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렀어요?
- 아, 왔어?

본즈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떼어냈어. 살랑이는 바람이 커크의 노란 머리카락을 들었다 놓았어. 본즈는 담배를 아예 벽에 지져서 끄고는 커크 쪽으로 다가갔어. 한 발자국 다가섰을 뿐인데도 물씬 풍겨오는 상쾌한 향에 기분이 좋아졌어. 짙은 담배 냄새가 다 덮일 정도로 포근한 향이었어. 본즈는 그게 좋아서 괜히 허리를 끌어당겨놓고는 코를 서로 맞대었어.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니 커크가 장난스럽게 코를 부비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커크의 등 뒤로는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지. 본즈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살짝 키스를 하고는 커크를 놓아줬어.

- 왜 불렀는데?
- 그냥. 이거.
- 응? 뭐가요?
- 네 번호 좀 알려줘.

커크는 눈앞에 내밀어진 본즈의 핸드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어. 그리고는 본즈의 대답이 귀엽다는 듯이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기만 했어. 멀뚱히 내밀어진 손이 민망해졌지. 하지만 본즈는 꿋꿋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어. 이것도 결심이라면 결심이었지. 커크와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보고 입술을 부벼댄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도 커크랑 친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 그 동안이야 천천히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되레 도망갈 구멍만 파고 있는 커크를 보면 이대로 시간을 다 흘려보낼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 뭐야.
- 저번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
- 진짜야.
- 알았어요. 줘요. 이거 때문에 부른 거에요?
- 뭐,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커크의 팔을 끌어서 얼굴을 맞대었어. 입술이 와 닿는 따뜻한 촉감이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 커크는 양손으로 핸드폰을 살짝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키스를 했어. 떨어지려고 보니 목에 건 사원증이 서로 엉키어서 줄이 온통 꼬여 있었지. 본즈는 제 목에서 사원증을 벗어냈어. 그리고 줄을 다시 반대쪽으로 돌려서 풀어냈어. 커크는 그 동안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느라 여념이 없었어. 본즈는 핸드폰 화면을 슬쩍 넘겨보며 벗겨낸 사원증 끈을 손에 대충 들었어.

본즈는 옥상 난간을 등지고 기대어서 커크가 번호를 찍어주길 기다렸어. 바람이 선선하니 날씨가 꽤 좋았어. 고작 11개의 숫자를 누르기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본즈는 그 동안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어. 본즈는 시선을 들어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봤어. 그리고 끝까지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어. 본즈는 이제, 이 풍경을 보고서야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어. 주변에 빌딩은 빽빽하게 치솟아 있었지. 하지만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옥상 위로는 오직 하늘밖에 없었어.

커크가 사라졌던 날들 동안, 본즈는 자기가 커크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도 없었단 걸 뼈저리게 실감했어. 문자 하나를 남기려고 핸드폰을 싹싹 뒤져보아도, 찾을 수 있는 건 사내 메신저 대화 기록 뿐이었어. 그나마도 공문을 이메일로 전송했다는 사무적인 메시지가 마지막이었고. 네. 커크 대답 역시도 그게 전부였지. 사람들은 자기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했어. 오랜 시간 담당해온 거래처 직원, 결제 때마다 만나곤 하는 상사의 비서, 늘 저녁에 주차장을 순찰하는 경비원. 그리고 내 책상 저 건너편에 앉아있는 부하 직원.

본즈는 커크의 습관을 꽤 잘 알았어. 웃을 때 귀가 올라가는 거,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혀를 가만두질 못하는 거, 음식은 안 흘리고 먹는 법이 없는 거. 과장해서, 본즈는 하루 종일 그 리스트를 읊고 있을 수도 있었지. 본즈는 조금 더 ‘사적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어. 커크는 키스를 할 때 종종 눈을 뜨고 있는 걸 좋아했고, 다음날 아침에 옷을 입을 때는 항상 티셔츠를 먼저 입고는 했어. 어디를 만져줬을 때 가장 흥분하는지,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체위는 뭔지, 그런 질문들에도 본즈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어.

하지만 정작 본즈의 핸드폰에는 그 흔한 연락 한 번이 없었어. 본즈는 매일 사무실에서 텅 빈 책상을 지켜봤어. 커크가 없는 사무실은 평소보다 공기가 한층 가라앉아 있었지. 분명 커크는 회사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막내 직원이었는데, 그 전에는 대체 어떻게 일을 했었던 건지 손에 익질 않아 어색하기만 했어. 본즈는 커크가 남기고 간 호텔 명함 뒤의 쪽지를 계속 들여다봤어.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 처음에는 기다렸어. 그 사이에는 커크가 그어둔 선이 있었고, 본즈는 자기가 그 선을 넘어도 되는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했어.

돌이켜보면 그건 꿈과도 같았지. 본즈는 아직도 그 꿈을 낱낱이 기억할 수 있었어. 라파스의 밤은 꽤 쌀쌀했어. 크고 작은 건물들에는 하나 둘씩 불이 들어와 있었고, 그 불빛들이 높은 언덕을 가득 메웠어. 목 안으로 넘어가는 맥주는 부드러웠지. 그리고 그 날의 일탈은 짜릿했어. 신발을 채 벗을 새도 없이 내동댕이치며 허겁지겁 침대로 뛰어들었어. 그의 웃음은 본즈를 깊숙이 수렁으로 끌어들였고, 본즈는 제가 다시는 그 날 밤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 날, 커크는 정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았지. 그가 어디에선가 태어나 자라고, 또 어디선가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 본즈는 커크의 집 문 앞에 두 발을 딛고 서며, 무언가 강한 이질감을 느꼈어. 그는 망할 꿈같은 게 아니었어. 그는 본즈와 같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지. 그게 본즈에게는 새삼스럽게 다가왔어.

- 자, 여기요.
- 문자할 테니까 저장해둬.
- 뭐야. 왜요?
-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로 하라고.
- 새벽 3시에 전화해도 되나?
- 주말이면.
- 그럼 평일에 하면 화낼 거에요?
- 글쎄.

아마도 그러진 못할 거 같은데. 본즈는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어. 커크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살풋 웃음을 터트리며 핸드폰을 돌려주었어. 핸드폰은 커크의 체온이 닿아 따뜻해져 있었지. 본즈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서 계속 만지작거렸어. 낯선 따듯함이 꽤 기분 좋게 느껴졌지. 커크는 본즈의 왼쪽 손등을 짚으며 옆으로 와서 똑같이 기대어 섰어. 바람이 커크의 앞머리를 살짝 들썩거리게 했어. 파란 눈은 빛을 받아서 반짝였지. 본즈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다가 무의식중에 담뱃갑을 꺼내었어. 아. 본즈는 커크를 흘깃 보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다시 담배를 집어넣었어. 그 나른한 날씨에 취해서 커크 옆이란 것도 잊을 뻔 했지.

- 나도 하나 줘 봐요.
- 이거? 안 핀다면서.
- 그냥.

본즈는 커크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끼워줬어. 커크는 신기하다는 듯이 담배를 한 번 빙글 돌렸어. 하얀 막대기가 손가락 사이에서 돌아가는 걸 보면서, 본즈는 순간적으로 묘한 충동을 느꼈어. 커크는 그 끄트머리를 입으로 살짝 물었어. 커크는 입술로 담배를 물어 지탱한 채로 등을 돌려 난간 쪽을 바라보고 섰어. 양팔을 난간에 걸치고, 햇볕에 반쯤 감긴 눈으로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제법 그 태가 났지. 본즈도 같이 담배를 한 개비 물어서 불을 붙였어. 쌉쌀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어. 본즈는 앞 쪽으로 몸을 틀며 커크에게도 라이터를 권했어. 하지만 커크는 본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어.

- 피는 건 싫고.
- 그럼 왜 달라고 했어?
- 그냥.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커크는 본즈의 손가락 끝으로 본즈의 턱을 잡았어. 본즈의 시야에 커크의 두 눈이 꽉 들어찼지. 커크는 고개를 꺾으며 천천히 입술을 감싸왔어. 본즈는 커크에게 닿지 않도록 담배를 든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었어. 본즈는 다른 한 팔로는 커크의 허리를 받쳤어. 커크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쭉 밀듯이 키스를 했어. 커크는 혀로 본즈의 입술을 한 번 쭉 훑고서야 떨어졌어. 그리고 본즈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뭐가 그리 우스운지 갑자기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렸어. 커크는 그렇게 눈이 접히도록 웃으며 다시 두 팔을 뒤로 해 하늘을 등지고 섰어.

- 쓰네요.

쨍한 햇살이 커크의 얼굴을 비췄어. 그 웃음이 더 환하게 보였지. 살랑대는 바람은 결마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흩어놓았어. 본즈는 몇 걸음 떨어져 서서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어. 파란 하늘을 등지고 선 그 모습이 너무 완벽하게 보여서,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지. 커크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멀리 바다 쪽을 바라보았어. 아마 커크 귀에는 지금쯤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을 지도 몰랐어. 본즈는 그만큼이나 파란 커크의 눈을 응시했어. 본즈의 귀에도 무언가가 들리는 것만 같았지.



- 저기, 제임스.
- 네?
- 어제 그 회의자료 혹시 갖고 있어요? 하드카피로.
- 아... 출력해서 드릴게요. 잠시 만요.
- 한 30장 정도만 부탁할게요. 고마워요.

커크는 컴퓨터 모니터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 직원은 인사치레로 커크에게 살짝 웃어주고는 바쁘게 사무실을 빠져나갔어. 품에는 노트북을 안고 있는 채였지. 커크는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서류를 한쪽에 쌓아 정리했어.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재킷을 주워서 다시 의자 등받이에 걸어놨어. 커크는 컴퓨터에 꽂혀 있는 USB를 뽑아서 주먹 안에 꼭 쥐었어. 본즈는 맞은편 자리에서 커크가 움직이고 있는 걸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눈은 모니터 너머에 머물러 있었어.

커크는 바지춤을 잡고서 옷을 좀 정리하더니 뚜벅뚜벅 걸어서 사무실을 나섰어. 아마 복사실로 가는 것 같았어. 본즈는 눈을 부릅뜨고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어. 초조하게 허리에 힘을 주고 앉아서 지금 쓰고 있던 문장을 급히 마무리 지었어. 본즈는 탁 소리가 나게 마침표를 찍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막상 자리에서 일어나고 보니 조용한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확 덮쳐왔어. 본즈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어. 그리고 문서를 저장하고 모니터를 하며 자리를 정리했어. 그 후에야 본즈는, 작년 행사 때 받은 후로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텀블러를 가지고 일어났어.

- 나갔다 오시게요?
- 아, 네. 사무실이 덥네요.

본즈는 일부러 넥타이까지 조금 끌어당겨가며 대답했어. 직원은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하고 본즈를 스쳐지나갔어. 괜히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본즈는 뒤를 돌아서 사무실 안을 빙 둘러봤어. 하지만 직원들은 각자 할 일에 집중하느라 바쁘기만 했지. 비어있는 건 커크와 본즈의 자리뿐이었어. 두 자리 모두 의자가 뒤로 잔뜩 빼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어. 마침 커크 자리 뒤쪽을 스쳐 지나가는 직원이 그 의자를 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어. 그는 본즈의 시선에 고개를 살짝 들었어. 본즈는 얼른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어. 그리고 앞에 있는 유리문을 밀어서 열었지.

본즈는 텅 빈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어. 큰 프로젝트를 끝낸 게 얼마 전이라, 회사 안은 온통 조용한 분위기였어. 복사실은 그 복도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지. 본즈는 복도 정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었어. 사원증이 셔츠 단추에 끼어서 답답하게 느껴졌어. 본즈는 사원증 끈을 돌돌 말아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어. 그 안에서는 라이터 하나가 같이 만져졌지. 딱딱한 플라스틱일 뿐인데, 본즈는 그 감촉이 왠지 묘하게 느껴졌어.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간질해졌어. 본즈는 복사실 문손잡이를 잡았어. 그 손잡이에서도, 꼭 똑같은 느낌이 들었지.

- 짐.
- 아, 본즈.
- 이럴 줄 알았어. 나와 봐.

본즈는 복합기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커크를 한쪽으로 물러나게 했어. 커크는 항상 이렇게 잡다한 일에는 손이 서툴렀어. 아까 대화를 엿들을 때부터 어딘가 불안하다 싶더니.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방 안에 온통 종이가 날아다니는 꼴을 볼 뻔했어. 커크는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한 팔을 기계에 걸치고 섰어. 본즈는 능숙하게 종이를 넣고 버튼을 눌렀어. 곧 복합기가 덜덜거리며 따뜻한 종이가 한 장씩 밀려나왔지. 커크는 감탄하듯이 오, 하고 소리를 내며 종이가 나오는 걸 구경하고 있었어.

- 오, 팀장님.
- 누르기만 하면 되는 건데.
- 그런가.
- 잠시만 옆으로 가봐.

커크는 본즈가 손짓하는 대로 옆으로 멀찍이 떨어졌어. 본즈는 한 손으로 밑에 나온 종이를 끄집어냈어. 그리고 빠르게 종이를 넘기면서 잘못 찍힌 게 없는지 확인했어. 커크는 그동안 선반 앞에서 기둥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거기 놓인 자재를 구경하고 있었어. 본즈는 커크 두 손에다가 종이를 턱 얹어줬어. 커크는 종이와 본즈를 번갈아보며 씩 웃었어. 커크는 종이를 옆 선반 안에 얹어두고서 급하게 본즈의 목덜미를 끌어당겼어. 주춤하던 본즈도 금방 눈을 내리감으며 입술을 빨아 당겨 댔어.

복사실 안에는 오래된 기계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나고 있었어. 커크는 덜컹거리는 선반 기둥을 한 손으로 꽉 붙잡았어. 본즈는 제 몸에 감겨온 커크의 한 쪽 다리를 붙잡았어. 본즈는 커크의 입 속을 온통 헤집어 댔어.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귀는 열려 있었어. 헐떡이는 숨소리와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귓속을 파고들었어. 본즈는 이 자리에서 못할 짓이라도 할 것처럼 커크를 마구 밀어붙였어. 또 커크도 허겁지겁 달려들어 입술을 빨아댔지. 넥타이가 저 밑으로 내려갔고, 셔츠 단추는 급하게 끌러졌어.

끼익하는 문소리가 들려온 건 그 때였어. 단순히 바람 탓이라고 넘기기엔 분명한 소리였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옆으로 떨어졌어. 서로 꽉 움켜잡던 뒤통수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있었고, 옷도 꼴이 별반 다를 바가 없었어. 커크는 풀려버린 바지 벨트를 얼른 제자리에 끼웠어. 본즈는 뒤쪽 선반에 떨어진 넥타이를 쥐어서 슬쩍 커크 손에 쥐어주었어. 커크는 작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어. 방금 문을 연 직원은 손잡이를 그대로 쥔 채로 눈을 끔뻑거리며 복사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어.

- 어...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 네.
- 쓰시는 중인가요?
- 아니, 아니요. 쓰세요.  - 이제 나가려고요.

본즈는 흐트러진 셔츠 깃을 바로세우며 그 직원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왔어.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지만 본즈는 헛기침 두어 번으로 그걸 넘겨버렸어. 커크도 곧이어 좋은 하루가 되라며 그와 악수를 하고는 문을 지나쳤어. 그러다가 정작 회의 자료를 잊고 나온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다시 돌아갔어. 그리고 선반 위에 있는 서류를 품에 안고 뛰쳐나왔어. 본즈는 뒤 한 번 안돌아보고 걸었어. 커크는 일정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라 걸었지. 본즈는 왼쪽으로 돌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어. 커크는 그 반대편으로 꺾어서 사무실로 향했어. 여전히 흐트러져 있는 옷매무새만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어.



치직거리는 소리가 귀를 찔렀어. 본즈는 아예 전원 버튼을 눌러서 라디오를 꺼버렸어. 본즈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계속 고개를 빼서 밖을 살피고 있었어. 운전석 쪽 차창은 이미 끝까지 다 내려놓았어. 본즈는 괜히 긴장된 마음에 옆에 있는 생수로 목을 축였어. 그리고 운전대를 두드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어. 띠링 하는 엘리베이터 알림음이 울리기까지는, 본즈가 느끼기로는 한참이 걸렸어. 본즈는 신경이 곤두서서 그쪽을 뚫어져라 바라봤어. 그리고 바람대로 커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걸 볼 수 있었지.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어. 쟤는 또 뭘 저렇게 걸어. 본즈는 혼자서 살짝 웃음을 터트렸어. 그리고 커크가 오기 전에 미리 옆 좌석을 만져서 조정해뒀지.

- 안녕하세요.
- 뭐 이리 늦어.

본즈는 옆 좌석에 불쑥 올라타는 커크를 보면서 괜히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어. 커크는 조금 당황해서 본즈의 눈치를 한 번 봤어. 그리고 씰룩이는 본즈의 입술을 보고서야 자기도 덩달아 피식 웃음을 지었어. 커크는 바지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며 몸을 꼼지락거렸어. 그러는 동안 본즈는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쭉 끌어다 메어주었어. 내려놓았던 차창은 다시 위로 올렸어. 공기가 조금 답답한가. 본즈는 에어컨을 살짝 틀어서 바람을 위로 가게 해두었어. 본즈가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는 동안 커크는 곁눈질로 지그시 본즈를 보고 있었지.

- 어디로 갈까?
- 팀장님 집으로 가요.
- 팀장님?
- 본즈.

- 그래. 옷은 안 가져와도 돼?
- 자고 간다고는 안 했는데.
- ...진짜?
- 뭐, 생각해보고.

네가 그렇지. 본즈는 혀를 내두르며 차를 출발시켰어. 차는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왔어. 커크는 차창 밖 풍경에 정신이 팔렸어. 날이 더워지는 만큼, 해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어. 늘 퇴근 시간은 똑같았지만, 이 시간에 볼 수 있는 풍경은 달라졌지. 빨갛게 번져나가는 노을을 보며 입을 맞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하늘은 옅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어. 회사 건물 어디쯤에 걸려있는 해는 유리창에 반사되어 쨍한 빛을 뿜어냈어. 커크는 내내 차창에 기대어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틀었어. 그리고 디스크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꾹 눌렀어. 하지만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플레이어는 아까의 치직거리는 라디오 소리만 다시 낼 뿐이었지. 커크는 정지 버튼을 누르고 cd가 들어있는 지를 확인했어.

- 무슨 cd도 한 장 없어요?
- 집까지 몇 분이나 걸린다고.
- 그래도. 잠깐만요.

커크는 뒷좌석에 던져뒀던 가방을 가져와서 주섬주섬 뒤적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포장조차 뜯지 않은 새 cd를 꺼냈어. 본즈는 신호 앞에 차를 세우면서 커크를 힐끗 보았어. 커크는 단번에 비닐을 쭉 뜯어내어 쓰레기를 가방 안에 쑤셔넣었어. 그리고 cd를 플레이어 안에 넣고 재생시켰어. cd에서는 요란한 밴드 음악이 흘러나왔어. 커크는 만족스러운 듯 가방을 꽉 끌어안으며 다시 차창에 기대었어.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게 기분이 꽤 좋아보였어. 본즈는 기어를 정지에 맞추어놓고 볼륨을 적절히 올려 조절했어. 알아들을 수 없던 가사가 점점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지.

- 이게 네 취향이야?
- 좋지 않아요?
- 난 잘 모르겠는데.
- 계속 들어봐요. 선물이니까.
- 선물?

커크는 대답 없이 cd케이스를 콘솔박스 안에 넣어놓았어. 일부러 주려고 사온 건가. 본즈는 노란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신호등을 보며 기어를 다시 내렸어. 기타 소리와 난해한 샤우팅이 음악을 채웠어. 본즈에게는 귀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낯선 음악이었지만, 커크는 몸까지 까닥거리고 있었어. 본즈는 다시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끝까지 내려줬어. 커크는 차 안으로 쌩하니 들어오는 바람에 신나서 얼굴을 완전히 창문 쪽에 들이밀고 있었어. 본즈는 아슬아슬하게 구는 커크를 살짝 잡아당겨서 자리에 앉혀놨어. 그리고 다음 신호에 맞추어 차 속도를 늦추었지.

- 아, 맞다, 본즈.
- 왜?
- 우리 집 들렀다 가야 되는데.
- 지금?
- 미안. 일찍 말할걸. 저번에 옷 놓고 간 거 있잖아요.

무슨 옷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본즈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러고 보니 세탁기를 돌려놓고 그냥 왔던 것 같기도 하고. 본즈는 1차선으로 빠지기 위해 왼쪽 깜빡이를 켰어. 이미 똑바로 가기 위해서는 저번 갈림길에서 길을 틀었어야 했는데, 한 블록을 지나친 바람에 바다를 빙 둘러서 가야했지. 어쨌든, 본즈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커크는 언제나 바닷바람을 맞는 걸 좋아했고. 사실은 본즈도 이젠 그걸 꽤 좋아했거든. 본즈가 좌회전 대기를 하고 있는 동안 cd는 다음 곡으로 넘어갔어. 본즈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지탱하고, 그 음악을 배경 삼아 커크에게 살짝 입맞춤을 하고 떨어졌어.

- 그냥 오늘 가져다주지 그랬어. 방도 복잡하던데.
- 음.
- 무슨 뜻이야?
- 아니, 속옷을 갖고 출근할 수는 없으니까.
- ...뭐?
- 안 가요? 앞에 차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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