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zzurago



“메리 크리스마스, 토니.”


이제 정말 졸린 상태에 놓인 피터 파커는 오늘도 토니의 중요한 순간을 같이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앞으로도 꾸준히 얻을 영광이긴 했지만, 그래도 토니 스타크가 대통령도 구해내고 세계도 구해내고 자기 주변인도 자기 자신도 결국 구해내는 소리를 같이 들을 수 있는 순간은 확실히 극히 드문 순간이다.

마치, 그 고백이 있던 날처럼 말이지.


[“그래, 아주, 끝내주는, 메리베리메리 크리스마스야…. 핏. 지금 소리 들려?”]

“폭죽 소리가 화려한걸요.”


토니 웃음소리가 신기할 정도로 시원했다. 피곤했던 피터조차 웃을 정도로.


[“단순 폭죽이 아니야. 네가 그렇게 잔소리하며 그만 만들라던 녀석들 폭파하는 소리거든!”]

“오-. 그럼, 잘 끝난 거군요? 그렇죠?”

[“아주 정확히 내 상황이 전달된 거 같네. 게다가 너도 들리는 소리를 보아하니, 꽤 잔치 분위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스타크 씨가 왠지 선물이라도 주시는 거 같은 뉘앙스로, 프라이데이가 배경음악 선곡을 해준다고 말하고 가셨던가. 약간은, 이게 왜 선물 같은 게 되는지 알 거 같기도 했다. 절묘하게도 지금 라운지에선 캐럴이 들리고 있다. 확실히 이 잔치 속에서 꽤 센스 있는 선곡이다.


“제가… 잔소리한 보람이 있었던 건가요? 일부러 슈트가 다 터지는 프로토콜 만들어 두신 거예요?”

[“그럼, 피터. 내가, 하우스 파티 프로토콜만 만든 게 아니었어. 이름도 ‘새출발 프로토콜’이라고.”]


토니는 피터가 작게 웃는 소리를 들으려는 건지, 일부러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이 순간에 너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물론, 아마 얼마지 않아 이거 후회하긴 할 거야.”]


그렇지만, 언젠가 찍어내듯 만드는 아머들이 또 생겨야 하고 내가 만들게 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나은 슈트일 건 확실해. 멘탈 상태가 더 좋을 테니까. 약간 희미한 자신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피터는, 기쁜 순간을 즐겨주는 것은 미덕이라 믿는 사람이기에 미래에 대해 꽤 정확히 예언하는 토니에게 함구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아이언 리전’이 펼칠 비극도, 지금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맞다, 페퍼가 지금 매우- 특이하게 건강한 상태로 근처에 있거든. 너라면 말하지 않아도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내 주변 상태는 어느 정도는 알 거 같긴 하지만- 오, 로디 왔네. 어쨌든, 페퍼의 저 상태는, 강하기는 해도. 음. 아픈 상태인 것도 맞고, 불안정하기도 하거든. 수술을 해서 일반인으로 돌려놓아야겠는데. 같이 방안 좀 의논하는 건 어때? 익스트리미스에 대한 기본 공식은 내가 제공할게.”]


토니 스타크는, 피터 파커가 페퍼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필요한 답안지를 어차피 미래인이기에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 피터는 토니 스타크가 일러주었던, 페퍼와 토니 스타크의 수술까지 이어진 여정을 떠올리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아주 조금 정도는 도움을 드리긴 해야겠다.

게다가 저쪽 토니와 피터에게도, 포츠 씨의 건강하고 당당하고 멋진 모습이 너무 필요한걸.


“당연하죠, 토니. 포츠 씨가 건강한 건 좋지만, 너무 건강한 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맞아, 우리 CEO가 아픈 건 결코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니지. 그리고, 음…. 그, 피터. 저, 내가 이번, 며칠 동안, 조금 생각해본 게 있는데…. 물론, 우주적 위기에 대항할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긴 하지만…. 그 페퍼 수술도 하는 김에,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이언맨이 아니어도, 너에겐 영웅인 거 같던데. 그래서 내가, 좀. 내 가슴팍에 있는 좀 귀찮은 물건을… 떼어 버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거든. 이거 없어도, 슈트에 아크 리액터만 있다면 충분히 기능이 가능해질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슈트를 개량할 방안은… 앞으로도 더 무궁무진할 거 같기도 하고.”]


알고 있던 결심이지만, 피터는 그 결심의 과정 속에 자신도 소량 참가했다는 사실에 다소 기쁘게 미소를 띠었다.


[“근데, 몇 년 전과 달리, 의학 발전이 좀, 됐겠지? 기껏 결심은 했는데, 실패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 네가 몰랐을 수도 있을 텐데, 음. 아니, 당연히 알려나. 내가 심장의학 쪽에 일부러 이런 수술 관련해서 투자를 하고는 있었거든. 그,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내가 이걸 쓸 거란 생각은 안 했어도 혹시 수술받을 수도 있긴 하다고 생각해서…. 물론, 먼저 얼마나 연구됐나 성과 보고를 들어봐야 할 거 같긴 해. 잘못하면 이대로 죽어버릴 지도 모를 일인지라.”]

“토니. 의학 발전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 수술은 무조건 성공해요.”


당신의 심장이 뛰는 거, 더는 아크 리액터로 보여줄 필요가 없어요. 오늘도 스타크 씨가 코앞에 너무 무사히 살아계셨거든요. 이 역사적 순간 함께라니, 너무 영광이에요. 그나저나 역시 토니답네, 안 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결국 미리 준비는 다 하는 거-. 그랬구나. 스타크 씨도 미리 연구를 투자해뒀으니까 수술이 가능해졌던 거겠구나. 피터 파커는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피터 파커는 라운지에서 그날의 목표 분량을 거의 끝냈다.



“졸려 보이네, 피터.”

“안녕하세요, 샘.”


피터는 하품을 하며, 식당 식탁 맞은편에 베이컨과 스크램블이 담긴 그릇을 놓고 앉은 팔콘에게 답했다.

어제 졸려 죽을 때쯤의 그 시점에서, 피터는 그 목표 분량 시점에서부터 딱 두 통화 정도 더 해 버렸다. 뉴욕 사태 이후로 신이 난 토니는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그리고 신난 연인 목소리는 듣기 좋았기 때문인지 그런지, 덕분에 늦게 잠자리에 들어 버렸고.

그러나, 의지가 가득한 피터 파커는, 물론 다소 늦잠을 잘 뻔했긴 해도 결국 어떻게든 기상을 해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해피 씨가 정말로! 드라마 보면서 깨어나는지! 그 세계도 잘 풀리는지는 들었어야 했단 말이야…. 그 세계의 피터에게도, 해피와의 즐거운 드라이빙이, 해피의 드라마 넋두리가 꼭 필요하단 말이야…. 게다가 우리 토니가, 드디어 잠을 잘 잤단 말이야!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이건 정말 꼭 확인하고 자지 않으면 안 될 사안이었던….


“아, 음, 오늘 아침엔 캡틴이 안 계시네요?”

“캡은 조깅하러 같이 나갔었는데 좀 더 돌고 오겠대. 출장 예정이라 그런지 체력 단련 확실히 하려나 봐. 또 누구에게 ‘On your left’ 하고 다니겠지.”


샘이 어깨를 으쓱했다.


“참고로 오늘은 나한테 6번 했어.”

“아….”

“언젠간 내가, 내가 그 말 할 거야. 언젠가는, 정말, 꼭.”


피터 파커는, 그 유명한 ‘조깅할 때 재수 없는 요원 순위(제작: 샘과 버키, 출처: 어벤저스 *튜브 채널)’에 1순위로 오른 캡틴을 떠올리고 있었다. 캡 별로 그렇게 빠르진 않던데. 음. 일반인 기준으론 상식 초월이라 그렇겠지? 난, 난 절대, 추월할 때 아무 말 안 해야지, 앞으로도 꼭. 지금도 저 순위 4위쯤에 내가 있으니 더 조심해야지. 좀 힘들 때쯤 웹 스윙해서 추월한 적 있다고 4위로 올린 건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지만….

안 너무한가?


“아, 그리고 우리들 출장 잦아지고 있다는 거, 기억하고 있지, Kid.”

“아, 네. 당연하죠.”

“그래도, 공백 기간 동안, 조금 다른 방향성에서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뉴욕으로 초청한 사람이 있거든. 근데 넌 못 만나본 사람 같더라고. 아직 어벤저스 전부 만나본 게 아니잖아.”

“아, 설마. 그렇다면-!”


피터가 순간 눈을 반짝였다. 잠깐 일어날 뻔했더니, 샘이 킥킥 웃어댔다.


“이럴 줄 알았지. 전에도 사인 받고 싶다고 막 소리 지르지 않았어?”

“완다 막시모프 씨가 여기 오시나요!?”


세상에! 전에 싱가포르에서 유람선 구한 뉴스가 제가 알던 마지막이었는데요! 그래서 한동안 아시아에 계속 계시며 세계여행의 행복을 즐기실 줄 알았어요! 환호. 피터 파커의 행복한 외침에 샘은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잠시 왔다 갈 거긴 해. 뉴욕을 그리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부부가 한창 즐겁게 휴가 내놓고 세계 일주 중인데 일하라고 부른 격이니, 좀 맘에 안 들기도 할 거야.”

“설마 비전, 비전 씨도 오시나요!”

“둘은 그냥 세트야. 햄버거와 콜라 같은 운명이라고.”

“세상에, 세상에!”


저! 사인! 받아야 해요! 사실 네드도 맨날 언제 받아올 거냐고 난리였고! 저도, 개인적으로 정말, 특히 최근에 세계 돌아다니시면서 가끔 좋은 일 하시는 거 너무 멋지지 않나요? 진짜 그, 마법 같이 빨간 그것도 너무 신기하고 대단하고, Awesome 그 자체고요! 간만에 들떠서 난리가 난 어벤저스 팬이자 신입생을 보니, 팔콘은 더 신나는지 이것저것 더 떠들기 시작했다.


“걔네가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우리 없는 기간 동안, 잠시 본부에 머물며 지낼 거라고는 들었거든? 근데 마침 네가 새로 들어온 셈이 됐다니까 관심을 꽤 보이고 있어. 그래서 아마 밥 한 끼 정도는 분명 같이 먹자고 할지도 몰라. 아, 그리고 스콧 랭이라는 녀석 알아? 너, 그때 그 공항에서, 거대한 앤트맨. 기억하지. 걔가 방학을 맞아 딸이랑 최근 미국 여행 중이라 들었는데-.”


또 다른 대단한 사람에 대한 재미있고 긍정적인 소식에 정규직 전환 대상자는 다시 환호를 질렀다. 그렇게 팔콘의 이야기에 홀딱 빠진 피터 덕분에 식당 한가득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 지 10분이 지난 후에서야, 피터는 폰에 진작 문자가 온 것을 깨달았다.


‘Kid, 너 지금쯤 완다 소식은 들었을 거 같은데. 그게 갑자기 결정된 거라.’

‘마침 이렇게 됐으니, 좀 급하긴 해도 오늘 훈련은 접고, 나랑 인터뷰 급히 하는 게 나을 거 같거든.’


그리고 피터는 곧 꽤 심각한 표정으로 폰을 보았다. 맞은편 팔콘이 잠시 수다를 멈출 정도로.


‘타이밍 좋았어. 소코비아에서 있던 일은, 네가 미리 알아 둬야 우리 멤버랑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야.’

‘나 이미 오늘 일정 취소했으니까, 그냥 하는 걸로 알지. 답장 없으면 수락인 걸로 봐.’


어떤 자그마한 위기 속에서 토니의 곁을 지켰다는 기쁜 성공 덕분에 뿌듯해했던 피터 파커로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자각이 꽝 하고 때려왔다. 

일전에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짊어졌던 죄책감이자, 어쩔 수 없이 방관시켰던 어떠한 ‘스톤’이, 완다 막시모프라는 존재와 함께 다시 뇌리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디어 ‘토니’에게도 다가온 미래.

-소코비아 대참사. 울트론 사태.



애초에 첫 어벤저스 뉴욕 사태 때부터 셉터의 행방을 확인하는 것을 방관시킨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마인드 스톤이 박힌 치타우리 셉터를, 이제 얼마 후 토니는 회수하게 될 것이다. 거기 박혀 있는 스톤으로부터 많은 것이 시작될 것이다. 셉터 코드를 기반으로 만들려는 A.I 울트론이 대 인류 멸망을 목표로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비전이 탄생하며, 소코비아라는 국가는 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완다와 피에트로 막시모프 남매가 어벤저스의 편에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결국 피에트로는 전사한다. 이 정도의 내용이 피터 파커가 대강의 역사책과 약간의 어벤저스들의 수다로 주워 알고 있는 정보다. 어벤저스의 구체적이 내부적 사정은, 찌라시는 많지만 정작 제대로 밝혀진 진실은 많지는 않았다. 아마도 스타크 씨가 판단하기에 부정적인 부분은 알아서 잘라낸 거겠지.

확실한 사실은 존재했다. 어떤 비극도 막아선 안 되는 피터 파커의 어깨에는 수많은 희생자와 함께 ‘국가’라는 무게가 추가될 것이다.

이번에 뵙게 될 ‘완다 막시모프’의 가족과 국가를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대신, ‘비전’을 만날 기회를 주게 되는. 아이러니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무겁네.”


어깨가 축 처진다. 이번엔, 진짜 무겁다. 토니의 죄책감도 장난이 아니라는 짐작이, 분명히 가지만. 그럼에도 이걸 방조하는 피터 파커도 이번만큼은 못지않게 그 책임이 분명히 무거울 것이었다.

한숨을 쉬며 피터 파커는 가방 안에 짐을 꾸렸다. 어제 실컷 활용한 폰도 가방 구석 안에 예쁜 케이스에 담아 고이고이 모셔두고 잠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실 꽤 피곤한 참이었지만, 스타크 씨와 면담이 급히 필요한 것을 분명 동의했기에 훈련은 하지 않고 짐부터 꾸리고 있었다. 옷도 예쁜 피자가 그려져 있는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너무 쿨해서 벌써 몇 년째 입다가 좀 닳아서, 새로 한 벌 다 사기까지 한 유서 깊은 옷이다.


그나저나 ‘면담해요!’라고 답문 보내놨는데, 아직도 스타크 씨의 답이 없다. 이건 긍정인가? 알아들으셨을까? 그렇다면 왜 이번엔 어디로 오라고 안 하시지? 피터는 곤란해하면서,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나갈 준비 다 해두고 스타크 씨 찾으러 다닐까? 그래, 그게 낫겠다. 인터뷰가 꽤 길어질 수도 있어. 그럼-.

노크 소리가 들린 순간, 스파이더맨은 직감했다.


“네. 스타크 씨?”


방으로 직접 오시는구나. 이건 또 새롭다. 최소한 최근 1년간은 없던 일이다. 저번에 스타크 씨와 사과라고 해야 할지, 아닐지 싶은 것을 주고받은 덕분에 기이한 냉전이 좀 누그러진 채라 가능해진 것일까. 자신이 아웃라이더 추적하려는 것을 걸리면 다시 취소될 분위기이고, 또 다시 길바닥에사 윽박지름을 당할지 모르는 괴상한 휴전 같은 상태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이네, 정말.

피터가 벌떡 일어서서 문을 여니 그 앞에 깔끔한 남색 티셔츠를 안에 걸쳐 입은, 편안한 운동복 차림의 스타크 씨가 있었다.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그쪽도 감회를 새롭게 느끼는 게 아닐까 싶었다.


“들어가도 돼?”

“누가 마련해주신 방인지, 이 넓은 방엔 끝내주는 탁자도 있어서, 손님 초대가 가능하더라고요.”


피터가 문에서 살짝 물러나자, 토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에 바로 당당히 들어서면서 주변을 살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꼭 랩에서만 이뤄질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어제 보니까 너 장소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결정 내린 거 같기도 하고.”

“음. 사실 제 방일 필요도 없긴 하지만-.”

“Kid, 그새 꽤 레고로 꾸며 놨는데? 예전에는 꽤 살풍경했는데 많이 쌓였네? 저거 그거잖아, 다크 시디어스.”

“오, 맞아요! 아, 아니. 스타크 씨?”

“세상에, 왜 탁상 위가 이렇게 잡다해. 저거 사진에, 큐브에, 별별… 뭐야? 내일모레 어른의 방치고는 역시 아직은 Kid 같은데. 커튼 좀 열고 살아. 탁자 분위기가 다 죽잖아. 우리 직원이 여기서 정성들여 키우는 다육이가 다 죽겠어.”

“좀 눈부신 거 같아서-, 아. 그러네요. 커튼 열어도 괜찮네요.”

“이번 건은 길게는 얘기할 필요 없을 거 같아. 별로, 그. 좋아하는 얘기도 아니거든, 내가. 게다가 이전 일이나 이후 일이 더 복잡하니까. 그래서 영화 분량 버전은 없고, 심슨 가족 한 회 방영 분량 버전은 있어. 그거 말고도 스톤이라든가에 대해 할 말도 있고. 일단 저기 앉아.”


창가 근처에서 빛이 내리쬐는 탁자 앞 의자에 턱하니 앉아 다리를 꼬는 토니는 마치 이 방의 주인 같아 보였다. 저런 자연스러움, 나도 배워야 할 거 같은데. 피터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가방을 뒤져 수첩과 필기도구를 꺼내서 토니 맞은편에 착석했다.


“아마 심장 수술 이후 쉴드 관련 사건도 이것저것 터지고 해서. 소코비아 건이 바로 터지진 않았으니까 인터뷰 텀을 둬도 됐지만 말이지. 완다가 안 온다면 모르겠는데,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을 결정이 났으니까 들어는 둬. 걘 섬세한 녀석이라 잘못 건들면 안 좋을걸. 특히 걔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토니 토니 거리면- 아주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그런…가요?”


피터의 얼굴 한가득 의문이 피어났다. 그분 앞에서 토니 스타크를 함부로 많이 언급하면 안 되는구나! 왜? 비전 씨랑 사귀는데도? 아, 팀 캡틴이었어서 그런가? 피터는 당혹스러운 깨달음을 얻고 수첩에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역사책 너무 빈약한데? 저런 건 몰랐는데? 엠바고 엄청 강하게 된 사항인가?

그러고 보니, 완다와 피에트로 남매가 어떻게 어벤저스에 연이 닿았는지, 그들에게 왜 능력이 생겼는지. 그 기원이 알려진 바가, 없던 거 같다. 특히 이 부분만큼은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을까? 어벤저스의 오랜 팬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자, 약간 불편한 듯 토니 스타크는 티셔츠 목가를 괜히 잡아 늘이며 다리를 꼰 자세를 반대 방향으로 바꿨다.


“…이건, 사실. 어벤저스 대참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거든. 내가 좀, 억울한 점이 없던 건 아닌데. 그…그래도. 좀, 음.”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내리깐 토니 스타크로부터, 어쩐지 아까까지 넘쳐나던 기묘한 당당함이 사라진 거 같았다. 피터도 미간을 좁히며, 선생님한테 자백하러 온 학생을 마주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도 본인이 잘못했다고 느끼신 부분은 찔려 하시는 모습을 많아 보이긴 하셨는데, 오늘처럼 아득히 어색해하시는 것도 처음이다.


“…좋아. 일단 사실, 완다 건은 내가 군수회사를 운영하던 때부터를 얘기를 해야 돼. 뭐, 당시엔 몰랐고 나중에 비전이 뭐라고 말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거긴 한데-.”


토니 스타크가 헛기침을 하다가 얘기를 시작했다.

피터 파커는 집중하며 필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간혹 멈칫했다. 간간히 눈꺼풀을 떨던 피터 파커는 잠시 한숨도 내쉬기도 했다.


그러네.

분명히, 참혹한 이야기였다.



이 사건에서 토니 스타크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억울한 부분은, 막시모프 남매의 비극 건부터 시작됐다. 소코비아에 밀수되어 막시모프 남매의 삶을 파괴한 스타크 사 무기는, 높은 확률로 오베디아의 대활약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또 다른 부분은 울트론의 탄생 건부터 시작했다. 셉터 코드롤 활용한 A.I 개발 시도 자체의 목적은 향후 일어난 우주 전쟁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선한 목적이었지만, 이상하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갑자기 인류 멸망을 최종 목표로 잡는 울트론 A.I가 탄생해버렸고, 그 울트론이 서울과 소코비아에 참혹한 참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리고 이 사건에서 토니 스타크가 고통받았던 부분은, 이런 부분이었다. 하나, ‘완다’로 인해 토니 스타크의 트라우마가 강렬히 되살아나, 부분적인 불면증이 재발했단 것. 거기에 꽤 거대한 죄책감이 더해진 것. 둘, 몇 년 사이 꽤 막역해진 브루스 배너가 ‘완다’로 인해 헐크에 대한 제어를 잠시 상실했고, 이로 인한 민간 피해로 비난받았으며, 결국 몇 년간 퀸젯 하나와 함께 실종됐다는 것. 셋, 어벤저스가 ‘소코비아 협정’의 장 앞에 서서 결국 갈라지게 되었던 시발점이었던 것.


…그렇지만, 결국 ‘가족과 국가’를 잃게 된 ‘완다’는 그녀의 반려자를 이 사건으로 ‘탄생’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더 질문 있어?”


그리고 이런 엠바고 되었던 진실들이 담긴 얘길 낱낱이, 동경하던 영웅에게서 듣게 된 멘티의 심정은.


“…….”


복잡함 그 자체였다.


“저… 한 번도… 이런 얘기….”

“내 탓이나 어벤저스 탓이 있다고 비난하는 기사는 본 적 있어도, 디테일한 건 몰랐던 거겠지. 소코비아 협정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는 진실 반영하긴 해서 역사책에 어벤저스 탓이라고 적나라하게 적혀 있더만. 그래도 막시모프 남매에 대한 건 건들지도 못하게 묻어버렸지. 하이드라 얘기도 얽혀 있고, 걔네 출신에 했던 짓이 다 까발려졌으면, 글쎄. 겨우, 정말 겨우 협정 때에서야만 내가 걜 보호해야 했을까? 애초에 매국자로서, 얼굴 못 들고 다녔을걸? 가뜩이나 그쯤 정부 및 대중 분들께선 우리한테 성인군자이길 요구하시던데. 굳이 한다면 나랑 울트론 탓만 하는 게 그나마 안전하잖아.”


그래도 요즘 교과서는 리뉴얼이 빠르더라. 게다가 몇 가지는 내 눈치도 잘 안 보던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역사학계의 고집인가 싶었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토니 스타크는 말한 뒤, 턱을 괴면서 창밖을 보았다.


“그래서… 완다 씨는. 스타크 씨는 싫어 복수하려고 하셨었지만, 지구 멸망이 싫어서 처음으로 어벤저스에 같이 동참하셨던 거고요. 그리고 호크아이 씨의 인도로 좀 더 참여하게 됐고요?”


피터가 질문을 던져도, 토니의 시선은 창밖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나랑 나름 회포를 풀긴 했어. 조금 혼나긴 했지. 걔가… 나한테 한 일이 있으니 그걸로 상쇄하자고 하니 더 날 때리고 싶어 하긴 했지만, 뭐. 실제로, 심하긴 했잖아? 딴 건 몰라도, 난 브루스 건드렸던 건 좀, 봐줄 순 없었거든. 그런데 바튼이 너무 싸고돌고 나한테만 뭐라 하길래 나도 뭐, 귀찮아서 접었고. 그렇다고 아예 책임 없던 건 또 아니라서.”

“음, 그래서 여전히 막, 사이가 좋진 않으신 거고요.”

“난 유사 인턴으로 치기는 했으니까 나름 이것저것 챙겼던 건데, 걔 생각은 좀 다를 수도 있지. 애초에 나중에 내가 보호하던 데에서 튀어나가 팀 캡틴으로 간 거 자체가. 기억나? 공항에서.”

“어, 음…. 음….”

“내가 일부러 그때 봐준 건 아는지 몰라. 나중에 몰래랍시고 대놓고 비전 만나는 거 다 봐줬는데. 비전한테는 내가 데이트 날까지 지정해줬어.”

“…….”

“어째 내 자식들은 항상 내 말에 순순하지는 않더라고.”

“…….”


피터 파커는 단호하게, 스타크 인턴십 및 스타크 사에 대해, 완다 막시모프 씨와 비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저들이 적대는 안 해도 최소한 편한 사이들은 아닌 게 분명하다. 큰일 날 뻔했다. 신나서, 엄청, 무례해질 뻔했다. 그대로 만났으면 분명 다 떠들었을 텐데.


“어쨌든 나랑 걔 불편해. 만날 일 생기면 잘 처리해 봐.”

“네…. 그럼요.”

“그리고 아까 일러둔 대로, 통화할 때 힌트 많이 퍼부어줘도 돼. 몇 가지는 강조해도 되고. 특히 토르 뒤통수는 때리기 위해 있는 거라고 해. 금발 양아치는 금발 양아치 취급을 해 줘야 한다고.”

“…스타크 씨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직접적으로 통화할 때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시는 건 처음이신데.”


너무 많이 한다거나, 토니랑 친하게 지내라는 거 빼곤요. 토니 스타크의 눈동자가 드디어 창가에서 떨어져서, 피터 파커에게 똑바로 와 닿았다.


“할 생각 없었는데. 넌 보아하니 매번, 자꾸 삽질하던데. 자기 책임이니 어쩌니. 이거 말해서 잘 될지, 어떨지. 미래를 망치니, 어쩌니. 약간, 뭐. 그래. 그게 뭐 틴에이지식 호들갑일 수 있지. 내가 나이 먹어서 공감을 못하나 보지?”

“…….”

“…뭐야. 오늘은 나 나름 자제했어. 그렇지? 최근에는 이제 조금, 네가, 그. 살짝, 기특한 말을 하니까, 나름 자제하고 살잖아? 그런데도 방금 거 아웃이야? 까다롭네.”


피터 파커는 평소보다 덜 신랄하긴 했던 토니 스타크가 그래도 자신의 눈치를 슬쩍 본 것을 깨달았다.


“하여튼 이리저리 미리 알려줘도 어차피 크게 바뀔 일은 없을 거야. 그때, 내가 지금 아는 거 다 알았어도, 그 이상 준비할 순 없었어. 정말 나는 할 만큼 다 했거든. 정말로, 다했거든.”


얼마나, 얼마나 지독하게 준비를 했어야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은 뭐라 할 거야? 드디어 아이언맨의 과거 작태에 대해 뭐라 하려나? 너 나한테 따지는 레벨도 이제 꽤 늘었잖아.”


토니 스타크가 일어나려는지 꼬던 다리를 풀었다. 아까부터 만지작대던 탁자 위의 다스 베이더의 레고를 깔끔하게 루크 스카이워커 레고 옆에 똑 소리 내며 놓더니, 그는 슬며시 질문도 무슨 레고 조각이라도 툭 던져 놓듯이 물었다. 피터는 탁자를 뚫어지게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들으면서 생각했는데… 세상이 이미 스타크 씨를 오랜 시간 많이 탓하고 있고, 스타크 씨도 스타크 씨를 충분히 많이 탓한 거 같아요. 지금도 계속 자기를 비난하고 계시고요. 그러니까…. 스타크 씨가 스타크 씨 편이 아닌 거 같아요.”


피터는 잠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 저는 그냥, 스타크 씨의 편이 되고 싶어요. 스타크 씨 편이 너무 없는 거 같아서요.”

“…….”

“그러니까, 저는 계속 팀 아이언맨이네요.”


피터가 희미하게 지은 미소에, 아이언맨의 호흡이 잠시 느려졌다. 토니 스타크는 탁자를 내려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래. 피터. 결국 너는 그럴 거 같았어.”


방금…, 뭐라고.


@BULJAE_22


이제는 두 스타크가 너무나 같은 목소리가 되어 버린 덕분에, 호칭 하나가 바뀌었다고 저 소리가 마치 ‘토니’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스타크 씨는 늘 자신을 Kid라고만, 하셨는데. 

피터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울 기세로 고개를 휙 들었을 때, 토니 스타크는 이미 뒤통수를 보이고 있었다. 피터 파커는 <토니 스타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배웅하는 수밖에 없었다.



훈련 대신 짧은 인터뷰로 채운 일요일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고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스타크 연표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발생했고, 피터 파커의 통화 계획에도 여러 첨가 자료가 추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본부 자기 방에서 수정을 끝낼 때까지 끙끙댄 피터 파커는, 작전 타임을 모두 완료했을 때에야 집에 귀가하면서 패트롤을 돌기로 결정했고, 그 패트롤이 끝난 저녁이 되어서야 메이와 행복한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저녁 시간에 침대라는 묘한 장소 대신 반드시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 구석에 앉아있겠다고 선택한 스파이더맨은 한숨과 함께 연표를 다시 붙들고, 아이언맨 포스터도 번갈아 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스스로에게 약간 수치스러운 고통이라고도 생각해서인지 어디 말도 못하고 캐런조차 멀리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물론! ‘연애 초는 무슨’이란 생각을 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던 거 같은데. 그래, 토니가 상태 안 좋으니까! 그걸 우선시하며 지내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나.

이제 피터가 하게 될 통화들을 거친다면, 피터 토니의 연애 기간에는 말도 안 되는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할 것이다. 피터 파커에게 지금 시기는 연애 시작한 지 일주일 될까 말까 한 초창기인데, 저쪽은 이제 몇 년을 달려 버릴 것이니까.


다행스러운 건, 스타크 씨가 표현한 소코비아 사건 직전까지 시기의 ‘토니 스타크’는 비교적, 안정적인 편이었단 것이다. 그 이후 극심한 트라우마를 재발당해 버리고 고통을 당하게 되긴 하지만, 마치 말하자면 고통의 레일에 올라타 버린다는 느낌에 가깝니만, 정말 그건, 이미 괴롭지만…. 하여튼 토니 스타크는 어벤저스 멤버들과 나날이 더 친해지고 우애를 다질 것이다. 중간에 무너진 쉴드 요원들도 잘 활용하고 캡틴을 도와 하이드라를 쫓으며 1년이 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찢어질 때 더 고통스럽겠지만. 하여튼, 토니 스타크가 나름 잘 지내는 시기… 연애도….

자신은 며칠일 텐데, 토니 스타크는 자신과 1년 넘게 연애를 해 버리겠지. 자신이 더는, 응해줄 수 없는 수많은 것들 때문에, 기분이 많이 나쁘진 않을까? 토니는 진짜, 스캔들 잔뜩 낼 정도로 음, 매우 성숙한 관계를 많이 겪어본 사람이란 말이야.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후, 크게 한숨을 쉰 후 피터는 마법의 폰을 잡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저, 안녕. 토니! 임시 심장을 바다에 던진 지 일주일이 지난 기분은 어때요?”

[“끝내주지? 다들, 가슴팍에서 이상한 소리 안 나는 물건 사는 거 치사했던 거 같더라고? 엄청 상쾌하잖아, 아침이. 그거 알아? 내가 건강 주스 이제 조금 덜 먹는 거?”]


-결국 그날 밤 피터 파커의 고민은, 정확하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곧 100일이잖아, 피터. 이번엔 어떤 선물이 좋을 거 같아? 아, 내가 센스가 넘쳐서 네 선물은 필요 없어. 그냥 네가 ‘달링’이라고 이십 번 만 불러주면 퉁쳐줄게. 어때? 엄청나지? 나 사실 엄청 쉬운 사람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잘못 알고 있어. 나처럼 쉬운 사람 또 어딨다고.”]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 것만큼은, 연애 초보에게는 너무나 아픈 상황인 것만큼은 확실했지만.


[“피터. 솔직히, 200일이나 됐잖아. 사실 토니 스타크 인생에 이렇게 얌전히 사귀는 일 별로 없거든. 그러니까 200일 기념으로 그, 혹시 들어 봤어? 폰으로…. 그, 모르지? 그런 거 같네, 확실히 모르네. …미안. 그, 아니라. 알아, 기억해. 너 모태솔로라고 했잖아. 음. 젠장. 아니, 이 나이 먹었는데, 너도 얼마나 늙었는데 말이야. 아니, 잠깐. 어이가 없잖아? 하, 참나. 화나네, 좀. 어? 왜 몰라? 이상한데? 역시 너 갇혀 있지? 대체 내 양심이 왜 아파야 하는 걸까, 응? …됐고, 이번엔 네 목소리로 모닝콜 녹음하는 거, 허락 안 하면 화낼 거야.”]


가끔은 혼자 뭔가 말 꺼내고 찔러 보다가 주저하는데, 피터 파커는 완전히 이해해내진 못했다. 목소리가 두근거려서 얼굴이 너무 화끈거린단 것만큼은,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직접 실물에 닿아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중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포착했지만, 뭐. 이게 또 연애 경험 차이에서 비롯되는 거겠지.

하지만, 그들의 통화에서 오가는 대화는 연애 외의 요소에 임무와도 관련 없는, 그런 소소한 부분들도 분명히 많았다.


[“아, 테네시 주에서 그때 날 도와준 꼬맹이, 앞으로도 좀 지원 좀 해줄까 봐. 나름 괜찮은 과학도가 될 거 같더라고. 오, 너도 동의할 정도면 역시 괜찮은 인재겠네.”]


[“애꾸눈 아저씨가 저리도 처량해 보이는 것도 참 드문데 말이야! 아니, 좀 비극도 맞는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건 아닐까? 비서 채용되고 싶다고 찾아온 애 내가 받아야 해, 쫓아내야 해?”]


[“음, 그래도, 누군가랑 바로 옆에서 연구를 같이하니까, 좀 낫긴 하더라. 너랑 있는 거만큼은 아니긴 한데, 일단 주변에 똑똑한 친구가 대놓고 옆에 있는 것도 꽤 좋더라고. 부러우면, 너도 좀 와서 돕든지?”]


[“그거 알아? 역시 얼음과자 할아버지가 꼰대는 맞거든. 어릴 때 착한 짓만 했나 봐. 근데 그런 거치곤 헬스 기구 파괴하는 습관은 스스로 반성하는 게 좀 웃기거든? 내가 진짜 방송국에 꼭 보내주고 싶은데 참고 있다니까. 우리 영웅이 얼마나 우리 직원에게 혼나는지 좀 봐야 했는데!”]


[“요원들은 왜 다 속내를 모르겠지. 둘끼리만 알아듣는 말하고 깔깔대는 거 되게 아니꼬워.”]


[“헐크를 만약의 경우 제압하는 경우에 대해 얼마 전에 논의해 봤거든. 허니가 듣기엔 어때? 내 아머가, 어찌 잘만 개량하면 그 무지막지한 녹색 덩어리를 제압할 가능성이 있어 보여?”]


그리고 여러 통화들을 통해 확실해지는 것은, 토니 스타크가 생각보다 다양하고 즐거운 우정을 다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터는 결국 별수 없이, 피할 수 없이 천천히 비극의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이 통화에서 행복을 다소라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토니 스타크가 잠도 못 자던 때랑 비교하면 정말 마음도 편했고.


[“딱 하나 문제점은 내 훌륭한 박사 친구가 잠을 너무 좋아해. 왜 내 말을 들으면 잠을 자지? 뭐가 문제일까? 수면 패턴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나 정도 유명인의 말이 재미없을 리가 없잖아, 그치, 달링…. 잠깐, 아니. 왜 웃지? 내 편 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세계 최고 유명인과 사귄다는 자각은 있는 거야, 너?”]


어느 정도 멘탈이 회복되어간 덕분인지 가볍지만 즐거운 태도도 꽤 늘어서, 피터 파커는 영웅이 아닌 토니 스타크랑 다시 얘기를 나누는 듯한 아득한 향수도 느낄 기회도 있었다.


[“핏, 내가 굿나잇 키스 모음집 갱신 좀 하려는데 협조할 거 뻔히 아니까, 거절은 하지 말고. 물론, 최근 통화 간격 멀어진 건 조금 열 받긴 한데, 넌 내가 안전하면 멀게 하니까…. 음…. 그래, 네가 조절 못 하나 보지. 용서는 해 줄게.”]


어찌 됐든, 토니 스타크는여전히  피터 파커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냥, 멈추지만 마. 늘 나한테 전화는 걸어야 돼. 아, 네가 그냥 막 안 하지 않을 건 알거든? 우리가 얼마나 오래 알았는데, 그럼. 내 핏은 절대 날 그냥 두지 않으니까. 알긴 아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비는 해야지. 내가 이젠, 꽤 덕을 쌓아서 말이야. 만일 네가 잠적한다 쳐도 9년 동안은 참아줄 만큼은 거대한 아량이 생겨 있거든. 아, 근데 10년은 안 돼.”]


그리고 그 길어져 가는 연애 기간 동안, 그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을 품고, 헤어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터가 헤어짐을 요구할 것을 늘 막으려고 들었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꼭 그래 줄 거지, 피터.”]


과분할 정도의, 기나긴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간절한 매달림에, 그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애 초보자 피터 파커는 형언할 수 없이 아득해질 따름이었다.



“끊겼네.”


토니 스타크는, 피터 파커가 애정 공세에 대한 거절에 서툰 것을 꿰뚫고 있다. 누가 모태솔로 아니랄까봐. 그래선지 자신이 던진 간절한 말에 숨막힐 것처럼 구는, 언제나 처음 연애하는 것 같은 피터의 분위기를 실컷 즐기며 전화 끊기고 나서 잠시 그는 웃어댔다. 그리고 그는 마침 통화를 하게 된 장소였던 어벤저스 타워 내 ‘자신의 방’ 휴게실에 있는 안락의자에서 다리를 꼬고 있다가 일어섰다.


“오늘은 은근 귀엽게 굴었던 거 같지? 허락도 다 받았으니까 음성 녹음본 예쁘게 파일화 해두자고, 자비스.”

[당연히 이미 해 뒀죠, Sir. 보편적 인간 기준으로는 다소 별나다고 판단될 정도의 수집이긴 하지만요.]

“오늘 분량의 아빠 디스 또 시작이야?”


토니 스타크는 투덜대면서 느긋하게 휴게 공간 구석의 바로 가 준비해 뒀던 레드와인을 와인 글라스에 따랐다.


“그나저나 저번 달 마크43과 마크44 헐크 버스터에, 자동 경비인 센트리 모드 만드는 추가 아이디어도 같이 제공했을 때 피터 목소리, 은근 톤 높고 내 눈치 보면서 어색한 게 귀여웠는데. 좀 이따가 다시 들을까? 사실 그중에서도 리펄서 연사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가 제일 귀엽긴 했지만, 그 앞부분도 나름 좋단 말이지.”

[네, 이따 말씀하시면 바로 틀어드리겠습니다. 물론 별나긴 하다는 사실은 기억해 주세요, Sir.]

“지독한 사랑이라고 해 줘, 자비스. 너도 내가 사귄 지 1년 된 사람과 손조차 못 잡아본 건 처음 보잖아. 이 꼴까지 됐으면 사람이 좀 집착도 할 수도 있지.”

[비교할 만한 표본이 없어 감히 답변은 못 드리겠네요.]


치즈라도 같이 먹으며 오늘 통화의 끝내주는 여운을 즐길까. 토니는 콧노래 나오는 기분을 참아가며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긴, 이런 대상을 어디에다가, 또 비교를 할 수 있겠어. 미국을 넘어서 전세계에 이런 존재는 또 없을 테니까-. 아, 그것도 좋았는데. 은근 핌 테크놀로지 관심 좀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할 때. 양자에 관심 좀 가져보라는 거, 내 전공이 완전 다른 건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게 제안하는 척하는 게 더 귀여웠거든. 그걸로 할까? 맞다, 자비스. 그래서 행크 핌이랑 우리 아버지랑 얼마나 사이 나쁜지는 정리해 놨어?”

[언제든 보실 수 있게 데이터베이스에 백업에 뒀습니다.]

“쉴드랑 연관성 있던 것도 전에 봤었잖아. 확인했지?”

[하이드라와의 연관성도 수집해 뒀습니다.]

“어쩌면 언젠가는, 확실히 쓸만하거나 만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피터는, 꽤 예언가잖아?”


토니는 만족하며 미니 치즈 몇 조각을 꺼내 와인과 테이블에 예쁘게 차려놓았다. 기분 좋을 때 자기 자신을 대접하라는 피터 신님의 전언을 너무나 잘 따르는 훌륭한 신도로서, 그는 자신의 뛰어난 의식 행위를 칭찬했다.


“그럼, 이제 드디어 이 보고를 할 차례야, 자비스. 피터 전화 있는 날마다 내가 물어보는 건 이제 너무 잘 알잖아.”

[당연하죠.]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토니의 앞 허공에, 자비스가 띄우는 화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추정하셨던 ‘비슷한 목소리의 가수들’의 미발표곡은 계속 추적 중입니다. 제가 찾은 바로는 여전히 해당 가사를 가진 노래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해당 가수들의 중학교 시절 습작들도 찾아봤으나 없었습니다. 해당 가수들과 비슷한 다른 목소리도 세계에서 추가적으로 찾아 비교 분석했으나 여전합니다.]


토니는 잔을 내려들고, 찰랑거리는 와인을 들여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1년에 데뷔한 특정 가수가 가장 비슷한 목소리를 지니셨다 하셨는데, 장르적 일치성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그런 가사를 가진 노래를 만든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업데이트된 사항은 추적하겠습니다.]

“…단지 프로 단위로는 부족한 거 같아. 아마추어나, 데뷔 이전일 가능성까지 넓혀야겠어. 그럼 사실 찾기 더 쉬워지지. 아마추어이면 아마추어일수록 당시 피터가 머물렀던 지역이 명확해질 테니. 혹은-.”


토니 스타크는 잠시 멈칫했다가, 과도한 추론에 이를 뻔한 자신을 추스르고 와인을 한 번 쭉 들이켰다. 치즈 조각을 포크로 살짝 하나 찍어 들면서, 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최근 출시되어서 먹어본 적 없던 치즈였지. 내 냉장고 구석을 잠시라도 차지할 보람이 있던 존재였는지는 지금 알아봐야겠네.


“아니, 자비스. 그냥 데뷔 전 학생들의 음악 시간을 다 추적해도 돼. 다음 보고 때는 그 시기 세계에서 접속 가능한 모든 음성 파일은 다 뒤져 보자고.”

[알겠습니다, Sir.]

“피터가 요새 엄청 느긋해졌단 건, 그만큼 내가 위험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단 거니까. 그러니 서두르진 않아도 돼, 자비스. 물론, 내게 전화를 계속하는 걸 보면, 확실히 언젠가 위험하긴 하겠지만….”


토니 스타크는 언제나 그렇듯, 피터와 통화를 한 직후에만 나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턱을 괴고 포크를 괜히 한 번 더 까딱이며 치즈 먹는 것에 뜸을 들였다. 그래, 그나저나 그때 피터의 배경음으로 들리던 그 노래, 가끔씩만 잘 들렸지만 가사만큼은 꽤 괜찮았지. 괜히 그 상황에서도 기억에 담아두고 신경 쓸 정도였으니, 뭐. ‘Been around the world and I can't find my baby’라니. 어쩐지 피터 얘기 같기도 해서…. 그래, 피터가, 요새 하던 얘기들…. 어벤저스와는 어째 동떨어진 듯도 해 보였던 것들. 좀 의미 없이 이어지던, 알 수 없던 정보들…, 스톤들 관리는 필요한 거 같긴 했고…. 

찝찝하던 핌 테크놀로지. 양자…. 핌 입자…. 다세계 해석. 또는-.

또는. 그러니까.


“…세계 또는 시간과 관련된 잡이론이 나와 있는 영역이긴 한데.”


-존재를 찾을 수 없는 노래가, 아직 만들어진 적 없던 노래라면?

혹은, 다른 세계의 노래라면?


아니. 피터 말대로 마법이라도 없는 이상,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긴 했지만.

그는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과도한 도약과 추론을 느긋하게 지웠다. 물론 핌 입자가 매우 대단한 물건인 것은, 알아본 결과 확실하긴 했고 아직도 미지인 부분이 많은 듯하지만 분명 한계도 있을 것이고. 아무래도 현대 물리학계 최신 논문 선에서 제거될 만한 추론일 것이다.


역시 밤이 되면 두뇌가 제멋대로 굴러갈 때가 있군. 감성의 시간이긴 하지.


“자비스, 역시 이럴 땐 시끄러운 노래를 트는 게 분위기 있겠지?”


바로 들려오는 격렬한 음악의 비트에 맞춰 토니 스타크는 다리를 꼬면서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그리고 자신의 괴상한 사고에 큰 유감과 감동을 느끼며 느긋하게 새로 산 치즈 조각을 삼켰다.

먹어본 적 없던 치즈인데다가 꽤 싼 편이었는데도 희한하게 자기 취향인 것이, 묘하게 맘에 들었다.



“완다 막시모프 씨, 언제 오시는지 너무 궁금해.”


분명 곧이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안 오셨단 말야! 물론 겨우 사흘 기다린 거지만! 투덜거리는 스파이더맨은 생텀 근처 지붕에서 완다의 멋진 손동작을 흉내 내 보고 있었다. 은근히 춤 같은데, 그 중에서도 예술 무용에 가까운 그 손동작들을.


[물리적 공격보다는 마법적 공격이 더 멋지게 느껴지는 거야?]

“그, 멋지다는 게 중요한 걸까? 굳이 말하자면, 꼭 그렇진 않아. 각자 다르게 멋진 느낌이지! 하지만 내가 못 하는 거란 점에선, 은근 더 멋진 점도 있긴 하고!”


스파이더맨은 유튜브 광고에서 본 바 있던 완다의 손동작을 흉내를 내면서 주변에 거미줄을 쭉쭉 뿜어보았다. 오, 내 전투 동작이 이 방식을 적용하면 좀 더 정갈해 보일 거 같은데!


“아무튼 아웃라이더 조사를 도와주신다는 게 너무 고마운걸. 인터뷰도 좀, 받아야 할 거 같고. 토니 입장에서 본 사건이, 아무래도 막시모프 씨 입장에서는 또 많이 다를 거 같았거든.”


진실이란 걸 알려면, 다른 입장도 보아야 하는 느낌이었어. 피터가 동작을 뚝 멈추고 그냥 손바닥으로 짝 박수를 친 후 그냥 지붕 위에 철푸덕 앉았다. 어디든 똑같은 맨해튼 풍경이긴 하고, 높은 곳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생텀 위도 나름 고민할 때 안정감 있는 장소이긴 했다.


“인터뷰할 때 스타크 씨는 자세히 얘기하는 일이, 필요한 일인 건 알아도 은근 더 삼가는 거 같기도 했어.  여태까지 일들은 좀 오래도록 곱씹은 내용들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곱씹으신 시간도 짧고 최근까지 고생한 부분이셨을 테니 더 많이 불편한 게 틀림없어.”

[걱정해?]

“어.”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고, 스파이더맨은 끄덕이던 고개를 잠시 멈칫했다. 아, 그렇구나.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 나온 김에 이번엔 토니에 대한 걱정도 좀 얘기해 볼게, 캐런. 사실 이것도, 혼자 해 보려 했는데, 좀 복잡해서. 네드는 그냥 즐기라고만 말해서 도움이 안 된단 말야. 걘, 걘 너무 로맨스 영화를 많이 봤어!”

[그쪽 토니 스타크에게 곧 다가올 사건이 걱정되는 거야? 여태까지 늘 그랬잖아.]

“그건 늘 그렇지, 맞아. 근데… 조금 더 있어. 내가 토니에게 무거운 존재인 건,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래서 임무 마치면 분명, 끝날 관계인 것도 걱정은 했거든. 했었는데….”


스파이더맨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한적하고 누구도 내려다보고 있지 않던 생텀 지붕, 햇빛이 정가운데에서 그를 숨김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근데, 하필, 내가 하필이면 토니의 오랜 연인이 되어갈 줄은 몰랐거든? 이걸, 이걸 예상을 못 했어. 나중엔 정말, 토니는, 나 없으면 안 될 거 같은데.”

[넌 연애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 그쪽은 오랜 연인으로 대하는 게 부담스러워?]

“부담? 그런 것도 있을 수도 있고. 그, 억울한 느낌도 있고. 이상하거든. 기쁜데, 좀 나쁘고, 그, 이상해.”


스파이더맨은 양손으로 볼을 쫙 감쌌다.


“그래도 통화하다 보면, 정말, 정말 좋아. 요새. 물론 날이 갈수록 달콤한 수위가 높아지는 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 외에도 토니가 이렇게… 나름 안정된 건 오랜만이란 기분도 든단 말이야. 어벤저스가 어떻게 ‘어벤저스’가 정말 되어갔는지를, 이제 진짜 아는 기분이기도 하거든. 정말, 서서히, 친해지고 있으시단 말야. 토르 씨에게 지구 농담 주입하시는 것도 신기하고, 배너 박사님과 연구실 토크하시며 아이언 리전 대량생산에 대해 상의하신다는 것도 듣기 좋았고, 점점 배너 박사님이 토니에게 장난치거나 구박하시는 것도 좋았고. 로마노프 씨랑 서로 디스하시는 것도 이젠 은근 관심 섞인 디스인 게 느껴진단 말이야. 바튼 씨 무기 만들어주는 게 너무 귀찮다고 툴툴댈 때도 있지만 정작 바튼 씨의 사용 후기를 기대하는 게, 정말 귀엽기도 하고. 게다가, 난 프로젝트 인사이트 사건 말이야, 당시에 캡틴이 말 안 하고 도움 요청 안 했다고 투덜대는 <토니 스타크>를, 여태껏 상상을 못 해봤었단 말야. 두 분, 친밀한데 살짝 거리도 있는 게 지금 모습이시니까. 그러니까… 난 어벤저스가 가장 화목한 순간의 <토니 스타크>의 상황을 귀로 듣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통화가, 미래에 닥칠 일은 슬프지만, 나름 좋은 부분도 있기는 하거든.”


속사포처럼 전화에 대한 다양한 감상을 중얼거린 후, 스파이더맨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런 안정감을 주는 요소 중에, 그런 수많은 소중한 것들보다도 훨씬 중요하게 여겨지는… 정체 모르겠고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소중하디 소중한 ‘오래 사귀고 있는 연인’만 없다면 좀 마음이 편했을까 싶긴 해.”

[소중히 여겨지는 게 기쁘고, 그렇지만 기쁘지 않고. 그렇다는 거야?]

“…….”

[말하자면 ‘복합적’인 감정이구나. 안타깝지만 이것만큼은 나로서도 분석이 어렵네, 피터.]

“그래? 나 그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이야?”

[극단적인 걸 보니 분명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반응인 건 맞는 거 같네. 이건 분석됐어.]


놀리지 마, 캐런! 스파이더맨은 한숨과 함께 결국 탈탈 털고 지붕에서 일어섰다.


[스파이더맨을 지원해야 하는 입장에서, 효과적인 솔루션을 제안할게. 다른 얘기를 할까, 피터?]

“말 돌리기라니, 너무 인간적이어서 나 진짜 감탄했어, 캐런.”


스파이더맨은 웹슈터 상태를 점검한 후,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근육 상태도 점검했다. 여기 편하긴 한데 지금 시각엔 햇볕 너무 내리쬐어서 불편하기도 하네. 자리 좀 옮겨서 주변을 망볼까. 곧 옆에 있는 건물들에 거미줄을 뻗은 그는, 시원한 스윙과 함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몇 번의 그네 타기로 순식간에 근처 그늘진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서서 멋지게 착지했다. 오, 생텀 내려다 보이는 여기 전망도 꽤 괜찮네. 스파이더맨은 괜히 한 바퀴 텀블링하면서 건물 옥상의 문 옆에 있는 벽에 도착해 턱 등을 기댔다.

좋아. 적당히 침침하다. 낮이라 해도 이 정도가 좀이라도 쉬기엔 딱이지.


“다른 얘기 하자, 캐런. 어차피 사건도 안 터지고 있는 행복한 뉴욕 한가운데라, 내가 좀 맘이 편한 상태거든. 이번엔 뭘 할까. 그래, 긍정적인 얘기할까? 토니가 얼마나 귀여운지….”

[피터, 미안한데 그 얘기는 오늘 세 번 정도 반복한 얘기야. 물론 사귀게 된 지 얼마 안 된 애인에 대해 매순간 떠올리는 것은 평범한 일이고, 난 지겨운 거 못 느끼는 존재니까 몇 번이고 반복해도 되긴 하지만.]

“난 가끔 너의 학습 능력이 놀라워….”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스타크 씨한테 배운 거 너무 많은 거 아냐, 캐런?


“음, 그럼 내 임무 진행 상태에 대해 같이 검토해 볼래? 내가 연표 나름 열심히 가다듬으면서 진행 중이거든? 이 흐름 이상 없는지 체크해 봐.”

[그래. 얼마든지.]

“일단 기술 개발은 확실히 체크했어. 분명 소코비아 사태… 벌어지기 전까지 헐크 버스터 완성될 거 같아. 마크45도 착수 상태야. 이번엔 좀 근골격계를 닮게 설계하게 됐어. 유니빔 화력도 상승시키고. 아이언 리전은… 사실 내가 빨간색 다음으로 파란색 좋다고 하니까 파란색 쓰던데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겠지? 여기도 그랬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종합하자면 기술적 대비는 충분히 마쳐둔 상태라고 말하는 거구나.]


스파이더맨은 힘차게 끄덕였다. 양 주먹을 불끈 쥐고서.


“응, 토니 무사히… 울트론 사태 넘길 수 있을 거야. 막시모프 씨만 무사히 합류한다면. 그리고, 영국 이상기류 바로 포착하시고 토르 씨가 에테르 관련 사건 만났던 거, 바로 눈치채 버리셨었거든? 내가 말하기도 전에 말해 버리셨어. 내가 사실 에테르도 조금… 안전한 데에 두는 게 좋다고 조언은 했거든. 그렇지만 지금의 스타크 씨도 어디가 더 나은 장소이신지 모르시고, 그때 타노스도 에테르 갖고 있던 거 보면… 어차피 결국엔 뺏기겠지? 정확하겐 뺏겨야 하겠지? 그러니까 아마, 이건 이후 결과에 큰 상관이 없을 거 같아.”

[전쟁이 결국엔 차근차근 다가오는 거 같네.]

“응…. 그리고 토르 씨 정말 많이 닦달하고 있는 거 같아, 우리 토니. 지구에 있는 김에 최대한 세뇌시켜 두겠다고 계속 말하더라고. 물론, 내가, 음. 그러면 좋은 점 있다고 하긴 했는데. 토르 씨가 타는 퀸젯이나, 자가용이나, 아니면 토르 씨 관련 벨트니 망토니 뭐니 하는 거에 죄다 ‘힘들 때는 동료를 찾아 와, 약속 지키고, 이 금발 양아치’ 같은 음성이 반복되게 한 건 조금… 음… 스타크 씨보다 두려운 점도 있기는 하더라고. 거기의 토르 씨, 지구에서… 되게 피곤하게… 살고 계실 거 같아. 혹시 그런 거때문에 제시카 씨랑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 물론, 일단 헤어지시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 어느 정도 토르의 행방에 대한 대책은 계속 유지 중이구나.]

“나중에, 최종 결과 봐야 정말 제대로 되는 건지 알겠지만.”


나름 신중하게,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나머지 스톤들에 대해서는 대책을 알려주고 있어?]

“…음, 사실 내가 이 타이밍에 이걸 말할까 고민이긴 한데. 사실 이제 하이드라 추적해서, 곧 셉터를… 찾으러 가긴 하실 거란 말이지.”


스파이더맨의 눈조리개가 가늘어졌다.


“스톤의 종류를 역시 모두 정확히 알려드릴까? 전에 직접 관련 있는 스톤들은 이미 말씀드렸었지만. 이제 곧 관련된 사건이 또 생길 거고, 에테르라는 세 번째도 알고 계셔. 애초에 토르 씨도 전에 토니에게 언급하신 바가 있다고 하셨고. 어차피, 정말 어차피 언젠가는 아셔야 될 정보이기도 하고. 나중에 너무 머리 아프게 아시는 것보다 지금 아는 게 도움 될까 싶기도 할까 싶어 내가, 고민이 돼. 아니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물론, 바로 전쟁이 날 거라고, 지금 겁주고 싶진 않아. 괜히 미리 스트레스로 다가가게 될까봐 걱정도 되고. 그래도… 몇 년 남았을 때부터 미리부터 알고 있는 상식이 갖춰진 상태라면, 더 침착하게 대처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젠 세상의 ‘상식’이 된, 그리고 스타크 씨에 의해 좀 더 공부해 둔 바 덕분에 피터 파커는 결국 잘 알게 되어 버린, 어떤 우주의 법칙을 관장하는 괴상한 물체들. 그런 초과학적인 것들에 대해, 저기 <토니 스타크>는 받아들이고 제대로 전쟁을 대비할 수 있을까?


“나름, 스타크 씨도 그런 정보 많이 알려줘도 된다고 내게 맡겨주시는 거 같기는 했거든….  통화할 때 힌트 많이 퍼부어줘도 되고, 몇 가지는 강조해도 된다고. 특히 토르 씨 뒤통수는 때리기 위해 있는 거라고 막, 엄청난 말씀을, 그날 인터뷰 때 해주시긴 했거든. 그리고, 음, 소코비아 전에 그나마 어려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제일 여유로울 멘탈을 가진 때가 지금이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음. 네 의견이 궁금해.”

[네가 예측을 원하니 해볼게. 나는 토니 스타크의 패턴 상, 필요 없는 이상한 시도를 하는 행동은 추가할 수는 있으리라고 봐.]

“…그래?”

[다만, 알다시피 그 당시 마인드 스톤을 제외한 스톤들 위치가 지구에서 닿을 수 없는 게 많아서 다 의미 없는 행동이 될 거야. 네게 못 닿고 있는 것처럼. 타임 스톤의 경우 마법사가 아닌 이상 생텀은 들어가지도 못할 테니까.]

“…엄, 그래?”

[그래도 토니 스타크는 계산해두지 않은 일을 하는 것보단, 미리 계산한 일을 나중에 하게 될 때 더 도움이 될 성향이니까. 임기응변도 꽤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심적인 안정을 따질 땐 전자가 좋은 걸로 알고 있어. 그래서 네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해.]


냉철하게 과거 아버지의 한계를 분석해내는 캐런에게, 오히려 피터가 머쓱해 머리를 긁었다.


“그럼 나 말한다?”

[그래.]

“그래도 걱정되긴 하니까, 한 번 스타크 씨에게 질문 문자는 보내 볼까?”

[그것도 동의해.]

“좋아, 상의 고마워, 캐-. 오, 저기네.”


피터는 매우 살짝 찌리릿한 감각을 느끼고 등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옥상 아래로 바로 뛰어내렸다.


추락하듯 비행한 스파이더맨은, 정확히 계산한 듯한 포물선을 그리며 졸음운전으로 비틀거린 버스에 치일 뻔한 어린이들을 안아 들고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다.


“롤러코스터였어, 얘들아!”


어안이 벙벙한 어린이들을 잠시 맞은편 건물 옥상에 세워둔 스파이더맨은 아이들을 기특하다고 순식간에 쓰다듬어 준 뒤, 혹시 1초라도 늦을까 봐 즉시 버스를 멈춰 세우기 위해 다시 아래로 날아올랐다. 물론 방금 전 버스의 바퀴들에 거미줄 폭탄을 뿌려둬서 속도가 이미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으니, 너무 걱정할 것은 아니었겠지만.



‘굳이 말해뒀던 부분인데 결국 이렇게 질문해 버리네, Kid. 힌트는 넉넉해도 괜찮다고 했을 텐데.’

‘물론 <나>라면 상태 좀 이상해질 거고, 네 뒤에서 이상한 짓을 할 거야.’

‘근데 네 목적을 방해하진 않겠지.’


토니 스타크가 계속 보내오는 담담한 문자를, 피터 파커는 물끄러미 보며 읽어내렸다.


‘살리는 게 목적이면 효율적이야. 추천해.’


이건, 대체. 하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그리고 앞으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나 이런 거까진 볼 시간 없어. 바빠.’


 이후 뚝 끊긴 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씩을 피터 파커는 노려보고 있어야 했다.

미셸의 ‘단체 회장님 만나서 일정 추가! 며칠 후 도착해. 파티 전엔 감.’이라는 문자와 ‘부품 잃어버린 데스스타 대체하는, 새로운 레고 주문함. 주문서 주소 그쪽임.’하는 문자, 해피의 ‘Kid, 네가 웬일로 요새는 자꾸 내 심장 건강을 물어봐 주냐? 가끔은 스릴러도 보는데? 문제 있어?’라는 문자도 치워두고, 피터는 메시지창을 껐다. 그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래. 어쨌든 스타크 씨 생각에, 자신이 할 일이 임무에는 적합하단 거지?


“대신 토니 마음엔 문제 생긴단 건가?”


이미 스타크 씨 인터뷰로 들은 내용만 해도 충분히 문제 생길 내용 많은데, 거기에 더 추가될 게 생기나? 고뇌하던 피터 파커는, 다음 순간 ‘어차피 저쪽 토니 스타크는 나 때문에 엄청 많이 고뇌 중’이라는 고통스러운 자각을 추가해 버렸다.


“…그래. 차라리 전쟁 이길 준비라도 빨리 하나씩 해두는 게, 덜 힘들지도 몰라.”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가, 결국 벌떡 일어서 의자에 앉았다. 그래, 토니를 살려야 돼. 오늘은 천장 말고 똑바로 앉자. 조금 진지하게 설명해야 하니까. 연표가 놓인 책상을 다시 한번 점검한 후, 스타크 씨가 스톤을 처리했던 방식들 중 자신이 알고 있던 사항도 다시 정리해둔 수첩을 펼쳐뒀다. 그리고 피터는 책상 위 딱 놓여 있던 그 폰을 드디어 집어 들었다.


“안녕, 토니? 잘 지냈어요?”


피터는, 당차게 인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로 틀리지 않기 위해 쫙 정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마침 마크45 설계 중인데, 잘됐네. 역시 오늘도 내가 하는 거 참견 좀 해줄래, Honey?”]


엄청 반기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피터의 머릿속은 번잡함 그 자체였다. 이때의 스톤 위치는-. 스페이스 스톤인 태서렉트는 아스가르드. 파워 스톤은, 곧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관여하게 될 예정이다. 마인드 스톤은 하이드라 연구소에 있고, 셉터라는 도구 안에 있으며 소코비아 사태 직전에 어차피 어벤저스가 해당 연구소를 털러 갈 것이다. 리얼리티 스톤은 토르 씨가 전에 말씀해주신 대로 콜렉터라는 외계인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소울 스톤은 ‘보르미르’라는 행성에. 타임 스톤은, 이쯤이면 아직 에인션트 원이라는 분이. 그래, 스트레인지 씨가 옛날에 말씀해주신 옛날얘기에 따르면 그 스승이신 분이 오래도록 보관하고 계셨겠지. 그러니까…. 좋아. 위치까지 다 말씀드리는 건 좀 그래. 위치의 경우는, 지금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스톤만 말씀드리자.


“오늘은 토니, 제가 저번에 말한 ‘스톤’에 대해, 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아, 네가 그때 말한 그 인피니티 스톤? 토르한테도 조금은 들었는데. 요새는 맥주 마실 타이밍에만 말하느라 맨날 까먹는지, 계속 세 가지만 제대로 말해서 별 도움은 안 됐지만.”]


토르와, 진짜 친하시구나. 다른 분들에 비해서 비교적 덜 바쁘기도 하고 연애하며 사는 일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 토르가 어벤저스 타워에서 노닥거릴 때가 있다는 이야기 자체는, 들을 때마다 계속 새롭다.


“네, 그 스톤들에 대한 얘기에요. 제 생각엔, 토니도 그 스톤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갖춰야 될 거 같아서요. 특히 우주에서 오는 것을, 지금도 경계하시니까 더 아실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요.”

[“와, 선생님, 제가 이런 얘기 정말 잘 듣는 거 알죠? 좋아, 해 봐. 나 앉았어. 자비스, 설계도 치워.”]


피터는 이런 토니의 장난이 항상 좋았기에, 작게 웃고 말았다.


[“필기 준비도 됐습니다, 선생님. 이번엔 무엇으로 토르를 괴롭히길 바라? 태서렉트 약속은 지금도 지겹게 세뇌 중이야.”]

“아, 토르 씨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 진짜 미리 알면 좋을 거 같아서 말씀드릴 거라서요.”

[“흠-. 그래. 그렇다 치고.”]

“-일단, 스톤이 총 6개 있다는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과 관련된 힘을 모두 갖고 있는, 엄청난 물건들인데요. 아, 절대 막 정한 숫자도 설정도 아니니까… 토르 씨로 증명 되죠? 스페이스 스톤 특징도 기억하실 거고…. 그러니까, 저 놀리는 거 아니라 진지한 거니까! 절대 의심하진 마세요.”


어딘가 말하면서 민망해진 피터 파커는, 곧 초등학교 현대 역사 만화에도 실리고 있는 내용을 말한다는 생각에 잠시 기묘해 하고 있었다. 그래, 정말이지, 계속 느꼈지만 이게 역사란 거겠지.


[“의심은 내가 보통 로디나 이상한 조직 요원들이나 애구눈이나 곧 들어올 새 비서한테나 하는 일이거든.”]


이 와중에 나오는 주변 디스가 오히려 피터를 편히 만들어줘서, 피터는 다시 웃어 버렸다. 아, 진지하려고 했는데!


“알겠어요, 토니. 그럼 말씀 드릴게요. 기억해 두세요. 일단 토니가 알고 있는 건, 포털을 만들 수 있던 스페이스 스톤, 심리를 조정하던 마인드 스톤. 저번에 토니가 발견했던 영국 사건과 관련된 게 바로 리얼리티 스톤. 이렇게 세 가지고요. 그 외에는 파워 스톤, 소울 스톤, 타임 스톤. 이렇게 있어요. 하나씩 특징을 말씀드리면….”

[“6가지. 마지막이 뭐라고? 내가 필기를 좀, 놓쳤거든?”]

“아, 타임 스톤이요.”

[“타임 스톤.”]


통화 저편의 토니 스타크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흐음-. 타임 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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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가 더 이뻐 보이는 건 착각일까요? ㅜㅜ... 글보다 빛나는 삽화 감사드려요.


어쩌다 보니 분량이 폭발했습니다...!

;- ; 이런 부족한 글에 대한 댓글과 관심 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재밌게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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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정이 미쳐 날뛰고........온갖 개인 사정이 겹쳐서 늦고 있네요.ㅠㅠ 

하지만 25화는 계속 쓰고 있습니다..!

하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