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을 끝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탄 항공모함이 샌디에이고 파이터타운 항구에 정박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와중에 대충 샤워를 마치고, 방에 죽은 듯이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겨우 짐을 챙긴 루스터가 일사불란하게 하선하는 동료들 틈에 섞여 지친 눈을 비볐다. 위험 부담이 어마어마했던 임무가 완벽하게 성공했으니, 모두 펍에 한 잔 하러 가자는 누군가의 외침이 그의 귀에 와 박혔다. 젠장, 닻을 내리면 곧바로 잠이나 자려 가려고 했는데. 그럼에도 저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또 절대 도망치지 않는 게 브래들리 브래드쇼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어깨를 으쓱한 루스터가 금세 저를 향해 손짓하는 동료들의 무리에 섞여들어간다.


창백한 달이 새까만 밤하늘 위로 둥실 떠오른 그 아래, 샌디에이고 파이터타운의 유일한 펍인 HARD DECK 안은 늘 그렇듯 시끌벅적했다. 항공모함을 탔던 이들의 귀환보다 아주 조금 일찍, 그들의 승전보가 전해진 탓이었다. 평소 그들을 반겨주던 쿨한 펍의 주인이 오늘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은 좀 아쉬웠지만, 그녀 대신 가게를 오픈한 지미는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을 위해 기꺼이 새 맥주병들을 건네 주었다. 


사이클론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게 가장 먼저 새 맥주병이 건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인지, 윗분들은 받아든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킨 후 곧바로 제군들 내일 보자며 펍을 나섰더랬다. 화끈하시네.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또 한 잔 하려는 생각이겠지. 그나저나 매브는 어디 있는 거지? 어깨를 으쓱한 루스터가 구겨져 있는 근무복 주름을 쭉 당겨 폈을 때, 문득 제 등을 툭툭 두드리는 손길이 있다. 그에 뒤를 돌아본 루스터가 오, 하고 눈을 껌뻑인다.


"피닉스."

"오늘도 한 곡 안 쳐 줄래? 루스터."


Great balls of fire 부르자. 어때?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피닉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스터가 제 맥주병을 든 채 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사방에서 울리는 환호가 그의 뒤를 받쳐주었다. 역시 이 순간이 좋았다. 하늘 위에서 비행하는 순간만큼이나. 모두가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그런 시간들. 


씩 웃은 루스터가 펍 중앙의 낡은 피아노 앞에 앉는다. 오늘은 제 트레이드 마크인 하와이안 셔츠가 아닌, 카키베이지색 근무복을 입은 채지만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루스터가 제 긴 손가락을 이내 사뿐히 건반 위에 올려놓는다. 이내 그 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발랄한 피아노 선율에, 모두가 맥주잔과 주둥이가 좁은 병을 들어올렸다. 따다다 딴.


"You shake my nerves and you rattle my brain,"


호우! 신이 난 이들의 한 목소리가 허스키한 루스터의 목소리를 따라 너른 펍 안을 가득 울렸다. 사랑. 사랑. 사랑. 맙소사, 거대한 불덩이! 이래서 노래하는 게 즐거웠다. 모두가 어우러져서 같은 것을 한 목소리로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아버지의 부대에 놀러 갔을 때, 그 어린 자신을 피아노 위에 앉혀두었던 아버지는 가족들, 그리고 하나뿐인 제 비행 파트너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도, 아버지와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제가 사랑하는 동료들과 함께. 세상에 나온 지 거의 50여 년이 지난 노래지만 이 노래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음, 아마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


가사가 들어가지 않는 간주 부분을 신나게 연주하던 루스터가 순간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내내 제 시야에 존재하지 않던 이가 갑자기 쓱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그것도 바로 제 옆에서. 노래하는 내내 텅 비어있던 피아노 왼쪽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행맨이 피아노 박자에 고개를 맞춰 고개를 까딱이자, 하마터면 그대로 박자가 밀릴 뻔했던 것을 겨우 돌려놓은 루스터가 다시금 연주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다음 부분에 눈이 마주쳐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Kiss me baby…!"


Holy shit. 몇 시간 전의 그 광경이 이렇게 생생하게 오버랩될 건 뭐람! 순간적으로 당황한 루스터가 다음 가사를 이어 부르지 못한 사이, 다행스럽게도 펍에 있는 이들 모두가 흥에 겨워 그의 빈자리를 메워 주었다. Ooh, that feels good, baby. 행맨의 목소리가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는 게 더 큰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도 이대로 노래를 망칠 수는 없으니 마저 이어가야 했다. 삐그덕대며 루스터가 겨우 박자를 맞추자, 사방에서 그를 격려하는 듯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늘 작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힘이 들어서 그런 줄 아는 모양새였다. 괜찮은 척 쾌활하게 웃고 있었지만, 새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루스터의 눈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행맨이 이내 그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로 화답한다. 그리고 둘의 반대편에 선 채, 미묘한 기류가 맴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제 미간을 살짝 눌러 좁힌 이가 있었다.


제가 어떻게 노래를 끝마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저를 향해 맥주잔을 들어보이는 이들을 향해, 익살맞게 허리를 흔드는 것으로 답을 돌려준 루스터가 이내 슬쩍 펍의 가장자리로 빠져 나온다. 딱 하나 남은 의자에 앉아 내용물이 반도 안 남은 병을 목구멍 쪽으로 기울인 루스터가 선글라스를 벗어들었다. 그대로 가슴팍에 매달린 선글라스가 루스터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왜 이렇게 시야가 흐리지. 루스터가 낮게 한숨을 토했다. 아직 제가 삼킨 알코올의 양은 간에 기별조차 가기 전인데도 이미 머리는 꽤나 멍했다. 


루스터! 루스터! 루스터! 그 와중에도 바쁘게 제 등허리를 두들겨주는 손길들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고 있자니, 문득 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툭 던져진다.


"뭐야, 갑자기. 루스터."

"…어?"

"행맨 왜 저래? 피아노엔 관심도 없었으면서."

"글쎄."

"글쎄는 무슨. …오. 넌 왜인지 아는 눈치인 것 같은데, 루스터."

"그럴 리가."


눈치가 빠른 소울 메이트를 속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피닉스가 툭 던진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인 루스터가 내용물이 빈 맥주병만 만지작댄다. 순간적으로 제 마음속에 이는 파문을 가라앉히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럼에도 루스터는 한 번 더, 일단은 시도해보기로 한다.


"음, 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람일 거야. 피닉스."

"나도 알아. …shit, 루스터. 너 입술이 왜 그래?"

"입술? 아, 이건…"

"생긴 게… 꼭 어디 박아서 찢어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행맨은 얼굴에 시퍼렇게 멍들었던데. 누구한테 맞기라도 했나? 분명 우리 임무 다녀왔을 때까진 멀쩡했는데."

"…"


당연히 말할 수 있는 입이 있어도 솔직히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피닉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스터가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머뭇대자, 얌전히 피닉스를 따라와 그 옆에서 팝콘 통을 끌어안고 있던 밥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그런다.


"입안 다 터진 것 같던데, 피닉스. 걔 아까 맥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이긴 하더라."

"그래? 멀쩡하던 입안이 갑자기 왜?"

"그야 나도 모르지?"

"행맨이 아무 때나 주먹 휘두르고 다닐 애는 아닌데. 이렇게 기쁜 날엔 더더욱. …뭐지?"

"괜찮겠지. …그냥 내버려 둬, 피닉스."

"흐음."


상황을 지켜보던 루스터가 툭 던진 말에, 피닉스가 곧바로 두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루스터가 조용히 다른 곳을 쳐다본다. 저건,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다 알고 있으니 개수작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밥만 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팝콘 섭취에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자꾸만 저를 회피하는 루스터의 시선을 끈질기게 따라간 피닉스가 무심하게 묻는다.


"혹시 니네 싸웠어?"

"뭐? 말도 안 돼, 피닉스. 내가 왜 행맨이랑…"

"아니면 말고."


제 소울 메이트는 가끔 이렇게 칼날보다 예리한 지적을 해낼 때가 있었다. 어느새 제 근무복 등 부분이 저도 모르게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지만 루스터는 전혀 그를 느끼지 못했다. 누가 봐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얼굴로 귓가를 긁적이는 루스터를 조금 미심쩍은 눈길로 보던 피닉스가 이내 호쾌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뭐, 아무래도 좋아. 너 많이 피곤해 보여, 루스터."

"좀 그런 것 같긴 하네. 괜찮아, 너랑 밥은?"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야지. 넌 먼저 들어갈 생각이야?"

"그럴까 싶은데."

"그래, 그럼 나머진 내일 얘기하자. 들어가."

"내일 봐. 피닉스, 밥."


페이백. 팬보이. 코요테. 여기저기 인사를 건네자, 다시 한 번 루스터를 향해 무수한 손길들이 쏟아졌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손바닥에 일일이 손바닥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이고, 겸연쩍게 웃어보인 루스터가 이내 조용히 펍을 빠져나왔다. 제 귓가를 꽝꽝 울리던 음악 소리와 목소리들이 사라지고 인적 하나 없는 고요한 거리에 나오니 그제야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새까만 밤하늘 위로 떠오른 별을 벗삼아, 루스터는 홀로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고작 맥주 한 병이긴 했지만 술을 마셨으니 포드를 몰 수는 없었다. 음, 내일은 아마 조촐하게나마 승전 자축 파티가 있지 않을까. 뭐 어쩌면 약장 수여식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겠고. 어차피 자신은 관제소의 명령에 불복종했으니 제외될 확률이 높았지만 매버릭이 뭔가를 받는 모습을 본다면 굉장히 기쁠 터였다. 나야 서훈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일단 살아서 돌아오는 게 중요했지. 그리고, 매브와 다시 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빠져 있느라, 루스터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스터, 루스터! 브래들리! 허니!"

"?!"


젠장! 누가 듣진 않았겠지. 마지막으로 제 귓가에 와 꽂히는 달달한 단어 하나에, 휙 뒤를 돌아본 루스터가 이내 행맨의 단단한 실루엣을 발견하곤 눈을 깜빡였다. 


"행맨. 언제 나왔어?"

"너 나가고 나서 바로. 나도 오랜만에 격추 기록을 추가했더니 좀, 피곤하네?"

"…퍽이나."


하여튼 끝까지 잘난 체는 못 잃지. 그게 행맨답기는 했다. 어깨를 으쓱한 루스터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느릿하게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너도 숙소로 돌아갈 거야?"

"당연하지. …그러려고 기다렸는데."

"뭐?"

"너랑 함께 가려고 기다린 거라고. 루스터."

"…아, 그래."


그러냐. 저렇게 응답이 친근하게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역시 아까의 그것 때문일까. 녹이 슨 전투기 부품처럼 삐걱삐걱 대답한 루스터가 저벅저벅 앞서 걸었다. 그럼에도 행맨은 전혀 뒤로 처지지 않는다. 결국은 앞서나가는 데 실패한 루스터가 행맨과 나란히 걸음을 맞춘다. 새까만 하늘 중간에 콱 박혀 있는 은백색 달빛만큼이나 끈질긴 시선이 제 옆얼굴에 와 닿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루스터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까의 그 주먹다짐이 있었던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걸까. 그것보다, 결국에는. 


당사자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 원인이었던 격렬했던 키스가 떠오르지 않을 리가 없다. 흡사 하늘에서 적기와 공중전을 벌일 때에나 맛보았던, 그 짜릿했던 느낌. 온몸에 뜨거운 무언가가 화악 번져가던, 그 느낌. 그것을 애써 잊어버리려 노력하던 루스터가, 결국은 태연을 가장하려던 제 시도를 포기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냥, 말해버리는 게 낫겠지. 묵묵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비추고 있는 달은, 참 어지간히도 밝았다.


"행맨. 우리 뭔가, 좀…"

"…?"

"순서가 좀,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아?"


순전히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명확한 대답을 원하고 한 질문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막상 제게 돌아오는 것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 하나뿐이라면 스스로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콧등을 찡그린 루스터가 마저 입을 연다.


"뭔가 그렇잖아. 난 아직, 그러니까 잘…"

"나에 대한 마음을 잘 모르겠다, 뭐 그런 얘기야? 루스터."

"뭐, 대충 그런 뜻이지. …그리고 누군가와 사귀기도 전에 키스부터 했던 적은 한 번도 없기도 했고."

"오, 그래? OCS 시절에도?"

"그땐 애인 사귄 적 없었어. 뭐, 이 참에 서로 과거에 사귀었던 사람들 이력이라도 늘어놓아 보자는 거야?"


안타깝지만 백맨, 네가 누굴 만났는지 난 전혀 안 궁금해. 슬쩍 미간을 찌푸린 루스터를 향한 행맨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을 갈라놓았다. 하하하, 그런 건 아니고. 두 손을 들어보인 행맨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필요 없어. 어차피 지금까지 네가 만났던 허니들 중에서 최고는 내가 될 테니까, 루스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시고."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후에 보면 알겠지."

"Holy shit. 그것 참 대단한 자신감이네, 백맨."


네 말을 듣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야. 헛웃음을 지은 루스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행맨은 꽤나 즐거운 듯한 얼굴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데이트 신청 절차를 밟아 볼까, 루스터."

"…그게 무슨 뜻이야?"

"확실히 넌 아주, 아주 느린 걸 선호하는 것 같아. 역시 보수적인 남자라니까. …Oh God, 브래들리!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좀 더,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 보자는 이야기지."


주저없이 뻗은 루스터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행맨이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종종 상대방을 열받게 하는 그 쾌활한 미소가 또, 못내 약이 올라 루스터가 후우, 하고 큰 한숨을 내쉰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결론 참 간단하게 내 버리네. 사고 과정이 단순명료해서 가끔은 부럽기도 하고. 이렇게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이야기의 매듭이 지어질 줄은 몰랐다. 갑자기 확 피곤이 몰려와, 제자리에 멈춰 선 루스터가 뻐근해진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극한의 임무로 인한 피곤이 층층이 쌓인 데다가 술도 마셨으니, 아까보다 판단 능력이 더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문득 뒷목 부근에서 낯선 체온이 느껴지자 놀란 루스터가 눈을 번쩍 뜬다. 그가 미처 물러날 새도 없이, 루스터의 목 뒤쪽에 안착한 행맨의 손이 근육이 뭉친 부분을 꾹꾹 누른다. 그대로 어색하게 선 채 그 손길을 묵묵히 받고 있던 루스터가 이제 되었다는 듯 몸을 살짝 틀자, 비로소 행맨의 체온이 떨어져나간다. 


다시금 둘 사이에 아까와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느낌이다. 살짝 충혈된 눈을 부릅뜬 루스터가 한숨처럼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가서 좀 자야겠어. 이러다 땅 위에서 G-LOC이라도 올 것 같다고."

"오, 허니. 상당히 좋은 지적이야."

"…"


허니…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 호칭이었다. 그건 좀, 그만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느라 루스터가 별다른 대답 없이 눈만 껌뻑이자, 행맨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그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걸어온 모양인지, 어느덧 두 사람은 파일럿 숙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럼 내일 보자고, 행맨. 고개를 까딱한 루스터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 다시금 팔이 잡혔다. 이번엔 또 왜. 슬쩍 짜증이 담긴 눈으로 루스터가 돌아보자, 행맨이 짧게 윙크를 날리며 그런다.


"가자고, 루스터."

"어딜?"

"네 방에."

"네가 이 시간에 왜 내 방엘 오겠다는 건데?"


얼이 빠진 얼굴을 한 루스터가 되묻자, 그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행맨이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브래들리. 아까 내가 했던 말, 아직도 이해를 잘 못 하고 있네."

"뭐?"

"방금 전에 말했잖아. 이제 서로에 대해 좀 알아가 보자고."

"그러니까. 천천히 알아가자며?!"

"이런, 루스터. 생각해 봐. 지금 이보다 더 천천히일 수가 있나."

"…나 가서 바로 잘 건데, 행맨."

"자. 난 너 자는 모습 구경 좀 하다가 갈 테니까."

"…"


Shit, 도대체 어디가 천천히라는 거야. 미간을 구긴 루스터가 결국은 두 손을 들었다. 들여보내줄 거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은 행맨이 이내 루스터의 뒤에 바짝 따라붙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숙소 건물 계단을 오르는 내내 자꾸만 행맨의 것과 제 손끝이 스치는 탓에, 루스터는 자꾸만 살갗에서 전기가 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라알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