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아, 개천에서 용이 나겠구나!”

그 개천의 용이 이 씨의 아들 현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걸은 났을 때부터 그 태가 남달랐다.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과 진한 눈매, 깊은 입술에 총기로 빛나는 눈망울이라니. 땀내가 물씬 풍기는 공장단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도련님의 상이었던 것이다. 생긴 것도 훤칠하게 잘생긴 것이 누구는 주성치급의 배우가 될 것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머리가 똘똘하나 판검사가 될 거라, 또 다른 이가 현걸은 품성이 곧고 사려가 깊으니 선생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게 뉘 집의 자식이든 간에 사람들은 공장 단지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용이 돼 승천할 현걸의 미래를 퍽 기대하고 있었다. 언젠가 유명해진 그의 고향이 조명된다면! 그런 크고 작은 기대와 관심 속에서 결국 이야기의 끝은 말갛게 웃으며 훌륭한 어른이 되겠다고 말하는 현걸의 고사리만 한 손바닥에 용돈과 간식거리가 쥐어지며 마무리되는 것이 공단의 즐거운 일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근혁은 그런 어른들이 영 못마땅한 아이 중 하나였다. 더워 뒤지겠는데 오래도 떠드셔들. 괜히 현걸의 곁에 있다가는 비교당하기 일쑤였으므로 멀찍이서 그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풀려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근혁은 일찍 배운 욕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른들은 모르는 모양이고 관심도 없겠지만, 그들의 유난이 클수록 현걸에겐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벌써 또래 아이 중엔 현걸을 재수 없다 헐뜯는 녀석들도 여럿인 것을 어린 자신도 아는데 그들은 왜 모르나 싶어 저절로 목이 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용돈을 짤랑대며 음료수와 하드 사이에서 고민하던 근혁은 아직 해체되지 않은 사람 무리를 흘긋 눈에 담은 뒤 잽싸게 슈퍼를 향해 달렸다.

“근혁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별로? 하마터면 엇갈릴 뻔했네.”

계산하던 중 현걸이 풀려나 두리번대는 것을 보자마자 급히 뛰쳐나와 가쁜 숨을 고른 근혁은 하드 껍질을 쭉 벗겨낸 뒤 한 입 베어 물며 멀뚱히 제 옆에 서 있는 친우의 얼굴을 살폈다. 저놈은 기대가 고되지도 않나? 그때였다. 꼭 근혁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다른 곳을 보던 현걸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이 망할. 현걸은 유독 눈이 크고 예뻤다. 까만 눈망울이 저를 바라본 순간 근혁은 놀라 굳었고, 현걸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막 내리쬐는 햇볕처럼 그저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말 뿐이었다.

아, 귀신 같은 놈.

이상하게 심장이 벌렁대었다. 참 웃긴 생각이지만, 근혁은 늘 뺀질댄다고 머리통에 꿀밤이나 쥐어박히는 자신이 쭉 현걸의 곁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었다. 비록 자신은 오진과 현걸이 나누는 대화의 반도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의 녀석이지만, 저놈이 용이 되면 그 꼬랑지에라도 따라붙은 벼룩이 되어서라도 말이야. 그래서 고생이라곤 모르게 생긴 반질대는 면상에서 언젠가 눈물이 쏙 빠지는 꼴까지 눈에 담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니 미리 뇌물이라도 먹여둬야지.

“야. 너 혈액형이 뭐더라.”

“그건 왜?”

“너도 이거 먹으라고.”

소처럼 크고 순한 눈을 끔벅이는 현걸의 하얀 뺨이 더운 여름 날씨에 벌겋게 익어들었다.

“그래.”

가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숙여 자신이 베어 물었던 곳에 잇자국을 나란히 남기는 현걸을 보던 근혁은 문득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목덜미를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더럽게, 뒤지게 더운……. 몇 번 헛돌려는 말을 겨우 입안에서 골라낸 뒤 근혁은 꺼내나 마나 한 이야기를 꺼냈다.

“덥다. 진짜 여름이네.”

“응. 그런 것 같다.”

7월이니 당연한 이야기를 왜 꺼내냐고 타박할 만도 하건만, 현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근혁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뭘 하고 놀지 정하지 못한 둘은 급히 더위를 피해 지붕 아래에 내린 그늘에 서서 공단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계절을 타지 않고 뜨겁게 치솟는 사람들의 열기, 공장 돌아가는 소리에 묻히기라도 할까 세차게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쇳물보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여름, 낙원의 가운데에서 둘은 함께 하드를 나누어 먹었다.

 

* * *


시간이 흘러 현걸이 승천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실낙원에서 근혁은 그의 바람대로 현걸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주린 배를 움켜쥘 때도 근혁은 입에 넣을 것이 생기면 콩 한 쪽이래도 현걸의 입에 반쪽을 넣어주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기어이 이지를 지키겠다는 현걸의 곁에서 날붙이를 잡아서라도 그를 지킨 것도 근혁이었다. 그건 우정이라기엔 집요했고, 애정이라기엔 건조한 모양이었다.

“자. 우리 호걸부터 한 입.”

살겠다고 공장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을 때도,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술을 배울 때도, 아이들을 떠나보낸 뒤에도 둘은 여름이 되면 하드 하나를 사서 함께 먹었다. 자연스럽게 긴 머리를 넘기며 하드를 무는 현걸의 입술을 빤히 보던 근혁은 타는듯한 갈증 속에 제 차례를 기다리며 언젠가의 여름을 떠올렸다.

 

* * *

 

그 여름에 현걸은 문득 소스라치는 두려움을 느꼈다. 더위를 느낄 때면 그는 입안에서 사각대는 하드를 떠올렸고, 하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함께 그것을 베어 무는 근혁을 떠올렸다. 아마 근혁도 같을 것이다. 더위에 헐떡이던 근혁은 언제나 현걸을 바라보며 하드를 먹겠느냐 물었으니까.

그건 각인이었다.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현걸은 근혁에게, 근혁은 현걸에게 서로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이제 하드는 각자 사서 먹도록 하자.”

의도가 뻔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근혁은 특유의 느물거리는 얼굴로 실실 웃어버리고 말았다. 천하의 이현걸에게 무서워하는 게 생겼다니. 그리고 그게 자신을 잃는 거라니! 그건 선명하고 명백한 공포였다. 적어도 굴다리의 사람들 중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집에 어제까지 날 돌봐주던 부모가 목을 매어 줄줄이 초상을 치른 동네에서, 이제 칼을 들고 밥그릇을 투쟁하는 동네가 되었으니 이보다 죽음이 가깝게 들러붙은 동네는 또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현걸은 근혁을 떠나보낸 뒤를 벌써부터 두려워하고 있었다.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사라지는 고통은 수없이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을 테니까. 부모와 오진이 그러했고, 배만수가 그러했듯이.

현걸은 늘 근혁의 가까이에 있었지만, 가장 먼 사람이기도 했다. 둘은 언제나 함께 행동했지만, 근혁은 늘 현걸의 등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현걸이 이제는 겨우 하드 하나를 먹을 때 자신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현걸에게 근혁은 이제 존재가 당연한 사람이었다.

“현걸이 너, 그렇게 오진과 행복을 논하더니 말짱 황이었네.”

“뭐라고?”

“내가 언제 죽을 줄 알고 당장의 하드를 포기하겠다는 건지.”

아주 나 먼저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 그 말에 넋을 놓고 있는 현걸을 쓱 돌아본 근혁은 처음으로 그를 향해 먼저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같은 선 위에 있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폭염으로 유달리 더운 여름이었다. 슈퍼까지 가는 길은 멀었고, 평소보다 빠르게 터지는 갈증에 근혁은 현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선이 굵어진 현걸의 외모는 수려함이 농익은 결과물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단정하게 쭉 뻗은 짙은 눈썹 아래, 진한 쌍꺼풀로 또렷한 눈매에 자리 잡은 총기로 빛나는 눈동자는 선명하게 근혁을 비췄다. 근혁의 시선은 다시 그 아래로 향했다.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깊은 입술과 그 안에 숨겨진 가지런한 하얀 치아. 그것들이 나타나면 더위가 사라진다는 걸, 근혁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하드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처음으로 맞닿은 입술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그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 * *

 

잠결에 자리끼를 들이켜며 겨우 눈을 뜬 근혁은 옆을 돌아보았다. 맨질한 얼굴과 달리 고되었던 흔적이 남은 하얀 어깨를 가만 토닥이며 간밤 자신을 한껏 끌어안고 부르짖었던 현걸을 떠올리자 괜히 웃음이 삐져나왔다. 처음엔 틈만 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물고 빨던 관계에서, 이제는 저녁을 먹은 뒤 한쪽이 넌지시 불러야 밤에 슬슬 준비를 하게 된 것이 무슨 오래된 중년의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걸도 근혁도 용광로를 돌리던 이들이었다. 단순히 열이 식어버린 게 아니라, 오래 유지하기 위해 온도를 조절했을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근혁아……. 더 자지 않고…….”

“어엉. 잘 거야. 괜히 일어나지 마.”

현걸이 날아올라야 했었던 개천은 메마른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근혁과 현걸은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나아진, 그리고 자신들을 대신해 날아오를 아이들의 내일. 하여 다가오는 여름에도 근혁은 승천하지 못한 용의 등허리에 딱 붙어있을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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