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영화평 연인 미만 친구 이상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씨발. 강길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이 취조실의 굵은 적막을 깨뜨린다. 눈앞에 있는 용의자는 변호사 불러 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는 짓이 존나게 열이 받기는 한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성범죄 전과가 7범인 놈의 재범이다. 강길영은 경위서를 읽으며 당장이라도 의자로 때려눕히고 심정을 간신히 억누른다. 너 이렇게 입 앙 다물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안 된다니까? 윽박지르는 고 선배의 음성이 귀를 울린다.



협박하는 겁니까 지금? 저 진짜 그 뭐냐, 과잉 수사. 강압 수사. 어? 그런 걸로 막 형사님들도 소송 때려요. 예?



조곤조곤 말하던 고 선배의 윽박 한 번이 영향을 끼친 건지, 용의자가 수갑을 덜그럭거리며 흥분한 듯 말을 내뱉었다. 전과 기록을 조금 훑으니 이미 이 전에도 수사 중 강압 수사 관련 소송을 걸었다가 무혐의로 끝난 적이 있었다. 즉, 이런 진상 짓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다.



저 새끼가 근데 진짜!



강길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책상을 두어 번 쳤다. 야. 지금 여기가 니 헛소리 받아 주는 상담센터인 줄 아냐? 일그러진 미간이 더욱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강길영이 일어나자마자 고 선배는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나 그 어깨를 붙잡았다. 섣부른 것 같아도 이렇게 말리지 않으면 이미 날아갔을 주먹이기 때문이다. 종알거리던 용의자도 입을 앙 다물곤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뭘 잘했다고, 미친 새끼...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용의자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곤 손목시계로 눈을 돌린다. 오후 9시 47분. 사람 귀찮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모습을 보는 고 선배가 한 마디 한다. 야. 얘 유치장으로 다시 넣어. 내일 취조하고 오늘은 이만 퇴근하자. 변호사도 내일 온다며? 취조실에 있는 모든 강력팀 형사들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눈치 빠른 건 선배밖에 없네요. 강길영은 그렇게 말하며 사건 파일을 들고 취조실을 제일 먼저 빠져나간다.



너도 얼릉 퇴근해. 또 숙직실에서 자기만 해 봐라. 그 택시기사 불러서 데려가라 한다?

윤화평은 왜 불러요? 제가 알아서 해요.

너 걔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제가요? 무슨 그런 소리를.



강길영은 능글맞게 웃음을 짓는 고 선배를 싸늘한 눈으로 한 번 바라본다.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리는 휴대폰 화면에 찍힌 이름은 윤화평, 세 자이다. 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텐 숨기지 마라? 장난스럽게 내뱉곤 일어나는 고 선배한테 강길영이 짜증 섞인 단말마를 내뱉는다. 물론 윤화평이 싫은 건 아니다. 강길영은 싫은 사람은 곁에 두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다만, 곁에 있으면 자꾸만 휘둘리게 되어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뭐든지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는 윤화평의 그 성격 때문에.



어디예요? 퇴근했어요?

아직. 너는?

택시기사가 퇴근이 어디 있대. 경찰서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안 나와서요.

뭐? 왜 기다려?

그냥요. 보고 싶어서.

개뿔이다. 그리고 왔으면 진작 말을 해야지. 니가 전화 안 했으면 나 오늘 여기서 내일 아침까지 안 나갔어.

숙직실에서 그만 자라니까... 고 형사님한테 진짜 제보 받고 찾아가요, 저?

그러던가. 지금 내려간다. 미련하게 기다리지 말고 진작에 전화 좀 해.



입은 열지 않고 덤덤하게 짐을 챙긴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생각한다. 귀찮게 왜 찾아와. 그래도 와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 줬으니까 편의점 커피라도 사 줘야겠다. 아니. 근데 미련곰탱이도 아니고 전화도 안 하고 두 시간이나 기다려? 진짜 왜 그런대. 여러 감정이 겹치지만 그 무엇 하나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어, 강 형사님!

뭐야. 너 담배 펴?

예. 오늘 좀 진상들이 있어서. 끌까요?

아니. ... 나도 한 대 줘 봐.

강 형사님 담배 끊었다고 안 했어요?

그냥 좀 줘 봐. 나도 오늘 열 받는 일 천지였으니까.



윤화평이 눈썹을 들썩이며 담배 한 대를 건넸다. 무슨 일? 알 거 없어, 수사 기밀이야. 우리 사이에 이러기예요? 우리 사이는 무슨. 둘의 짧은 대화가 오간다. 이미 윤화평이 태우고 있던 담배에서 짙은 회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간다. 불 좀. 짧게 내뱉는 말에 윤화평이 라이터를 켜 강길영의 담배에 갖다 댄다. 분명 오래 전에 담배를 끊었는데 가끔 이렇게 땡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하고 강길영은 생각한다. 서로 다른 숨을 가진 짙은 색의 두 한숨이 허공을 겉돈다.



나 오늘, 성범죄 저지른 걸 자랑하듯이 얘기하는 손님을 만났거든요. 그래서 경찰에 잡아 넣어버릴까 하다가... 그냥 기소유예로 풀려났다는 소리 듣고 포기했어요.

그래서 한 대 태우는 거냐? 평소에 잘 안 피잖아, 너.

예. 세상에 그런 놈들이 자랑스럽게 다니는 걸 보니 갑자기 담배가 땡기더라고요. 강 형사님은 뭔 일 있었어요?

어. ... 비슷해. 너가 한 얘기랑. 오늘 성범죄 전과 7범 새끼가 용의자로 잡혀 들어왔거든. 근데 반성하는 태도는 전혀 없고, 강력팀 형사들을 강압 수사로 소송을 때린다 하질 않나..

미친 놈이네. 그쵸?

미친 놈이지. 그래서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려줄까 했거든. 근데 취조실 들어가기 전에 팀장님이 한 마디 하시더라. 쟤 청장님 아들이랑 고등학교 동창이고 아빠가 변호사래. 전과 기록이 있어서 범죄를 감싸주진 못 할 테지만 손 끝이라도 건드리면 진짜로 소송 당할 수도 있다더라.

와... 그게 돼요? 세상 진짜 장난 아니네.

어. 그런 놈 하나 못 팬다는 게 열 받아서.



강길영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다. 유난히 기분이 나쁠 때 보이는 버릇 같은 표정이었다. 나쁜 놈들 잡아 처넣으라고 있는 게 형산데. 니가 그런 놈들 만난 것도 우리 잘못이 있겠지. 윤화평은 강길영이 짧게 내뱉는 말에 얼룩진 숨이 섞여 있음을 감지한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고, 어느 정도 강길영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분노를 윤화평은 쉽게 알아보았다.



나쁜 놈들 다 어떻게 잡아요. 그냥 우리는.. 우리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지. 강 형사님도 무리 좀 하지 말아요.

무리는 무슨... 너나 이렇게 시간 버리지 마. 무슨 두 시간이나 기다리고.

내가 뭐요? 강 형사님 얼굴 보자고 기다린 건데. 참.

그니까, 얼굴 보겠다고 두 시간이나 왜 기다려?

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왜, 문제 있어요?



참내, 헛웃음을 내뱉곤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떨궈 밟는다. 그래. 너는 원래 그렇게 항상 네 맘대로 하는 사람이었지. 너 위해서 말 해 줘도 난리야.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내뱉은 말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더 이상 피어나는 담배 연기도 없다. 적적함이 공기 사이사이에 맺힌다. 마치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얽히는 적막에 강길영은 입술을 가볍게 다문다.



장난 같아 보여요? 진심인데.

뭐?

내가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강 형사님이랑 담배 좀 피고, 돌아가는 거. 그게 그냥 단순하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 같냐고요.

... 뭔 소리야? 취했냐?

아휴, 됐어요. 말을 말자.



윤화평이 담배꽁초를 짓밟다 발걸음을 옮긴다. 커피도 안 사 줬는데. 짧은 생각이 스친다. 돌아서기 전의 윤화평은 얼핏, 얼굴이 붉어 보인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 찬 바람 때문이겠지. 따뜻하게 좀 입고 다녀. 강길영의 복잡하지 않은 사고회로를 거친 말이 입술을 지나 튀어나온다.



그렇게 툭툭 내뱉는 말, 강 형사님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 아니라고요.

내일도 올게요. 내일은 정시 퇴근 좀 해요. 기다리지 말라고 하지 말고, 강 형사님이 안 기다리게 해 주면 되겠네.



뺨이 벌겋게 붉어질 만큼이나 기다려놓고, 얘기 좀 하고 담배 한 대 피웠다고 간단다. 뭐 하는 놈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강길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뭐하러 와, 귀찮게. 오지 마. 그런 말은 입 아래를 맴돌 뿐이었다. 너만 그런 줄 알아? 넌 어떨지 몰라도, 네가 이런 말 할 때마다 나는 휘둘려서 짜증나 죽겠다고. 강길영은 미우면서도 밉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의 말은 내뱉지 않는다. 긍정은 하지 않을지언정, 평소처럼 틱틱거리고 까칠하게 굴지는 않는다. 그게 강길영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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