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세탁소 4부 (완결)




 

 

"어쨌든 중요한건 그거지... 적어도 지금 넌 미친세탁소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거."

 

 


"아니거든?!"

 

 


"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넌 두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미친세탁소 얘기만 했어."

 

 


"아 그건... 짜증나니까..."

 

 


"......"





수민은 저를 바라보는 설아의 눈에서 한심함을 느끼는 시선을 읽고야 말았다.




 

 


"......"

 

 


"....등신아."

 

 

 



등신아, 하는 설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얼굴에 수민은 더이상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지금 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뭔가 냉정할 수 없는 짜증나는 이 마음 안에 가득, 정말이지 가득, 그 여자만 있었다. 제 담임, 미친세탁소.




결국 거리를 방황하며 오랜만에 잊었던 비행의 맛을 다시 즐겨보고자 했지만 이미 노는 것도 지친건지, 잊어버린건지, 아니면 정말 유림에 의해서 제가 갱생이라도 된 건지 오히려 밤의 거리가 무서워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친구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여고생'이라는 건전하기 짝이 없는 컨셉으로 최설아의 동네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새삼 미친세탁소라는 별명이 얼마나 유림을 있는 그대로 녹여낸 최고의 함축미를 자랑하는 말인지 실감하는 수민이었다. 문득 무서워졌다. 아니, 사실은 진작에 이 불안함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인기척과 온기에 길들여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 유림은 그저 제 담임 선생님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신과 유림의 관계가 '덜' 특별할 수도 있다. 어쩌면 유림에겐 그저 평범한 사제관계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제가 확대하고 기대를 담아서 해석한 것은 아닐까.




"......"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수민은 이제 그런 말 조차 설아에게 꺼내지 못했다.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입 밖으로 낸다면,





...조금 울고 싶어질 것 같았다.





사람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민은 스스로 잘 정의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떠남'을 예정해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섭다. 그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정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유림에게 길들여져 있었고, 그것은 적어도 제게있어서 특별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타인에게 경계를 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경계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물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니. 그걸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비로소 물밀듯 밀려오는 깨달음들에 수민은 텅비어버린 눈동자로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제게만 유림과의 관계가 특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런 것만 같다. 그래서 유림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떠난다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야..."

 

 

 

 



 

 

말이 없어진 채 심각한 얼굴이 된 수민을 설아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제가 아는 정수민은 사람때문에 고민할 만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와서 제일 처음에 친해지게 되었고 본의아니게 학년이 바뀌어도 같은 반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 얄쌍하고 예쁘장한 얼굴에 도도함을 가득 담고서, 제 잘난맛에 사는 귀염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애가 바로 정수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수민을 만났을때 설아는 생각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딱 얘를 두고 하는 말이네. 어떤 의미에서 수민은 좀 이상한 아이이기도했다. 관심있는 거, 신경쓰는 거, 무서운 거, 고민있는 거...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세상사는게 따분해 죽을 맛인 것 같은 아이였다. 무슨 생각으로 사는걸까? 하고 진지하게 궁금해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무미건조한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바로 미친세탁소에게 잡힌 이후였던 것 같다. 과연, 정수민 같은 애가 화내고 열내고 슬퍼하는 이유가 '선생님' 때문이라니. 누가 들으면 퍽이나 학교생활에 충실한 전형적인 풋풋한 여고생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 '선생님'이 아름답고 젊은 여자선생이라는 것이 조금 의아한 사실이지만.





 

 

 

 

그리고 수민과는 또 다른 의미로 영악한 머리를 가진 설아의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리가 내린 결론은 이것밖에 없다. 미친세탁소의 힘! 그래, 저도 제 담임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제 친구를 통해 피부로 느껴지는 그녀의 갱생과 세탁의 힘이란... 과연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담탱이는 알 것인가. 당신 때문에 지금 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둥벌거숭이같은 정수민이 마치 짝사랑하는 남자애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듯한 서글픈 얼굴을 하고 그네를 타고 있다는... 이 믿기지 않은 현실... 어어?

 

 

 

 



 

 

...이...믿기지 않은...

 

 





...현...

 

 





...시일??

 

 

 

 

 

 

 

 

 

 





"어어!"

 

 

 

 

 

 




으아 대박!





"어어어!"





수민의 표정을 보며 쯧쯧,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던 설아는 갑자기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수민의 모습이 저혼자 보기에 너무 아까울 정도로 놀라웠기 때문도 있었다. 풀이 죽은 정수민이라니. 그것도 고민에 겨워 놀이터로 친구를 부르는 전형적인 여고생의 깜찍한 행동을 정수민이 하다니.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던 설아는 가로등 빛을 등지고 저와 수민 앞에 늘어지는 그림자에 슬쩍 눈동자를 치켜뜨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서는 벌떡 일어났다.





 

 

 

 

 

늘씬한 그림자가 어디서 많이보던 실루엣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가로등을 등지고 팔짱을 낀채 서있는 여자에게선 마치 후광이라도 나는 듯한 포스가 풍겨져나왔다. 설아는 그때서야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제 담임선생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 어... 야, 저, 정수민..."





설아는 제 담임의 표정과 수민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어어... 하고 말을 잇지 못한채 툭툭 수민을 건드렸다. 야, 저길 보라고, 저길 봐. 존나 양반은 못되나봐... 근데 왠지 넌 이제 죽었다...라고 말해주고 싶어 수민아. 왠지 모르겠지만 내 직감이 그래...




 

 

 

 

 

 

"왜?"

 

 

 

 

 

 




뭐가 그리 심란한지 모래를 발로 파내며 생각에 잠기던 수민은 갑자기 원맨쇼라도 하듯 벌떡일어나더니 저를 툭툭 건드리는 설아의 다급함에도 늘어지듯 따분한 목소리로 왜? 하고 묻다가 설아가 쳐다보던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수민은 언제나처럼 드라마틱한 등장으로 저에게 늘 스릴을 주던 유림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제 앞의 유림의 등장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지 알고 찾아온 걸까, 싶었다.





뒤숭숭한 마음에 아주 조금 설렘이 섞여버렸다.





단지 유림의 얼굴을 보는 것인데도...





"미...친..."




세탁소다...





아차, 하고 수민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나봐. 미친세탁소 보고 미친세탁소라고 할 뻔했어.





 

 

 

 

 

근데 진짜... 미친세탁소? 근데 어떻게?

 

 

 

 

 




"휴대폰 왜 꺼놨어?"

 

 


"네? 어...어..."

 

 

 

 

 

 





그제서야 교복 재킷의 주머니를 더듬더듬 거리며 어색하게 일어나는 수민이었다.  제 위치가 어디있든 GPS추적이

라도 하는 사람인양 저를 찾아내는 유림이었음을 새삼 깨달으며. 그렇다하더라도 오늘은 또 어떻게 저를 찾아낸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민은 어쩐 일이세요, 하고 물어보려다가 유림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 말 없이 애꿎은 휴대폰만 만져대며, "어...이게 왜 꺼졌지..."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왜.꺼.졌.지?"

 

 


"......아...그러니까..."

 

 


"저, 전 가볼께요! 정수민, 나 간다 바이~"

 

 

 



 

 

 

세사람이 동시에 한마디씩 뱉었다. 수민은 설아의 말을 듣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슬쩍 돌려 눈을 부라리며 입을 뻥긋거렸다.

 

 

 

 

 



 

'최.설.아.제.발.가.지.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만큼 어색한 미소를 뿌리며 유림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설아의 뒷모습을 보며 수민은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몇 시간 후의 자신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안돼.... 또 단둘이 남겨지다니...




 

 

 

 

 

사실 휴대폰은 유림에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수민이 일부러 꺼놓았던 것이었다. 아침만해도 제깍제깍 주차장으로 나오라던 유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혼자 하교한다고 하면 분명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이상 심란해서 당신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하는 속마음을 감춘채 최대한 제 마음을 절제하고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폰을 꺼놨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왜 자기가 그랬는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수민이었다.

 

 

 

 




 

"너 미쳤어?!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네?"

 

 

 

 

 





갑자기 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유림을 수민은 토끼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유림의 손에 홱- 팔이 잡인채 질질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유림의 무시무시한 스킨십을 받아봤지만 그중 가장 갑작스러운 행동에 꼽힐만한 것이었다. 수민은 유림에게 끌려가면서도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거기다 언뜻 비췬 유림의 표정은 심각하기 짝이없었기 때문에 이유도 없이 그냥 자신이 죄인이 되는 느낌이었다.




"잠깐만요!"





 

 

 

 

 

놀이터 가변에 주차된 익숙한 유림의 승용차로 끌려가다가 수민은 잠시 있는 힘을 다해 유림이 이끄는 힘에 반항하며 우뚝 섰다. 





"뭐야."


"그건 제가 물을 말이에요."


"정수민."





저 조차도 왜 그런 반항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유림의 손을 뿌리치면서 수민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빤히 유림을 쳐다보았다. 




 

 

 

 

 

수민의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던 유림은 수민이 저를 뿌리치며 "잠시만요!"하고 외치자마자 화가 났던 표정을 잊어버리고 당황스러움에 수민을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반항이 묘하게 뒤섞인 얼굴의 수민은 잠시 저가 꽉 잡았던 팔뚝을 쓰다듬으며 제게 눈을 치켜뜬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수민의 표정이 유림은 왠지 모르게 진짜 어린아이같이 느껴졌다. 단지 어려보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나이에 가장 맞는 표정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저런 표정들을 잘 보여주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일이 있어도 저런 불안함과 어쩔줄을 몰라하는 표정을 온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던 아이였으니까. 




유림은 또래에 비해 조숙하게 감정을 컨트롤 해왔던 수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 묘한 감정을 느껴야했다.





 

 

 

 

 

짧은 정적과 침묵속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수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그러나 지금만큼은 제법 진지하게 화가 난 것 같은 유림의 얼굴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왜 쌤이 저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정수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야."

 

 

 

 

 




짐짓 목소리를 낮게까는 유림의 기세에도 수민은 쫄지않고 무언가 결심한듯 유림을 똑바로 쳐다본다. 한참동안 고여있던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민은 유림의 앞에 똑바로서서 약간 상기된 뺨과 충혈된 눈동자를 깜빡이며 말했다.

 

 

 

 

 

 





"어떤 선생이 하루종일 학생 하나를 이렇게 옭아매요? 이상하잖아요! 그냥 선생님일뿐이면서!"

 

 


"...너..."

 

 


"내가 불쌍해서 그래요? 혼자살아서?"

 

 


"......"

 

 


"쌤이 나 괴롭힐때마다 그래도 좋아서... 정에 약해서... 싫은 소리 들어도 마음이 동해서... 그래서 나는..."

 

 


"수민아...."

 

 


"그냥 직업의식이잖아요... 너무해... 그냥... 착한 선생님인척... 했던거잖아요. 그래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떠난다고 그러면 어떡하냔 말이에요!"


"야!"

 

 

 

 

 





순식간이었다.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듯 북받쳐오르는 목소리로 유림을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듯 말을 뱉던 수민이 몸을 빙그르 돌며 유림의 반대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으로 금세 사라져 버리는 수민의 뒷모습을 유림은 한참 바라보다가 그제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수민이 사라진 곳으로 따라 뛰어들어가는 유림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점점 설움이 북받쳐 촉촉히 젖어들던 목소리가 놀라워 유림은 무어라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수민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서야 유림은 지난 밤부터 이상했던 수민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으나,

 

 

 

 

 

 

 

"......내가 치타새끼를 키웠어..."





쟤 왜저렇게 빨라.





 

 

 

 

 

 

 

제가 발견한 수민의 재능에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무슨 작심이라도 한듯 뛰어간 수민의 모습은 유림에겐 마하의 속도로 달리는 치타새끼 같았다. 8cm 펌프스를 신은 저와, 체육특기생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은 여고생이 상대가 될려냐만은...





 

 

 

 

 

그러나 유림은 찰나의 순간에 손등으로 눈물을 스윽 훔치고 돌아서던 수민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한숨을 쉬었다. 차에 기대어 주르르 몸을 주저앉다가 이내 유림은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자, 그제서야 수민은 비틀 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집, 이라고 불리는 건물까지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혹시 몰라 살짝 뒤돌아 본 곳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작정하고 뛰었으니 유림은 절대 저를 쫓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달리는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방금 한 짓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뭐야! 아 진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채 스르르 주저 앉던 수민은 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믿을 수 없어.





 

 

이건 말도 안돼...





 

 

 

 

 

 

'고민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뭔지 몰랐던 제 인생에 김유림이라는 존재는, 고민을 넘어서 삶의 의욕까지 좌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서야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수민은 몸을 일으켜 제 오피스텔의 현관쪽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어, 말도 안돼...하는 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수민은 미친년 집단을 떠올렸다.





 

 

 

 

 

 

여자가 여자를? 하며 불쾌해하던 제 자신이 정작...




 

 

정작... 

 

 




아... 이건 말도 안돼...

 

 

 

 

 

 





달칵,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 손잡이를 돌리면서 수민은 생각했다. 드디어 오랜시간 자연스럽게 제 속에 자리잡았던 그 감정을... 마치 제 담임이 떠난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평생 알아채지 못했을 그 소중함을... 아니, 보다 더 격렬하고,





더 간절하고,





더 낯선 그 감정의 정의-





갖고싶고, 인정받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미친세탁소...를... 같은 여자를...





달칵, 현관문이 전자음을 짧게 내면서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제 안에 애매모호한 모든 감정들이 일순 완벽한 이름표를 달고 명징하게 머릿 속에서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좋아한다, 좋아해서,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이런 감정인...거였나봐....

 

 

 

 

 

 

 

 

 

 

 

 

 

 

 

 

 

 

 

 

 

 




 

 

 

"이 천둥벌거숭이."










....!









 

 

"....으앗! 뭐, 뭐예요!?..."




 

 

 

 

 

그리고 수민은 제 집의 현관문을 열자마자, 혼란스러운 제 내면의 목소리들 때문에 멍하니 있다가 그만 몸을 굳혀버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꼭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제 앞에 특유의 팔짱을 낀 도도한 자태로 저를 내려다보는 여왕같은 표정의 미친세탁소가 있었다. 수민은 기겁하며 저도 모르게 다시 몸을 빙그르 돌리려다가 제 팔을 잡고 쭈욱 당기는 힘에 휘청거리며 유림 쪽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뭐...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도대체 미친세탁소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무슨 드라마틱하게 등장하는 연습이라도 하는 것일까. 제 집인데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 수민은 놀라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이 여자 우리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여자였어. 그제서야 유림의 존재를 과소평가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제 집, 제 동선, 제 연락처, 제 집의 비밀번호까지... 모조리 꿰뚫고있는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여자가 바로 미친세탁소 김유림이라는 것을. 제 부모조차도 모르는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꿰뚫는... 무시무시한 세탁소라는 것을 잠시 망각한 저 자신이 가장 바보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미친듯이 뛰어오다니... 진짜 등신같다, 정수민.





 

 

 

 

 

"어딜가? 여기 니네 집이야."


 

 

".....우리집인데 왜 쌤이 있는건데요?"


 

 

"운동하느라 힘든 제자를 위해 응원이나 해주려고."


 

 

"......"


 

 

"너 체육특기생 할래? 뛰는 폼이 아주 세렝게티의 치타새끼 같았어."

 

 


"....어...떻게...왔어요?"

 

 


"니가 아무리 뛰어봤자 내 벤츠는 날아다녀."

 

 

 

 

 




으으... 또 특유의 저 여유로운 웃음이라니. 빙긋, 하고 다시금 포커페이스를 찾은 유림의 표정을 보며 수민은 결국 제 위치가 원점으로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이리 와."




그러다 수민은 갑자기 제 팔을 잡고 끌어당겼던 유림이 그 손을 풀지않고 오히려 더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는(그것도 보다 더 큰 힘으로) 힘에 멈칫 거리면서 한 걸음 더 유림의 가까이에 바짝 다가서게 되었다. 당황스러움과 치타새끼처럼 달려서 힘이 빠진 제 몸이 유림이 끄는대로 그대로 휘적 거리며 끌려가 버린다.  





 

 

 

 

 

....어... 뭐...야...

 

 

 

 

 





정말 갑작스러웠다. 순식간에 저를 끌어안은 유림의 행동은. 유림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히게 된 수민은 그냥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고르며 눈을 땡글땡글 굴릴 뿐이었다. 심장이 귓바퀴에서 뛰는 것 같았다. 뭐야, 뭐야, 뭐야... 도대체 뭐지 이건... 당황스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제 어깨를 감싸안아오는 팔이 느껴진다.





제 어깨를 감싼 팔에서 수민은 알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을 느껴야했다. 그도 그럴것이 저를 안자마자 유림은 제가 부서질듯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민의 뺨에 제 뺨을 갖다대며 "너를 어쩌면 좋니..."하고 말끝을 흐리는 유림은 지금껏 수민이 알던 미친세탁소의 모습과는 한참 다른 모습이었다.




 

 

 

 

 

......아......뭐냔 말이에요....진짜.....




 

 

 

 

 

수민은 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유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해야할 것 같았다. 저를 정말 꼬옥 안아주는 그 힘이, 그 품이, 그리고 그 목소리가... 꼭 유림의 허리를 안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


"......"





침묵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만, 집안 어딘가에 있는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렸다. 왜 이렇게 안겨있는지, 왜 유림은 저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지, 아니 애초에 왜 저는 유림이 곧 저를 떠날꺼라는 말에 그토록 불안하고 화가났던 그 엄청난 감정들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지금 제가 안긴 유림의 품이 너무 좋아서, 지금 이 순간 유림에게 안긴 제 자신이 너무 행복해서,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어떤 진심같은 거... 무어라 말로 정의할 순 없지만, 그게 어떤 건지 마음으로는 충분히 알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느낌이 처음이라서 수민은 그냥 이순간에 가만히 저를 놓아두기로 했다. 그건 무척이나, 정말이지 무척이나 벅차오르고 행복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키가 크긴 크구나. 근데 몸 되게 여리다. 미친세탁소도 여자는 여자였어. 허리도 완전 얇아. 가슴은 역시... 디따 크다. 어떻게 이 여잔 이런 몸을 하고 선생님을 하고 있는걸까. 수민은 유림에게 안겨 있으면서 새삼 제 몸에 닿는 유림의 몸구석구석을 느끼는 중이었다. 




".....야."




그런 제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건지 갑자기 몸을 떼어내더니 묘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유림의 행동에 수민은 황급히 표정관리를 하며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순진한 표정으로 유림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깜빡할 뿐이었다.





 

 

 

 

 

"너 느끼고 있었지?"

 

 


"뭐, 뭘요..."

 

 


"......"

 

 


"......"

 

 

 

 

 

 




일순 또 찾아온 침묵이었지만, 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유림의 표정이 너무 민망해서 수민은 결국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미친세탁소의 기선제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더 저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이라니... 으으 민망해. 슬쩍 힘을 푸는 유림의 행동에 수민도 유림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고 민망한지 괜스레 시선을 이래저래 옮기며 애꿎은 제 팔을 만져댔다.

 

 

 

 

 





좀전의 그 뜨거운 포옹이 무색하게 어색해진 분위기였다. 




그러나 유림은 그런 분위기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수민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제법 부드러운 표정으로 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민은 미친세탁소답지 않은 민망한 스킨십을 시전하는 유림을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닭살이 돋아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왜? 싫어?"

 

 


"...으...닭살돋아요. 하지마요."

 

 


"아깐 느끼기까지 했으면서."

 

 


"하! 아니거든요? 그건 그냥... 어... 갑자기 끌어안으니까..." 

 

 


"됐어 바보야. 집에 들어온거 봤으니까 됐다. 어서 씻고 자. 문단속 잘하고."

 

 

 

 

 





수민은 저를 지나치며 현관문을 열려는 유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늘 봤던 뒷모습인데, 왜 오늘따라 마음이 콕콕 쑤시는 것 같을까. 수민은 짧은 순간 제게 뒷모습을 보이는 유림의 등을 바라보다가 이내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 세웠다.




 

 

 

 

 

 

 

"......"




 

 

 

 

 

 

저... 등...




 

 

 

 

 


언제라도 제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




 

 

 

 

 

그랬었어... 늘...




 

 

 

 

 

 

사는 건 왜이렇게 지겹고 따분할까, 하고 생각했던 시절에 나타난 담임선생. 온통 무색무취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다 저의 외로움이 억지로 합리화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 주말, 생일, 학교, 집에서의 시간조차도 늘 함께했던 사람. 가끔은 영화도 보여줬고, 시험성적이 오를 때마다 외식도 하고. 





수민은 가만히 유림의 뒷모습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경찰서를 들락날락 거릴 때 마다 둘이 치킨을 시켜놓고 제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그 옆에서 자신은 시말서를 썼던 사람,  "쌤 차 타기 싫어요.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리고 나 차 타는거 싫어해요. 의자도 불편하고..." 라고 했더니 그날부로 썬팅에 키티쿠션까지 구비해놓았던 사람, 하루라도 끼니를 거른 날이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보고 제대로 챙겨먹으라며 잔소리를 하던 사람.





 

 

 

 

 

그런데 왜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요?




 

 

왜 나예요?




 

 

왜 나를...




 

 

 

 

 

"미친세탁소가 널 제대로 찍은것 같애."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학년이 바뀌어도 담임은 바뀌지 않았을 때도, 사실 내심 실실 웃으며 잠이 들었던 수민은 제게 다가온 유림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서 제대로 행복해할 수가 없었던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제가 좋아하고 행복하면 또 떠나갈까봐... 제게 너무 과분한 행복이라고 앗아갈까봐...




 

 

 

 

 

 

 

 

 

 

"....어머."




 

 

 

 

 

 

 

 

 

 

유림은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제 등뒤에서 안아오는 수민의 손길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어머, 하고 말하고는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수민은 제 등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제 허리에 손을 둘러 깍지낀 채 저를 꼭 안고 있는 수민의 행동에 유림은 잠시 알수없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열었던 문을 닫았다.

 

 

 

 

 




"뭐니 너."

 

 


"......"

 

 


"정수민. 너 지금 애교부리는거니?"

 

 


"......"

 

 


"......"

 

 

 

 

 

 




장난스럽게 응수하던 유림은 제 등뒤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묻고있는 수민의 대답을 기다리다 이내 제 허리에 깍지껴진 수민의 손등에 제 손을 살포시 포개었다. 그 움직임에 수민이 사락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유림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다 이내 다시금 정면을 바라본다. 웅얼웅얼...무어라 말을 하는 수민의 목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잔잔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내일...주말인데..."

 

 


"풉...근데?"

 

 


"...올꺼죠? 응?"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웅얼 하는 목소리가 꼭 갓 태어난 강아지가 낑낑 대는 것 같다고 유림은 생각했다. 유림은 자연스럽게 수민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저를 민망하게 쳐다보는 수민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괴롭히는게 좋아. 왜일까?"

 

 


"...네?"

 

 

 

 

 

 





말을 마저 뱉기도 전에 제 두 뺨을 소중히 감싸잡는 유림의 손길에 수민은 얼음이 되었다.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어서 미처 뭐라고 할 시간도 없었다. 슬쩍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유림의 얼굴, 그리고 우아하게 감기는 속눈썹을 바라보던 수민은 이내 본능적으로 저도 눈을 감았다.

 

 

 

 

 




"올꺼야.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수민은 제 입술에 닿는 따땃한 온기를 느꼈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사라진 촉감에 스르르 눈을 뜨니 유림의 눈도 저와 비슷하게 촉촉하니 젖어 있는게 보였다. 어, 미친세탁소가 울 때도 있구나. 두고두고 놀려야지. 두고두고... 아싸... 드디어 내가... 미친세탁소의... 약점을... 잡았...




 

 

 

 

 

"으흐윽....흐으으....지...진짜죠? 진짜...? 올꺼지? 나 놔두고 안갈꺼지?"




 

 

 

 

 

그러나 정작 울음을 터뜨리는 건 수민이었다. 저 조차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를 모른채. 누군가 왜 제가 이렇게 울음을 터뜨리는지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울음이었다. 그냥 가슴 속의 감정을 어쩔 수가 없어서... 지금 유림의 앞이라면 지금껏 꾸욱꾸욱 눌러담았던 불안함을 마음껏 터뜨려도 될 것 같아서...

 

 

 

 



 

"안가는게 아니라... 못가, 이 바보야."





 

 

 

 

 

 

이윽고, "너를 어쩌면 좋니..."하는 말이 속삭이듯 들렸다.





 

 

 

 

 

 

다행이야, 정말... 눈물을 손등으로 스윽 훔치며 수민은 유림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행복, 이라는 말의 의미를 드디어 알 것 같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처음으로 세상에 대한 어떤 '감사함'을 느끼면서 수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오는 한숨이었다. 





따뜻한 품에 안긴 아기처럼, 잔뜩 풀어진 표정의 제 뺨을 감싸주는 손길이 좋아서, 그게 너무도 꿈같아서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계속 울음을 흘리는 수민이었다. 제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의 주인이 지금 이 순간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진짜 다행이야...





 

 

  

 

 

 

 

 

 

미친세탁소는 연중무휴라서. 





거기다 손님은 나밖에 없어서...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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