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s, 파커군이 왔습니다."

"몇시야?"

장시간 숙고 있어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는 토니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하다. 안그래도 깊이 잠들지 못하는데 요즘은 더 그렇다. 알코올 냄새만 마셔도 취하는 놈이 왜 저렇게 술을 마시고 다니는지 토니는 그게 다 자신 때문인것 같아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막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다는 프라이데이의 알림을 뒤로하고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피터가 있을 곳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손잡이를 잡을까말까 망설이고, 손잡이를 잡고 나서도 열까말까 수십번 고민했다. 망설이다 아주 조금 열린 틈 사이로 풍겨오는 독한 술냄새에 괜시리 푸석한 입술을 물었다. 

"스타꾸씨이- 저 와써요오-"

좁은 문틈새로 들려오는 취한 목소리가 제 미련인 것 같아 한번에 문을 열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최대한 화가 난 것 처럼 표정을 만들었다. 술에 취해 더 단순해진 아이는 제 표정 하나에도 여러갈래로 난 그 눈썹을 축 늘어뜨리겠지. 물론 모든일이 생각되로 되진 않았다. 피터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토니의 품으로 안아들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지었던 화난 표정은 저도 모르게 풀어져 웃어버리고 말았다. 

"네 방은 옆방인데 왜 자꾸 내 방으로 오는거야 꼬맹아."

"스타쿠씨랑 딱! 한잔만 더 하려고 그래쬬!"

헤헤헤. 나사빠진 사람마냥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펴 볼 옆에 가져다 놓는데 어떻게 그냥 가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도 들어오라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매고 있던 가방을 아무대나 던져놓곤 자신의 방을 제 방처럼 휘젖고 다니는 피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쉰 토니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얼른 오라며 제 옆자리를 두드리는 피터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터덜터덜 걸어가 앉으니 바로 토니의 손에 술이 가득 찬 잔을 쥐어주고 제 것과 부딪히는 피터다. 잔끼리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내고 해사하게 웃고 있는 피터를 보던 토니가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한번에 잔을 비웠다. 분명 얼마안가 쓰러질게 뻔한데 매일 똑같았다. 술독에 빠진 것 같은 피터가 토니의 방 문을 두드리면 자신은 늘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같이 술을 마셨다. 

친구들과 있을 땐 그래도 어느정도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데 토니와 함께 마실 땐 3잔이면 고꾸라졌다. 술을 많이 마시고 와도, 그러지 않아도 늘 3잔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편한 것인지 헤실헤실 웃으며 무방비한 상태로 있다 잠드는 피터를 두고 토니는 늘 독한 술 한병을 홀로 비웠다. 이제 두 잔, 짠! 그리고 세 잔, 어김없이 픽 쓰러져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자는 피터를 본 토니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꼬맹이가 뭐라고 늘어버린 한숨이 내쉬고나면 다시 제 맘속에 콕콕 박혔다. 

"좋아해. 피터."

몇번째일지 모르는 고백이 뱉어졌다.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 대답이 벌써 몇번째인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의 도수가 높아져도 정신은 되려 멀쩡해졌다.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운 피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토니의 표정이 조금 슬퍼보인다. 다시 술을 넘기는 토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마지막 잔까지 비운 토니가 무표정으로 일어나 피터를 안아들었다. 평소보다 더욱 느리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발걸음으로 피터의 방으로 와 조심히 침대위에 눕혀주곤 옷을 벗겨주었다. 안에 받쳐입은 하얀 티셔츠만을 남겨주니 한결 편안해진 피터의 표정에 토니의 얼굴에도 슬핏 미소가 생겼다. 땀에 젖어 반듯한 이마에 붙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조심히 넘겨주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 고작 이마에 입술을 꾹 내리누르는데 바들바들 떨리는 제꼴이 우스웠다. 천하의 토니스타크가 도둑키스나 하고 있다니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보면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 

"잘 자."

낮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뚝뚝 흘렀던 미련이 다시 제게로 와 달라 붙었나보다. 이제 그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을 물고 일어나 일부러 피터가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란게 제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니 답답했다. 문 손잡이를 잡은 토니가 머뭇거렸다.

"..좋아했어 피터."

한마디로 조금은 털어낸 미련 덕분에 방을 걸어 나서는 뒷모습이 조금은 가벼워 보인다. 곤히 잠든 줄 알았던 피터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꾸물꾸물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피터가 숨어버렸다. 


***


"토니, 피터는?"

"알아서 오겠지."

베이컨을 자르다 말고 입맛이 없다며 커피 한 잔을 들고 일어나 가버리는 토니에 스티브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토니의 표정이 전과는 달라져보이기도 했지만 마침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피터 때문이기도 했다. 늦었다며 토스트 하나를 입에 물고 문을 나서는 피터를 쳐다보지도 않는 토니가 이상한거 저 혼자만은 아니었는지 옆에 앉은 나타샤와 클린트의 표정도 이상했다. 토니가 피터를 좋아하는 것은 어벤져스 멤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토니가 표정을 숨기는데 능통하다고는 하나 잔뼈 굵은 어벤져스 멤버들이 이를 눈치 못챌리 없다. 다만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지. 물론 당사자인 피터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토니의 열렬한 눈빛이 늘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니 미성숙한 아이가 눈치챘을리 만무하다. 오랜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이 눈 앞에 있으니 그를 따랐는데 그가 자신을 좋아한단다. 그리고 자신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는 토니의 말에 피터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토니도 마찬가지였다. 늘 흔들림 없었던 토니가 흔들리는 모습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아니야 못 들은걸로해. 이미 들은게 못 들은게 될리는 없지만 어쨌든, 그러니까 내말은 그냥 잊으라는거야. 잊어 피터."

피터는 예전부터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그래서 잊으려 애를 썼지만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 토니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찾은 것이 술이었다. 한잔만 마시면 그냥 즐거웠다. 토니로 가득 차있던 머릿속이 다른 것으로 채워지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마침 신입생 환영회다 엠티다 뭐다 해서 각종 행사도 많았다. 예전이었으면 참여하지 않았겠지만 피터는 일부러 행사를 찾아다녔다. 덕분에 친절한 이웃도 잠정 휴업이 됐다. 어벤져스에 합류했다는 기사가 나갔으니 시민들은 그를 그리워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술에 취해 돌아오면 그날 이후 묘하게 자신을 피하던 토니가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터는 더 자주 술을 마셨다. 자고 일어나면 전부는 아니지만 예전과 같이 자신에게 웃어주는 토니의 얼굴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갔으니 말이다. 가끔은 잘 자라는 낮은 목소리와 자신의 이마를 매만져주는 따뜻한 손의 느낌도 생각났다. 피터는 술을 많이 먹지 않은 날에도 취한척 토니를 찾아갔다. 어제도 그랬다. 독한 술을 향수처럼 제 몸에 뿌리고 입 안에 한가득 머금고 있다 뱉어냈다. 그리고 토니를 찾아가 취한척 헤실헤실 웃었다. 좋아했다는 토니의 말은 술을 마셔도 잊혀지지 않는다. 

"토오니이이이이"

"하아..."

벌써 몇분째인지 문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피터에 토니가 이마를 짚었다. 없는척 앉아있는것도 어느정도지 저러다 내일까지 서서 제이름을 부를 것 같은 느낌에 결국 몸을 일으킨 토니다. 

"어딧써요오오오. 터어니이이이이이."

"내 이름은 토니지 터니가 아닌데."

"터니!"

웃으며 안겨오는 피터에 또 웃어버릴 뻔 했다.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피터를 아닌 척 떼어놓으니 자연스레 토니의 방으로 들어가려한다. 이젠 안된다며 막으니 축 쳐지는 눈썹에 마음이 흔들렸다. 

"왜요오. 우리 딱! 한잔만 더 해요!"

"안돼. 들어가서 자."

몇 번이고 막무가내로 들어가려던 피터의 행동이 토니의 단단한 팔에 모조리 막혀버렸다. "왜요, 왜요오!" 입을 삐죽 내밀고 땡깡을 부리는 피터에 토니가 다시 한번 한숨을 뱉어내었다.

"..이제 저 안좋아하셔서 그래요?"

"뭐?"

"어제 그랬잖아요! 좋아했다고! 좋아 '했다!' 고!"

'했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 부분을 강조하며 주먹을 쥐어 자신의 손바닥에 내려치는 피터를 멍하니 바라보던 토니가 자신의 말을 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놀라 라 꽥 소리를 질렀다.

"다 들었어??!!"

"네!! 다 들었어요!! 왜요? 왜 '좋아해'가 아니고 '좋아했어'에요? 이제 저 안좋아하세요? 제가 그때 토니 고백 거절해서요? 그래요?"

다다다다 물어오는 피터에 토니의 입이 다시 한번 막혀 버렸다. 뭐 하나 틀린 물음이 없어 할 말이 없다 싶다가도 차인건 자신인데 죄인처럼 몰아가니 억울해졌다. 

"그래."

"네..?"

"네가 거절해서 그런거 맞다고."

되려 뻔뻔하게 나가니 이번엔 피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자기가 싫다고 차 놓고선 왜 좋아하지 않냐니 앞, 뒤가 안 맞지 않은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인 피터에게서 뚝뚝 떨어진 것이 바닥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토니는 냉정해지려 애써 그 것을 외면했다.

"..늦었어. 그만 들어가서 자."

더이상 함께 있으면 소리 없이 눈물을 뜍듁 흘리고 있는 피터를 껴안아버릴 것만 같아 뒤를 돌았으나 자신을 붙잡은 손에 꼼짝할 수 없었다. "제가 토니를 좋아하게 됐나봐요.." 작게 웅얼거리는 말이었지만 토니는 귀 바로 옆에서 들은 것 마냐 선명했다. 

"뭐..?"

"그 날 이후로 매일매일 토니가 보였어요. 강의실에서도, 거미줄을 타고 뉴욕 하늘을 날고 있을 때도 토니의 얼굴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어요.."

고해성사를 하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내뱉는 피터의 고백에 토니는 믿을 수가 없어 몰래 자신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아프다.

"술을 마시면 토니가 안보여서 술을 마셨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진짜 토니가 제 옆에 있는거에요. 그리고 예전처럼 웃어주셨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술을 마셨는데, 그런데.."

곧잘 말을 하더니 설움이 복받친듯 이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망설이다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폼에 안으니 답싹 안겨오는 피터에 마른 등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찌릿찌릿 했어요."

"뭐?"

조금 진정된 듯 차분해진 피터의 말에 조금 떨어져 얼굴을 마주보니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는 피터의 눈이 물기가 어려 초롱초롱하다.

"여기가 찌릿찌릿 했다구요."

자신의 심장부근에 토니의 손을 가져간 피터가 다시 한번 말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피터의 심장박동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고 있다. 흠칫 놀라며 빼려는 손을 꼭 잡은 피터가 흔들리는 눈동자의 토니와 똑바로 마주했다.

"술 먹고 주정부리는데 왜 잘해줬어요? 왜 웃어줬어요?"

"피터."

"왜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안좋아해요..?"

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는 피터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토니가 한숨을 내쉬니 움찔 몸을 떤 피터가 토니에게서 한발짝 멀어졌다. 그 날 이후 한숨이 많아진 토니를 모를리가 없었기에 피터는 토니의 행동을 부정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피터의 생각과는 달리 토니는 한발짝 물러서는 피터에게 다가가 안아버렸다. 

"토니..?"

"그 말 책임져."

"네?"

"좋아하게 됐다는 말. 프라이데이가 다 녹음했어 술 취해서 기억안난다고 하면 다시 생각날 때 까지 가만 안둘거야."

토니의 품에 안겨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피터의 동그란 뒷통수를 만져주는 토니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찌릿찌릿해."

"네?"

"나도 찌릿찌릿 하다고."

자신의 말에 웃음이 터진 피터를 놓치기 싫다는 듯 꽉 안으니 맞닿은 심장이 두근두근 같은 박자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찌릿찌릿하다.

해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