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W.겨울안개








적요하지만 부산스러운 방안에서 이따금 옷깃 스치는 소리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세자와 함께 들이닥친 궁인들은 화려하고 극진한 한 상을 차렸다. 세자가 하필 낮에 들이닥친 탓에 낮것상이 함께 올라온 것이었다. 늘 먹는 깔끔하고 정갈한 밥상이 휘황찬란해졌다. 세자는 괜히 세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읏…!”




민석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손목을 감싸 쥐었다. 손목은 검푸른 멍이 들어있었는데, 왼쪽 손목 역시도 같은 상흔으로 흰 피부가 얼룩져있었다. 민석의 신음에 맞은편에 앉은 세자가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이쪽에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인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만나고 싶다, 청한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씹어 삼킨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데 가슴이 틀어 막혔다. 세자의 뒤로는 그의 호위무사들이. 민석의 뒤로는 금강위들이. 각자 자리를 지키고 금방이라도 불붙을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경계 하고 있었다.

화려한 방에서 당장 입을 것, 먹을 것. 어느 것 하나 걱정 없이 지내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 그저 막연하기만 한 내일이 두려워진 탓이다.

어제만 해도 금강위 몇몇이 갑작스럽게 문을 열어젖히고 민석의 손목에 쇠스랑이 이어진 수갑을 채웠다. 그 무게가 어찌나 무거운지, 그들이 민석의 팔을 붙들고 끌려가는 동안 반항할 의지조차 가시게 만들었다. 두려움이 먼저였을 테다. 백현 대군과의 소란으로 궁 안이 시끄러워졌다는 무녀의 생각을 들었던 것이 번뜩 뇌리를 스친다. 아마 지금 이대로 형장에 올라 이슬로 사라져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거대하게 자신을 감싸오는 이 신전이 꼭 감옥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가리를 쩍 벌린 죽음이라는 악마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지금과 같을 것이다.

그렇게 끌려간 곳에서 남자와 마주 앉아야 했다. 금강위는 무거운 손목을 책상 위에 올려주고 남자의 뒤로 물러섰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피부가 벌써 벌겋게 부어있었다.




*




‘예 오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우리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으셨겠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네요. 네. 다음번엔 목이라도 날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온몸은 떨고 있으면서 용케 문장을 끝마쳤다. 자신이 너무 무례했던 것은 아닌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성을 잔뜩 내고서도 꼬리를 말고 두려워하는 강아지 같은 꼴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별수 없다. 죽는 건 무서운 일이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신전을 지키는 대관 김종훈이라 하오. 그대가 이리 끌려오게 된 것은 일전에 있었던 백현 대군과의 대면에서 작게 소란이 있었던 것이 화근으로. 궁 안에 흉흉한 소문이 파다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의 말대로 목이 날아갔을 것이외다. 그대가 신탁이 말한 자일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입장은 변함이 없소. 따라서 우리는 그대를 보호하고 지켜야 함이 마땅하니, 이렇듯 강압적으로 대한 것은 오롯이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꼭 알아주길 바라오. 덧붙이자면, 이젠 그런 소란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예상과는 달리, 김 대관은 조용히 민석을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그 뒤로는 지지부진한 심문이 이어졌다. 어디에서 왔으며, 하는 일은 무엇인지. 궁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인지. 혹여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곳으로 일부러 잠입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김 대관은 민석의 답변을 차근히 종이에 써 내려갔다. 책을 읽던 중이라는 답변을 들을 때에는 그가 눈을 맞춰오며 경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책에 대한 답변은 종이에 적지 않는 듯 보였다.





‘좋소. 더 물어 무엇 하겠소.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보아도 되겠소?”

‘… 그것도 종이에 적으셔야 하나요?’

‘아, 그렇지 않소만… 그저 조금 궁금증이 일어 물어보는 것이오.’

‘그렇다면 굳이 답변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소. 강요할 순 없지… 잘 알겠소.’





김 대관은 조금 서운한 눈치였으나, 이런 대접을 받는 중에 그의 비위를 맞춰가며 모든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지내는 것은 편하시오?’

‘…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죠.’





민석은 들어 지지도 않는 손목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관은 민석의 시선을 따라 내려와 붉게 물든 손목을 발견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금강위가 다가와 다시 손목을 자유롭게 했지만, 그 흔적은 오래 남을 것만 같았다.





‘우린 그대를 가둬두는 것이 아닌, 보호하는 것이오. 그러니 부디 편하게 지내셨으면 하오.’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혹사당한 것은 손목뿐만이 아니었다. 지쳐버린 정신 상태로는 더이상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다시 가느다란 줄 위에 서서 곡예를 하는 기분이 들어 속이 메스꺼웠다.





‘다친 것인가….’





낮은 목소리가 아까부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무녀의 생각을 들었던 것처럼. 세자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하….’





그제야 세자가 멍하게 굴었던 이유를 눈치챘다. 생각을 들키는 것이 처음이었을 테지. 그러니 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를 비운 것일 테고. 하지만 그렇게 해선 대화가 되질 않는다. 민석은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끝내고 현실로. 좁은 자취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당장 내일을 걱정하는 편이 더 편안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으니까.





“라디오 켜놓은 것 같네요. 뜬금없이 불쑥불쑥 들리는 말소리. 나쁘진 않은데,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는 게 더 좋겠어요. 저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전 다 들을 수 있으니까요.”





손을 아래로 내려 허벅지 위에 얹었다. 손목의 통증이 유난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통증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감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만히 손목을 감싸 쥐자, 이번엔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야기가 빠르군.’





민석은 세자를 응시했다. 깐 달걀 같은 얼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눈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잘 생겨서 나쁠 것은 없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자가 손짓하자 내관 하나가 다가왔고. 그는 세자에게 종이와 붓을 건넸다. 이런 일이 흔하게 있었던 모양인지 서로의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세자가 붓을 받아들고 무어라 종이에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읽은 내관이 작게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세자의 눈빛에 잠자코 물러났다.

내관의 지시에 상이 치워지고, 간단한 다과상이 올라왔다. 잎을 우려낸 씁쓸한 맛의 차와 달지 않은 주전부리가 가운데에 놓였다. 그리고 세자를 지키던 궁인이며 호위무사들이 눈치를 보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는 독대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알아챈 금강위도 물러섰고 방안에는 세자와 내관, 민석과 무녀 하나만이 자릴 지켰다.





‘생각을 멈추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군. 그대 덕분에 새로운 수련을 하는 기분이 들었어.’

“그렇군요.”

‘그대는 역시…. 신탁이 말한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아.’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 없어요.”





세자는 작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쓸데없이 심술을 부린 것인데. 어쩐지 쉽게 간파당했다. 따뜻한 차가 그의 입속으로 쏟아지는 것을 보다가, 민석 역시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묵직한 무게감에 놀라 금방 잔을 놓쳤다. 쏟아지진 않았지만 받침에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신전의 심문방식은 꽤나 거칠군. 백현 대군과 소란이 있었다지.’

“….”

‘손목의 그 상처는 그 때문에 생긴 것 같은데.’

“네.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면 좋으련만.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일 같아 보여 아쉽군.’

“… 아뇨. 별로. 그냥… 그냥 닿았어요. 그뿐이에요.”





세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민석을 바라봤다. 깊이를 알 수 없던 그 눈빛이다. 사람을 올곧게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 민석을 주눅 들게 만들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빛은 그 속에 따스한 걱정이 스민 듯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닿았다?’

“네.”

‘마음이 동하였다는 뜻인가.’

“아뇨. 그냥 손이 스쳤어요.”

‘대군이 그대에게 함부로 다가간 것인가?’

“아니에요. 어쩌다가 실수로….”

‘…그럼 그 실수 나와도 함께 해보면 좋겠는데. 아, 겁박하는 것은 아니니 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진한 눈썹이 으쓱거렸다. 배려하는 것인지, 자신을 떠보는 것인지. 장난스럽기까지 한 세자의 표정에 슬쩍 웃음도 났다.





“아프진 않지만… 놀라실 수는 있어요.”

‘미리 일러주어 고맙군.’





민석이 일어서서 세자에게 다가가자, 세자 역시 일어서서 민석이 더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는 시선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또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망설여진다. 소란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던 김 대관의 얼굴도 눈앞을 스치는 듯했다.

세자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곧 결심하며 마주 잡았다. 따뜻한 손바닥이 민석을 단단히 감싸오는 평온함 뒤로 찌릿한 쾌감이 몰아쳤다. 안정된 상태에서 느낀 통증은 분명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단단한 품이 자신을 감싸 안았고, 귓가엔 작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손이 떨어졌지만 품에 안긴 몸은 일으킬 수가 없을 만큼 피로해졌다.





‘그대는 신탁이 말한 자가 분명해.’

“섣부른 판단이라니까요….”

‘확신할 수 있어.’





힘을 주어 어깨를 밀어내자, 세자는 쉽게 물러났다. 휘청거리는 자신을 다시 받쳐주는 손이 고마웠지만, 금방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이 감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다급히 옷을 여며야 했다. 분명히 느껴진 쾌감에 다리 사이가 불편해진 것이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의자로 돌아가 앉자, 세자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는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기뻐 보였다.





‘부탁이 있는데.’

“여기서 계속 부탁만 하고 계신 거 아시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설명을 해보라고 하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자고 한 것도 모두 따지자면 부탁과 같았다. 에둘러 청하였지만.





‘… 미안하지만, 꼭 들어줬으면 해.’





편안한 표정으로 싱긋 웃어 보이는 그의 면전에 대고 거절을 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민석은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이 모두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제는 죽음이 곁에 있음에 화가 났다면, 오늘은 잠깐의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다. 세자와 닿은 후로 멍 자국은 어느새 옅어졌지만, 무녀 하나가 살뜰히 약을 발라 깨끗한 천을 묶어주었다. 이젠 욱씬한 통증도 한결 가셨다. 침대에 누워 세자를 생각했다. 스러지는 자신을 감싼 품이 제법 기분 좋았다. 갑작스럽게 닿아 놀라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온몸을 지배하던 쾌감이 신기하기도 했다. 세자의 손을 잡았던 오른손을 꾹 쥐었다펴고, 허공을 쥐었다가 펼치고 또다시 쥐었다. 내일은 세자의 전령이 도착할 것이다. 그가 자유를 허락하기로 한 것이다. 대가가 따라붙었지만, 가만히 앉아 흐름대로 흘러가고 싶은 마음은 이제 추호도 없었다.





‘세훈 대군에게도.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자유와 바꾼 것 치곤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 궁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대에게 친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기다랗고 흰 손가락이 다가와 민석의 팔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곧 전류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짜릿한 감각에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가 나질 않았다. 목구멍이 틀어 막힌 사람처럼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누구도….’





손가락에서부터 시작된 전류가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았다. 누구도 믿지 말라고 해놓고선, 본인이 가장 섬뜩했다는 사실을 알까.

민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몸을 감싸온 전류나 뱀 같은 손가락은 여명과 함께 저만치 물러났다. 포근한 침구 속에서 저릿한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백현 대군은 그 감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그게 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어제 세자에게 이 느낌이 무엇인지 물어볼 것을.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하지만 오늘부로 얻게 될 자유는 언제든 기회를 다시 만들어줄 것이니 개의치 않기로 한다. 백현 대군이던. 세자던. 그것도 아니라면 오늘 만날 세훈 대군이던. 누군가에게라도 물어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로 오게 된 이례. 최고로 기다려진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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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작품은 요랑(@xiu_suming), 겨울안개(@mist0221)가 릴레이로 연재합니다.

연재일은 매월 8일과 28일이며, 해당 회차 작성자의 포스타입에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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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회차 상‧하단에 전후편 링크가 첨부됩니다.





후편(04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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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글을 업로드 하면서 후기를 올리는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 요랑님이 저와 함께 하시면서 가장 고생이 많으십니다.

제가 기일을 못맞추고...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이미 끝난 이야기를 한참뒤에서야 다시 딴지걸고......

조별과제에 저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제발 이 수업 드랍해달라고 말할것같은 느낌으로 해왔어요..

이번 기회를 빌어서 말씀드리는건데.

잘못했어요..............................................................

RPS 슈른. 겨울안개. 짜부. 결개. 슈슈밍. 뭐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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