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지 다시 만나. 그때 그거 다 오해였대. 애들한테는 뭐라고 말하냐. 그 자리에서 민지 욕을 그렇게나 했는데. 아, 아무튼 그래서 오늘 화해 기념으로 너네 술집 가기로 했는데. 괜찮냐? 그리고 너 알바 끝나면 너네 집에서 잤다가 기숙사 짐 빼러 가게. 너랑 같이.

김동한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걸까. 결국 기억 못할 행동이었으면서, 나한테 왜 그랬을까. 언제나 김동한은 갑이고 나는 을이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을의 사랑이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하는 건 을의 사랑이 아닌 을보다 더 밑인 병이나 정의 사랑일 것이다. 나는 목소리가 덜덜 떨릴 것만 같은 기분에 목을 가다듬었다.


"나 내일 미정이랑 약속 있어. 오늘 가게 오든 말든 너 알아서 하고, 잠은 기숙사에서 자."


핸드폰 너머로 김동한이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김동한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박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 있냐는 내 물음에 박미정은 자취방에 혼자 있다고 말했고, 나는 괜찮다면 내가 알바에 가기 전까지만 통화를 해줄 수 있냐 물었다. 박미정은 알겠다고 했다. 친한 오빠 동생 사인데, 이것도 못해주겠냐면서.

결국 박미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놔버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박미정은 내 얘기를 잘 들어줬고, 공감을 해줬다. 나 사실 남자 좋아해. 라고 말을 꺼냈을 때, 사실 나는 박미정이 나를 더럽다고 생각할 줄 알았다. 어떻게 남자를 좋아해요. 하면서. 하지만 박미정은 그럴 수도 있죠. 라는 말을 했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박미정과 통화 중에 울어버린다면 왠지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 울음을 꾹 참았다. 박미정은 모든 것은 김동한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분명히 내 편을 들어주느라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만, 사실 박미정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김동한이 나한테 그러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거다. 다른 친구들보다 나를 유별나게 더 챙기지만 않았어도, 나 때문에 여자친구와 싸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여자였다면 사귀었을 거라는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그날 밤 나에게 키스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박미정은 김동한이 정신을 차리려면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나도 그 말에 동의를 했다. 그리고 박미정은 내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때 그 술집에서 손민지가 했던 건, 종강 기념 과팅이 맞았다고. 나는 박미정에게 굳이 이런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내 말에 핸드폰 너머의 박미정은 푸하하 웃었다. 손민지보다 오빠가 더 그 오빠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요.

박미정의 말에 의하면 손민지는 저번에도 이러다가 남자친구와 한 번 대판 싸우고 이별을 했다고 한다. 나는그걸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너무 화가 나서, 가게에 오는 손님들을 모두 거칠게 대해버렸다. 단골 손님인 치기공과 학생이 "오늘 기분 많이 안 좋아요?" 라고 묻기 전까지는. 그래, 손민지에게 빡친 걸 손님들에게 푸는 건 정말이지 잘못된 행동이니까. 내가 마음을 다시 평화롭게 다스리려던 그때, 김동한과 손민지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려던 나의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손민지의 그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김동한의 팔에 팔짱을 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동한의 테이블에서 벨을 눌렀지만 난 그걸 확인하고도 가지 않았다. 사장님은 내게 안 가봐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김동한과 지금 싸운 상태라고 거짓말을 쳤다. 내 말에 사장님은 역시 불타는 청춘이라며 껄껄 웃으시고는 김동한과 손민지가 있는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김동한에게 갔다가 돌아온 사장님은 김동한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셨다. 나는 김동한이 나를 부르든지 말든지 김동한의 테이블을 뺀 모든 테이블에 서빙을 했고, 김동한에게 다녀올 때마다 김동한이 나를 부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장님이 너무 불쌍해서. 나는 결국 김동한의 테이블로 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나를 계속 부르는 거냐고.


"왜 서빙 니가 안 오고 사장님이 오냐?"

"손님 너만 있어? 나 바쁠 때 니가 눌렀으니까 그랬겠지."

"확인 다 했는데."

"…."

"너 보고도 가만히 앉아있었잖아."

"니가 부르면 꼭 와야되냐? 나는?"

"뭐라고?"

"사람 존나 병신 취급 하네. 야. 내가 개냐? 니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요새는 개도 그렇게 안 해."

"야 김상균."

"왜 불렀는데."

"…아니다."


김동한은 고개를 획 돌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고는 김동한의 맞은편에 앉은 손민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손민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나는 둘을 번갈아보다가 이내 카운터에 있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김동한과 살면서 투닥거린 적은 몇 번 있어도, 이렇게 다툰 적은 없었다. 다퉜다고 해봤자 장난을 쳤던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던 게 끝이었는데.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김동한과 내가 왜 이렇게 어긋나나 싶어서. 김동한의 모든 나쁜 점도, 나쁜 버릇도 좋게 보던 나는 이제 김동한이 무슨 짓만 하면 그것을 너무 비꼬아서 봐버리게 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계속 카운터에 앉아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앞에 누가 서길래, 나는 당연히 김동한일 줄 알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건 김동한이 아니었다. 단골 손님. 우리 가게에 자주 온다던 그 치기공과 학생이었다. 허우대는 멀쩡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동기들과 온 것 같았는데, 여자들과 술을 마시러 오는 날도 꽤 있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는 계산을 할 거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네?"

"아니, 저 이 술집 자주 오니까... 번호 교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갑자기요?"

"네, 아니 저는 사실 갑자기가 아닌데... 아무튼 번호 주는 거 싫으시면 그냥 제가 제 번호 드릴게요. 괜찮으면 연락 주시고 안 괜찮으면 연락 안 주셔도…,"


야 김상균. 내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김동한이 나를 불렀다. 그 사람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김동한은 그 사람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아까 김동한과 손민지를 그렇게 쳐다봤던 것 마냥. 나는 무슨 일이냐고 대답했지만 김동한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또 내가 자기랑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 어쩌나 생각을 했다. 사실은 기대를 한 거다. 한참동안이나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김동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등을 돌려 손민지에게로 가려고 발을 뗐다. 그리고 나는,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엄청나게 큰 소리로,


"번호 주세요. 생각 해보고 연락 드릴게요."


라고 말해버렸다. 내 말에 김동한은 잠깐 멈칫하는 듯 싶더니, 이내 다시 손민지에게로 걸어갔다. 거기로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애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데. 몇 년동안이나, 김동한이 사귀었던 여자들보다 내가 훨씬 더 김동한을 좋아했는데.

한시 반 정도가 되었을 때 김동한은 손민지를 데리고 카운터에 왔다. 계산을 하는 내도록, 김동한도 그랬고,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손민지는 김동한의 팔짱을 끼고서는 우리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봐도 손민지는 너무 예뻤다. 그러니까 김동한이 좋아해주는 거겠지. 나는 계산을 다 끝내고서 카드를 김동한에게 내밀었다. 김동한은 아무 말 없이 카드를 받았고, "야 너 마감 때…." 라며 말을 하다 말았다. 아마 마감 때 오겠다는 소리였을 거다. 김동한은 늘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김동한에게 우리 집이 아닌 기숙사에서 자라는 말을 했고, 김동한에게 나쁜 소리를 했다. 김동한은 내게 손을 흔들어주지도 않고 손민지와 함께 떠났다. 짝사랑이라는 건, 진짜 비참한 거구나. 드라마를, 웹툰을, 영화를 봐도 공감을 못하던 나는 이제서야 그것을 뼈저리게 공감한다.

김동한이 떠난 후 나는 내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 해도 너무 오래 했지. 최가람도, 이병준도, 심지어는 김동한마저도 언제까지 이 사진을 해놓을 거냐는 말을 했었다. 그래, 이제 바꾼다 병신들아. 나는 갤러리를 뒤져 내가 잘 나온 사진을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있는 사진에는 언제나 김동한이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그 어디에도 김동한이 없는 게 없어서. 나는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그런데, 바꾼 프로필 사진마저도 사실은 김동한이 찍어준 거라서. 그게 너무 짜증이 났고, 너무 힘들었다.


김상균 님의 프로필 사진

2월 X일 


김상균 님의 프로필 뮤직

2017년 11월 3일

첫사랑 - 버스커 버스커


김상균 님의 프로필 사진

2017년 4월 2일

평행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