 그 알바생 울망울망하던 눈이 생각난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그래서 요즘은 그 편의점 안간다고?"


태태가 묻길래 이불을 덮어 쓴 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니까 또 얼굴 보기 좀 그렇고. 껄끄러워서 못가겠다. 걔도 기분 상했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딴에는 친절을 베푼건데. 나 원래 좀 이상한 성질 있어서 나 아는 애들도 이해못할 때가 있는데. 잘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짜증을 냈으니, 걔가 나 어이없게 생각하는건 당연하다. 


그냥 뭐 그런 일도 있지 뭐. 잊어버리면 그만인 일인데. 근데 이게 이상하게 계속 마음에 남는다. 그날 마지막으로 봤던 토끼 눈망울이 금방 울 것처럼 보여서 그런 것 같다. 설마 진짜 울었을리는 없겠지만. 역시 난 귀여운거, 예쁘게 생긴 것에 약했다. 토끼가 그만큼 귀엽지 않았다면 금세 잊었을텐데.


"맘에 걸리면 가서 미안하다 그래."


"뭐가 미안하다 그래?"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너 보나마나 걔한테도 눈 이케 막 치켜뜨고 뭐라 그랬을거 아냐."


태태가 자기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쭉 위로 올려보이면서 그런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싶지만. 사실 좀 그렇긴 하다. 미운 소리 할 때 나 되게 얄미운거 나도 알고 있다. 그래. 지금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건 잘 모르는 사람한테 괜히 신경질을 부렸기 때문이다. 


태태 말처럼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만일 일이다. 

아...근데 막상 가서 말하려니까 좀 뻘쭘하고 민망한데. 어쩌지.






그래서 그후로도 며칠동안 생각만 하고 편의점에는 가지 않았다. 연습할 것도 많아서 바쁘기도 했다. 밤에는 지쳐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핑계로 편의점은 못본척 했다. 


마음 속 찜찜함은 남았지만 뭐 그럭저럭 이러다 말겠지. 


오늘은 오후 수업인 태태랑 같이 학교 가려고 나왔다.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중간에 버스정류장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수업 끝난 시간인지 교복 입은 애들이 몰려 있었다. 별 생각없이 앞을 봤는데, 어.. 토끼다.


토끼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갑자기 눈이 마주쳤고 나는 속으로 좀 당황했다. 며칠내내 마음에 걸렸던 일의 장본인을 전혀 예상못한 순간에 만나니까 순간 좀 멍했다. 토끼 눈은 오늘도 초롱초롱 예뻤다.


"왜?"


내가 좀 머뭇거리니까 옆에 가던 태태가 물었다. 


"어 아니.."


암것도 아니야, 라고 대답하려는데 토끼가 내게로 다가왔다. 뭐지. 그날 내가 짜증낸거 얘도 마음에 담아뒀나. 그래서 지금 한소리 해주려고 그러나. 근데 그렇다기엔 토끼 표정이 너무... 왜 또 울 것 같지? 원래 이런 표정 잘 짓는 앤가. 


"저기, 지미니 형."


내 앞에 온 토끼가 숨을 한 번 흡! 들이쉬더니 단숨에 말했다. 응? 혹시 지미니 형이 나 말하는건가. 내 이름 같긴 한데, 이름 어떻게 알았지. 토끼는 역시 고딩이었다. 그럴것 같더라니. 남색 교복 마이에 자수로 새겨진 이름을 봤다. 전정국. 이름도 꼭 자기같네. 어울려.


"아.. 토끼? 아.. 아냐, 나 저기 앞에 있을게 지민아."


내 반응을 보고 태태는 얘가 그 토끼라는걸 알아챘다. 그렇다고 진짜 토끼라 그러면 어떡해. 다 들렸는데 뒤늦게 입막으면 뭐할건데 태태? 


태태가 지하철역 쪽으로 좀 멀어져갔다. 나는 다시 토끼, 아니, 전정국을 봤다. 대낮에 보니까 얼굴에 솜털이 뽀송뽀송한게 아직 애다. 근데 나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네. 누가봐도 몸은 얘가 더 어른같아서. 그래서 얘 나 무시한건가? 며칠동안 미안했던 것과 별개로 또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한다. 나도 내 기분 잘 모른다.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한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어리니까 반말해도 되겠지. 생각보다 말이 더 뾰족하게 나갔다. 토끼 눈망울이 또 울망울망.


"그,그게, 저...형,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여?"


"왜?"


"같이 저녁 먹어요!"


갑자기? 요즘 고딩들은 원래 이런가, 아님 토끼 성격이 이런거야. 우리 자연스럽게 같이 밥먹을 그런 사이는 좀 아니지 않나 싶은데. 근데 거절의 말이 바로 안나간다. 그니까 말했잖아, 나는 귀여운거에 약하다고.


"일곱시에 편의점 앞에서 기다릴까요!"


"일곱시? 음..."


얘 설득의 화법 뭐 이런거 배우러 다녔나. 그러자고 말도 안했는데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니까 나도 모르게 오늘 저녁 일정을 떠올리고 있다. 토끼는 숨도 안쉬는 표정으로 나만 빤히 보고 있다. 저 뒤에 토끼 친구들인것 같은 애들도 입을 꽉 다물고 전부 나를 보고 있다. 뭐, 뭐야 이 분위기.


"알았어. 일곱시에 편의점 앞."


못만날 것도 없지 뭐. 마침 저녁에 다른 일도 없고. 오늘은 연습도 일찍 끝난다. 


알았다고 대답하면 좋아하거나, 그에 맞는 대답을 하거나 그럴줄 알았는데. 토끼는 계속 멍하니 나만 보고 있었다. 못들었나?


"알았어, 일곱시."


"...네?! 아아, 네!!"


얘 눈 뜨고 자고 있었나? 갑자기 잠 깬 사람처럼 쩌렁쩌렁 크게 대답을 하는 바람에 내가 더 깜짝 놀랐다. 저 뒤의 토끼 친구들이 소리 없는 박수를 치는게 보였다. 지금 되게 구경거리 된 느낌인데.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태에게로 갔다. 걸어가는데 뒤통수가 계속 뜨거웠다. 






그날 저녁 일곱시. 나는 태태를 끌고 편의점 앞으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가기엔 뻘쭘했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뭐 할 말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같이 밥을 먹자니. 태태는 '이거 데이트 신청 아닌가.'라고 말했다. 말도 안된다. 고딩 꼬맹이한테 데이트 신청이라니. 내가 절대 그런게 아니라고 하자 태태는 또 말했다. 


'근데 너 원래 이렇게 접근하는 애들 다 매몰차게 대하잖아. 근데 왜 토끼는 거절 안했어?'


역시 태태는 나를 너무 잘 안다. 태태 말 다 맞다. 밥 먹자 술 먹자 번호 뭐냐. 이런거 묻는 애들 학기 초마다 널리고 널렸다. 이제는 나 싸가지 없다고 소문 나서 전보단 좀 덜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애들한테 카톡 많이 온다. 지민아 시간 돼? 밥 같이 먹을래? 뭐 이런거. 


나는 그런 애들이 다 귀찮다. 관심 없다. 대부분 속셈 뻔하고 만나봐야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근데 토끼에게는 거절의 말이 선뜻 안나왔다. 숨도 안쉬고 내 대답을 기다리던 모습을 보니까 평소처럼 그런 대답이 안나왔다. 실망하는 표정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태태랑 편의점 근처에 도착했다. 저 앞에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는 토끼가 보였다. 아깐 교복이었는데 지금은 집에 갔다 나왔는지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커다란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 대충 입은 것 같은데 몸이 좋아 그런가 잘 어울렸다. 


토끼는 땅바닥 한번 보고, 하늘 한번 보고 반복하다가 내가 다가가자 또 흠칫 놀라면서 굳었다. 놀라는 모습은 진짜로 진짜 토끼 같았다. 머리 위로 뿅 토끼 귀가 튀어나올 것 같다. 


"여긴 내 친구. 같이 왔어."


"어, 녜, 녭!"


더듬더듬하면서도 목소리는 우렁찼다. 귀여워. 


"배고픈데 일단 뭐 좀 먹으러 가자. 어디 갈래?"


태태는 뭔가 웃기다는 표정이지만 웃지는 않고 말했다. 글쎄 뭐 여기 근처 아무데나, 라고 입을 떼려는데. 나와 태태를 번갈아 보던 토끼가 먼저 대답했다.


"저기 앞에 삼겹살집 맛있는데 있는데여. 지미니형 삼겹살 좋아해요?"


이번에도 숨도 안쉬고 말했다. 얘 원래 말할 때 숨안쉬는 타입? 삼겹살, 좋아하지. 없어서 못먹지. 요즘 다이어트 때문에 못먹은지 한 달은 된 것 같은데. 먹으면 안되지만 얘 입에서 '삼겹살' 말이 나오는 순간 내 위장은 이미 세팅이 끝났다. 


"그래, 먹으러 가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끼는 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힘차게. 




삼겸살 집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막상 이러고 앉아 있으니 이 조합 뭔가 싶다. 토끼는 내 앞에 앉아서 뭔가 되게 부산스럽다. 물컵을 여기 놨다 저기 놨다 하다가 태태가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자 뭔가 생각난듯 후다닥 '제,제가 할게요' 하며 집게를 가져갔다.


토끼는 고기를 못 구웠다. 토끼라서 그런가. 고기 안먹어봤나. 쉴새없이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는 통에 고기가 익질 않았다. 태태가 '지민아, 구운 마늘 먹을래?' 하자 또 후다닥 자기가 먼저 마늘을 가져가더니 그대로 불판 위에 쏟아붓는다. 불판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마늘이 후두둑 떨어졌다. 멈칫, 토끼 손이 허공에 멈췄다. 큭. 태태가 못참고 소리내서 웃었다. 솔직히 나도 웃겼지만 어쩐지 웃을 수가 없었다. 앞에 앉은 토끼가 너무 진지하니까 차마 못 웃겠어.


"내가 할게, 나 고기 잘 구워."


최소한 너보다는. 이 말이 생략된 태태의 말에 토끼가 어쩔 수 없이 집게를 뺏겨준다. 집게 뺏기고 또 나라 잃은 표정 뭔데. 


태태가 구운 고기를 가위로 잘랐다. 원래 태태는 나를 잘 챙겨준다. 내 앞접시 위에 자른 고기를 놓아주려는데, 이번에도 토끼가 후다닥 먼저 움직였다. 불판 위의 고기 한 점을 집어서 내 접시 위에 놓아준다.


"지미니형! 이거 드세요, 잘 익었어요."


"어? 어어..."


토끼 너, 진짜 고기 안먹어본거니? 전정국이 내 접시에 올려준 고기는 반밖에 안익었다. 뒷면은 그냥 생고기였다. 근데 얘 너무 해맑은 표정으로 내가 먹나 안먹나 눈도 안깜빡이고 빤히 보고 있으니까. 차마 이걸 불판 위에 다시 올리질 못하겠다. 나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닌데. 태태는 어쩌나 보자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억지로 띄면서 절반 익은 삼겹살을 입에 넣었다. 안익어서 잘 안씹혔다. 토끼는 감격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다른 메뉴로 먹자고 할껄. 안구워도 되는걸로.


"저기, 지미니형."


"어."


"그, 저, 요즘에.. 요즘에 왜 편의점 안와요?"


조금 먹고 있는데 정국이 묻는다. 쑥스러워할거 다 하고 긴장할거 다 하면서도 은근히 할말 다 하는 스타일 같다. 돌려 말하는 것도 없고 직설적이다. 이 질문에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너 보기가 좀 껄끄럽고 어색해서 안간다고 대답하면 진짜 껄끄럽고 어색해질 것 같고.


"그냥. 별로 살게 없어서."


그래서 무난한 대답을 했다. 토끼 표정이 좀 시무룩해진다.


"아..그렇구나... 저기, 형 그날 제가 죄송했어요."


"그날 뭐?"


"저는 그냥 형 먹으라고, 아니 진짜 아무 뜻 없이 그런건데.. 혹시 기분 나빴으면 제가 진짜 잘못했어요."


사과하는 것도 직설적. 나는 어색해서 잘 못하는 말을 얘는 잘 했다. 물론 지금도 숨은 안쉬고 말한 것 같긴 하다. 폐활량 좋네 얘.


"아 형, 저 어제 알바비 받았거등여? 이거는 제가 사드리는거에요."


뭔가 다짐이라도 받듯이 그러는데.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나한테 뭘 사주려고 그러냐고. 내가 너보다 형이잖아? 설마 내가 편의점 알바하는 고딩 알바비 뜯어먹을 것처럼 생겼어?


풉. 옆에서 또 태태가 웃는다. 야 그럴거면 그냥 소리 내서 크게 웃어. 아까부터 그렇게 웃는게 더 거슬리거든?


"이름이..정국이? 전정국이랬지?"


"그런데요."


깜짝이야. 태태 말에 토끼가 대답을 하는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톤이라서 놀랬다. 숨도 안쉬고 더듬더듬 하던 애가 태태한테는 겁나 냉정해. 뽀송한 얼굴에 사슴같은 눈망울 마저 지금은 좀 차가워 보였다. 반전 매력인가.


"너 왜 지민이한테 자꾸 먹을거 주려고 해? 얘 돈 없어 보여서?"


"아닌데요!"


태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가듯 대답하는데. 누가 들어도 맞다는 뜻인 것 같다. 진짜였네. 진짜 나 돈없어 보여서 너 나 동정한거구나... 아니 나 그 정도로 없어보이진 않는데? 대체 왜?


태태는 '내가 뭐랬어' 하는 표정으로 날 보면서 웃는다. 그래.. 니 말 맞나보다. 토끼는 내가 불쌍해서 그랬나봐. 좀 쪽팔리기도 하고 살짝 억울하고 뭔가 서운하기도 했다.


"얘 다이어트 하느라 안먹는거야. 먹을거 안사줘도 돼. 얘 돈 많아."


"에? 지미니형이 다이어트를 왜 해요? 안그래도 겁나 말랐는데여?!"


"아냐, 나 요즘 살 쪄서 다이어트 해야 돼."


"안되여!"


깜짝이야. 갑자기 버럭 그러는 바람에. 내가 다이어트 한다는데 하지 마세요도 아니고 안되여는 뭔 뜻이야. 말해놓고 자기도 놀랐는지 토끼가 손으로 입을 막는다.


"어 그니까 저는 그냥.. 지금도 보기 좋다는..그 말인데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아래로 내리까는 눈. 속눈썹이 깜빡깜빡하는데 그것도 귀여웠다. 내가 소리내서 웃자 정국이 눈을 살짝 들고 날 본다. 


"나 무용전공이거든. 곧 실기 시험이라 그거 준비하느라. 끝나면 또 잘 먹어. 그때 내가 너 맛있는거 한번 사줄게."


"저,정말요?"


"그동안 챙겨준거 고마웠어."


내 말에 정국은 뭔가 대답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잘 익은 고기를 한 점 집어 정국의 접시 위에 놔주었다. 


"많이 먹어. 너 거의 안먹었잖아."


아까부터 정국은 부산스럽기만 했지 정작 거의 먹질 않고 있었다. 내가 얹어 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더니 앙, 맛있게도 먹는다. 볼이 올록볼록, 먹는 것도 귀여웠다.






계산은 내가 했다. 정국이 끝까지 자기가 한다고 했지만 편의점 알바비 뜯어먹는건 말도 안된다. 그리고 나 안가난해. 삼겹살은 사먹을 수 있다니까?


"너 알바 안가?"


"오늘은 쉰다고 했어요."


아 그래. 그러면.. 여기서 헤어질까? 그 말을 해야할 것 같은데 이번에도 정국이 먼저 말했다.


"형, 제가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아니 괜찮은데."


"밤길 어둡잖아요."


"나 태태랑 같이 살어."


그러니까 어두워도 괜찮..은데 정국아, 너 또 왜 그런 표정이야? 세상 무너진 표정 또 짓고 있다. 


"같이..살아요..?"


"어? 응. 2년 됐어."


"2년.."


내 말을 따라하며 정국이 또 커다란 눈을 꿈뻑꿈뻑. 아 그렇게 쳐다보지마. 그 눈 보면 마음이 뭔가 되게 근질거리고, 뭔가 거절의 말을 못하겠다. 


"아 나 어디 들렀다 갈데 있다. 너네 먼저 가."


태태가 갑자기 뭐 생각난 듯이 말했다. 정국은 멀어지는 태태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데려다줄게요, 형."


그리곤 나를 향해 다시 말했다. 이것봐, 거절 못하겠다니까. 나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집 쪽으로 걸었다.




가면서 정국인 아무 말도 없었다. 은근히 재잘재잘 말 잘할 것 같았는데 막상 둘만 남으니까 조개처럼 입을 꾹 닫았다.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걷기만 했다. 참, 얘는 집이 어디지?


"너네 집 이 근처야?"


"네."


"어느쪽?"


"저쪽요."


손으로 대충 아무데나 가리키면서 그런다. 뭔데. 삐졌나? 갑자기? 요즘 애들 모르겠다니까 정말. 두 살 차이지만 지금은 그 차이 엄청나서.


"지미니형."


"어 왜."


"아까 그, 태태형이랑 사겨여?"


엥. 난데없는 질문에 뭐라 그래야 하나 싶은데 정국이 뭔가 결심한 듯이 발걸음을 딱 멈췄다. 나를 향해 똑바로 선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데요. 근데요 형, 사귀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고, 또.. 아 물론 형이랑 그 형이랑 헤어지라는건 아닌데요, 그러니까 언제든 헤어질 수도 있는거니까 그게.. 아 씨..."


말하다가 뭔가 이게 아닌지 정국이 자기 머리를 막 헝클어뜨린다. 하늘 한 번 봤다가 한숨 푹. 얘 더 오해하기 전에 바로잡아 줘야 할 것 같다.


"태태랑 나 그냥 친구야."


"..진짜요?"


"응. 고등학교때부터 절친. 지금은 룸메이트. 걔는 나같은 타입 안좋아해."


"예에?! 형처럼 귀엽고 이쁜데 어떻게 안좋아할 수가 있어요?"


"...취향은 다양한거니까."


고딩 입에서 귀엽고 이쁘다는 소리 듣는 기분이 묘했다. 묘한데, 나쁘지는 않았다.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한데 막상 얘 이런 얼굴로 외치듯이 하는 말 듣고 있으면 뭔가 다 수긍이 간다. 너무 진심인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한겹 꾸밈이 없는, 속에 있는 마음 그대로인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럼 형, 저기, 사귀는 사람 없어요?"


"응. 지금은 없는데."


"아 그렇구나.. 지금은 없구나..."


또 내 말을 그대로 따라서 중얼중얼. 그러더니 다시 앞으로 걷는다. 얘 좀 넋이 나간 것 같다. 나보다 좀더 큰 키, 그래서 좀더 긴 그림자. 나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저 편으로 길게 이어진 그림자를 보면서 걸었다.


저 앞에 우리 아파트가 보였다. 현관 근처에 가서 걸음을 늦췄다. 정국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계속 걷다가 내가 옆에 없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를 본다. 


"우리집 여기야. 다 왔어."


"아 벌써여..."


괜히 아파트를 한번 올려다보며 정국이 또 뒷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머리꼭지 위로 삐죽, 머리카락이 솟아올랐다. 귀여워. 나는 우물쭈물하며 서 있는 정국이 앞으로 가까이 갔다. 손을 들어 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정리해주었다. 다 정리하고 얼굴을 보는데, 귀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반짝이는 눈이 나를 또 빤히. 너무 가깝나. 쑥스러워서 한 발 뒤로 물러서려는데.


쪽. 


갑자기 입술에 닿는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 너무 갑자기라 이게 무슨 일이지 싶은데. 눈앞엔 이제 타오를 듯이 얼굴이 빨개진 토끼가, 아니, 정국이가 있었다. 


"너..지금 나한테 뽀뽀했어?"


"에? 어..그게, 아니? 그게 아니고.."


허둥지둥. 갈곳을 잃은 정국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리곤 헙, 제 입을 막는다. 


"미,미안해요! 형 그게.. 너무 곰젤리 같아가지고..그게 입술이.."


아 씨... 또 귓머리 벅벅. 방금 정리해놓은게 아무 소용없어졌다. 머리카락은 좀전보다 더 사방팔방으로 뻗쳤다.


"화..났어요? 잘못했어요 형.."


내가 아무말 없자 정국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그런다. 벌써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나는 가볍게 한숨을 한번 쉬고 말했다.


"화난건 아니야. 근데 좀 당황스럽다 너."


"아... 진짜 잘못했어요. 미쳤었나봐요.."


"정국아."


"네..."


"나는 사귀는 사람이랑만 뽀뽀해."


"네... 네?"


"아무하고나 안해. 혹시 너 그렇게 생각한건 아니지?"


"아,아닌데여! 진짜 그거는 아니고, 갑자기 나도 모르게!...그런건데..."


"그래 알았어."


그렇진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얘가 나 만만하게 보고 그런걸까봐 확인은 했다. 가끔 오해하는 놈들 좀 있어서. 이 말은 진짜다. 나는 사귀는 사람이랑만 뽀뽀한다고.


"형, 지금 화난거 아니면요.."


"응."


"그러면.. 형이랑 또 뽀뽀하려면 사귀면 되는거네요...?"


"...어..?"


이번엔 내가 당황했다. 뒷머리 헝클어뜨리고 싶다. 


"그니까 제 말은요. 그게..어..음.. 형이랑 또 뽀뽀를, 아, 아니! 그게 아니고, 형이랑...또 만나고 싶은데..."


"왜?"


"왜,냐면.. 형 좋아해서요."


왜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싶어서 물어본건데. 이번에도 정국인 아무런 꾸밈 없이 속마음을 말했다. 이런 순진함과 솔직함 앞에서 나는 또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 훅 들어오는 애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얘처럼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고?"


"네? 네.. 네, 완전요!!"


"그럼 더 커서 와. 너 너무 애기야."


"제가여? 아닌데요, 다 컸는데요 저.."


이거바여, 지미니형, 제가 형보다 키도 더 크고 또... 뭐라고 중얼중얼 하는데 참던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가 깔깔 웃자 정국이가 멍하니 쳐다본다. 오랜만에 이렇게 크게 웃는 것 같다. 요즘 연습하느라 찌들어서 웃을 기운도 없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너 대학 오면. 그러면 생각해볼게."


"아..."


"얼마 안남았잖아."


"많이 남았는데..."


"암튼 지금은 안돼."


"그러면 형, 하나만 약속해요."


"뭘?"


"나 대학갈때까지 형 애인 안만들기로요."


군대 갔다올때까지 바람피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거. 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참고 고민하는 척 했다. 정국인 그런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얼마 안남았어여."


조금전엔 많이 남았다고 쫑알거렸으면서 금세 말을 바꾼다. 놔두면 또 울 것 같아서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알았어. 너 대학올때까지."


"약속 꼭 지켜야되요. 잊어버리면 안되요."


알았어. 안잊어. 


난데없는 약속을 해버린 것 같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다. 전정국. 이름을 쓰고 옆에 '울보토끼'라고 덧붙였다. 번호 저장하고 나니까 갑자기 뻘쭘함이 밀려왔다.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져야겠다. 그럼 잘 가라고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정국이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잡았다가 자기도 놀랐는지 후다닥 손을 뗀다. 


"저기, 형."


"응."


"저기, 이따 전화해도 되요?"


"그래, 해도 돼."


"아..그리고 저기..."


어, 음, 아... 정국은 한참 다음 말을 골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하고 입만 달싹달싹. 나는 웃으며 정국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에 쪽, 짧게 입을 맞췄다. 


"됐지?"


"...아...네..."


너가 하고 싶은거 이거잖아, 맞지? 정국이 얼굴이 또 화르륵 불타올랐다. 






귀여워.



나는 원래 좋아하는걸 귀엽다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정국이가 빨리빨리 컸으면 좋겠다.












그냥 달달물 보고 싶어서♡ 

근데 1차들이 더 달아서♡♡




잠깐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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