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팀장님 요즘 수상하지 않아? " 

" 그죠? 저만 그런 거 아니죠? " 

" 원래도 멋있긴 하셨지만 뭔가 더 멋있어지고, 요즘 부쩍 월요일에 피곤해하시는 거 같지 않아? " 

" 어? 맞아요! " 


은호는 탕비실에 들어가려다가 안에서 들리는 대화에 멈칫했다. 팀장실 사건 이후로 민재도 저도 회사에서는 조심한다고 했는데, 주말이 문제였다. 정력도 체력도 좋은 연하 애인은 평일에 참았던 욕구를 주말에 모두 쏟았고 덕분에 은호는 푹 쉬어야 할 주말이 오히려 더 피곤했다. 물론 민재와의 스킨십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


커피를 마시려던 계획을 뒤로하고 팀장 실로 돌아온 은호는 정력을 떨어트리는 약을 지어다가 몸에 좋은 거라고 속이고 먹여야 하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 그러다 역효과가 나거나 정말로 뚝 떨어져 버리면 이러나저러나 힘든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따위는 접고 다시 업무를 보는데 각 부서 팀장들이 있는 메신저가 울렸다. 


다들 바쁘시겠지만 저희 팀에서 일손이 너무 부족해 SOS 요청합니다. 인력 지원 부탁합니다.


물류관리 팀에서 보내온 메시지였다. 아르바이트생들도 있었지만 워낙 일이 고되고 이번에 다른 시즌 때보다 물량이 많아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어서 지난번부터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거리던 팀이었다. 


힘내요. 우리 팀도 지금 정신이 없어서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정신없기는, 제일 한가하면서


은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하나둘 올라가는 메신저 창을 보면서 혀를 쯧 찼다. 잠시 고민하던 은호는 씩 웃으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내일 저희 팀에서 한 명 지원 보내겠습니다. 

정말요? 기획 1팀 바쁘지 않아요? 

그 정도는 여유 있습니다. 

감사해요 ㅠㅠ


저도 신입 때 물류 팀에 지원을 갔던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물건 체크하고 박스들을 나르다 퇴근을 하면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한 듯 쓰러져 잠을 잤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마자 취업 준비를 했고 2학기를 시작하면서 웬만한 곳엔 다 입사 지원서를 넣어 민재보다 한두 살 더 어렸던 때였고 운동을 했던 민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저도 체력이라면 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려고 입사했나 싶기도 하며 두 번 다시는 지원 나가고 싶지 않은 부서였다. 지원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겠지만 적어도 이번 주는 짐승 같은 연하 남자친구가 얌전하지 않을까? 




" 아직 휴가 안 다녀오신 분들은 내일까지 정해서 알려주세요 " 

" 네. 그런데 팀장님은 언제 가시려고요? " 

" 여러분 날짜 정해지는 거 보고 결정할 거니까 빨리 정해주셔야 저도 정하겠죠? 굳이 안 쓰겠다 하시는 분은 말리지 않겠습니다. " 

" 네, 알겠습니다. " 

" 아, 그리고 박 대리님, 지금 강 인턴 바쁜 일 없죠?" 

" 네, 뭐 그렇죠 " 

" 그럼 강 인턴은 내일부터 당분간 물류 관리팀으로 지원 나가세요. 그쪽이 지급 일손이 부족하다네요. 같은 회사원끼리 돕고 살아야죠 " 

" 네? " 

" 왜요? 싫습니까? 싫으면 내가 가고 " 

"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 

" 그럼 회의 여기까지 하죠. "


민재는 왜 자신이 물류 관리팀으로 지원을 나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갖지 않았다. 궁금한 건 오롯이 은호가 언제 휴가를 쓸 것이며 뭐 하고 보낼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대화를 하다가도, 섹스를 하다가도 갑자기 불쑥 물어보며 유도질문을 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휴가를 보내려고, 이젠 혼자도 아니면서. 


" 대리님, 팀장님은 휴가가 며칠입니까? " 

" 아마 주말 포함 열흘? "

" 열흘요? " 

" 네, 근데 팀장님이 길게 자리 비우시면 우리도 힘들고 팀장님도 다녀오시면 힘드시니까 작년엔 나눠서 다녀오셨는데, 팀장님이라면 올해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 인턴들은 주말 포함 3박 4일이었죠? " 

" 네 " 

" 민재 씨는 당연히 애인이랑 함께 하겠네? 계획은 세웠어요? " 

" 글쎄요, 일정을 몰라서 " 

" 에? 같이 보내기로 약속은 했고? "

" 아직.. " 

" 이번 휴가는 글렀네, 글렀어. 그나저나 민재 씨 내일부터 고생길이 열렸네요. 하필 제일 바쁜 시기에... 안 바빠도 거긴 힘든데... 팀장님한테 뭐 밉보인 거 있어요? 지난번에 팀장실에서 다 풀었던 거 아니에요? " 

" 하하... " 


박 대리의 말에 그날 팀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민재는 어색하게 웃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 하단의 시계 표시를 열어 날짜를 보며 고민했다. 자신이 파악한 은호라면 박 대리 말처럼 휴가를 나눠서 갈 가능성이 컸다. 일에 대한 열정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으니까, 


은호는 팀원들의 이달 휴가 계획서를 확인하다가 민재의 날짜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팀원들이 모두 다녀온 뒤에 갈 거라고 했더니 마지막 주에 휴가를 신청했다. 민재는 인턴이라 다른 팀원들과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고, 은호는 팀장이라 언제 어떤 식으로 써도 상관없었다. 단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팀원들이 힘들까 봐 지금까지 팀원들과 되도록 겹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왔다. 


은호는 모니터를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저의 휴가 일정을 작성하고는 민재의 휴가 날짜를 수정해서 인사팀 메일로 넘겼다. 민재가 없었더라면 어차피 클럽이나 들락거리면서 보냈을 휴가였고 그동안 수없이 제 휴가 일정을 알아내기 위해 애 쓴 민재를 모르지 않았다. 사실 저도 민재와 보내고 싶기도 했고, 양심이 있고 정말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설마하니 휴가 내내 달려들진 않겠지, 라는 생각 끝에 내릴 결정이었다.


지금 해외여행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고, 가까운 곳으로 바람이나 쐬러 갔다 올까.. 



민재가 물류팀에서 구르고 있을 때, 업무를 보다가 여유가 생기면 틈틈이 인터넷 창을 열어 휴가를 보낼만한 곳과 휴가 때 무엇을 하면 좋을지 검색하고 있었다. 아직 민재에게는 휴가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틈만 나면 꼬리를 살랑거리며 저의 휴가 계획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는 맛이 있었다. 


물류팀으로 지원을 나간 지 3일쯤 지난 금요일, 은호는 외부 미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민재가 생각나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민재 콩깍지가 씐 탓일까, 모두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도 유난히 민재만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듯 보여 은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민재를 보내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인턴으로서 뭐든 열심히 해야 하는 민재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은호가 조용히 민재에게 다가가자 저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반기는 민재를 가만 쳐다보았다. 커프스를 접어 올리고 약간은 서늘하게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곳에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니 짜증이 확 올라왔다.


" 적당히 해, 적당히. 뭐든 중간이 없어 왜 " 

" 언제 왔어요? " 


손을 뻗어 민재의 땀을 꾹꾹 눌러 닦아주자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은호의 손을 잡아 내렸다. 


" 더러워요, 먼지 엄청 묻었을 건데 " 

" 안 더러워, 넌 내가 이 꼴이면 더러워 했을 거야? " 

" 그럴 리가 " 

" 밥은? " 

" 먹었죠, 물류팀이랑 같이 " 

" 조금만 고생해.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 자기가 해주면 안 돼? " 

" 뭐 먹고 싶은데? " 

" 당신 " 

" ... 물류 팀장 어딨냐, 좀 더 빡세게 굴리라고 해야겠다. " 

" 지금도 충분하거든요? 당신이 해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 " 

" 퇴근하고 집에 가 있어. 나는 마트 들렀다가 갈게 "

" OK " 


은호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금만 더 고생하라며 어린아이 엉덩이 토닥이듯 저의 엉덩이를 토닥거리고는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다가 민재는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서운할 정도로 철저하게 선을 긋고 남처럼 굴다가 가끔 불쑥 치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어쩐지 둘의 관계가 연인이기 전 은호와 제 모습이 뒤바뀐 듯 느껴졌다. 


은호가 다녀간 뒤 민재는 더 힘을 내서 일을 도왔고, 곧장 은호네 집으로 퇴근한 민재는 마치 제집처럼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호의 옷장 서랍 속, 은호의 옷과 나란히 정리되어 있는 제 옷과 드로즈를 꺼내 욕실로 들어가 먼지가 잔뜩 묻은 제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 시각, 은호는 카트를 끌고 뭐를 해주면 좋아할까 고민을 하면서  마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식재료 코너를 돌다가 조리가 된 장어구이를 보고는 걸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민재의 감당되지 않는 체력을 떠올리고는 다시 카트를 밀며 집에 있는 재료를 떠올리면서 필요한 재료를 카트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은 장어구이를 담아버렸다.


집으로 들어서면서 민재를 찾던 은호는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피식 웃으며 식탁에 장 봐온 것들을 내려놓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편안한 옷을 챙겨 나오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는 민재와 마주쳤다. 


" 아주 이제는 그냥 네 집이세요? " 

" 그럼요 " 

" 어쭈? " 

" 내 집 아닌 이유는 또 뭔데, 집 주인이 내 건데 " 

" 그냥 이 집 남은 대출을 네가 갚고 집을 가지는 건 어때? " 

" 싫은데, 둘 다 가질래 " 


그렇게 말하며 제게 다가와 안으려는 민재를 가볍게 피하며 등짝을 때렸다. 


" 너만 씻으면 다야? 나도 씻고 나올 테니까 저기 저거 냉장고에 이쁘게 정리해두세요. 밥 얻어먹고 싶으면 " 

" 아... 기다렸다가 같이 씻을걸.. " 


정말로 아쉬워하는 민재의 표정에 은호는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 민재는 식탁 위에 있던 박스를 열다 맨 위에 있는 음식을 보고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깜찍하기는, 굳이 이런 거 필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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