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은 유하의 눈치를 살폈다.

드…들켰다.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유하 선배 원래 눈치 없는데 오늘은 예리하네. 한결은 키스만 해도 소원이 없다 싶었는데 키스하니 더한 게 하고 싶었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었다.

유하가 한결의 복근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복근 그냥 자랑하려고 만든 거 맞네. 난 또 다른 쓰임새가 있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아…. 이거요? 이건 말이죠. 아, 장식! 장식용이예요. 일종의 무늬죠. 언젠가 쓰일 날이 있겠죠. 신경 쓰지 마요. 아하하핫.”

한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손사래를 치며 유하의 말에 억지로 동의했다.

쓰임새가 있는데 킵해 놨다가 나중에 쓸 거예요. 나중에 선배도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한결은 급한데 자신과 달리 여유로운 유하가 얄미웠다. 다른 여자들은 저랑 자고 싶어서 환장하는데 유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유하가 한결을 보며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결이 아까부터 묘하게 불안해 보였는데 분명히 뭔가 노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 마음을 내려놓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어휴….

“자꾸만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어요.”

한결이 유하의 금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실컷 봐. 이제 말만 꺼내면 자동으로 닭살이 돋는다.”

“그래요? 실망. 사실 다 마음속에서 늘 하던 말인데. 그렇게 닭살이 돋아요?”

한결은 얼굴이 빨개져서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럼. 계속 마음속으로만 해줘.”

유하는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한결이 유하의 볼에 뽀뽀했다.

“솔직한 모습 너무 귀여워요. 쪽.”

“어후. 그만 좀 하자.”

유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축축한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한결아, 침 범벅이다.

 

*

 

엠티가 끝나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한결은 2층에서 샤워를 하고 내려왔다. 1층에서 유하는 아직도 샤워하는 듯했다. 한결은 홀린 듯 유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엉망진창이네.”

한결은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들을 대충 정리했다. 유하는 외모는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데 의외로 정리 정돈을 잘 못했다. 정리 정돈 하는 걸 좋아하는 한결은 유하의 이런 모습까지 사랑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유하에게 도움이 되어서 기뻤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하 한정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더럽다며 진작 손절 했을 것이다.

한결은 유하의 침대에 누워보았다. 보통은 유하의 냄새만 맡고 유하가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일부러 자리를 비켰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 당당한 애인으로서 꺼릴 길게 없었다. 불법이 아니었다.

“힝. 언제 오려나. 이렇게 누워서 기다리는데 안 오니깐 심심하다.”

한결은 좀 전까지 같이 차 타고 유하와 함께 있었는데 눈에서 안 보이니깐 또 보고 싶었다.

나 완전 중증이야. 미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서 히죽 웃으면서 유하의 침대 끝에서 끝으로 떼굴떼굴 굴렀다.

“영역 표시해야지.”

왠지 모르게 자신의 냄새를 묻혀두고 싶은 한결이었다. 수컷의 본능이었다.

철컥.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결이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유하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얹고 방으로 들어왔다. 촉촉하게 젖은 뽀얀 피부와 젖어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금발 머리카락이 섹시했다. 한결은 이제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그 모습이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갖고 싶어요. 선배의 모든 것을.

한결은 유하의 침대에 베개를 베고 누워서 여유롭게 씩 웃으며 한 손으로 바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어서 와요. 기다렸어요.”

자기. 아직은 마음속으로만 해야지.

한결은 유혹하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섹시한 눈빛을 발사했다. 혀를 살짝 내미는 것도 있지 않았다.

“추룹.”

“어. 뭐야?”

유하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 침대에서 뭐해? 그 능글맞은 웃음은 또 뭐고.”

“아잇. 다 알면서 그래요.”

한결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일어나. 나와.”

유하가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냥 사이도 아닌데 같이 자요. 제가 워낙 외로움을 많이 타서요.”

“한결아….”

유하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안 해요. 그냥 손만 잡고 잘게요.”

“한결아….”

유하가 한결의 등짝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악! 애인한테 이러기 있어요?”

한결은 침대 이불을 붙잡고 딱 버티고 있었다.

“애인이고 뭐고 나는 혼자 자고 싶어. 개인 취향 좀 존중해줘.”

“못 나가요. 안 나가.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요. 이제 혼자 안 잘래요. 자기!”

“퍽퍽.”

유하가 베개를 들고 한결을 마구 때리자 그제야 한결은 못 이는 척하면서 나갔다.

“아, 가요. 가기 전에. 그거 한 번만 더 하면 안 될까요?”

“그게 뭔지 몰라도 싫다.”

유하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저었다.

“나가!”

한결은 결국 유하의 방에서 쫓겨났다.

철컥.

유하가 방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와. 너무하네. 선배는 진짜 내가 뭐 어쩐다고 그래. 왜 저렇게 겁이 많아.”

한결은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문 잠그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한결에게는 유하 방문의 열쇠가 있었다. 유하는 몰랐지만.

하지만 오늘은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사용할 날이 있을지도 몰랐다.

한결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주방으로 갔다. 와인을 한잔 따라서 마셨다.

혼자 살 때는 딱히 외로움을 잘 못 느꼈다. 그런데 유하가 오고 나서부터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1층에 있는 유하가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이제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같이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그냥 잠만 자는 사이 말이다.

“저 선배는 어디 속고만 살았나 사람을 왜 이렇게 못 믿어요. 서운해요.”

한결은 갑자기 광대가 볼록 올라갔다.

힛. 조금만 더 기다려야지. 이제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어.

한결은 유하의 방문 앞에서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선배, 다음에는 같이 건배해요.”

씁쓸하게 웃으며 와인을 삼켰다.

 

*

 

“선배! 일어났어요?”

유하가 눈을 뜨고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주방에서 한결이 앞치마를 입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을 곱게 접어서 환하게 웃었다. 잘생긴 얼굴에 훤하게 후광이 비쳤다.

“어, 주방에 있는 모습 오랜만에 본다.”

유하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긁적였다.

“오늘 1교시 같이 수업 듣는 날이잖아요. 선배는 늘 아침 굶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건강에 좋아요.”

“어….”

유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건강을 강조하는 게 뭔가 한결이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서 자꾸만 움찔움찔했다.

“양치 꼭 열심히 하고 와요.”

유하가 문을 닫으려는데 한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유하는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 주방으로 가니 한결이 아침밥을 다 차리고 유하를 보며 방긋 웃었다.

한결은 당연하다는 듯 유하를 보자마자 다가와서 입술에 뽀뽀를 했다.

“쪽!”

“헉.”

놀란 유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맞다. 우리 사귀는 사이였지. 유하는 한결과 사귄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런 아침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마치…. 신혼부부 같았다.

“헙.”

유하가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국과 반찬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집밥이었다. 물론 반찬이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

“잘 먹을게.”

유하가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먹었다. 한결이 눈을 말똥말똥 뜨며 유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대로 밥을 오물오물 꼭꼭 씹어서 먹었다.

한결이 유하의 그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빨개지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왜? 또? 뭐?”

유하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결에게 물었다.

“후아. 후아. 너무 귀여워서 심장마비 올 뻔 했어요.”

“흐음.”

유하가 그런 한결을 싸하게 쳐다보았다. 이제 적응해야지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다. 이미 팔에 닭살이 솟았다.

한결아, 그런 말들 마음속으로만 해라고 했잖아.

한결은 이미 자신의 마음속의 말들을 그냥 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유하의 팔에 난 닭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또 닭살 돋았네. 전 그 오돌토돌한 닭살마저 너무 귀여운 거 있죠.”

한결이 햇살처럼 해맑게 웃었다.

유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침부터 그런 닭살스러운 부끄러운 말을 들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래도 건드리지 말야 할 것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한결은 생각보다 중증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유하에게 빠져있었다. 게다가 아침이라서 잔뜩 부은 얼굴에 자고 일어나서 얼굴도 머리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도 좋다고 저렇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아니…. 바보처럼이 아니였다. 어느새 진화해서 바보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한결아, 너 우리 다른 사람에게 비밀인 거 알고 있지. 당분간만이야.”

유하는 한결의 뜨거운 눈빛을 보니 왠지 걱정되어 말했다.

“네. 알아요. 전 다른 사람이 알아도 아무렇지 않은데…. 선배한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아야지 이상한 놈들이 못 다가올 거잖아요.”

갑자기 한결은 유하 곁을 스치고 지나간 경쟁자들이 생각나서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에 독기가 흘렀다.

“다 없애버려야 해요.”

“한결아, 나 그 정도 아니야. 오히려 인기는 나보다 네가 훨씬 많잖아. 질투는 내가 해야지.”

한결은 반찬을 집어 먹다가 멈추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선배도 질투해요. 저 때문에?”

“어?”

유하는 한결의 눈빛을 보니 실수했다는 생각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 그래도 빈틈을 노리고 있는데…. 이걸 인정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랐다.

“말해줘요. 질투해요? 제가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면?”

“어…. 조금.”

유하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이며 밥을 먹었다.

한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캬하하항.”

어찌나 좋아하는지 한참을 웃었다.

“그만 웃어. 밥 먹어. 우리 이러다가 지각해.”

“네.”

한결의 광대가 볼록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밥을 먹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휴. 선배도 질투하는구나. 선배 나한테 홀딱 반했구나. 완전 빠졌구나. 푸훕후훕.”

한결은 밥을 먹으면서도 좋아서 중얼거렸다.

유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결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한결이 저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아…. 부담스럽다.

“밥은 제가 차렸으니 설거지는 선배가… 알죠?”

한결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유쾌하게 거실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춤추듯 걷고 있었다. 너무 좋아하는 모습에 유하는 가슴이 묵직해졌다.

내가…이렇게 한결이에게 많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하아….

유하는 한숨을 짙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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