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진 숨, 뜨거운 체온, 갈망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선뜻 손을 뻗지는 못한다. 숨의 속도를 맞추고 눈을 맞춘다. 같은 마음이라고 확인하기 위해선 이거로는 부족하다. 이한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이 분위기가 낯설어 얼어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 아주 천천히, 이한이가 나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틈을 주면서 다가간다. 이한이는 피하지 않는다. 나는 이한이에게로 손을 뻗어 그를 내 품으로 끌어들인다.

여태까지의 이한이와는 다르다. 이 아이의 피부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서는 내 행동을 그만두라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소리치지만, 나는 본능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온 몸으로 이한이를 느껴본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귀로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동. 이한이의 손이 내 머리칼에 닿는다. 그리곤 꿀꺽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갑자기 몸을 뒤로 빼버렸다. 그래선 안됐는데. 우리는 조금 떨어졌다. 이한이를 바라봤을 때 내 앞에 어색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 애는 씁쓸함을 가득 머금은 채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미안.”

 

‘난...!’

 

“쉬고 있어... 방해 안할게.”

 

“...”

 

 

*

 

 

가볍게 넘길 수 있던 그런 포옹이 아니었다. 아직도 형운의 피부에는 이한과 껴안은 아까까지의 감각이 남아있다. 이한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느낌이다. 하지만 이한은 아까의 포옹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가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너무 평온한 이한의 모습에 형운은 조금 심술이 난 것 같다. 형운의 달아올랐던 얼굴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간다.

 

“왜?”

 

“뭐가.”

 

“갑자기 얼굴이 구겨졌잖아.”

 

“아니거든.”

 

“맞는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형운은 별 것 아닌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아려온다. 이한은 여전히 뜨거운 노을빛 아래에서 미소를 띠고 있다. 형운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한이 이렇게 행동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기억이 나지 않는데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감정에 대입 할 수는 없다. 또 어쩌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형운이 좀 더 괴로워야 하고 이한이 좀 더 즐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가야겠다, 가자.”

 

“... 응.”

 

“아직도 표정 안 푸네? 뭐가 문제야~”

 

“아 괜찮다니까.”

 

“내가 뭐 잘못했어? 미안해!”

 

애교 섞인 말투로 형운에게 들러붙는 이한. 뭐랄까 지금의 이한은 과거의 어떤 이한과도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사고 때문인지, 기억을 잃어서 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이한은 어떤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형운은 어쩔 수 없이 굳히고 있던 얼굴 근육을 푼다. 

 

 

*

 

 

요즘 들어 부쩍 밝아 보이는 이한의 모습에 스치듯 방문 앞을 지날 때면 그의 이모는 복잡한 마음으로 웃는다. 여전히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에 대놓고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고, 왜 이한이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저렇게 웃는다는 것 자체가 지금 행복하다는 증거가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들이 그녀의 머리를 넘어 온 몸을 가득 채운다. 그의 이모는 머뭇거린다. 궁금하고 묻고 싶다. 온갖 물음표들이 그녀의 머리를 채운다. 물론, 이한이 그녀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키운 작은 아이의 생각을 알고 싶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아이에게 애정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까. 행여 상처라도 줄까봐 소중히 다루고 싶다. 엇나가지 않게 심지를 잡아주고 싶다. 그녀의 머릿속에 생각이 더 크게 번져간다.

이한은 통화를 하다가 방문을 밖에 있던 이모와 눈을 마주친다. “미안, 잠시만.”하고 형운에게 전한 후 이한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방 문 앞으로 다가간다. 점점 다가오는 이한에 그의 이모는 뒷걸음질 칠 뻔 했다.

 

“미안, 너무 시끄러웠지. 방문 닫을게.”

 

“아냐, 괜찮아.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던데.”

 

“그래?”

 

“응, 근데 누군데 그렇게 즐겁ㄱ...”

 

“그럼 나... 마저 통화해도 되지? 일단 문은 닫을게! 이모 피곤할 테니까.”

 

문을 닫은 이한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든다. 여전히 형운과 즐겁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한이지만 왠지 자꾸만 방문으로 시선이 향한다.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은 멍 해보이기만 한다. 그는 생각한다. ‘이모는...’, ‘에이 말하지 말자, 이모도 이해 못할 거야...’ 같은 말을.

이한은 눈을 감고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버린다. 요동치는 마음이 반갑지 않다. 굳어버리는 표정이 싫다. 무거워지는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형운에게만 오롯이 집중하고 싶지만 이한은 그러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이한은 자신의 이모와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 밀어내고 있지도 않은데 별 같잖은 생각들이 자꾸만 그와 그의 이모 사이에 끼어든다. 이한의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 형운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듣지 못해 “응?”, “미안, 못 들었어.”, “미안... 하하.” 같은 말들로 대답한다. 형운의 목소리에서 그의 찌푸린 얼굴이 떠오를 때 쯤에야 이한은 다시 그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

 

 

“뭔가 말이야...”

 

“응.”

 

“계속 생각해봐도 떠오르질 않네.”

 

“뭐가? 수행평가?”

 

“응.”

 

“그치? 나도 그래.”

 

“아니, 수행평가 말고!”

 

“그럼?”

 

“너 말이야.”

 

“나?”

 

“응.”

 

“내가 왜 안 떠올라? 나 지금 형운이 바로 네 옆에 있잖아.”

 

“아니! 그거 말고. 이한이 네 정체...? 본 모습...? 뭐라고 해야 되지?”

 

“아아~”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무거나 말해보면 되지, 스무고개 같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뭔가 한 번에 맞추고 싶잖아. 좋아하니까.”

 

“이미 여러 번 틀려놓고!”

 

“여태까지 말했던 거는 다 연습이었으니까!”

 

“연습? 그런 게 어디 있어!”

 

이한이 장난스럽게 형운을 밀친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형운은 살짝 흔들려 볼에 아이스크림이 조금 묻고 만다. 형운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한을 바라보자 그는 살짝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형운의 어깨를 붙잡고 까치발을 들어 형운의 볼에 입을 가져다 댄다. 얼굴 피부로 느껴지는 혀라는 것에 감각은 신비롭다. 따듯하면서도 축축 하기도한 불쾌감과 두근거림 그 사이의 느낌. 형운이 이한을 바라보자 이한은 미소를 띠우고 자신의 입술 주의에 묻은 새하얀 아이스크림을 닦고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기도, 일부러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야?”

 

“왜? 더러워?”

 

“아니, 너 우유 들어간 아이스크림 안 먹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그랬었지~ 가 아니잖아... 괜찮아?”

 

“응? 왜?”

 

“막 우유 못 먹고 그런 거 때문에...”

 

“그냥 안 먹는 건데?”

 

“그냥?”

 

“응. 난 왠지 우유가 섞인 아이스크림은 별로라서~”

 

“...”

 

“?”

 

“앞으로 아무 아이스크림이나 사다 줄거야.”

 

“뭐? 왜!”

 

“그냥!”

 

우는 듯 한 얼굴로 형운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는 이한. 우는 척을 하지만 그가 울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 수 있는 형운이다.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이한은 어딘가 신비롭고 자꾸만 끌린다. 무표정한 얼굴로 일부로 이한을 바라보지 않고 있지만 형운 왠지 자꾸만 웃음이 피어날 것 같아 계속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한은 계속 얼굴을 형운의 옷에 비비며 사과한다. 형운이 고개를 돌려 이한을 바라본다. 그리곤 갑자기 이한의 머리를 헝클이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형운의 행동에 이한은 놀라 얼굴을 형운의 몸에서 떼어낸 후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형운의 손길에 엉망이 된 머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한. 형운은 보란 듯이 크게 웃는다. 이한은 그런 그의 행동에 살짝 짜증났지만 이번에는 넘어가주기로 한다. 이한은 머리를 한번 세 개 흔들고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들 사이의 즐거운 점심시간이다. 점점 뜨거운 공기가 다가오는, 조금만 움직여도 더워지는 그런 시간. 

 

 

*


 

지루하다면 지루한 날들도 평범하다면 평범한 날들도 누군가에겐 특별한 날이 될 수 있다. 나에게도 그렇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모두가 즐거워하지만 나는 더 들뜬다. 그 애와 평일에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비록 전에 있었던 일은 우리 둘 다 서로 결론 내리지 않고 아무것도 없었던 일인 척 넘어갔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로 찾아가는 나를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면 이한이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나를 부르는 같은 반의 친구들을 두고 나는 이한이의 반으로 걸어간다. 이미 아이들의 반 이상이 교실에서 나와 저마다의 무리와 함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다. 나는 이한이의 반으로 들어선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이한이는 아직 책상을 정리하지도, 가방을 메고 있지도 않다. 왠지 말을 걸기가 힘들다.

 

“시간이라는 건 너무 슬픈 거 같아.”

 

“어?”

 

“손에 잡힌 적도 없는데 벌써 저 멀리로 가버렸어.”

 

“...”

 

“여름을 기억해?”

 

“기억하지...?”

 

“쓸쓸해.”

 

“왜?”

 

“그냥... 내가 느꼈던 여름이 이제는 과거라는 단어로 뭉뚱그릴 수 있잖아.”

 

“그런가?”

 

“그 때의 마음도, 기온도, 눈에 담았던 것들도 안 잊었는데...”

 

“나도 안 잊었어.”

 

“나중에 생각해보면 널 처음 만났던 날도 특별한 날이 아니라 그냥 과거의 일부가 될 거 같아서. 그래서 슬퍼. 언젠가 나중에 나는 우리가 나눴던 이런 사소한 대화들도 한 단어 속에 뭉쳐서 기억해내지 못할까? 그러고 싶진 않은데...”

 

이한의 말이 마음에 닿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할 순 없지만 마치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나는 이한이 하던 것처럼 눈을 감고 생각을 해본다. 내가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이한이는 가방을 맨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냥 한탄이었어. 너무 마음 써주지 않아도 돼.”

 

“그래...?”

 

“응. 그냥... 그런 거였어.”

 

“...”

 

“시험 끝났는데 뭐라도 먹으러 갈까?”

 

“응...”

 

“뭐 먹을까?”

 

“음...”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

 

“...”

 

“?”

 

“... 괜찮아?”

 

“뭐가?”

 

“아직도 많이 속상해 보여...”

 

“...”

 

갑작스럽게 이한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기가 눈물을 흘린 지도 모르는 듯 이한은 슬픔과는 거리가 먼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가 손을 뻗어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자 그제야 이한이는 자신의 감정과 마주한 듯 자신의 눈에 손을 가져다 대 본다. 나는 가방을 뒤져며 언젠가 넣어두었던 손수건이나 화장지 같은 것을 찾는다.

고개를 숙인 이한이는 교실 바닥에 계속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다. 울음 섞인 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나는 당황해 좀 더 다급하게 가방을 뒤진다. 겨우겨우 찾아낸 손수건을 이한이에게 건네 본다. 이한이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나는 손수건으로 이한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

 

“시험이라도 망친거야?”

 

“...”

 

“아니면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

 

“말을 하지 않으면 난 몰라...”

 

“사실은...”

 

“응.”

 

“사실은 너 때문에 그래...”

 

“나?”

 

“응...”

 

“내가 왜? 뭐 잘못했어?”

 

“아니...”

 

“그럼?”

 

“그냥... 언젠가 떠날 거 같아서.”

 

“내가?”

 

“응...”

 

“내가 왜 떠나...? 솔직히 떠날 거 같으면 이한이 네가 떠나지 않을까?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난 못... 아니, 안 떠나.”

 

“...?”

 

“넌... 늦어도 5년 내에는 여길 떠나겠지? 우리가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것도 2년 하고 몇 개월 정도 일거고... 그게 너무 싫어...”

 

“...”

 

“난 계속 여기서 널 떠올리겠지만... 넌 다른 곳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거야. 더 멋지고 더 좋은 곳으로... 그 때는 날 과거 정도로 생각하겠지. 언젠가 한 번쯤 생각나서 연락을 하고 싶어도 연락처가 없어서, 아니면 연락하기엔 너무 멀어져 버려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미안.”

 

“전에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 때 난...”

 

“아니, 아니야. 그냥 사춘기잖아. 감수성이 예민하니까 이러는 거야. 그냥 그렇게 생각해줘.”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사춘기나 감수성 그런 단어에 기대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이한이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었다. 내 앞에서 발갛게 부어오른 눈을 가진 이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한이는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말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입을 열 능력은 없었고, 이한이는 일방적으로 내 손을 잡고 교실 그리고 학교를 빠져나오는데 만 집중했기에 나는 그저 이한이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우리는 고등학생이 먹기엔 제법 비싼 뷔페를 갔다. 하지만 즐겁진 않았다. 자꾸만 이한이가 신경 쓰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나는 그날 잠들기 직전까지도 이한이의 생각만 하다 잠들었다. 그 날의 이한이는 이후에 일어날 일과 합쳐져 내게 낙인처럼 남았다.

 

 

*

 

 

당황스러운 일이다. 마음이 이상하다. 왜 그런 말을 해버린 걸까. 창피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를 괴롭히는 역시나 형운이가 결국에는 이곳과 내게서 멀어져버릴 거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집결 장소로 가지도 않았다. 처음 형운이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아이들 사이로 보인 햇살이 비치던 얼굴. 마음 속 무언가가 켜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다가갈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 남자애가 처음 보는 고등학생 남자에게 다가가서 “친해지고 싶어.”, “너 잘생겼어.”,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같은 그런 말을 걸면 백이면 백 나를 이상하게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남자 인어로 태어나서 남자를 좋아한다니 참 이상한 변종이다. 보통 인어는 남자가 태어나지 않지만 인어의 특성상 이성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던데 나는 왜 이런 걸까. 그래서 엄마랑 아빠가 날 여기에 버리고 간 거였을까. 그래서 내게 이렇게 연락을 안 하는 걸까? 내가 괴물이라서? 이미 인어는 인간에겐 괴물인데, 나는 그런 괴물중에서도 꺼려지는 존재인 걸까. 최소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건강한 남자 인어라는 이상함을 가지고도 잘 살아 갈 수 있었을텐데.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인어들한테도 덜 혼났을 텐데.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줬을 텐데. 아니, 인정 받지 못했더라도 다른 사촌들이나 엄마, 이모의 대용품으로 잘 살아 갈 수 있었을...까? 정말 그랬을까? 내가... 내가 잘못이 있는 건 맞는 걸까.

생각이 번져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 애 하나로 이렇게 되다니 나 자신이 미쳐버린 것 같다. 그냥 호감 정도일 텐데 왜 이렇게 자꾸만 생각나는 걸까. 아직 그 애의 이름도 모르는데. 애초에 그 애는 날 알지도 못할 텐데. 나는 계속 그 애와의 이런저런 있지도 않은, 찾아오지도 않을 일들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그 애의 얼굴은 더 선명해진다. 언제부턴가 깨달은 동성을 호감 이상으로 생각하는 감정. 좋아함이나 사랑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감정. 그게 싫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상하고 꺼려지는 변종인 내가 싫다.

그 애와는 생각보다 자주 마주쳤다. 책 읽는 것들 좋아하는 건지 자주 도서관에 들렀었다. 도서부원이 된 게 정말 좋았었다. 하지만 나와 그 애가 도서관에서 눈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멀리서 그 애를 바라보고 기록부에 적혀 있는 그 애가 빌려간 책 그 애의 이름을 볼 뿐이었다. 형운. 그 애의 이름이다. 이름마저 가슴을 뛰게 만든다.

도서관 밖에선 그 애를 뚫어져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내가 계속 그 애, 형운이를 바라봄으로써 인기척을 느끼고 나를 봐주길 원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속 조심하고 형운이를 귀찮게 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자꾸만 가는 눈길을 멈추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니, 어느 날은 아니고 여름 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갑자기 형운이는 도서관으로 찾아왔었다. 나는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교실에서 도망치듯 온 거였지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은 몰랐었다.

그 애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도서관에 들어섰다. 눈길이 자꾸만 갔지만 필사적으로 쿨 한척을 해 봤다. 그리고 거짓말을 해버렸었다. 상관도 없는 선생님들 들먹이면서. 형운이는 내 이야기를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조금 삐걱 이면서 책장 뒤로 걸어갔다. 걔속 형운이 쪽을 바라봤다. 조금의 움직임도, 아주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걸어 가버렸다. 책장 앞에서 고민에 빠진 듯한 형운이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책 볼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내 말에 화들짝 놀란 형운이의 모습 그리고 고개를 숙인 붉어진 얼굴.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적일까. 그게 아니면 유일하게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나를 위해서 기적을 일으켜 준걸까. 정말 그렇다면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는 내게 구원일지도 모른다. 많은 것에 속박 돼 심연으로 가라앉는 내 인생의 빛. 바다 안에서 바라보는 찬란한 태양. 내가 가질 수 없는, 손조차 뻗을 수 없는 따듯한 색. 색안경 없이 나를 봐주는 사람. 아마 그런 것이 되 주지 않을까.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린다. 이모나 다른 어른들의 문자, 메시지, 통화 등이다. 엄마나 아빠도 이 많은 사람들의 연락 중에 있을까. 엄마는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러니까. 아빠는 인어도 아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 편만 든다. 모두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받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다. 나는 휴대폰을 침대에서 떨어뜨린다. 그 정도로 휴대폰은 고장나서나 부서지지 않았다. 실망이었다. 하지만 손에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린 휴대폰은 이제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다시 온전히 형운이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겠지. 태양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 같은 뜨거운 구리빛 피부. 부드러운 말투, 나를 항상 생각해주는 마음, 내 앞에서만 움츠러드는 태도 같은 것들.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동시에 슬퍼진다. 나의 구원, 나의 태양, 나의 따듯한 빛은 언젠가는 그와 헤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심해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나의 존재가 나를 언제든 끌어내리려고 할 테니까. 아니,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수 많은 존재들이 나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아니란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 나는 겁쟁이니까. 

형운이에겐 미안하다. 그 애에게 너무 많은 것들 투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 애의 행동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형운이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나는 비겁하고 고약한 이기적인 못난이다. 마음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평소와 같은 느낌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이 시리다. 이젠 차가움 마저도 이질감을 느끼는 인어라니. 정말 왜 이렇게 태어나버린 걸까.

 

 

*

 

 

“아... 나 언제부터 잠들었었어?”

 

“음... 시간까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한 꿈을 꾼 거 같아.”

 

“꿈?”

 

“응.”

 

“난 너 잠든 동안 작년에 있었던 일 떠올렸었는데.”

 

“작년에 있었던 일?”

 

“응.”

 

“어떤 일?”

 

“있어, 너 엄청 이상했던 날.”

 

“나?”

 

“응, 너.”

 

“어떻게 이상했는데?”

 

“음... 가르쳐주기 싫은데?”

 

“왜...? 나 기억 잃은 환자인 거 알지?”

 

“응!”

 

“그럼 왜...”

 

“내 마음이지~”

 

“아, 말투 따라 하지 마.”

 

“싫은데~”

 

이한은 형운을 살짝 째려보다 그대로 그에게 달려든다. 덩치로 보나 힘으로 보나 이한이 달려 들어봤자 형운이 미동 할리 없다. 그는 달려든 이한을 안고 방바닥으로 누워버린다. 이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벗어나기 위해서 버둥대지도 자기를 풀라며 날 선 말을 하지도 않는다. 뜨거워진 공기에 잠겨 두 사람은 장난을 치거나 속삭이거나 서로의 피부 위에 손을 올려본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두 사람이 이 순간을 떠올린다면 가장 그립고 따스한 그런 오후로 기억할 것이다.

탁상 위에 널브러진 교과서와 문제집들은 오후에 펼쳐진 페이지 그대로이다. 언제 또 다시 잠들어버린 걸까. 하지만 이번에는 형운도 잠들었던 것 같다. 어느새 창밖은 어둠만이 가득하다. 아직 잠들어 있음에도 자신에게서 손을 풀지 않는 형운의 모습에 이한은 그의 입에 살짝 입술을 맞춘다. 그리곤 미소 지어 보인다. 조금 후 형운도 깨어난다.

 

“몇 시지?”

 

“모르겠어, 나도 방금 일어났거든.”

 

“잠시만... 아...”

 

“왜?”

 

“엄마랑 아빠한테서 X톡이랑 부재중 전화 폭탄으로 와 있어...”

 

“...”

 

“잠깐만.”

 

형운은 이한의 몸에 두른 팔을 거둔 후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곤 이한의 방을 넘고 거실을 지나 현관문 밖으로 나간다. 이한은 걸어가는 형운을 바라본다. 뭔가 다르다. 자신은 어른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로 연락해줬던 적이 없던 것 같다. 비록 온전하지 못한 기억이지만 그랬던 적은 한번도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갑자기 스친 생각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다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한 밤중이다. 이런 시간까지 잠든 줄은 몰랐다.

이모를 찾아 집안을 두리번거리던 이한은 자신의 이모에게서 온 X톡 메시지를 확인한다. 대충 집안일이랑 카페일이랑 이것저것 겹쳐서 오늘은 할머니 댁에서 자고 온다는 소리였다. 아주 잠깐 형운처럼 바로 연락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둔다. 작은 한 숨이 고요한 집에 퍼진다. 집안에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한은 조금 괴로워한다. 이런 느낌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하다. 그래서 싫다. 겉으로는 티내려 하지 않지만 마음 속 어딘가로부터 느껴지는 떨림. 두려움일까, 외로움일까,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감정일까. 복잡한 마음에 이한은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 살짝 문을 열고 형운을 바라본다. 형운은 통화를 하는 와중에 인기척이 느껴져 몸을 돌려 이한을 바라본다. 별로 혼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몇분 쯤 후 형운이 휴대폰을 주머니로 넣는다.

 

“뭐라고 하셔?”

 

“그냥 똑같은 말들이지.”

 

“?”

 

“걱정하는 말들이셨어.”

 

“그렇구나.”

 

“...”

 

“갈거야?”

 

“아니, 버스도 안 다니는데 어떻게 가? 이 야밤에 나 집으로 보내려고?”

 

“아니! 절대로 가지마!”

 

“절대로? 절대로 라고할 것 까지 있어?”

 

“아니, 그게 이모가 오늘 집에 안들어 온다고 해서.”

 

“이모님 안 들어오신다고...?”

 

“응.”

 

“...”

 

“...”

 

“...”

 

“왜?”

 

“아, 아니... 괜찮겠어?”

 

“뭐가?”

 

“나처럼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랑 한 집에 어른도 없이 같이 있어도 되겠냐고.”

 

“...”

 

“...”

 

“덮치기라도 하려고...?”

 

“응! 어쩌면?”

 

“응! 은 무슨 응! 이야. 누가 그렇게 해맑게 이야기 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들어가자. 밖에 벌레 너무 많아.”

 

“응.”


“나도 혈기왕성 한데.”


“이한이 넌 혈기왕성하지는 않아.”


“그럼?”


“혈기... 음... 심장박동 수가 좀 느리지.”


“뭐야 그게!”

 

현관문을 지나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 오후에도 집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라도 오후와 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형운은 그 때보다 지금 더 이한에게 가까이 달라붙는다. 형운의 치근덕댐이 좋은 이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무게를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는 없다. 무거운 듯 휘청휘청 걷는 이한. 형운은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 때, 형운의 배에서부터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운은 순식간에 이한에게서 떨어진다. 조금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한은 “배고프지? 나도 그래.”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향한다. 조금 창피한 형운이지만 이한의 뒤로 다가가 같이 냉장고 안들 들여다본다. 이런 즐거운 날이다. 다음 날이 주말이기에 더더욱 두 사람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건 꿈속에서 스친, 기억 속에서 스친 그 얼굴. 그것이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계속 반짝이듯 떠오르는 것이다.

 

 

*

 

 

벌써 며칠이나 의도적으로 형운이를 피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창피함과 불안함, 그 두 감정을 먹고 자란 절망이 자꾸만 그 애에게서 멀어지고 싶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그 정도까지 감정을 터트려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살면서 그렇게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후련하기도 하다.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학교에서 형운이를 피할 방법은 없다. 그저 못 본 척 하는 방법 뿐. 그것도 형운이가 나를 찾아오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 아이마냥 이리 저리 숨어 다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 이런 혼란스럽고 약한 마음으로 그 애를 만나고 싶지 않다. 형운이에게 그런 모습을 또 다시 보이고 싶지 않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형운이는 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사실 여태껏 찾을 수 있었는데도 모른 척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피하는 내게 시간을 준 것일 수도 있다. 형운이는 그 정도로 따듯하고 배려심 깊은 다정한 아이니까.

우리는 도서관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다시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서 도서관을 나가려 했을 때 형운이는 그 때, 그 초여름 날에 내가 만났던 거칠고 짙은 숨을 내뱉고 있는 붉어진 얼굴을 한 모습 그대로 나를 찾아왔다. 도서관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형운이의 숨소리가 들렸고,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열고 그 애의 품에 안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네가 떠나갈까 봐 두렵다는 말도,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말도. 내 머릿속에는 그저 형운이 라는 존재 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생각할 빈틈은 없었다.

우리는 한 참 동안 그렇게 껴안고 있다 학교를 몰래 빠져 나왔다. 학교를 빠져나가는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운이가 걸어가면 아래만 보던 나는 그 애의 발소리를 듣고 따라 걸어가고, 형운이가 멈추면 그 애의 뒷모습만 보던 나도 멈췄다. 발소리가 우리의 언어가 됐었던 순간이다. 정말 좋았다. 아무런 글자 없이도 마음을 주고 받는 느낌이었으니까. 왜 학교를 빠져 나갔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라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이유인 것 같다.

학교를 나오고 나서는 모든 것이 쉬웠다. 누구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도 서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형운이와 나란히 걸었다. 그 애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나는 살짝 그 애를 바라봤다. 무거운 마음을 가진 얼굴이었다. 나는 또 다시 감정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은 그 애의 손길에 나는 넘칠 것 같았던 감정을 삼킬 수 있었다.

형운이가 나를 데려간 곳은 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이미 학교 주변 버스 정류장에서 타는 버스의 번호를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나만의 공간이었던 곳. 내가 자유가 되는 곳. 이상하게도 형운이는 절벽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분명 불편하고 힘들었을 텐데.

 

 

“...”

 

“...”

 

“왜 그랬어?”

 

“...”

 

“왜 피했어?”

 

“...”

 

“내가... 뭐 잘못했어?”

 

“...”

 

“아니면...”

 

“...”

 

“내가 싫어졌어?”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뭐든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다못해 진지함을 무시하는 장난 섞인 말이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는다. 형운이를 쳐다보기조차 버겁다. 그 순간의 나는 생기를 잃은 가을 날 들풀과도 같았다.

어깨에서 형운이의 체온이 느껴진다. 나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고개를 들어야 할까. 고개를 들고 형운이와 마주해야 할까. 그리곤 속에 든 모든 것을 다 토해내야 할까. 아니,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바라보는 것조차도 이미 내게는 사치일거다. 나는 손을 뻗어 나를 잡고 있는 그 애의 손을 내린다. 손은 천천히 내게서 떨어져 갔다.

 

“돌아가자.”

 

“어디로.”

 

“학교로.”

 

“왜.”

 

“그야...”

 

“난 못 가겠어.”

 

“...”

 

“학교로 돌아가면 또 나 피할거잖아.”

 

“...”

 

“왜 그런 거냐고, 말 좀 해봐.”

 

“...”

 

“또 입 닫는구나.”

 

“...”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렇다고 해줘, 말 하기 싫으면 고개라도 끄덕여 달라고!”

 

“...”


“내가 잘못했잖아... 그렇잖아... 미안해...”

 

“...”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왜...”

 

“있잖아... 난 좀 달라, 너도 같이 놀면서 알았겠지...”

 

“...”

 

“조금이 아니라...”

 

“...”

 

“내 입으로 말하기가... 힘드네.”

 

“그래도 말해 줘...”

 

“정확히 뭐라고 말 못하겠어... 난 멍청이거든... 모든 게 다 괜찮은 척하고 남들 배려하는 척하고 다 따르는 척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원하는 걸 이루는 척, 내가 추구하는 게 있는 척... 그런 척들을 되게 많이 해. 형운아... 네가 보던 나는 사실 내가 아닌 것 같아... 난 그냥 빈껍데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버려졌고, 남들은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고, 그런데도 순응하면서 보통의 뒤에 숨어서 언젠가 다가올 희망들만 간직하면서 지내려고 하는... 그냥 난... 추하고 더럽게 겁 많은 돌연변이 일 뿐이야... 난... 있잖아... 난... 하...”

 

무슨 말은 뱉어버린 걸까. 방금전까지 했던 말인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진 않았겠지.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내 끔찍한 진짜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형운이는 내 앞에 남아 있지 않겠지. 어지럽고 메스껍다. 점점 어두워지는 눈앞. 주변에는 잡을 것도 디딜 곳도 없다. 나는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눈앞이 어둡다. 그 덕분에 그 애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들 수 있다. 형운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 속 내 눈이 향하는 곳에 있다고 믿는다. 어두운데도 눈이 부시다. 형운이가 빛나는 것이라고 믿고싶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숨이 가빠지는 기분이다.

 

“괜찮아?”

 

“응...”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괜찮을 거야... 아, 싫다... 이런 모습 보이는 거... 진짜... 싫어... 내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고, 맨날 혼나고, 맨날 걱정시키고, 맨날 거짓말만 하고...”

 

“무슨 소리야?”

 

“그냥... 떨어져 버리고 싶어. 계속 추락하고 싶어. 추락하는 동안 계속 계속 울다가 퍽 하고 땅이랑 부딪혀서... 부딪혀서...”

 

“이한아? 이한아...? 야! 정신차려!”

 

“... 그냥 오늘 한 말 다 잊어줬으면 좋겠어, 너한테는 가치 없는 말들이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방 침대 위였다. 몸을 일으키고 말소리가 들리는 쪽을 봤을 때는 상기된 얼굴의 이모가 형운이를 혼내고 있었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형운이는 왜 굳이 혼나고 있는 걸까. 왜 굳이 이모한테 연락을 한 걸까. 난 차라리 절벽위에 버려져 있었던 게 더 좋은데.

조금 후 이모에게 전화가 와서 이모는 잠시 집 밖으로 나간다. 형운이는 그 틈을 타서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따듯한 눈빛이다. 아, 그렇게나 받아보고 싶었던 그런 따듯한 빛을 어둠 속이 아닌 곳에서 볼 수 있다.

 

“괜찮아?”

 

“응.”

 

“그냥 빈혈이래.”

 

“빈혈?”

 

“응.”

 

“정말, 진짜로 빈혈이 나기도 하는구나... 또 이상하게 보겠네.”

 

“난 너 그렇게 안 봐.”

 

“그래, 알아... 넌 그렇게 안 보겠지. 하지만...”

 

“?”

 

“아니야, 아무것도...”

 

“깜짝 놀랐어...”

 

“미안.”

 

“네 탓이 아닌데 뭐.”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아직 옆에 있어서.”

 

“나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나.”

 

“거짓말.”

 

“정말인데?”

 

“...”

 

“...”

 

“고마워.”

 

“뭐가 또.”

 

“그냥... 다...”

 

“그렇게 웃지 마.”

 

“왜?”

 

“그냥.”

 

 

*

 

 

눈을 떴더니 불쾌감과 땀이 이한의 온 몸을 덮고 있다. 이한은 몸을 일으킨다. 아직 새벽이 한창이다. 분명 달갑지 않은 장면들을 꿈에서 본 거 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온기에 놀라 잠이 달아난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손에 감각이 집중해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만져본다. 그것은 형운의 얼굴이다. 이한은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안도하며 숨을 내쉰다. 분명 바닥에서 잔다고 해놓고서는 침대에 올라와 있던 것이다.

 

“거짓말.”

 

이한은 살짝 미소 짓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벗어난다. 형운이 깨지 못하게 아주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다. 온 몸에서 풍겨오는 땀 냄새가 싫다. 축축하게 젖은 옷과 땀이 제대로 마르지 않은 머리. 새벽이지만 샤워를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샤워를 하기 전 이한은 현관문을 나선다. 잠시 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여름이 찾아온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밤공기는 제법 쌀쌀하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이한은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본다. 이한은 자주 했었던 것처럼 또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빛을 향해 왼 손을 뻗는다. 손끝에서부터 돋아나는 비늘. 태양의 아래에서와 달리 상처도 피도 나지 않는다. 변한 자신을 손을 바라보며 이한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오른쪽 손으로 손에 돋아난 비늘을 떼려고 잡아당겨보지만 고통스럽기만 할 뿐 비늘은 떼어지지 않는다. 손을 털어보고 물어도 본다. 비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한은 반대쪽 손에도 비늘을 드러낸다. 달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겨우 정체를 드러내며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겨우 달 밖에 없는 것. 하지만 달빛에 의지해서 살기엔 주변의 세상은 너무 어둡다. 이한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자신에 처지에 몸서리치게 억울하고 슬프고 화가 난 이한은 자신은 손들을 벅벅 긁기 시작한다. 손에 돋아난 비늘을 다 떼버리려는 듯 아주 강하게 긁고 있다. 하지만 찾아오는 것은 고통 뿐 비늘은 떨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그런 짓을 했을까 벗어날 수 없는 고통에 지친 이한은 손에 힘을 푼다. 야심한 새벽에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며 자신을 한번 비웃고는 현관문을 향해 걸어간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이질감이 이한의 몸을 스쳐간다. 이한은 자신의 오른 쪽 손을 바라본다. 손등의 비늘 사이로 살이 보인다. 생길 수 없는 일에 잠시 얼어버린 이한은 왼 쪽 손을 바라본다. 오른 손과 비교했을 때 비늘이 더 촘촘하게 있다. 이한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분명 며칠 전 운동장에서 노을을 향해 오른 손을 뻗었었다. 그 때 빠져버린 비늘이 회복되지 않은 걸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인어는 인어를 벗어나지 못한다. 비늘은 평생 재생되고 태양 아래에서 비늘을 보인다한들 한순간 고통만 얻고 비늘은 다시 돋아난다고 이한은 그렇게 배웠다. 그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한은 한 가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이 것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동경하는 것이 자신에게 내려준 축복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동경하는 것. 그것은 두 개면서 하나다. 이한은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선다. 벌써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라도 된 듯 자꾸만 웃음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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