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lome ~



그건, 조금 오래 전의 이야기.

높은 키. 작고 흰 얼굴. 그 위에 더욱 돋보이는 검은 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코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붉은 입술. 그리고 굳이 염색하지 않은 천연의 검은 머리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가만히 있어도 돋보이고야 마는 주목성. 그것은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그녀 자신. 주목성의 재능을 살린 배우라는 직업은 그녀의 천직임이 틀림없다.

그녀는 지금 내일 상영될 연극 「살로메」의 무대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베테랑이라면 베테랑인 그녀는 이미 그 누구보다 완벽한 살로메가 되어 있었다.



여배우 레이라 킴.



그녀는 세상 둘도 없을 나긋한 목소리로, 세상 가장 광기 어린 목소리를 연기했다. 


"「세상에 당신의 입술만큼 붉은 것은 없어요……, 당신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게 해주세요.」"

"「절대 안 돼! 바빌론의 딸이여! 소돔의 딸이여! 절대 안 된다!」"

"「당신과 입을 맞추겠어요!」"


검은 눈에서부터 흘러넘치는 광기. 그녀는 항상 그런 연기를 선보였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생생함. 그래서 레이라는 연극을 사랑했다. 관객과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것만큼 짜릿한 건 없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긴 리허설을 끝낸 레이라는 내일의 무대가 완벽히 성공할 것이란 자신감에 가득 찼다. 몸 안에 남은 살로메를 흐리게 하는 것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레이라는 곧 레이라로 돌아왔다. 그녀가 그녀로 돌아오게 해주는 가장 큰 일 등 공신이 있었으니까. 

연기 하느라 진이 빠진 레이라의 옆으로, 검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여성이 다가왔다. 햇볕의 따사로운 향이 나는 그녀는 레이라의 친구이자, 매니저이자, 팬이자, 후배였다. 지연이 말했다.


"언니, 고생했어."

"고생이랄 게 뭐 있니.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업으로 삼은 이상 죽을 만큼 해내야지."

"그런 점이 멋있다니까."


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압도하는 공연장 크기에 침을 삼켰다. 이 커다란 공연장이 내일은 관객으로 꽉 찬다는 거지. 하지만 눈앞의 레이라는 이 커다란 공연장의 꽉 찬 관객을 홀로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조그만 소극장에서도 덜덜 떠는 자신에겐, 레이라는 따라가려야 따라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 경이감에 지연은 레이라를 향해 몸을 돌며 말했다.


"「기막힌 세계예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사람들의 운명은 가지가지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근근이 이어가고, 서로 비슷하고 모두가 불행한데. 어떤 사람들한테는, 예를 들어 100만명 가운데 한 사람인 당신 같은 분에게는 흥미롭고 산뜻하며 의미로 가득한 인생이 주어진 겁니다. 당신은 행복한 거예요.」"


지연이 읊은 대사에, 레이라는 미간을 좁혔다. 레이라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런, 그건 '갈매기'의 니나잖아. 살로메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언니처럼 빛나는 이를 향한 대사야.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줘. 어쨌든 난 언니의 팬이니까."

"네 마음이야 항상 잘 알지. 그건 그렇고, 내일 보러 올 거지?"


레이라가 지연에게 물었다. 자신이 보낸 초대장. 관객석, 그 1열의 좌석을 그녀에게 보냈다. 레이라의 말에 지연은 가방에서 티켓을 꺼내어 팔랑거렸다.


"물론이야. 이 비싼 것을 받고도 오지 않다니, 말도 안 돼. 나 말고 또 누구에게 보냈어?"

"우리 그이와……, 얼마 전에 알게 된 젊은 사업가."

"그 젊은 호텔리어? 굉장히 잘생겼다는?"

"그래. 호텔 사업에 투자 좀 해보려고 초대했어."

"흐음."


지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형부를 두고 한눈 파는 건 아니지?"

"헛소리 할 거면 티켓 내놔."

"무슨. 장난도 못 치게 해."


지연이 입을 비죽 내밀며 말하자, 레이라는 웃었다. 레이라는 내일 그 젊은 호텔리어를 소개라도 시켜주겠다고 말하며, 지연과 함께 공연장을 떠났다. 

하지만 웬걸. 다음 날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레이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연과 젊은 호텔리어가 함께 대기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차림을 한 젊은 호텔리어. 레이라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스터 에이든. 와주어서 고마워요."

"당신과 같은 여배우의 초대를 받다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겸손도 하셔라."


레이라는 에이든과 악수한 뒤, 지연을 바라봤다. 레이라가 말했다.


"내가 소개하기도 전에 함께 들어오다니. 솔직히 말해서 놀랐어."

"내 옆자리에 앉아 계셨거든. 하지만 아직 소개를 나누진 못 했어."

"그래? 그렇다면 잘됐네. 내 할 일이 사라지지 않아서 말이야."


레이라가 에이든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이 분은 미스터 에이든. 이번에 내가 투자할 호텔의 호텔리어. 그리고 이 아가씨는 지연이라고 해요. 제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이죠."


저의 제일가는 팬이기도 하고요. 레이라의 소개에, 지연과 에이든은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동양인이시기에 이름이 궁금했어요. 의외로 평범한 영문권 이름을 쓰시는군요."

"저야말로 당신 이름이 궁금했습니다. 이름을 보아 한인 혈통이신가 봅니다."

"정확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세상에. 그렇담 우리 모두 한인이네요. 형부가 왔더라면 넷이었을 텐데."


지연의 말에 에이든이 놀란 눈을 떴다. 에이든이 물었다.


"레이라, 당신 결혼했나요?"

"아니요. 약혼자예요. 저 아이가 멋대로 형부라 부르는 거죠."

"언니, 어차피 형부와 결혼할 거면서."


지연이 티끌 없는 모습으로 해맑게 웃자, 에이든이 조금 주춤했다. 에이든은 햇살 같은 지연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고, 그걸 눈치챈 레이라는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레이라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지연을 향한 꺼림칙한 시선을 거두기 위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울렸을 뿐.


"그이는 너무 바쁘단 말이야. 어차피 못 올 거라고 생각했지."

"섭섭하시겠군요."

"전혀요. 정말이지 너무 바쁘다니까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에이든이 묻는 말에 레이라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재밌다는 얼굴로 붉은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레이라가 길고 검은 속눈썹을 팔랑이며 말했다.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경찰 같은?"

"그거 멋지시군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레이라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레이라가 물었다.


"저녁이라도 함께 하시겠어요?"

"아뇨.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아쉽게 됐네요. 하긴, 젊은 호텔리어가 한가하다는 것이 더 이상하죠."

"그렇습니까."

"바쁜 와중에 공연을 보러 와줘서 감사해요."


레이라는 에이든에게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에이든은 한 번 더 살로메를 보겠노라 이야기 하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


지연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고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지연이 말했다.


"심장 떨려. 무슨 사람이 저리 잘생겼어?"

"얘, 정신 차려."

"하지만 언니. 저 사람, 공연 내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걸. 내 귀가 붉어지진 않았을까 걱정 돼."

"그러니까. 정신 차리라구."


내가 보기에 그건 정상이 아니니까. 레이라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의 일면만 보고 그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의 눈빛은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요카난을 처음 본 살로메의 눈. 하지만 설마. 그 젊은 호텔리어는 매너가 좋고, 꽤 성실한 사람이었다. 분명 착각일 것이다. 그야 사람은 언제나 착각을 하니까.


"……."


찰나의 시간 동안 수만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레이라는 그 어떤 것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뭐. 이런 걸 기우라고 하는 거겠지. 레이라는 평소와 같이 태연히 웃으며 지연과 함께 디너를 즐기기 위해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 * * *




에이든은 공연장을 나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검은 세단에 몸을 실었다. 연극 하나 보았을 뿐인데 어쩐지 피곤했다. 뭐라 할까. 기가 빨린 느낌. 보는 내내 불편했다. 레이라 킴. 그 여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가짜에 불과한 것을, 어떻게 실체화 할 수 있는 거지? 어쩐지 기괴하기까지 한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자 영 불편해 보이는 에이든의 모습에 벤자민이 물었다.


"보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아니, 그냥. 소름이 끼쳐서."

"연극이요?"

"그래. 가짜를 그렇게 생생히 만들다니. 기분 나쁘군."

"그래 봐야 가짜죠. 가짜는 가짜인 걸 아시잖아요."


벤자민의 속 편한 말에, 에이든은 눈썹만 치켜올려 창밖을 응시했다. 그래. 가짜는 가짜여야지. 진짜와 가짜. 적군과 아군. 의뢰와 보수. 시침과 분침. 세상 만물이 이렇듯 정확해야 하는 자신으로선, 레이라의 연기는 매우 불편했다. 가짜가 가짜 같지 않았으니까.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그녀. 경계를 흐리게 하는 그 재능이 과연 연기에만 영향을 미칠까? 에이든의 머리에서, 그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경찰 같은?"


그녀가 올린 붉은 입술이 영 마음에 걸린다. 그 붉음은 마치 마녀가 건네는 독 사과. 에이든은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녀 옆에 자리했던 지연을 떠올렸다. 레이라의 소름 끼치는 공연 내내 두 눈을 환히 빛내던 사람. 그 거짓투성이인 공간에서, 지연의 눈빛만이 진짜였다. 

원래 검었던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걸까? 밝은 금발이 그녀와 퍽 잘 어울렸다. 어쩐지 햇볕의 향이 나던 사람. 그림자에만 있던 자신이라 그런가. 그녀의 햇살을 훔치고 싶었다. 그야 찬란한 금빛 잔상이 머리에 남아 떠나질 않으니까. 에이든은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벤자민에게 말했다.


"사람 좀 찾아봐."

"말씀 하시죠, 보스."

"이지연. 레이라 킴과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

"그런 일반인을 어디 써 먹으시려고요. 마음에 안 들기라도 하세요? 그렇다면 그냥 아래 것들 시켜서 쥐도 새도 모르게……."


평소와 같은 것을 지껄이던 벤자민은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보스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걸 확인하고 말았으니까.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벤자민 자신인 모양이다. 보스가 말했다.


"손 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찾기나 해."

"……네, 알겠습니다."


벤자민은 그리 말하며 곧 자신의 수행원에게 일 처리를 시켰고, 에이든은 벤자민이 지시 내리는 걸 그저 듣고만 있었다. 자신의 머릿속 한가득, 햇살 빛 황금이 차오른다. 그 햇살에 닿으면, 나도 따뜻해질 수 있을까? 피도 눈물도 없다는 자신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까? 에이든은 공중으로 손을 올려,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주먹을 쥐었다. 간절하다.


'그 황금빛이. 그 햇살이. 그 따뜻함이.'


그녀가 자신에게 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레이라가 공연 중 읊었던 살로메의 대사가 떠올랐다. 


당신과 입을 맞추겠어요. 

당신과 입을 맞출 거예요. 

당신에게 입 맞추겠어요. 

당신에게 입 맞추게 해주세요. 

당신에게 입 맞출 거예요.


광적인 집착. 그 대상이 입술이 아닐 뿐, 간절함만큼은 이미 살로메와 같다. 미친 건가?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은 어딘가 미쳐버리고 만다던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 걸까. 에이든은 난생처음 겪는 심정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햇빛이 그립지 않을 듯했지만, 검게 덮인 시야가 햇빛을 더욱 갈구한다. 곤란하다. 미칠 듯이 곤란하다. 사람을 얻는 방법은, 무력을 제외하곤 모른다. 

에이든은 일단 정보를 기다렸다. 무언가를 얻을 때엔, 보다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사람이든, 물건이든, 형태가 없는 마음이든. 그 모든 게 마찬가지 아닐까.

그리고 며칠 후. 벤자민의 수행원이 종이 몇장과 함께 빌딩 꼭대기 층을 찾았고, 에이든은 지연에 대한 정보를 모래알을 훑는 개미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 * * *




에이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디올의 검정 재킷을 걸쳤다.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하지? 아아, 그래. 그녀가 좋아하는 우디 계열 향수를 뿌리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사랑에 빠진 눈. 여느 남자와 다름없는 그 모습이, 에단의 눈엔 그저 두려웠다.

보스가 지연을 만난 지 벌써 1년. 그리고 그녀와 그림 같은 별장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 건 반년. 지연은 아직 에이든이 뒷세계의 주인인 것을 모른다. 에단이 말했다.


"보스. 그녀가 그렇게 좋으세요?"


하지만 에단의 목소리는 보스에게 닿지 않았다. 검은 방 가득, 보스의 콧노래만이 울려 퍼진다. 오랜만에 현장을 갔던 보스는, 일주일 만에 별장으로 돌아가는 게 몹시 기대되는 모양이다. 에이든은 마치 패션 잡지에 나올 법한 모델의 모습으로, 로스앤젤레스 빌딩 꼭대기 층을 나섰다. 에이든의 뒤를 졸졸 쫓던 에단이 다시 말했다.


"저……, 보스."

"왜 그래."

"한참 기분 좋으실 때 정말 죄송하지만, 레이라에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레이라? 그 여자가 왜."


레이라의 이름에, 에이든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 이름만 들어도 신물이 난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여자. 하루 24시간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여자.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여자. 에이든은 그녀가 정말 싫었지만, 관계를 끊을 수는 없었다. 이유야 뭐. 말할 것도 없이…….


"오늘 지연 씨와 함께 저녁 식사나 하자는데요."

"……끔찍하군."

"저, 어떻게 할까요."

"갈 수밖에 없잖아."


에이든은 잘 정돈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꼭 친자매처럼 우애 좋은 레이라와 지연을 부러 떨어뜨릴 수는 없는 탓이다. 자신의 햇빛인 그녀는 구름에 가려지는 일 없이 빛나야 하고, 늘 따사로워야 하니까. 에이든은 당장에 핸드폰을 들어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신음이 지나, 연결 된 전화. 전화기 너머로 햇살의 따스함이 전해져 왔다. 지연이 말했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일이 끝났어?"

"정확해."

"잘됐네. 마침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당신은 어쩜 이리 내 맘을 잘 아는지!"


지연은 언제나 에이든에게 같은 말을 했다. 


'어쩜 내 맘을 이리 잘 아는지.'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그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입수한 그날부터, 에이든은 지연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으니까. 미친 짓이지만, 어쩔 수 없다. 에이든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평범한 남자의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 있어?"

"레이라 언니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당신 시간 어때요? 나 이미 레스토랑 근처야."

"당신과 함께 하려면 가야 하지 않겠어?"

"로맨틱 하기는."

"그렇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레이라에게서 연락이 왔었어."


에이든의 말에 지연은 깔깔 웃었다. 문득 햇빛에 닿은 피부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건가? 믿을 수 없다. 에이든은 지연과 약속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장 일찍 도착해 있던 건 물론 지연이었다. 

근 반년 동안 동화 같은 별장에서 지낸 지연은 오랜만의 외출에 잔뜩 들뜬 모양이다. 커다란 레스토랑, 하지만 몇 개 놓이지 않은 소수의 테이블이 꽤 고급스럽다. 지연은 일주일 만에 만난 제 연인이 반가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왔네요."

"나도 마침 근처였어."

"언니네도 곧 온다 그랬어."

"언니네?"


에이든이 자리에 앉으며 의아하게 묻자, 지연은 조금 더 신난 얼굴로 말했다. 지연이 에이든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형부 말이야. 오늘 함께 온다 그랬어. 당신은 처음 보겠구나."

"그 바쁘신 분 말이지?"

"그래. 그분 말이야."


지연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연과 알게 된 지 일 년이었지만, 레이라와 그 남편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거의 없다. 사람을 시켜 알아볼까도 했었지만, 굳이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만두었다. 그렇기에 에이든에게 있어, 레이라의 남편은 미지에 가까웠다. 에이든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군."

"형부는 좋은 사람이야. 가족애가 넘치고……, 정의감도 넘치거든."


지연의 말에 에이든이 헛웃음을 쳤다.


"정의감이라니. 히어로라도 되는 건가?"

"마음만은 히어로야."


지연이 와인잔에 든 물로 목을 축이며 웃었다. 꽤 목이 말랐던 지연은 물을 절반이나 마셨는데, 물이 다 떨어져 갈 즈음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연은 마치 잃어버렸던 가족을 만난 사람처럼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언니, 형부."


지연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에이든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타고난 눈이 좋지 않은 탓에 둘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가 않는다. 순간 벤자민이 누누이 렌즈를 끼라 말하던 게 생각났는데, 눈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에이든은 그 말을 항상 무시해 왔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눈치는 좋아서, 저 편에 있던 레이라의 남편이 주춤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지연이 너, 어디 산골에 숨어 사니? 보기가 너무 힘들어."


레이라는 무더운 여름,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들어왔다. 저 멀리서부터 들어오는데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보아, 필시 잘나가는 여배우임이 틀림 없다. 레이라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간에 배우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레이라와 그 남편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진다. 레이라가 다시 한번 말했다.


"미스터 에이든, 당신도 오랜만이군요. 내게서 이 아이를 데려가더니 얼굴이 피었어. 마치 꽃 같네."


그녀의 요염하고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고, 에이든은 숨을 멈췄다. 레이라의 옆에 서 있는 남편. 


'말도 안 돼.' 


에이든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 하지만 역시 여배우의 남편인지, 아니면 기만인지. 그가 먼저 에이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일러 킴입니다. 지연의 연인 분이라 들었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든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맞잡은 두 손에 긴장감이 흘러넘친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에이든은 자신의 커다란 삼백안으로 타일러를 바라보았다. 자기소개? 개 같은 소리. 우린 초면이 아니다. 서로의 서류 속에서, 총알 튀기는 현장 속에서, 정말이지 질리도록 보아왔으니까.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정적. 저 소름 끼치는 선한 눈으로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관통시키는 정부 측 스나이퍼. 로스앤젤레스 마피아들의 블랙리스트, 그 첫 번째가 눈앞에 있는데도 죽일 수 없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그건 저 쪽도 마찬가지. 

여자들은 두 남자의 속도 모른 채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정말 모르는 걸까? 순간 레이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 듯했지만,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잘못 본 것만 같다. 에이든과 타일러가 당황한 채 멀뚱히 서 있자 레이라가 손짓하며 말했다.


"앉지 않고 뭐해? 여기서 주목을 끌고 싶거든 그렇게 하던가. 다들 인물은 잘났으니 말이야."

"그보다 언니. 어서 알려줘. 기쁜 소식이 있다고 했잖아."

"넌 너무 급해. 여유를 좀 가지면 안 되겠니?"

"로스앤젤레스를 떠났지만, 난 여전히 언니의 첫 번째 팬인걸. 언니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알고 싶어 안달 났단 말이야."


지연이 재촉하듯 말하자 레이라는 검은 눈을 초생달로 접어 웃었다. 레이라가 남편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아이가 생겼어."

"세상에!"


레이라의 말에 지연은 두 손을 입으로 가리며 방방 뛰었지만, 타일러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정적의 앞에서 약점을 보인 것과 같았으니까. 딱하기도 해라. 타일러 인생 중 가장 끔찍한 날인 게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정적. 아내와 가장 친한 동생의 연인. 그리고 그 앞에서 밝히는 아내의 임신 소식.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에이든의 위치 또한 훤히 발각된 것과 다름없으니까. 타일러가 원한다면, 그는 언제든 에이든의 정체를 지연에게 밝힐 수 있었다. 에이든이 지연에게 얼마나 목을 매는지는 레이라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이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 


'누가 먼저 행동할 것인가. 누가 먼저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레이라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디너 내내, 두 남자의 머리는 끝없는 계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반년 뒤, 먼저 행동에 들어간 것은 에이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순전히 운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엮여 눈치만 보던 둘은 결국 현장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저격수인 타일러의 위치를 운 좋게 발견한 에이든은 총구를 겨누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어떻게 엮였든 간에 저 놈은 지나치게 거슬리는 돌이었고, 레이라의 남편 따위 자신의 알 바가 아니기에. 

이 바닥 생활 십수 년 동안, 저격이란 것을 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애초에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날따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래서 에이든은 자세를 잡은 뒤, 방아쇠를 당겼다. 방아쇠를 당기는 도중 팔을 받치던 돌이 흔들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에이든의 실수투성이인 총알이 타일러의 목 뒤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으니까.


럭키샷.


인생 최고의 럭키샷이었다. 아마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기적. 에이든은 그때 생각했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아아, 정말이지.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자만했었다. 




* * * *




타일러가 자신의 럭키샷에 죽은 이후, 지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묘하게 일그러진 것이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에이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타일러가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즈음, 어딘가 거리가 생긴 지연이 에이든에게 말했다.


"에이든."

"왜 그래?"

"나 외출을 좀 하려고 하는데, 차 좀 보내줘."


지연이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에이든이 웃으며 물었다.


"외출? 어디로 갈 거야? 나도 같이 갈까?"

"아니, 그냥 좀. 오랜만에 시내나 나가볼까 해서. 이 별장도 그림 같긴 하지만, 가끔은 도시 냄새가 그리워."

"같이 가?"


에이든은 지연을 향해 두 번 물었다. 하지만 지연은 묘한 미소만 지을 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어. 정말이지 당신은 나를 너무 좋아한다니까."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에이든은 금세 체념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에 쥐고 있던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에이든이 말했다.


"10분만 기다려줘. 금방 대기시킬 테니."

"그래. 그동안 난 외출 준비나 해야지."


지연은 간단한 가방 하나를 챙기고는 에이든을 향해 말했다.


"다녀올게."

"기다릴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구."


지연은 조금 쓰게 웃으며 외출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지 정확히 53분이 지난 시간, 에이든의 곁에 있던 수행원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보스."

"그래."

"사모님께서 레이라 양을 만났다고 합니다."

"……."


수행원의 말에, 에이든은 읽던 신문을 접고 제 미간도 접었다. 그러자 수행원이 지체 않고 이어 말했다.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에이든은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예감이 불길하다. 레이라는 제 남편이 죽은 이후, 지연을 만난 적이 없다. 남편이 죽었음에도 두 눈 번뜩이며 꿋꿋이 살고 있는 그 여자.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그녀. 


'그 여자와 지연이 만났다고?'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타일러가 죽은 것이 맘에 걸린다. 이미 사자가 되어버린 타일러가 목에 걸린 독 사과처럼 느껴진다. 마치 체한 기분. 에이든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검은 세단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급하다. 이런 걸 초조하다고 하는 걸까? 에이든은 최대한으로 달리는 검은 세단이 느리다 생각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 * * *




지연은 몇 번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익숙한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열린 문. 작게 열린 문틈으로 레이라의 얼굴이 보였다. 지연이 레이라의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언니."

"……."


레이라의 얼굴은 지난 3달 동안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하지만 여배우의 검은 눈동자만은 여전히 살아있어, 그녀의 존재감을 여과 없이 빛냈다. 그 얼굴에 지연의 심장이 바닥을 쳤다. 지연이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 꼴이 이게 뭐야."

"그럼 멀쩡하겠니?"


레이라는 지연의 손을 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녀는 손님맞이 용으로 따끈한 허브티를 우려냈다.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드랍고, 하얗기만 하다. 지연이 말했다.


"언니. 할 말이 있다면서."

"그래."

"……혹시 형부 일이야?"

"달리 뭐가 있겠니."

"나 있지, 그동안 언니가 말했던 것 생각해 봤어."


형부가 죽은 이후. 레이라는 줄곧 에이든이 이상하다는 말을 해왔다. 어쩐지 수상하다는 영문모를 말과 함께 형부를 죽인 것이 에이든이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처음 지연은 남편을 잃은 레이라가 실성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레이라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에이든에 대한 의아함은 배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언제나 저택을 지키고 있는 검은 남자들. 아무리 젊은 호텔리어라 한들, 믿을 수 없는 재력. 게다가 가끔 그에게선, 탄환의 화약 냄새와 철의 비린내가 나곤 했다. 지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나를 부른 건……."

"명백한 증거를 찾아냈기 때문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언니. 난 어쩌면 좋아?"

"어쩌긴 어째 도망쳐야지. 너.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몰라. 듣기가 무서워."


정말로 무서워하는 지연의 모습에, 레이라가 지연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얼마 전, 그이의 동료가 와서 알려주었어. 타일러가 누구에게 죽었는지 알았다면서."

"……."

"미스터 에이든. 그 사람 일반인 아니야. 젊은 사업가는 더더욱 아니고. 그 사람……."

"……."

"뒷세계 사람이랬어. 워낙 거물인지라, 쉽게 건드릴 수 없어서 죽이지도 못 한대."


그리 말하는 레이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레이라가 작게 말했다.


"말이 되니? 내 남편 죽인 사람을 건드릴 수가 없다는 게? 그 범법자가 멀쩡히 살고 있다는 게? 지연아, 나는, 너무 분해서 살 수가 없어."

"……거짓말."

"사진이랑 영상도 내가 가지고 있어. 하지만 네게 보여주기는 싫어."

"보여줘."

"싫어."

"보기 전에는 못 믿어."


레이라는 결국 지연의 고집을 이기지 못 하고 사진을 들이밀었다. 위성사진. 작은 인영들이 보였지만, 지연은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을 쥔 지연의 손이 덜덜 떨고 있다.


"……말도 안 돼."

"……."

"언니. 사실 그 사람……."

"……."

"가끔 철의 비린내가 나곤 했어……, 그렇다면 그건……."


지연의 눈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건 피 냄새였던 걸까? 다른 누군가의 피였던 걸까? 그가 누군가를 죽인 걸까?"


지연은 얼굴이 창백히 질린 채로 몸을 덜덜 떨었다. 싫다. 너무나 끔찍하다.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여? 지연은 올라오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 막았다. 계속해서 덜덜덜.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는 지연의 어깨를 레이라가 부여잡았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도망가야 해."

"어, 어떻게……."

"정신 똑바로 차려."

"언니, 나, 나……, 살인자랑, 살고 있었……."


지연이 레이라를 보며 몸을 떨었다. 레이라가 말했다.


"내가 당분간 네 뒤를 봐줄게. 외국이라도 나가 있든가, 그도 아니면 네가 있던 고아원으로 잠시 돌아가. 그곳은 정말 외진 곳이니 잘 모를 테지."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죽을 각오로 도망쳐."

"모, 못할 것 같아.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는……."

"……."

"내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집착하는 걸."


안 그래도 그의 집착이 두려웠던 지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칠 수 있을까? 화를 내면 어쩌지? 죽이지는 않을까?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순간, 돌연 지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 사실 자신은 그의 아이를 가졌더랬다. 


'만일 도망치지 못한다면, 이 아이는 그이처럼 되는 건가?' 


온갖 더러운 것에 손을 대고,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미친 짓을, 이 아이도 하게 되는 건가?


"……."


그것만은,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지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종이와 펜으로 부리나케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지연이 정신없이 말했다.


"……나. 고아원으로 돌아갈게. 언니. 만약 내게 연락할 일이 생긴다면, 이곳으로 해줘."


지연이 적어 내린 것은 고아원의 주소와 전화번호였다. 지연은 그 종이를 레이라에게 건네며, 들고 왔던 가방을 들고 급히 집을 나섰다. 레이라는 갑자기 바삐 행동하는 지연의 손을 붙잡았다. 레이라가 놀라 말했다.


"얘, 침착하게 생각해!"

"지금, 지금 밖에 없어. 내가 그에게서 도망칠 시간은 지금 뿐이야. 운전기사에게 2시간 후에 돌아오라 했거든. 그가 오기 전에,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움직여야 해."


지연은 횡설수설하며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문득, 뒤를 돌아 말했다.


"언니. 언니도 조심해. 괜히 불똥이라도 튄다면……."

"그럴 리 없어. 난 일단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연락해 언니. 아니, 내가 먼저 연락할게."


지연은 레이라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달려 나갔고, 레이라는 급히 뛰쳐나가는 지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레이라는 자신의 앙상한 두 손을 맞잡았다. 맙소사. 우리 모두 잘못 엮인 것이다. 이게 다…….


'내 탓이야.' 


호텔 사업을 문제로 그와 손 잡은 자신의 탓이다. 그 때문에 남편을 잃고, 아끼던 동생이 그에게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 그는 뱀이다. 한 번 휘감은 먹이를 놓칠 리 없는 독사인 것이다. 레이라는 자신의 두 팔을 꽉 쥐었다.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새끼.'


감히 당신이 햇살을 원해? 그 황금빛을 원해?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뒷세계 사람이면 뒷세계 사람답게 지하의 퀴퀴한 곰팡내나 맡을 것이지. 

레이라는 지연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곧 굳게 닫았다. 레이라의 두 눈이 단단히 빛났다. 에이든은 지연을 쫓을 것이다. 불쌍한 지연이.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야 한다.


"하……!"


레이라는 에이든의 얼굴을 떠올리며 차게 웃었다. 햇빛을 가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그것은 손에 쥐어지지도, 담기지도 않는 것. 숲속 동화 같은 집에 가둬둔다 한들, 가둬질 리 없는 것이다. 

일단은……, 지연을 지켜야 했다. 레이라는 당장 전화기를 들어 타일러의 동료에게 연락했다. 그놈을 죽이지는 못 할지언정, 지연을 지켜주기는 해야겠다.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다. 그녀의 인생을 말아 먹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금방 연결된 통화음. 그것에 레이라는 슬픈 내색 따위 없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레이라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간에 배우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레이라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케니.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요."


레이라는 지연이 에이든에게서 잘 빠져나가기를 바라며, 핸드폰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

"……."


하지만 레이라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지연은 고아원으로 돌아가려던 버스 정류장에서 에이든을 다. 검은 세단에서 미끄러지듯 내린 에이든의 얼굴이 어쩐지 초조해 보인다. 


"……."

"……."


에이든이 지연에게 한 발짝 다가가자, 지연이 한 발짝 뒷걸음 친다. 에이든이 지연을 부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리자, 지연이 잔뜩 겁먹은 눈으로 움찔한다. 에이든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초조함을 느끼며 물었다.


"……안색이 왜 그래?"

"……."


지연은 에이든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몸만 떨었다. 저 큰 손. 저 커다란 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형부를 죽였다. 어디 형부뿐일까. 지연은 어쩐지 에이든의 손이 피칠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태껏 저런 손으로 날 사랑했던 것인가? 소름 끼친다. 천벌. 그래, 천벌을 받을 거다. 덜덜덜. 공포에 잠긴 지연에게 에이든이 다시 말했다.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 일단 집에 가자."

"시, 싫어……."

"왜 그래……."


에이든은 울상이 된 얼굴로 또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는 뒷걸음. 지연이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저, 저리가……!"

"무슨 말을 들었어."

"……."

"무슨 말을 들었냐고!"


손 틈 사이로,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에이든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괜히 주먹을 꽉 쥐었지만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멈추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소리치는 에이든의 모습에, 지연이 덜덜 떨며 말했다.


"다, 당신 때문이잖아……!"

"무엇이."

"당신이, 당신이……."

"그래, 내가 뭘."

"……사람을 죽였잖아."


지연의 커다란 두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당신이 사람을 죽였잖아. 그래서 그렇잖아. 그 피칠 된 손으로 날 사랑해서 그렇잖아. 당신이 너무 소름 끼쳐서 그렇잖아.

지연이 소리 죽여 중얼대는 소리에, 에이든은 넋을 잃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그래. 레이라. 결국 그 여자가 알아챈 것인가. 결국 그녀가 지연에게 말해버린 것인가. 에이든이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어?"

"……."

"레이라가 그렇게 말했냐고."


삼백안에 살기를 가득 담아 내뱉은 말에, 지연은 들고 있던 가방을 힘껏 집어던졌다. 그 작은 가방은 에이든의 가슴팍에 맞아 꽤 둔탁한 소리를 냈다. 지연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건들기만 해봐! 건들기만 해보라구……!"

"……."

"형부처럼 죽이기만 해봐. 나, 가만 있지 않을 거니까."

"……지연아."

"역겨워. 부르지 마. 보지 마. 싫어. 끔찍해."


지연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고, 온몸으로 저를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에이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햇살이, 사라지고 있었다. 


"……."


비록 사람 없는 거리라지만, 에이든은 그 공개된 공간에서 무릎을 꿇었다. 에이든의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오른다. 피도 눈물도 없다던 자신이지만, 그녀 앞에선 피도 눈물도 차고 넘쳐흐르고 만다. 에이든이 지연에게 빌었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미쳤어? 당신 미쳤어? 어떻게 사람을 감쪽같이 속여?"

"제발 가지 마. 이렇게 빌게."

"날 가지고 노니까 재밌었어? 그래? 사람을 얼마나 죽였어. 셀 수는 있니?"

"미안해,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용서를 구할 건, 내가 아니잖아."


지연이 자신의 앞에서 비는 에이든을 향해 표정 없이 말했다. 그러자 지연을 향해 빌던 에이든의 눈이 광기를 담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섬뜩하게 지연을 응시했다. 에이든이 말했다.


"……날 버리고 어디로 갈 셈이야."

"당신이 알 게 뭐야. 날 내버려 둬, 제발."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난 네가 있으면 안 돼."

"……갈 수 있을 줄 알고? 못 가. 넌, 절대로 못 가."


에이든이 입술을 씹으며 중얼거리자, 지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눈. 또 저 눈이다. 에이든이 때때로 집착을 나타낼 때면 떠오르는 눈. 지연이 다시금 몸을 떨며 말했다.


"……날 사랑한다며."

"그래. 그래서 이렇게 미쳤잖아."

"……놓아줘. 날 생각해줄 수 있잖아."

"그건 못 해. 그렇게는 못 해."


에이든은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얻은 황금빛인데, 햇빛인데, 온기인데. 이제 와서 놓아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에이든은 성큼성큼 걸어 지연의 손목을 잡아챘다. 


"못 가."

"왜 이래, 안 놔?"

"그래. 안 놔. 절대로."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 안정을 취하면 그녀는 괜찮아질 것이다. 에이든은 지연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세단을 향했다.


"싫어, 싫다니까……!"


지연이 바둥거리며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무지막지한 힘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에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 보는 남성. 꽤나 차려입은 그 남성은 에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그만하시죠."

"이 새끼는 뭐야."


에이든은 자신의 수행원들이 남자 하나 막지 못한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평온한 얼굴로 신분증을 꺼내어 에이든에게 보여주었다. 


"……."


정부 측 사람. 저 소속은 죽은 타일러가 속해 있던 단체였다. 그것을 확인한 에이든의 눈썹이 순간 일그러졌다. 남자가 말했다.


"여성 분을 놓아주시죠."

"당신 뭔데."

"지금 이성을 좀 잃으신 것 같은데, 우린 지금 당신을 봐주고 있는 겁니다."

"웃기는군. 잡아갈 수나 있나? 날 건드리려면 꽤 큰 각오가 필요할 텐데."

"하지만 당신도 우리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을 텐데요. 제대로 붙으면 그쪽은 와해 되고 말 겁니다. 지금은 그저, 그녀를 우리에게 인도하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죠. 그렇게만 해준다면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눈앞의 남자가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어쩐지 지연을 넘기기 전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에이든도 마찬가지. 지연을 넘길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에이든의 태도에,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은 지금 우리의 타깃 A로써, 총 5명의 저격수 눈에 들어있습니다. 저기랑 저기……, 그리고 또 저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5개의 건물들을 가리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 당신을 죽이는 것이 우리에겐 이롭죠. 당신에게 뒷돈 받아먹는 윗분들한테 좀 깨지고, 어쩌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다들 정의감은 투철한 사람들이라."

"……."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지금 죽을 것이냐. 아니면 그녀를 우리에게 넘겨줄 것이냐."

"……."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 오래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30초 드리죠."


눈앞의 남자는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자비 없이 내려가는 카운트. 에이든은 눈앞의 남자를 죽여버릴까 싶다가도,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아 제 입술만 씹어댔다. 


'어쩌지? 그녀를 넘겨야 하나? 그건 죽어도 싫은데.'


하지만 이대로 죽으면 개죽음이다. 일단은 살아야 했다. 그래.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그녀를 다시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에이든은 카운트를 딱 5초 남기고, 지연의 손목을 놓았다. 에이든이 말했다.


"……당신 얼굴. 절대 잊지 않겠어."

"영광이군요. 그리고 탁월한 선택입니다."

"……."

"아, 여기서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레이라를 건들 생각은 마시죠. 그녀는 우리의 보호 아래 있으니."

"……."

"그럼 이만."


눈앞의 남자는 매너 있게 인사한 뒤, 지연을 데리고 떠났다. 아. 자신의 태양이 사라졌다. 떠나버린 것이다. 어쩐지 지금, 굉장히 춥지 않나? 에이든은 조금 몸을 떨었다. 춥다. 햇살이 들지 않는다. 원래 이렇게 추웠던가. 에이든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게 모두 그 망할 여자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것을 빼앗은 것과 같았다. 그래.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잖아. 레이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죽이면 지연에게 미움받을 게 틀림 없지만, 그녀가 멀쩡히 숨 쉬고 사는 꼴은 못 보겠다. 망할 여자. 빌어먹을 여자.


"……."


지금은 건드리지 못 한다. 그래. 지금은 안 되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정부의 보호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이라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아마 짧으면 5년, 길어봐야 10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제 손으로 직접 죽일 것이다. 그 마녀는 반드시 죽이고 만다. 나의 햇빛을 훔쳐 갔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그렇게 에이든의 두 눈이 번뜩였다. 

독사는, 한 번 휘감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다.




* * * *




"……엄마!"


대본을 외우던 레이라의 품에, 작은 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까맣고 동그란 정수리. 아무리 밖에서 뛰어놀아도 좀처럼 타지 않는 하얀 피부. 고작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인데도 눈썹은 어찌 이리 곧고, 입술을 어찌 이리 붉은지.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아이가 엄마를 빼닮았다고. 하지만 다들 모른다. 이 아이가 웃을 때면, 제 아빠와 똑 닮았다는 것을. 레이라는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그 작은 머리에 입을 맞췄다. 세상에 엄마가 전부인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한다. 레이라가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석진이, 책은 다 읽었니?"

"네, 다 읽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던 타일러를 위해, 레이라는 아이에게 한국식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도 알았으면 좋으련만. 오늘 하루 책을 다 읽었다는 아이의 말에 레이라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래. 무엇을 읽었어?"

"해리포터!"

"마법사 이야기구나."

"맞아요. 해리포터는 영웅이에요."

"멋진 사람이네."

"근데 세상에 진짜 영웅이 있어요?"

"그럼, 있고말고."


석진이 묻는 말에,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는 아이의 고운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네 아빠가 영웅이었거든."

"정말?"

"그렇다니까."

"아쉽다."

"……."

"아빠가 있었으면, 나도 영웅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석진이 어쩐지 시무룩해 말하자, 레이라가 웃었다.


"우리 석진이한테도, 영웅이 나타날 거야."

"어떻게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영웅이 한 명쯤은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 석진이에게도 나타나지 않겠어?"


레이라의 말에 석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몇번이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던 레이라는, 어느새 조금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석진에게 말했다.


"그보다, 엄마가 외우라고 했던 건 기억하고 있니?"

"네, 기억해요."

"다시 한번 외어보렴."


레이라의 말에, 석진은 어딘가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줄줄이 외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렸을 적 지연이 머물렀다던 고아원의 주소와 전화번호. 레이라가 다시 한번 말했다.


"만약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경찰 아저씨에게 가서 그렇게 전해야 해.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알았지?"

"네."


레이라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석진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동안은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8년이 지나자 그것은 시들해졌다. 지난 8년 동안 에이든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그는 분명, 어딘가에서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그 집념. 요카난을 보는 살로메의 눈. 그는 한 번 담은 목표를 놓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얼마 전 지연이 말하길, 지연은 아직도 그의 집념에서 도망치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레이라는 만일의 수단으로 석진에게 고아원 주소를 줄줄 외우게 했다. 머리가 좋은 아이는 한번 외운 것을 잊지 않았다.


"……."


레이라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밤 9시 반. 레이라는 읽던 대본을 내려두고 석진을 안아 들었다. 아이는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 레이라는 석진을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함께 누웠다. 이 어린아이는 어둠만큼은 무서워하는지라, 항상 엄마와 함께 잠이 들었다. 레이라가 아이에게 말했다.


"눈을 뜨면 아침이겠네."

"어쩌면 꿈속일지도 몰라요."

"그래, 석진이 말이 맞네."


레이라는 석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진은 베개에 머리를 대면 곧 잠이 든다. 그리고 그건 레이라도 마찬가지. 여배우가 사는 넓은 집은 그렇게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한 번 잠이 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레이라는, 새벽 즈음에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왜인지 소름이 끼친 탓이다. 거짓말처럼 싸한 느낌. 이런 걸 사람의 직감이라 하는 걸까. 동물로서 버리지 못한 본능이 지나치게 섬뜩하다.


"……."


너무나 소름 끼치는 느낌에, 레이라는 몸을 뒤척이지도 못했다. 제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레이라의 직감을 확신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관자놀이에 차가운 금속이 닿아왔다. 자신의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울린다.


"그 동안. 잘 살았나 봅니다."

"……."

"당신과 같은 유명한 여배우의 집에 발을 디딜 수 있다니. 영광이군요, 레이라."


에이든의 목소리에, 레이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린다. 하지만 그녀는 거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제 옆에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잠들어 있었으니까. 공포에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레이라는 평소처럼 침대에서 우아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에이든."

"날 기억해주다니."

"당신을 어떻게 잊나요. 내 남편이 그 손에 죽었는데."


레이라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여배우의 얼굴에 공포라곤 없다. 언제나처럼 당찬 모습. 그것에 에이든은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다.


"레이라. 역시 당신은 소름 끼쳐."

"본인 얘기를 하는 건가요?"

"무엇이 가짜고, 무엇이 진짜인지. 전혀 알 수 없거든."

"당신의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옆에는, 아이?"

"……."


자신의 아이에게 시선을 돌리는 에이든을 향해, 레이라는 눈꼬리를 잔뜩 치켜세웠다. 그 모습에 에이든이 웃었다.


"이제야 당신의 진심을 보는 느낌이군."

"내 진심이 필요해?"

"전혀. 내가 원하는 건, 지연의 진심이지."

"맙소사."


지연을 원한다는 에이든의 말에, 레이라는 헛웃음을 쳤다. 레이라는 흉물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말했다.


"아직도 그 아이를……!"

"당신이 내게서 빼앗아 갔잖아."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요."

"그녀가 나에게서 도망치던 그 눈을 잊지 못하겠어. 아주 괴로워 미칠 지경이야.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 다시, 다시 데려와야 하거든."

"……."


여전히 지연에게 집착하는 그의 모습에, 레이라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레이라는 새벽녘에도 유독 붉은 입꼬리를 움직였다.


"당신. 살로메구나."

"……."

"당신의 그 집착이, 일그러진 애정이, 결국 지연이를 죽일 거야."


레이라의 말에 에이든의 이성이 끊겼고, 이성을 잃은 에이든은 레이라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내던졌다. 원목 서랍에 강하게 부딪힌 레이라는 등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크흣……!"


서랍 위에 있던 책이며 온갖 잡화들이 바닥에 요란스레 떨어지자 아이가 뒤척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척이던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졸린 눈을 한 아이는 바닥에 쓰러진 제 엄마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엄마?"


에이든은 석진을 바라봤다. 저런. 어쩜 저렇게 제 어미만 닮을 수 있는지. 에이든의 손이 석진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에 레이라가 에이든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가 에이든을 저지하기도 전에 그가 들고 있던 권총에서 두 번의 총성이 울렸다. 

난생처음 듣는 커다란 굉음. 무언가 터지는 소리에 석진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경악스러운 것은, 하나뿐인 엄마의 배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이었다.


"흐, 흐으, 으아아앙……."


놀람과 공포가 뒤섞인 아이는 뭣도 모르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에 에이든은 혀를 찼다.


"시끄럽군."

"아, 아이……, 아이는……."

"아이는 뭐. 설마 살려달란 말은 아니겠지."


레이라의 말에 에이든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권총을 들어 올려, 세 번의 총성을 울렸다. 또다시 터진 굉음. 아이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쯧……."


에이든은 그 요란한 비명 소리가 거슬려 아이의 입을 틀어 막았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울었다. 정말이지 레이라와 똑 닮았다. 소름이 끼치는군. 에이든은 작은 아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 아파아……."


바닥에 부딪힌 등이 아파 눈물이 나왔지만, 제 옆에 미동도 없이 누운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바닥에 흥건한 붉은색 웅덩이. 이게 뭐지? 모른다. 아이는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아저씨가 자길 죽일 거라고. 석진의 까만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


에이든은 소리 없이 우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순간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만일 지연과 함께 살고 있었다면, 자신도 아이가 있었을지 모르는데. 저 망할 여자 때문에 그조차도 이루지 못했다.


"……."


에이든은 바닥에 떨어진 화병을 주워들었다. 이런 조그만 아이에겐, 총알조차 아깝다. 


"……."


에이든이 삼백안을 번뜩이며 석진을 노려봤다. 맹수의 눈앞에 놓인 작은 소동물. 석진은 그에게 있어서 먹잇감이고 사냥감이었다. 그 작은 사냥감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곧이어 화병을 든 사냥꾼의 손이 높게 올라갔고, 어린 석진의 눈앞이 노랗게 번지기 시작했다. 


'무서워. 무서워 엄마. 엄마, 나 무서워……!'


그리고 마침내. 에이든은 석진을 향해 힘껏 화병을 던졌고, 석진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병이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챙그랑-.

아프다.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머리가 찢긴 아이는 그저 자신이 아프다는 것만을 인식하며 곧 의식을 잃었다. 


"……."


에이든은 피를 줄줄 흘리는 모자를 조금 바라보다,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레이라의 집을 나왔다. 푸른 새벽녘은 슬슬 아침이 되고 있었다. 이제야 속이 좀 후련하다. 에이든은 검을 세단에 몸을 밀어 넣으며, 손에 묻은 피를 손수건에 닦았다. 할 일을 끝냈으니 이젠 지연을 찾으러 가야지. 에이든은 그렇게 또다시. 자신의 햇빛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




* * * *




아파. 머리가 아파. 엄마, 나 너무 아파요. 석진은 몽롱한 정신으로 깨어나, 평소처럼 엄마를 찾았다.


"어, 엄마……."


하지만 부르고 불러도 엄마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엄마를 찾던 석진은 문득, 엄마가 제 눈앞에서 죽어가던 장면을 떠올렸다. 


"……."


어린아이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가 제게 당부했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경찰 아저씨에게 가서 그렇게 전해야 해.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알았지?"


경찰 아저씨……. 경찰 아저씨에게 가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석진은 미친 듯 욱신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를 향해 기어갔다. 작은 몸에서 많은 피를 흘린 아이는 걸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어지러워……, 너무 아파.'


석진은 제 엄마가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 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뿌옇게 변한 시야 사이로, 석진은 간신히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전화번호를 눌렀다.

주소와 함께 외웠던 전화번호. 석진은 그 전화번호가 어디의 전화번호인 줄도 모른 채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경찰의 짧은 911 보다도 엄마가 외우게 했던 그 번호가 더 선명했다. 

석진은 여전히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어쩐지 할머니 목소리 같다. 그런데 뭐, 누구면 어때. 석진은 엄마의 핸드폰에 대고, 딱 한 번의 목소리를 내었다.


"……도와주세요."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아팠다. 춥고. 어지럽고. 그냥 잠이 왔다. 그래서 석진은 잠이 들었다. 무언가 굉장히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겪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난 것만 같다.

그래서 기억하기 싫었다.


'그냥 모두 잊어버리고 잠이나 잤으면.'


그래서 석진은 자신의 바람대로 잠을 잤다. 정말이지 길고 긴 잠을. 그래. 꿈결에서 참 많은 것을 겪었지. 그 많은 것들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얼굴 모를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자주 들렸던 것만은 기억 난다. 그 아이는 항상 더듬더듬 책을 읽었다. 굉장히 서투른 영어. 하지만 그 아이가 읽어주는 동화내용은 좀 재밌던 것도 같다. 


'근데 난 더 자고 싶은데.'


저 아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저 목소리는 나를 더 자게 내버려 두지 않아. 그래서 석진은 아이의 목소리를 따라 잠에서 깼다. 


"……."


눈을 뜨니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게다가 머리는 아주 멍한 상태.


"……."


처음 보는 곳. 아니, 처음 보나? 모른다. 그때, 자신의 옆에서 꽤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일어났다."

"……."


석진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봤다. 또래 아이. 누구지? 몰라. 기억 안 난다니까. 제 옆에 앉은 아이는 굉장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인지. 아이가 물었다.


"괘, 괜찮아? 아. 내 말 알아들어?"

"……."


그럼 못 알아듣겠니? 석진은 차마 말할 기운도 없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머릿속에 안개가 잔뜩 낀 것 같다. 그런데 진짜 여긴 어딜까. 석진은 낯선 장소가 신기해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자신의 옆에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내, 내가 원장 수녀님 불러올게. 여, 여기 가만히 있어!" 


우당탕탕. 남자아이는 그렇게 소리치더니 소란스럽게 방을 떠났다. 그리고 한동안, 원장 수녀님을 찾는 아이의 소리가 석진의 귀에도 울려 퍼졌다. 어쩐지, 남자아이의 얼굴이 석진의 머릿속에 가득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석진의 첫 번째 기억.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자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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