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고갱 - 져가는 태양과 적막 사이에





 새카만 상주복을 입고 머리 위엔 하얀 핀 하나를 꽂은 채 말없이 서있으니, 기다렸단듯 문상객들이 들어왔다. 영화판과 대학에서 알게된 사람들은 전부 모인듯 했다. 끝이 없는 조문 행렬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옆에 서있던 세훈이 팔을 툭 친다. 

 며칠째 함께 밤을 새고 상주까지 서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그는 전혀 힘든 티를 내지도 않고 있었다. 괜찮아? 하고 그가 묻는다.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지금 괜찮을 수 있을까. 괜찮아도 되는걸까. 눈물 한 번 흐르지 않는 감정 상태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내가 괜찮은건지 안 괜찮은건지 알 수도 없었다. 아니, 모르겠다. 당최 모르겠다. 무얼 모르겠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 ...... "




 끊임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나온 말은, 참 좋은 분이셨는데, 였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당황한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닥쳐 어떤 말로 날 위로해야할지 고민이었다. 한참동안 조문객들을 받다 갑자기 핑,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나도 모르게 주저앉으려하니 오세훈이 빠르게 날 받아낸다. 




 " 너 안 괜찮아. "

 " 안 괜찮으면. "




 그가 안타까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동정 가득한 시선으로 날 무너뜨린다. 내 어깬 그렇게 짓눌려져 바닥 밑으로 꺼져간다.




 " 내가 너 보기 좋으라고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해? 하나 밖에 안 남은 엄마가 죽어서 이틀내리 서있고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잤어. 안 괜찮은 게 당연한 거 아냐? 너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 안 괜찮으니 나가서 잠이라도 자고 오라 하려 했어? 혈육은 난데, 네가 상주자리 지키고 싶었니? 네가 나야? 우리 엄마 자식이 너야? "

 " 그런 뜻이 아니잖아. "

 " 정신차려 오세훈. 우리 엄마 딸은 나야. 하나뿐인 자식 새낀 네가 아니라 나라고!! "




 밖에서 자리를 지키던 태영과 찬열이 달려와 그에게 달려들려는 날 다급히 붙잡았다. 왜 그래, 진짜! 너야말로 눈 돌았어. 정신차려!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태영의 말에도 난 폭발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별 거 아닌 한 마디에 불 같이 화를 내며 달려드는 내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대체 화가 난 이유가 뭘까.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을까. 아니, 오세훈에게 화가 난 게 맞긴할까? 화를 내야할 대상은 따로 있지 않을까? 그게 나이진 않을까? 난 지금 내게 화가 난 건 아닐까?





 " 나도 좀.. 욕심내보면 안 되냐? "

 " ...뭐? "

 " 누구보다 네 어머니 내 어머니처럼 모셨는데,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난데 좀 욕심내면 안 되냐? "

 " ...... "

 " 내가 뭐 호적을 옮겨달래? 나도 슬프니까, 나도 십몇 년 넘게 모셨던 친어머니 같은 분이니까, 같이 좀 슬퍼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소리지를 일이야? 야, 너만 슬픈 거 아니야. 나도 지금 미치겠어. 넌 멀리라도 가있었지, 난 고작 30분, 아니 10분이라도 일찍 갔으면 살릴 수 있는 거리였어. 나는 뭐 죄책감도 없는 줄 알아? "




 둘 다 그만해. 보는 눈 많으니 소란 피우지마.

 결국 중재에 나선 박찬열의 말에 난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잔뜩 상처받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오세훈은 그대로 뒤돌아 담배를 챙겨 나갔고, 난 바짝 마른 입술을 꾹 다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대로 파해지는 분위기에 씩씩대며 서있으니, 태영이 등을 토닥이며 달랜다. 이번엔 너가 먼저 사과해. 그리고 그때였다.




 " ...... "




 난 또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모든 과거는 다 잊어버렸단듯, 얼굴에 측은함을 가득 띄우며 분향실로 들어오는 아빠를 보자마자 태영의 옷깃을 꽉 쥐었다. 당황한 그는 날 힐끗 보더니, 곧 상황파악이 된 건지 오세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사진 쪽으로 꽃봉오리를 헌화하고서 조용히 절을 하던 아빠는 곧 내 앞으로 다가와 내게 묵념을 했다.




 " ...... "




 그러곤 더 가까이 다가와 날 위로하려 안으려던 그의 어깨를 탁, 잡았다. 당황한 아빠와 더 당황한 태영이 날 바라본다. 이미 그럴 줄 알았는지 아빠는 더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곤 내게 말한다.




 " 네 엄마가 꽃을 참 좋아했다. "

 " ...... "

 " 그래서 꽃봉오리도... "

 " 여기가 어디라고 와. "




 사람은 너무 절박하면 잠시 돌아버린다.

 그리곤 뒤늦게 깨닫는다.




 " 누구 좋으라고 여길 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아빠가 뭔데 여기까지 찾아와. "

 " 표자야. "

 " 왜 엄마 죽은 후에도 찾아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놔. 일부러 엿 먹으라고 이러는거야? 그래서 찾아온거야? 좋게 끝난 사이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리도 뻔뻔하게 찾아올 수 있어. 엄마는 아빠 얘기만 나오면 사지를 벌벌 떨었는데, 아빠는 정말 다 잊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멀쩡히 헌화하고 내게 말까지 거는구나. "

 " ...... "

 "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그 오랜 시간동안 연락 한 번이라도 한 적 있어? 아니, 못했겠지. 아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원래 자기한테 불리한 건 금방 잊어버리고, 자기가 맞닥뜨리기 껄끄러운 상황이면 먼저 나서지도 않는, 그런 쫄보였으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렇니. 인간이 어떻게 그래. 남편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그래!!!! "




 '아, 그런 말까진 해선 안 됐는데.' 하고 말이다.

 그 뉘우침을 깨닫기도 전에, 뒤늦게 분향실 안으로 뛰어들어온 오세훈이 날 있는힘껏 끌어안는다. 그의 등을 퍽퍽 때리며 더 크게 울부짖었다.




 " 왜 그랬어, 우리 엄마한테 왜 그랬어 !!! "




 다급히 태영의 배웅을 받으며 분향실을 떠나는 아빠를 보면서도 난 좀처럼 화를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오세훈의 등을 퍽! 퍽! 때리면서 터져나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마구 큰 소리를 냈다. 




 " 엄마는 연민이겠지. 아빠한테 느꼈던 감정이 동정이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그치만 난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니야!! 내 앞에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꼴 보이지마.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마, 혼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살다 나 모르게 가!! 꺼져버려, 꺼지라고!!! " 




 접객실에 있는 모두가 쳐다보는데도 난 멈추지 않았다. 오세훈은 그런 내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지 단단히 끌어안으며 똑같은 말만 뒤풀이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난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삼일차 새벽에 입관식에 들어간 건 나와 오세훈이었다. 둘이 나란히 서서,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라는 장의사의 말에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 가란 말도, 잘 살아가겠단 흔한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내일이면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우리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운구행렬 가장 앞에서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 차에 타는데, 이쯤되면 눈물이 날 법도 한데도 여전히 화만 끓어오를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크게 슬프지도 않았다. 아니, 슬픈 것 같지 않았다. 이게 슬픈건가. 이 정도 슬픈거면 울어야 하나. 별 것 아닌 상업영화에서도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왜이리도 눈물이 안 나는지. 드디어 미친건가 싶었다.

 화장을 할 때도 울지 않았다. 상을 치뤄본 이들의 말론 보통 화장할 때 울음이 터진다는데 난 여전히 울지 못했다. 억지로 눈물을 짜려해도 눈가에 살짝 젖을 뿐, 함께 온 이들처럼 목놓아 울지 못했다. 옆에 있던 영은 그저 멀뚱히 서서 화장되는 관을 바라보는 날 꽉 안아주었다. 너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울지 못하는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 옛날에, 아주 옛날에. "




 화장터로 가는 동안 하늘 가득 꼈던 먹구름이, 돌아오는 길엔 거의 다 개어 마알간 구름들이 우릴 반겼다. 옆에서 운전을 하던 오세훈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 우리 엄마 초등학생 때, 할머니랑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대.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드리는 할머니 옆에서 엄마는 할머니가 잠깐 빼놓은 금반지를 갖고 놀았나봐. "

 " ...... "

 " 그런데 그 반지를 잊어버린거야. 난리가 난 거지. 할머니는 빨래도 다 못하고 엄마랑 같이 한참동안 물 속만 살폈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길래, 할머니는 됐다, 하고 다시 엄마랑 집에 왔대. 근데 엄마는 그 반지가 자꾸 생각나는거야. 결혼반지였거든. 자기 때문에 잃어버렸으니 잠이 오겠나. "

 " ..그래서. "

 " 그 다음날 아침에 혼자 찾으러 간 거지. 잃어버렸던 자리에서 혼자 다 젖어가지곤 찾아대는데, 물 속에서 뭐 하나가 반짝거리더래. 그래서 그걸 꺼냈더니 할머니 반지인거야. "

 " 다행이네. "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생각이 나는지. 




 " 그러곤 집에 와서 할머니한테, 엄마 나 반지 찾았어요, 하면서 보여주니까 할머니가 그 반지를 보자마자 별말 없이 엄마를 데리고가선 샤워를 시키더래. 할머니가 뿌려주는 물로 머리를 막 감는데, 자꾸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거야. 그래서 뭔 소리나, 하고 봤더니 할머니가 우는거야. 엄마는 당황해서, 엄마 왜 울어요, 물어보니 할머니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러더래. 너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 물에 네 혼자 들어갔냐. "

 " ...... "

 " 할아버지 탄광 망해서 오밤중에 도망나왔을 때도 울지 않던 양반이 고작 그거 하나로 우니까, 엄마도 눈물이 막 나더래. 그걸 나한테 말해주는데, 그냥.. 모르겠어, 마음이 좀 그랬어. "

 " ...... "

 " 마음이 그랬어.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데, 마음이 막.. 막 그랬어. "




 그때 할머니가 왜 울었는지 이제야 알겠다던 엄마의 푸념이, 그 마음이 어떤 의미였는지 나 역시도 이제야 알 것 같아 속이 쓰리다. 목구멍이 아프고 두 눈이 아프고 손발이 아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당최 무슨 짓을 해야할지 모를만큼 마음이 그랬다. 그게 사랑인 것 같았다.




 " 고생 많았어. "

 " 너 밥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

 " 괜... "

 " 오늘 자고 가려는 거, 너 혼자 있고 싶을까봐 참은거니 말 들어. "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벙쩌 있었다. 오세훈은 근처 식당으로 가 간단한 도시락을 사왔고, 난 그런 그가 바로 앞에 수저를 다 놓아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 지금 혼자 있고싶은데. "

 " 먹는 것만 보고 갈게. "

 " ...... "

 " 나 가고나서 버려도 되니 지금은 한 숟갈만 떠. "




 결국 수저를 들어 한 숟갈 가득 입에 넣었다. 우적우적 씹으며 앞에 놓인 도시락만 바라보는데, 이를 지켜보던 오세훈이 물 한 잔을 내게 떠준다. 물도 마셔. 난 다시 한 번 크게 퍼 입 안 가득 넣었다. 그리고 그걸 박박 긁어 먹기 시작했다. 도시락 통이 뭉개질 때까지 긁고 또 긁어, 며칠내내 밥을 먹지 못한 거렁뱅이처럼 미친듯이 먹어댔다. 다 씹지도 못한 채 꿀떡꿀떡 삼키며, 목이 막히는데도 물을 마시지 못하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오세훈은 그저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난 보란듯이 꾸역꾸역 삼켜 도시락을 비워냈다. 그러곤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밀려오는 토기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 우웩, 웩!! 커헉..! "




 다급히 따라온 그는, 변기를 부여잡으며 토하고 있는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왜 그랬냔 핀잔도, 괜찮냔 걱정도 없이 그저 내 등만 툭툭 때려주었다. 그제야 이제 내 곁에 엄마는 없단 현실이 강하게 날 치고 지나간다.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말없이 가슴만 퍽퍽 내리쳤다. 가슴팍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때렸다. 

 그러지마, 이러지마 자야야. 이러면 안 돼.

 오세훈은 함께 주저앉아 내가 날 때리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난 온 몸이 터져라 마구 때려댔다. 그냥 막 때렸다. 이대로 내 주먹에 맞아 부서져라 때리는 걸 그가 억지로 말리며 울었다. 울지 못해서, 눈물이 나질 않아, 두 눈이 벌게진 채 악에 받쳐 소리지른 날 대신해, 그가 꺽꺽대며 울어주었다. 































 거즌 한 달이 지났다. 평소 절에 공양을 많이 해왔던 터라 49재는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이 해주기로 했다. 다들 갖은 영화촬영으로 바빴기에, 49재 막재 때는 조촐하게 자야와 세훈만 참석했다. 청명한 목탁소리와 함께 등 뒤로 시원한 산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49재가 있기 전까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살았다. 혼자 있을 때의 적막을 견디지 못해, 작업실에서 먹고 잤으며 엄마가 있던 집엔 자주 들어갈 수도 없었다. 온 집안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혼자 멍하니 앉아있다보면 문득 그가 해줬던 얘기들이 떠올라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 달을 참지 못한 채 다른 집으로 이사를 결정했고, 바로 엊그제 이삿짐을 완전히 옮겼다.




 " 이제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 드리세요. "




 절을 올린 후 가지런히 합장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옆에 있던 오세훈도 조용히 절을 올린다.




 " ...... "




 49재 지나서도 못 놔주면 영영 못 떠난다는데, 내가 언제 완전히 엄마를 놔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직은 엄마 없는 세상이 무섭고 쓸쓸하고 막막하고 그래. 눈물도 안 나는 걸 보니, 여전히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나봐.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한테 잘해드린 기억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왜그리 모질고 무뚝뚝했나 싶어서, 나 스스로 엄마한테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 혹여나, 이생과 똑같이 다음 생애에서 또 만나거든, 그땐 마주치지 말자. 좋은 사람 만나 평생 사랑받으며, 착한 아이 낳아 행복하게 살아. 나쁜 것 안 좋은 건 내가 다 이고 갈테니, 엄마는 다 잊고 그렇게 살아가.

 그제야 눈에서 무언가 주륵 흘러내린다. 합장을 한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는 날 바라보며, 오세훈은 다 괜찮아질 거라며 위로했다.




 잘 가, 엄마.

 엄마를 만난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내게 축복이야.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갔다. 하늘도 멀쩡하고 주변 이들도 여전했다. 이제 엄마가 없단 걸 빼곤 기가 찰만큼 모든 게 그대로다. 평소와 같이 자주 가던 카페 창가에 앉아, 이번에 컴백한 지수의 무대 영상을 돌려보던 중이었다. 

 여전히 무대 위에선 당당하고 힘이 넘치는 아이였다. 더욱 매끄러워진 춤선과 나아진 노래실력으로 그는 요새 걸그룹 중 상위 클래스의 꼭대기를 달리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박찬열이 요즘은 오 대표보다 김지수가 더 잘나간다며, 다시 잡아야하는 게 아니냐 농담까지 할만큼, 지수는 아이돌 중 탑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거침없이 무대를 장악하는 영상을 바라보다, 문득 창밖으로 고갤 돌렸다. 때마침 바로 옆에 있는 스포츠 매장 앞으로 검은 밴 하나가 멈춰선다. 누가 내리나 고개를 잔뜩 빼내 지켜보니, 문이 열린 차 안에서 익숙한 자가 폴짝 뛰어내렸다.




 " ...... "




 여태 그 스포츠 브랜드 모델로 활동중이었는지, 빨갛게 머릴 염색한 지수가 팬사인회를 위해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괜한 반가움도 잠시 유리창 사이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 당장 반갑다며 손을 흔들어야할지, 전화를 하겠다며 휴대폰을 가리켜야할지 고민이었다.




 " ....... "

 " ....... "




 하지만 이내 먼저 고갤 돌려버리는 그를 보며, 난 뒤늦게나마 우리 둘의 명시된 관계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완벽하게 이별을 맞이한 전연인 관계.

 그것이 우리 둘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였다.




 " ...... "




 미련없이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나 역시도 마침 그의 파트가 나오던 무대 영상을 꺼버렸다. 떠나보내야할 사람이 깨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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