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숨겨져 있는 진실이 두려워






다니엘은 강회장의 명령으로 학교에도 나가지 않고 수습이 끝날때까지 조용히 집안에서만 살아야 했다. 아주 가끔 재환이가 눈치를 봐가며 다니엘에게 성우에 대해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중에 얘기하자며 화제 거리를 돌렸지만 다니엘 또한 성우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때문에 아니, 무의식 깊은 곳에선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도 화가 났던 것 같다. 성우가 순간적으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성우는 다니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사람이다. 성우의 안부가 궁금한 것은 다니엘이 가장 컸다.




몇년을 같이 살았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보다는 정이 더 들었기에 재환은 다니엘 몰래 종종 성우를 따로 만났다. 재환이 성우를 만나고 들어온 것 같은 날에는 궁금함이 하늘을 치솟았지만 다니엘은 따로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 엄청난 일이 진실이 될까봐 감히 겁에 질려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다니엘에게 먼저 말문을 튼 건 재환이었다. 성우를 만나고서는 혼자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인지 조금은 흐트러진 상태로 다니엘을 물끄럼히 쳐다봤다.



성우선배 잘 지내고 있어라는 짤막한 말...

다니엘이 가장 궁금해 하던 것이다. 잘 지내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아파보이던데 실험 때문에 힘이 드는건지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혼자서 우는 건 아닌지 내가 없어도 잘 지내는지...



성우선배 어떻게 할꺼냐는 재환의 물음에 이미 끝난 사이니 상관이 없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재환은 다니엘이 잊을려고 노력했던 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술을 마셔도 많이 마셨는지 다니엘이 그 기사얘기를 싫어하는것을 알면서도 기사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아니래잖아! 옹성우가! 스스로 아니라고 했잖아. 나한테 왜이래!! 나와는 상관이 없어.”

“왜 상관이 없어! 강다니엘 비겁해! 설사 니가 의도한 일이 아니라 해도, 니 아이일 수도 있잖아! 만약 니 아이라면 책임은 지지 않더라도 한번쯤은 돌아봐 줘야 하는거잖아! 솔직히 말해 너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넌 그 아이가 다른남자의 아이일까봐 그게 겁이 나는거잖아!”




아이? 분명 아이란 말을 들었다. 아닌데. 형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기사 거짓인데. 우리 회사를 어떻게 해 볼려는 협박일 뿐인데. 재환이 한 말 단순한 술주정이 아니라 너무나도 진솔하게 들렸다. 성우가 말하지 말랬다고, 그런다고 어쩜 그렇게 무책임할수가 있냐고 재환은 다니엘에게 소리치고 화를 내고 있었다.


한순간의 꿈이었다고 악몽이었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이 정말 사실이란 말인가...




“아이? 그런 건 없어. 그게 말이되?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남자가 임신을 해? 김재환 넌 의대에 다니면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영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니가 요즘 공부한다고 피곤한가본데 영화와 현실을 혼동 하지마.”

“이럴 줄 알았어. 너 이럴 거 다 알기 때문에 성우선배가 너한테 비밀로 해달라는 거였어. 자신이 더 비참해 질까봐. 이렇게 거부당할까봐. 그래서 말하지 말라고 했던거였어. 난 그 기사를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성우선배가 쓰러져서 우리집에 데리고 왔을 때 그때 알았다고! 정확하게 아이를 가졌다는거... 누구 아이 인지는 모르지만 아니, 니 아이라는것도 다 알았는데 왜 너만 몰라 강다니엘!!"




운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잘 보이지 않던 재환이 다니엘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내 아이라면? 정말 그게 현실이 될 수 있는건지 말이 되는건지 영화에서만 봤는데 그것이 눈앞에 펼쳐 지는게 두려워진 다니엘이었다.


정말 머릿속이 시끄러워 졌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더 이상은 듣기 싫다고 돌아서서 방안으로 들어오는데 재환의 악에 바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성우는 절대로 책임지라는 말 하지 않았다고, 그냥 옆에서 보기에 그 사람이 너무 힘들어하니 한번쯤은 돌아봐 주라고. 지금 성우의 곁에서 그 사람을 다독여줄 사람은 자신도 민현도 아닌 바로 다니엘이라고.



다니엘은 방안에 들어와서도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조금 전에 재환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책임지지는 않더라도 한번쯤은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신의 아이일수도 있다고,
물론 다니엘도 힘들지만 누구보다 가장 많이 힘들어 지쳐있을 성우, 다니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다니엘은 아직까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이 들었다.




이성간에 사고를 친다는 것. 그래서 원치 않은 아이를 가졌을 때의 고민 바로 이런 것일까? 원치 않은 아이는 아니지만 성우와 다니엘의 사이는 다르다. 정말 성우가 여자였다면.. 여자였는데 다니엘의 아이를 가졌다면 다니엘은 물론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우는 여자가 아니다. 의례적으로 아이는 여자가 갖는 것인데 성우는 여자가 아니다.



다니엘만 조선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다니엘만 이 상황을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재환도 다니엘의 입장이라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재환이 방안으로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재환은 조용히 다니엘의 옆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어릴때 반항심에 배웠던 담배를 성우를 만나고서 끊었었다. 하지만 이럴때는 새빨간 불과함께 타들어가는 담배처럼 자신도 다 타버려 소멸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치지직.. 조용한 방안에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동안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다니엘이 물고 있던 담배가 필터만 남도록 짧아 질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장감만 조성하던 재환이었다. 무언의 시위인지 아무말 없이 연신 담배만 피워대다가 나갈 참인지 방문을 향해 가더니 문 앞 에서 나가기 직전 그동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다니엘. 나는 아무상관이 없어. 난 니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간에 니 편이 될 수밖에 없고 너 마음 가는 데로 해라. 난 니가 어떠한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 그게 잘못되었다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꺼야. 난 니가 결코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현명한 선택을 할 것 이라는 걸 알아. 잘자라 내일 보자.”





어리석은 결정? 현명한 선택? 어떤 것이 어리석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마음 가는데로... 지금의 마음 나도 모르겠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내가 갈피를 못 잡겠는데...



방안 한가득 뿌연 연기가 자욱해졌다. 마치 다니엘의 머릿속처럼, 이렇게 뿌옇게 되어버려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앞이 흐릿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이 짙은 안개를 걷어 줬으면 했다. 깊은 한숨을 쉬는데 매캐한 담배 향만 목구멍 한가득 들어왔다. 옛날 같았으면 또 방에서 담배를 피웠냐는 성우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 왔을텐데 창문을 다 열고 손을 휘휘 저어가며 담배연기를 빼낸다고 소란 이었을텐데 작은 것 하나하나 까지도 이렇게 추억이 서려 있었다. 



이 순간 만큼은 다니엘은 정말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성우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상관이 있다. 하지만 이 현실은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우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분명 아니라고 말해주겠지만, 다니엘은 아니라고 거짓말 하는 것이라도 믿고 싶었다.



성우를 찾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이지만 대낮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 밤거미가 내려앉자마자 재환을 끌고 성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단지 그 사실만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재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다니엘을 성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재환이 가리키는 곳. 불이 꺼져있는 반지하 방이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찌푸리자 이런 곳에 옹성우가 산다고 재환의 말에 기분이 더 나빠진 다니엘이었다.


초인종도 없다. 재환이 조용히 문을 두드리자 불을 켰는지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이윽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초췌한 성우의 얼굴이 보였다. 재환과 함께 온 다니엘을 보고 놀라는 표정. 하지만 무언가 기대를 하는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둘이서 얘기를 하겠다고 재환을 밖에다 세워놓고는 다니엘은 성우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워낙 성격이 깔끔한 터라 모든 물건이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있지만 집 자체가 좋지 않아서인지 다니엘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잘 지냈냐는 다니엘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잘 지내지 못하다는 거 다 보이는데 이런 환경이 얘기를 해주고 형 얼굴이 다 말해주는데...

또 또 거짓말 하지 옹성우..





“나 뭐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 저..저기...”

“또 아이 때문이니? 정 궁금하다면 말해줄께. 사실이야. 니가 알고 있는 데로 아이는 사실이야. 그런데 걱정 하지마. ”

“걱정? 형 지금 걱정이라고.”

“사실이지만 니 아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재환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니 아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한테 책임지라거나 그런 거 없다고. 확인했으면 돌아가”

“아.. 그래..알았어. 그거 물어 볼려고 왔어. 갈게 잘 지내.”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인지 혼자 나오는 다니엘을 보고 성우선배는 어쩌고 혼자 나왔냐고 물어보는 재환이었다. 다니엘은 아무 말도 없이 재환을 등지고 그 집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성우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런 곳이 성우가 있다는 것이 자꾸만 마음이 아파 와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성우를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성우의 말 데로 다니엘과 성우는 헤어진 사이다. 이미 끝난 사이니 예전처럼 집으로 데리고 오거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것은 값싼 동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다니엘의 옆을 지키며 함께 걷는 재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밉냐는 다니엘의 물음에 재환은 다니엘이 어떤 결정을 하든 다니엘의 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냐며 웃음을 보였지만 평소에 봐왔던 해맑은 웃음이 아니라 억지로 웃는 쓴웃음이었다.

다니엘에게 실망 한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아니라는데 다른사람의 아이를 품고있다는데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성우가 다시 다니엘에게 오지 않을 텐데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잊은체로 살 수는 있지만 그렇게 그를 대할 수는 있지만 아니라는데 억지로 마음데로 할 수는 없었다.




강회장이 뒤에서 손을 쓴 탓인지 기사에 대한 부분은 잠잠해 졌고 성우까지 보호해 달라는 다니엘의 간곡한 부탁에 이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은 영원한 비밀로 묻어졌다.

다니엘의 생활도 조금은 예전으로 돌아온 듯 했다. 다니엘에게는 한달이 일년 같은 시간이었다. 긴 악몽을 꾸는 듯 했다. 재환도 이젠 사랑한다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냐느니 그딴 구차한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니엘에게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건내지 않았다.




형.. 잘 지내고 있지? 아프진 않고? 그 아이 아빠란 사람 만나는 봤니? 혼자서 힘들지 않아?


형 보고 싶다. 내가 아직 많이 사랑해...



선물 Beautiful Never 약속해요 애인(愛人) 그냥 너라서 감기 밤의 가스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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