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연재하던 창궁 오메가버스au 리메이크 버전입니다. 9월 목표로 회지 작업 중이던 작품이어서 내용이 꽤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미완입니다. 이쪽도 도입부에서 끊겼습니다.




RE:




Intro


붉은 아처, 궁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활보다 검을 자주 쓰는 남자는 제가 후유키 시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 직후, 절망했다. 그는 영령이 아닌 몸이 되어 있었고, 그 말은 죽어서 벗어나게 된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에 또다시 얽매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죽어도 형질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 ■■라는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해도 그 끝이 같을 것이라는 내정된 운명과 같이.

따라서 그는 다시 돌아오게 된 형질의 영향을 받는 세계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운명이었다.



*

“어라? 아처, 당신 오메가였어?”


시작은 마스터였던 알파의 한 마디였다.

아처는 부지런히 책장의 먼지를 털고 있던 손을 멈추고, 소파에 앉아 홍차를 음미하는 린을 바라보았다. 런던, 시계탑에서 한층 성장해 온 것은 마술 실력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처는 한층 예민해진 린의 후각을 속으로만 칭찬하며, 무심코 풀어놓았던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아무리 서로 그런 마음이 없는 상대라 해도 한 번 인지한 이상, 주의는 필요한 법이지.

린은 대답 하나 없이 완전히 향을 숨긴 실력 좋은 남자를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꽤 담담한 페로몬으로 비 올 때나 맡아볼 수 있는 옅은 꽃향기 같이 느껴져서 좋았는데. 얼마 전에 각인을 맺은 연인과 미묘하게 다른 꽃향기이기도 해서 재미있어질 거 같았는데 참 아쉽다. 완벽하게 사라진 오메가의 향에 그녀는 살짝 물기가 남은 입술을 핥았다.

“안타깝지만, 나는 오메가가 맞다. 생전에 결정된 형질은 한 번 죽어서도 변하지 않더군.”

“흐음~? 지금까지 잘도 숨겼네.”

“운이 좋게도 열성이거든. 오메가라 해도 열성이면, 여느 베타와 다름없다는 걸 그 꼴사나운 녀석을 보면서 알고 있지 않나. 그보다 린, 오늘은 꽤나 느긋한가 보군?”

“별로? 오랜만에 휴우키로 돌아왔는데, 바보같이 전 마스터의 저택을 청소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니까 하려던 일은 나중에 미루고 잔소리를 하고 싶어진 거뿐이야. 그리고 덧붙이자면, 시로는 내가 각인해서 완전 오메가답게 변했거든!”

“…언제?”

“런던에 있을 때. 어떤 망할 년이 자꾸 내 시로를 탐내기에 그냥 해버렸지.”

“린, 너란 애는…… 본딩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 녀석이 순순히 각인을 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군.”

"그거야 시로랑은 연인 사이인걸! 그보다 왜 내가 짝을 맺은 일호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아 진짜!!"

“그건 유감이다만, 저녁은 어떻게 할 건가?”

“시로네 집에서 먹을 거다 뭐!”

후유키 시에서의 성배 전쟁이 모종의 이유로 잠정적 휴전 상태에 접어든 지 1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성배의 농간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서번트들이 수육을 하게 되었고, 전쟁은 잠정적으로 중지되었다. 서번트의 힘을 펼치기 힘든 평화로운 마을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싸움이 없는 후유키 시에 적응했다.

그것은 마스터가 아니게 된 여성의 집을 관리하던 아처도 마찬가지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전쟁이 멈춘 후, 런던 시계탑으로 떠나는 린을 따라가지 않았다. 애초에 시계탑에 서번트를 데려가는 마스터가 어디에 있냐고. 령주가 사라져 이제는 마스터가 아니게 된 린을 앞에 두고 일장 연설을 했던 때도 있었다.

린은 일단 아처의 고집과 상황을 이해했고, 수전노 같지 않은 상당한 금전을 지불하며, 주인이 자리를 비운 토오사카 저택의 관리를 제안했다.

아처는 그 제안에 대해서 주거는 하지 않은 상태로 어디까지나 외부인으로서 관리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받아들였다. 이후 1년 동안, 따라서 그는 매일 통장에 들어오는 돈을 확인하고, 혼자 살기에는 턱없이 넓은 저택을 관리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그 모습은 저 스스로가 생각해도, 마치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플란다스의 개 같지 않은가.

개라고 하면, 떠오르는 파란색의 잔상에 아처는 비소를 지었다. 그것은 플란다스와 같이 귀여운 동물이 아니었다. 그는 교차하여 머릿속에 자리한 한 영령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직도 어색한 제 목덜미를 쓸었다. 그 서투른 행동은 아처로서는 드물 따름이어서 린은 지긋이 그를 응시했다. 곧바로 붉은 예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의 선명한 잇자국을 발견한 것은 마술사로서 한 보 전진한 그녀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어머, 아처. 라고, 린은 그의 흔적을 눈치채자마자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 얼굴을 들이댄다. 아무래도 기구한 제 서번트가 저 몰래 짝을 찾은 모양이다. 안심하면서도 얄밉게, 린은 웃었다.

분명 영령은 수육 전까지 형질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오메가니 알파니 하는 것들에는 익숙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누구 서번트 아니라고 행동이 잽쌌다.

“그래서 아처? 대체 네 짝은 누구야?”

“무슨? 아아- 가려지지 않은 건가.”

“그야 그렇게 큰 자국인데 가려지면 이상하지. 내가 모르는 알파의 흔적이니까, 역시 상대는 영령?”

짓궂게 물어보는 목소리에 아처는 등을 돌렸다. 필시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기 위한 행동이었을 테지만, 목과 귀도 붉어진 것은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대체 어디의 누구실까? 아처의 짝이 된 행운아는.

“아무리 린이라도 남의 사생활은 캐내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지 않는다면, 난 이만 돌아가지.”

“체엣―. 알았어! 대신 내일 점심을 만들어주도록 하세요.”

“런던에는 언제 돌아가는데?”

“내일모레 새벽 비행기니까 괜찮아!”

“흠. 알았다. 원하는 리퀘스트가 있나?”

“없어! 그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

어쩔 수 없지. 너털웃음이 나와 아처는 어깨를 들썩였다. 당장 머릿속에 린이 좋아하던 요리 리스트가 떠오른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들로 조합하면 되겠지.

대충이라기에는 구체적인 재료와 레시피까지 정하고 아처는 미련 없이 토오사카 저택을 나섰다.






1


린이 시로와 함께 런던으로 떠나면서, 아처는 후유키 시 외곽에 버려진 폐가를 고쳐서 살게 되었다.

린은 그가 토오사카 저택에 체류하기를 원했지만, 아무래도 주인 없는 집에 멋대로 세 들어 사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더욱이 비었다 해도 마술사의 공방인 장소다. 그런 곳에 서번트가 머물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그러나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살면서 저택의 관리를 겸하는 것은 꽤 불편했다. 수육한 몸은 영체화도 불가능해서, 아처는 저택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낡은 폐가를 고쳐 사용하는 것으로 동거인과 타협을 봤다. 아처 정도의 영령과 그 동거인이라면, 폐가를 수리해서 꽤 살만한 장소로 만드는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기에 아처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동거인의 의견에 따랐다.

린이 떠난 직후에 아처는 토오사카 저택에서 꽤 거리가 있는 인적 드문 거리에 낡은 아파트에서 방을 빌려 혼자 지내려고 했다. 린이 떠난 마당에 룸쉐어를 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도 없었고, 오메가의 몸으로는 아무래도 혼자가 편했기 때문이다. 오메가가 사람들 사이에 끼이면 가끔 귀찮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아처야 이미 한 번 죽었던 만큼의 연륜이나 경험이 많아 불운에는 익숙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였다. 괜히 또다시 방심해서 각인을 당하는 일은 방지해야 했다.

그런 아처의 계획이 보기 좋게 무너지고, 이사까지 가게 된 데에는 태연하게 생선을 팔던 랜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푸른 창병을 만난 것은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집을 정리하고, 생필품을 구하러 시내로 나온 날이었다. 예전부터 단골이었던 생선 가게에는 얼스터의 빛의 왕자가 어울리지도 않는 꼴을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만연에 피운 채 생선을 팔고 있었다.

그냥 지나쳐도 되었을 텐데, 어째서 눈이 마주쳐 버린 것일까. 아처는 상점가 입구에서부터 훅 맡아지는 강력한 알파의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도 저 멀리서 하얗고 까만 아처를 알아보고, 인상을 찌푸렸으니 피장파장이다만.

“뭐냐, 네 녀석 오메가였냐?”

“흥. 알파면서 생선가게 알바를 하는 놈에게 형질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다만. 영령이면서 네 놈은 자존심도 없는 건가?”

자기도 손에 떡하니 장바구니라고, 전혀 영령답지 않은 물건을 들고 있으면서 잘난 척이다. 켁! 랜서는 괜히 말을 걸었다고 후회했다. 전혀 오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녀석에게서 자신이 아닌 이상 맡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오메가 향이 나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실책이었다. 오메가라고 하니 알파의 본능으로 조금 동하려던 마음도 재수 없는 면상을 보자 빠르게 식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연어 한 토막이나 내놔라, 랜서. 아무리 개라도 싱싱한 생선 정도는 구별할 줄 알겠지?”

“당연하지! 그전에 네 녀석, 개라고 했겠다.”

“개를 개라고 하지, 그럼 다른 동물에 비유하나? 너 같은 개에게 비유 당하는 동물들이 불쌍해지는군. 그보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엉망인데, 이곳 사장은 아르바이트생의 예절 교육을 하지 않나 보지?”

재수가 없기를, 하필 붉은 궁병을 볼 게 뭐람. 랜서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마구잡이로 흩뿌린 페로몬도 갈무리하지 않은 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연어라면 밖에 널려 있었지만, 잠깐이라도 아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랜서가 늦장을 부리는 사이, 아처는 그가 남기고 간 페로몬에 곤혹을 느꼈다. 생전 페로몬에 대한 저항력을 쌓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다. 미치겠다.

영웅의 유전자는 어디 가지 않은 듯 랜서의 형질은 우성이었다. 우성 중에서도 특급의 품질인 것. 아처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알파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망할 놈의 개가 자신의 향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본능적으로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 깨닫게 되고, 오메가는 알파에게 복종하게 된다. 영령으로 있을 때는 성배 전쟁을 수행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형질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수육을 한 지금은 다르다. 영령이 아니게 되어서 되찾은 형질의 강제성은 철천지원수에게도 욕정을 품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헤이, 요!”

“흠.”

“받지 않고 뭐해?”

“…앞에 멀쩡한 연어를 놔두고 어떤 생선을 가져왔나 고민하고 있었다. 신속의 영령이라는 이름이 울겠군.”

“네 녀석! 아까부터 왜 그렇게 시비인데!”

그거야 네 놈이 향을 전혀 갈무리하지 않으니까 당연하지 않나!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내리눌렀다.

이것은 얘기해봤자 알아들을 것도 아니고, 오메가 쪽에서 향을 말한다는 것은 알파에게 복종의 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듯, 굴욕스러운 행위였다.

현재 후유키 시에서 알파나 오메가는 영령 외에 얼마 없으니, 사람들은 랜서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오메가만 아처 포함 네 명이나 있다.

누군가는 그에게 향에 대해서 말해줘야 할 테지만… 아처는 연어를 받아 들고 생선가게에서 등을 돌렸다.

모르겠다. 어째서 적이었던 이를 신경 쓰는지. 랜서는 그 빛의 왕자이니, 곧 어딘가에서 그 강력한 향에 이끌린 오메가가 나타나 알려줄 수도 있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만 혹시나 계속 그가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알파에게 홀린 오메가의 표정을 알고 있다. 바보 같고, 멍청한 본능의 노예가 된다. 알파에게 씨를 구걸하는 그들에게 얄팍하고 메마른 의지는 남아있지 않다. 이성보다 본능이 더 강하기에 그들은 사회 최하위 계층에 머물렀다.

랜서는 오는 오메가는 막지 않았다. 본딩은 신중하게 하는 편이지만, 한 번의 가벼운 정사 정도 반기는 쪽이다. 그렇게 아처와도 하지 않았었는가.

먼 과거, 혹은 미래. 시간 선에 의미를 두지 않은 어느 사막의 성배 전쟁,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 따지자면 미래라고 할 수 있었다. 좌에 있는 본령에게 기록이 전해졌다면, 사막에서의 시간 선과 지금의 시간 선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이자 영령을 이루는 일부가 되어 현재의 행보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그런 것이다. 언젠가의 미래에서 아처와 랜서는 만났고, 섹스했으며, 드러나지도 않은 서로의 형질을 알아내어 어쩌다 보니 본딩을 했다. 그것을 아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가 이빨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고, 알파에게 길들어져 예민해진 몸은 다시금 무엇에도 굳건한 목석같이 변한 것과 무관했다. 그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처는 랜서에 대해서…….

그는 고개를 살살,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어느 시대, 어느 때라도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지금 그가 하려는 행위에서 쓸데없는 감정을 묻히면 곤란한 건 아처뿐이었다.

자제하고, 억누르는 행위는 언제나 아처의 특기였다.

“이봐, 랜서!”

“엉? 무슨 볼일이라도 남았냐?”

“그렇지. 상시 발정 났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개를 향한 작은 충고를 좀 하려고.”

평화로운 한때를 가로지르는 살기가 피어오른다. 아처는 내색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이쪽에서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알리는 데에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행동만큼 효과 좋은 방법이 없다. 아무리 랜서가 모욕당했다고 느껴도, 아처가 먼저 무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은 그도 함부로 붉은 창을 소환할 수 없다.

싸울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아처는 재차 비꼬는 것처럼, 랜서에게 비소를 지어 보였다.


“발정 난 개새끼를 훈육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지.”



*

랜서는 말 잘 듣는 개답게 아처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그 또한 성배에게서 현대의 지식을 백업받은 영령이므로, 수육을 한 채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 페로몬은 매우 예민하고 사적인 영역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갈무리해야 하는 사실도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그러나 이해의 문제와는 별개로, 생전과 사후에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는 페로몬의 제어는 랜서에게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문제였다.

랜서가 살았던 시대, 고대 켈트. 용맹한 전사와 영웅, 명예와 비극이 판치던 때에 페로몬이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그 시대에 누가 바람이 부는 방향을 꺾으려 했던가? 아무도 바람길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는 달랐다. 인간은 바람길을 거슬렀다. 자연에 대항하여 그를 꺾고, 이겼다. 바람길 때문에 인간의 길이 막히면 바람을 돌아서기보다 그 길을 없애고 새로 만들어 냈다. 그랬기에 랜서는 바람길을 거스른 현대의 성별 시스템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아처에게서 수십번 멍청한 개라는 망언을 들었지만, 랜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또렷한 신념을 가지고 누구보다 명예로운 삶을 산 영웅이었다. 한낱 수호자 나부랭이가 영웅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처는 거창한 이상이나 신념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제보했다.

아처는 랜서가 현대에서는 당연한 상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아무리 성배로부터 현대의 지식을 백업받았다고 해도 형질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지식으로는 메꾸지 못하는 공백이 존재한다. 형질은 본능적이고, 형질에 대한 체계는 백업 외에도 현대에 정립된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형질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보던 고대와 달리 현대에서는 형질을 본능에 기초를 둔 사회적인 관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관습은 경험에 의해 축적되며, 학습에 의해 전달된다.

현대에서 형질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아는 정도의 지식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웠다. 특히 러트나 히트 때, 사람들은 그 시기에 함부로 향을 흘리는 사태를 혐오했다. 시기를 맞추지 못한 채 아무 조치 없이 밖에 나갔다가 발정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크게 욕을 들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 시대 사람들은 형질 간 예의에 무척 민감했다.

현대와 가장 근접한 시기인 근대까지는 괜찮았다. 열강이라는 단어와 식민지, 침략 전쟁이 무성하던 2차 세계 대전. 그 시기는 오히려 형질 간의 무분별한 뒤섞임으로, 베타 외에 성별 모두가 고통받아야 했다. 발정기가 있는 이상, 그들은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약자로 전락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도 알파는 나았지. 상대를 지배하는 데 천부적인 작자들. 성별 하나로 몇백 년을 잡아 버틴 권력의 동아줄을 그들은 쉬이 놓치지 않았다. 다시 그들의 세상이 오길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막대한 부로 전쟁에 용이한 베타들과 협의를 보아 제 명줄을 잡았고, 권력에 산을 올랐다. 빠르고 편한 케이블카를 타고서.

2차 대전이 무르익을 무렵, 많은 나라가 협정을 맺고 승자와 패자의 기운이 명확해지려는 시기. 알파들은 그들을 위한 평등해 보이는 성명을 발표했다.

알파들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베타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게. 공공의 예절에 성별을 포함해서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만들었지만, 혼자 당하지만은 않게.

알파의 성명이 낳은 결과로 가장 고통받는 이는 누가 되었나. 알파보다 긴 발정기가 있었다.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적은 성별. 전쟁 탓에 더 열악해진 사회적 위치는 오메가를 완전히 추락하게 했다. 차라리 성별 안 가리고 모두가 고통스러웠던 고대 노예가 낫지. 전 인구의 2%. 그 수부터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약자의 희생으로 현대 사회는 구축되었다.

아처는 그런 오메가였다. 오메가의 인권이 길가의 쓰레기 정도로 인식되는 시대에 살던 영령이었다. 다행스럽게 열성이어서 베타를 흉내 내는 삶을 살았으나, 결코 행복할 수는 없었던.

고대와 현대, 그 사이에 몇 세기가 지나고 얼마만큼의 변화가 있었나.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사회는 고대보다 뒤떨어져 있는지도 몰라. 성별보다 생산력을 기준으로 삼아, 힘에 대한 열망으로 똘똘 뭉쳤기에, 힘이 있다면 누구한테든 존중받은 찬란했던 시대에 비해 현대는 얼마나 칙칙해졌는가.

아처는 그 차이를 인식해 인내심을 가지고 랜서에게 같은 정보를 반복해서 주입했다. 그가 이해하지 않아도 좋아. 현대의 복잡하고 무의미한 억압에 반발해도 괜찮아. 애초에 고대의 영령에게 현대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부터 기만이다.

인류사에 기록된 사실에 기초하여, 현대에서 알파의 페로몬이 얼마나 해악한지 말했다. 페로몬을 접할 기회가 드물어진 현대의 알파나 오메가가 강력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물었다. 이렇듯 아처는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끈질기게 랜서에게 오지랖을 부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병의 행동은 기이했다. 그는 랜서를 만날 때마다, 랜서가 도통 익숙해지지 못하는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라고 부탁했다. 때로는 자신의 얄팍한 페로몬으로 협박도 자행했다. 그가 페로몬을 숨기지 않는다면, 그에게 오메가의 향을 입혀 사람들이 꺼리게 만들 거라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랜서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먹혀든 협박이었다.

몇 번째인지. 일수로는 나흘째 자신을 찾은 아처의 앞에 쭈그려 앉아 랜서는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껐다. 이제 랜서에게서 알파의 향은 아처가 전력으로 향을 풀어놓았을 정도로 아주 옅게 맡아졌다. 그럭저럭 접객업을 해도 같은 우성이 아닌 이상, 상대의 성별을 알 수 없을 실력이었다.

이쯤에서 만족해도 되련만, 아처는 랜서의 행실이 그의 기준에서 멀쩡해져도 멈추지 않고, 성배의 백업 이상의 심도 있는 지식을 알려주었다. 꽤나 복잡하지만, 마구 어렵지는 않은 설명을 듣다가 중간에 모르겠는 부분을 질문하는 랜서는 자신이 마치 선생님의 수업을 받는 착한 학생이 된 기분을 받았다.

“그러니까 짝을 맺는 걸 현대에서는 본딩이라고 한다고?”

“맞다. 어차피 좌로 돌아가면 흔적이 사라지는 서번트에게는 필요 없는 지식이지. 그래서 성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다.”

“너 뭔가 성배를 너무 인간적으로 보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어디까지나 표현의 문제야. 본딩에 대한 현대의 지식은 이제 필요 없나?”

“아니. 더 말해 봐.”

고개를 끄덕이고, 아처는 랜서가 가져다 준 커피를 마셨다. 다음부터는 홍차를 가져오도록. 커피보다는 그쪽이 취향이니. 꽤나 맛있게 마시면서 흘리는 말은 재수가 없을지니. 랜서는 괜히 저 도발에 넘어가 왕왕 짓지 않기 위해 이빨에 힘을 줬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장이라도 코앞에 재수 없는 면상을 후려칠 거 같았다. 서비스 정신을 끌어 모아 지은 미소의 한쪽 근육이 경연을 일으키며 괴상한 모양새를 자아냈다. 오우. 다음부터는 특별 서비스를 해주지.

주 2회,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랜서의 아르바이트처는 후유키 시에서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찾는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훌륭한 빛의 왕자는 여러모로 카페를 호강시켰기에 카페 주인은 며칠 전부터 랜서를 찾아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말하면서, 영업 방해를 하는 또다른 잘생긴 손님을 내버려 두는 넓은 아량을 펼쳤다. 하루 20여분의 휴식시간 동안, 랜서는 쉬지 못하고 아처를 상대해야 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아처는 좋은 대화 상대는 아니라도, 꽤 훌륭한 선생님이었으므로. 그의 오지랖은 어디까지 이어지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랜서는 이제 거의 완벽히 페로몬을 제어하게 되었어도 아처의 방문을 내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처는 알고 있을까. 아마 너구리는 눈치 채지 못한 척하고 있을 거다. 

느긋하게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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