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열은 저를 아씨라 부르는 어미의 뒤를 쫓는다. 어젯밤 내리던 비가 바싹 말라 발걸음마다 흙이 지겼다. 찬열은 어미가 일으키는 흙바람에 치마를 조금 더 올려잡고 물 위에 뜬 수련잎을 건너듯 걷는다. 훤칠한 키와 외모의 어염집 자식은 내내 길거리의 주목을 받아들었다. 고운 치맛자락과 깨끗한 피부는 길을 걸어가던 남정들이 멈추어 서서 뒤돌아볼 만큼 아름다웠고, 덕분에 속이 비칠듯한 비단으로 가리운 목의 뼛조각이라던가, 펑퍼짐한 치마 속의 사정 같은 것들은 우아한 손끝과 하얀 목덜미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쉬이 벗어났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몸. 찬열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연한 연지색이 든 분이 짙게 발린 눈꺼풀은 향내가 풍기는 무당집 안으로 들어서고나서야 뜨인다.

찬열의 앞에 선 어미는 웃돈을 잔뜩 얹어주고 단독으로 잡은 방으로 미끄러지듯 뛰어들어간다. 박이 깨지는듯한 목소리가 듣기싫을만큼 낡아있었다. 한 때 궁녀라는 자도 저렇게 천해질 수 있구나. 조신하게 문 밖에 서있던 찬열은 눈 앞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눈을 감았다. 곧 엽전이 쩔렁이는 소리와 어미가 장판에 무릎을 꿇어앉는 소리가 들린다. 미신은 질색인데. 그리고.

"밖에 선 오얏은 들어오질 않고 뭘 하는고?"

곧 날카로운 무당의 목소리가 찬열에게 꽂혀든다. 사납게 돌아간 시선이 지체없이 닫힌 문의 창호지로 박혀들었다.

"천운이다. 도리가 있겠느냐. 들거라."

탁. 방금 들린 말을 실감하지 못해 멍하니 서있던 사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틈으로 이젠 울며 엎드려 절하는 제 어미와, 부채를 펴든 짙은 눈가의 무당이 비친다. 찬열은 신발을 벗고 대청으로 올라섰다. 곧 문은 닫혀들고, 담장 안을 기웃대던 새는 퍼득이며 날아가버리고 만다.


-


궁전 안은 크고 작은 피바람이 쉴새없이 몰아치는 전쟁터와 같았다. 중전이 낳은 아기의 성별에 따라 그 아기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은 예사였고, 그 전에도 아기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그 아기를 밴 여인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중전 조씨가 밴 아기가 사실은 세자가 아니라 공주라는 무당의 말에 두 사람의 인생이 섞여든다.


'알아보라 명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춘분날에 승은을 입은 궁녀가 밴 아기가 사내라 하옵니다.'
'춘분날이란 말이지.'
'예. 거처하는 곳을 알아두었습니다.'
'데려오거라.'


그리고 세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후의 새벽, 궁녀 하나는 중전의 씨를 박 속에 담아 안고 궁을 나가게된다. 제 씨앗이 아닌 아기를 안은 여인이 처음으로 운 것은 중전이 준비해준 집 안에 들어있던 수많은 패물과 돈이 쌓인 대청을 보고나서였다.

'한낱 궁녀가 낳은 사내는 왕이 되지 못한다.'
'...'
'나는 네 아들을 왕으로 만들 것이다.'
'하오나,'
'내 아이를 데리고 떠나라. 평생을 그 아이의 은혜를 보며 살게 해줄 것이니.'
'중전마마.'
'승낙하지 않는다면, 네 아이와 너는 우물 속에서 발견되고 말 것 이다.'

매몰찼던 중전, 그녀가 준비한 대궐같은 집에 누워 새근새근 잠에 든 황자. 궁녀 박씨는 아이의 보를 들추어보고 황급히 그 몸을 덮었다. 왕자 이 열은 그렇게 다른 씨가 되었고, 본디 왕실의 적자인 열은 장대한 기골은 아니나 분명 여자의 것도 아닌 몸을 하고서 찬열이라는 이름을 얻고, 성씨 박을 얻었다.


-


"..."

"궁에 있어야 할 사내가 어찌하여 이런 곳에 있느뇨?"
"말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이씨라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일테고 말이다."
"무엄ㅎ,"

"닥치거라."

됐고. 궁으로 들어갈 테냐. 무당은 어미를 눈치를 주어 내보내고 열을 독대했다. 목덜미를 잡아 목젖을 만져본 후로는 앞에 앉은 탁상까지 치우고 날카로이 말한다. 그녀는 열에게 궁으로 들 것을 권했다. 사대부 중에 인물이 하나 있더구나. 나라의 판세가 바뀔 것이다. 어떠냐. 네 자리를 되찾아볼 것이냐?

"처음 본 자에게 왜 이러시는겝니까."
"천지신명의 말씀이 있었다."

내 굴로 기어들어오는 오얏이 하나 있을것이라셨다. 그래서, 이 열. 어찌할것이냐? 열은 삽시간에 들이치는 상황이 껄끄러워 소매속에 가리워진 주먹을 두어번 쥐어보았다. 붉은 색 곤룡포가 제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2.

열은 살면서 한 번도 사대부와 엮일 일이 없었다. 비단 중전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인은 이름을 빼앗긴 귀족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어염집의 무난한 딸로, 호적상의 아들로 살아가면 됐기 때문이다. 안전하고 또 평범하게.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디 자신은 왕족. 핏줄을 타고 흘러들어온 재능 덕에 글에 대한 열정도 있었으나, 서당은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여자라서. 아니, 여자의 형상을 하고 여자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동네 서당의 변변찮은 남자아이들도 본 적이 없는 열이 그 어렵다는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들어간 인재人材를 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안녕하시외까."

"…."

"도경수라 하오."

"이 열이라 합니다."

"내 앞에서까지 여식의 말투를 쓸 필요는 없소."



그리고 오늘 처음 본 사대부의 자식. 벌써 흉배를 단 도경수는, 말하자면 호랑이같은 남자였다. 그의 기백이라는 것은 쌍학 흉배와 홍색 관복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눈빛, 말투 하나, 숨을 쉬고 걸음을 옮기는 것 하나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열도 왕족이라곤 하나 핏줄 속에 든 혈청만으로는 사대부의 자식같은 기품이 새겨질 수는 없었고, 때문에 본인도 모를 압박감에 초조해하는 기색을 숨기질 못했다.



"보아하니 글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듯 하고."

"…."

"아니오?"

"맞습니다."

"흐음, 나라를 바꾸려면 당신을 먼저 바꾸어야 쓰겠군."



비죽 웃는 얼굴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띄고있었음에도 얼굴 한 번 붉히지 못한 건 필시 그 때문이었으리라. 본능적인 죄책감, 열등감이라던가 하는 것들. 이것부터 떼고 오라며 조롱조로 던져주는 책이 손때가 묻어 까맣게 낡아있었다. 책의 제목을 읽는 손에 두껍게 핏줄이 올라왔다. 천자문.


열은 그 날, 아주 낡아빠진 그 책을 들고 집에 가 많이도 울었다. 오묘한 제 표정을 굽어살펴보던 도씨가 신하를 불러 집에 보내던 그 순간까지도 우겨진 책에서 힘을 뺄 수 가 없었다. 모멸감이 사무친다. 소학까지는 우습게 떼던 여덟 살의 자신이 꺼벙한 표정으로 스물 셋의 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륵. 다시 눈물이 흘렀다.



-



"견문넓기로는 나라에서 손을꼽는 문관이 무당 노인네를 부르기엔, 자네 나이도 꽤 되지 않았는가?"

"국모가 무당 나부랭이를 끼고 도는 시국에."

"얌통머리 하곤. 역모ㄹ,"


"쯧. 신의 말씀을 받는다는 그 머리가 아깝지 않은가보군."

"……고얀."

"됐고. 도대체 그 이 열, 아니. 그 요사스러운 사내는 뭐요."



일없이 앞에 놓인 잔만 만지작대던 무당이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가 정말 왕족이 맞긴 하오? 배운거라곤 하나 없어보이던데. 경박한 말투에 설핏 미간을 찌푸린 무당 조씨는 이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도씨가문이 날고 기어도 이 나라 아래서 핏줄보다 더한 능력은 없지않은가. 지금 세자 자리에 앉은 이 열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 처럼 말일세. 저 아이는 옥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 난 아이일세. 기껏해야 신하밖에 못 될 자가 함부로 괄시할 인물이 아니란 소리지. 적어도 당신이 거사를 치를 의사가 있다면 말일세. 갈수록 비난조인 말에 도씨도 점점 인상을 찌푸렸다. 호랑이인 줄 알고 보석을 데리고 왔더니 이거야 원. 잔챙이였구만.



"이보게, 도씨 자네."

"……."

"무당 나부랭이가 가져온 게 언제나 부적일줄로만 아는가?"

"…."

"가끔은 그게 세기의 명약이자, 위대한 유산일 수도 있을줄로 아뢰오."



당신이 부리는 건 자존심도, 객기도 아닐세. 어리석음이지. 무례한 도씨의 언행에 끝끝내 마음이 상했던 조씨는 이내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냉한 온기가 감도는 방 안. 도경수는 주먹을 맞대고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거사라 하여 인물들만 엮여올 줄 알았더니 웬 잔챙이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라질것들. 낮게 욕을 씹는 음성이 섬뜩했다.




3.

솔직히 말해서, 도경수는 이 열이 소름이 끼칠만큼 싫었다.


사내의 몸을 하고 여장을 한 자라니. 다시 없을 기괴한 이야기이며 솔직히 아무리 왕족이라 하여도 그런, 망측한 일을 행하고 다닌 사람은 제 옆에 아무도 없었다. 있어서도 안되었다. 이야기의 질 자체가 낮았기 때문이다. 이 열은, 그러니까, 양민들에 입에서 우스개 소리로나 나올만한 자였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주리가 틀려 죽을만한 그런 자였단 말이다. 그만치 해괴한 행로를 걸어온 자를 본인의 선군으로. 왕으로 모셔야한다니. 경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사대부로써 자라온 지난날에 먹칠을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거사에 걱정이 먼저 깃들었다. 과연 괜찮을 것인가.


그가 왕이 된 뒤에 이 열의 예전 행색이 퍼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매일 밤 경수의 뇌리를 옭아매는 걱정이었다. 만약 열의 이야기가 궐 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제 거사도 목숨도 정치를 향한 꿈도 모두 끝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봉기와 시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백성에게 왕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건 치명적인 것이었다. 시행되는 모든 정책과 본인이 할 정치에 사사건건 걸림돌이 될 것임을 어림짐작으로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내가 어찌 이 열을 살가이 대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나 온갖 생각이 몰아치는 그 순간에도 알았다. 본인이 이러한 행동을 나중에 크게 후회하리란 것을. 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순간부터 후회는 시작되었으나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제 치기가 불러온 불찰이었다.

그리고 경수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를 몰랐다. 모른다기보단… 제 앞에 달려있는 흉배를 숙이기 싫어 뻗대는 것에 가까웠다.


유명한 사대부의 집안, 착실한 대목으로 자라온 경수는 제 실수에 유연치 못했다. 어찌해야할것인가. 머리가 하루종일 아팠다. 항상 중용을 유지해야하는 신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하는 것 조차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요 며칠 새 눈에 띄게 꺼슬한 피부를 쓸어내리며 몰래 한숨을 내쉬는 것 밖엔.


"오늘은 가 보았느냐."

"예에.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허, 이것 참..."

"서신이라도 보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대감."

"일단 물러가있거라."

"예."


그래서. 그 뒤로 어찌되었느냐고? 뻔하지 않은가. 경수가 계획하는 거사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실의 핏줄이 필요했고, 운좋게 얻게 된 그 핏줄의 마음을 편찮게 했으니 본인이 숙이는 수 밖에는. 경수는 열과 무당에게 여러번 사람을 보냈다. 그것도 제 성씨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경로를 우회해가며.


그러나 그 망할 무당은 제 법당으로 돌아간 뒤에 기가 살아선 경수가 사람을 보내는 족족 돌려보냈다. 어디 이따위 것들로 나와 흥정하려드느냐. 전해오는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거사를 계획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본인이 슬슬 불안해지던 차였고, 본인이 직접 갈 것 또한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열은.


열은 그 이후로 통 볼 수 없었다. 제가 책을 던지고, 그 책을 빤히 내려다보다 눈을 적시고 돌아간 그 날. 경수는 그 이후로 열의 붉은 치맛자락과 손때가 묻은 천자문 책 같은 것들을 시시때때로 기억해냈다. 그 새빨간 치맛자락이 머릿속에 들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어쩔 수 없는 핏줄을 앞에 두었다는 열등감이 가시고 나니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핏줄이 다른 사내. 내가 시국을 바꾸어낸다면 왕의 자리에 앉아야 할 남자. 영민한 경수는 열이 보이지 않은지 꼭 일주일 만에 깨달았다. 본인이 해야할 일들을, 그리고 그의 과거를 숨기고 또 재창조 해낼 방법들을.


생각이 정리되던 날, 경수는 열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소매속에는 본인의 사죄의-본인을 변명하는 것에 더 가까운-뜻을 담은 편지를 담은 채. 그리고 답신을 기다린지 꼭 삼 일 만에, 열은 경수를 찾아왔다.



"안녕하시외까."

"아."

"이 열이오."

"일단 앉으시오."



그러니까... 남자의 복식으로.




4.

어인 일로 찾아오신 것이오. 여인의 복장을 거둔 열의 기골은 꽤나 장대했다. 경수는 달무리가 짙은 밤 찾아온 열의 분위기에 눌려 자리 안내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선 복잡한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사람의 품격이란 단시간에 바뀔 수 없는 것이라 했거늘 이 자는 어찌하여. 본인을 조롱하던 무당의 음성이 재차 머릿속을 울렸고, 뒤에서 본인을 따라오는 이 열의 느긋한 발걸음이 본인의 발꿈치께에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인편에 서신을 보내시었길래 염치불구하고 찾아봬었소."

"아."

"소인이 보고 배운 것이 없어 그릇이 작소."

"아니외다. 과인이 모자라,"

"그런데."

"……."


"거사라는 것에 있어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이 맞소?"


 늦은 밤임에도 하녀를 시켜 술상을 냈다. 본인이 지은죄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손님 대접에 대한 예의일 뿐인지, 경수는 청에서 넘어왔다는 귀한 술과 안주를 냈다. 이 열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잔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경수는 눈을 내리 깔고 가만히 앉아있는 열의 낯짝을 보며 입안이 깔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자는 대관절 이 오밤중에 여기를 왜 찾아왔단 말인가. 양반의 본분을 잊고 왜 찾아왔냐며 닦달을 하기 직전까지 열이 채인 시점에, 그제야 한 잔을 제대로 받은 이 열이 본인이 찾아온 연유를 설명했다. 인사치레라도 그 말을 받아쳐주려는 찰나, 제 말을 뚝 분지르는 무례하기 짝이없는 말본새하며 제대로 다듬어지지않은 말투같은 것들을 한심스러웠다. 다시 세모꼴로 뜨인 눈으로 열을 바라보았을 때,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한 열이 경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아프게 후벼왔다.


"……."

"아무리 봐도 도 공의 편지는, 어린 아이들이 쓰던 반성문 같았소."

"허."

"그 거사라는 것을, 누가 계획하는 것이오."

"나일세."

"그래서 그렇게 무시하는 한낱 무당에게 나를 소개받았는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공이 설명해주는 것에 따라 난 관아에 갈지 도 공의 주변에 남을지를 결정해야겠지. 마지막으로 묻겠소. 이건 미천한 내가 도 공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요.


"왜 나를 찾았소?"


난 조선에서 제일가는 선비라는 당신이 왜 한낱 무당에게 그리 끌려다니는지를 알아야겠네.



-



열이 경수에게 부당하게 조롱을 당했던 그 날 이후로, 꼭 보름이 지나던 날 밤에 제 집 마당으로 끼어든 서신을 하나 받았다. 도읍 도(都)가 아닌 섬 도(島) 자 하나가 겉에 무성의하게 적혀있던 그건 경수가 열에게 지난날의 본인의 과오에 대해 변명하기 위한 서신이었다. 사과하는 듯한 태도는 분명히 취하고 있지만 끝까지 제 앞에서 미안하다고 제대로 굽히지는 않는 태도가 기개인지 객기인지 헷갈렸다. 어찌 거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영리한 선비가 이 정도 그릇 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본인이 입고있던 여식의 복식을 조롱하듯이 쳐다보던 그 눈빛과 재차 편지의 내용이 겹쳤다. 본인이 왕실의 후손이라는 것도 들켰고, 무려 사대부의 집안에 출입했으니 거사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무슨 일이 나도 날 터였다. 열은 본인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꼭두새벽이 되도록 도 공의 편지를 밤새도록 반복하여 읽었다. 건방지게도 한숨이 나올 즈음에는 닭이 홰를 쳤고, 그 때부터는 열도 모든 것을 접고 일어나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물을 데우는 등 평소의 생활을 시작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들은 산란히 눈 앞을 떠다니며 열을 괴롭게 했다. 도경수라는 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그 자가 거사를 계획하는 것이 맞는지, 아무리 벌레만도 못한 내 목숨이라지만 말도 안되는 일에 휘말려 역적으로 죽고 말는지. 본인의 목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에 걸리는 것은 어머니였다. 친아들이 아니라지만, 수태한 자식을 빼앗기고 어거지로 나를 키우게 된 저 여자를 내가 끝까지 도랑창에 처박아야하는가. 효도를 하지는 못해도 폐는 끼칠 수 없어 열은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명을 써서는 안됐고, 본인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뒤늦게 찾아든 이성이었다. 경수의 당당한 기품에 홀려 감고 있던 눈을 그가 그의 바닥으로 하여금 다시 깨워낸 것 같았다.


"아씨."

"어머니, 일어나셨습니까."

"왜 이리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잡념이 떨쳐지지 않는 바람에…."

"어미라고 이 곳에 앉아있는 제가 아씨에게 어리석게 굴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찬열의 볼을 쓰다듬었다. 잘생긴 얼굴이 다 상하였습니다, 아씨. 과분한 일을 떠안게 되어버린 본인의 양자에게 미안해 어쩔줄을 모르는 그 늘그막한 얼굴은 찬열을 슬프게했고, 곧 목구멍에 자갈이 채이는 듯 깔깔해져왔다. 찬열은 황급히 제 뺨에 붙은 손을 잡아떼어내고 데워온 물을 방 안에 들여놓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미는 그 물 대야를 양손으로 잡고 찬열을 바라보았다. 찬열은 그 퀘퀘한 방과 제 어미의 손때가 묻은 무명옷, 김이 피는 대야가 너무 슬퍼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미는 얼굴을 가리고 우는 찬열의 손을 잡아 따뜻한 물을 적셔주었다. 해도 채 뜨지않은 추운 겨울의 아침, 찬열은 손수 세수洗手를 시켜주는 그 어미의 손이 애달파 내도록 울었다. 죽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이 마음에 단단히 스미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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