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끌게."

"응. 여기 열쇠."

"고마워."

자율연습까지 마치고 체육관을 나서는 길이었다. 언제나처럼 히나타와 카게야마가 마지막까지 남아 연습하고 야치는 둘의 연습을 도왔다. 배구의 ㅂ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니저가 된 야치도 여름방학을 지나면서 공을 올리는 데만큼은 도가 텄다.

히나타는 자전거를 가지러 갔다. 히나타가 없으면 카게야마에게서는 유머가 사라진다. 진지한 침묵. 뉘엿뉘엿 지는 노을조차 카게야마에게 이끌려 축축 처지는 듯 무거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야치는 괜히 카게야마에게 말을 붙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구했다며?"

"응."

"어쩌다 시작하게 된 거야?"

"하고 싶어서."

카게야마에게는 서술형 질문도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배구가 재미있었어?"

"응."

야치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평소처럼 짧게 대답하더니 평소와 달리 길게 뜸을 들였다. 카게야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처음 공을 만지는 순간부터 좋았어."

카게야마와 야치는 정문에서 히나타를 기다렸다. 둘은 아직 배구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크게 없었다. 야치는 무슨 말이라도 더 꺼내볼까 혼자서 쩔쩔매면서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카게야마 때문에 말을 꺼내는 게 괜히 긁어 부스럼 아닌가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편안하게 가만히 있기는 또 꺼림칙했다.

어색하지만 어색한 게 더 어색한 기분. 아직까지는 그랬다.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문득 카게야마가 말을 꺼냈다. 묵묵히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던 야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둘의 눈빛이 허공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반짝 부딪쳤다가는 이내 길을 잃는다. 야치가 살짝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괜히 긴장이 된다. 누군가의 진지함을 대한다는 건 늘 긴장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괜히 긴장이 된다. 야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카게야마에게 되물었다.

"뭔데?"

"머리 묶는 거 있잖아."

"응."

"묶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야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이거? 글쎄... 5초 정도?"

카게야마가 한층 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5초밖에 안 걸려?"

"그...렇지? 왜?"

야치는 한쪽으로 올려묶은 자신의 머리를 풀었다. 야트막한 언덕처럼 솟아올라 있던 머리카락이 본디 모습대로 내려앉았다.

"자, 봐봐. 일, 이, 삼, 사, 오."

야치는 능숙하게 별 힘 들이지 않고 머리끈을 놀려 원래대로 머리를 묶었다. 카게야마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단하다."

들뜬 모습이 꼭 난생 처음 돌고래쇼를 본 어린애같다.

"그, 그런가?"

"마술 부리는 것 같아."

"그 정도는 아닌데..."

"어떻게 묶는 거야?"

"어... 음... 이렇게?"

야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풀었다가 묶었다. 그래도 카게야마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않았다.

"더 천천히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몇 년 동안 매일 하던 동작인데 의식하면서 천천히 하려니 야치조차 헷갈릴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일단 의혹과 경이가 넘치는 눈빛은 거두어들였다.

"볼 때마다 신기해."

"머리 묶는 게?"

"응. 자꾸 보게 돼."

"머리 묶은 애들 다?"

"아니. 그건 아냐."

"그러면?"

"너만."

"나만?"

"응."

"왜지?"

카게야마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곧 말문을 열었다.

"머리 묶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왜 묶는 거야? 어떻게 해?"

어쩐지 중요한 무언가를 지나친 것 같지만 대화는 계속되었다. 

누구한테 배웠더라? 야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도 엄마한테 배웠겠지만, 어떻게 배웠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를 묶고 싶었고, 그래서 묶었고, 그러다 쭉 묶었을 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살짝 포인트라도 주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밝고 발랄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는 설명까지는 굳이 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다 보니? 그냥 하다 보면 하게 되는 그런 것 같아. 워낙 매일매일 많이 하니까..."

"배구같은 건가?"

"그...렇지?"

카게야마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 묶는 게 배구 같은 거라면 세상만사가 배구 같은 거 아닐까 싶었지만 야치는 멋쩍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내가 해봐도 돼?"

"어? 응."

야치의 묶은 머리가 또 한 번 풀렸다. 야치에게서 카게야마에게로 머리끈이 전해졌다. 야치의 검지손가락의 손톱이 카게야마의 오른손 손금에 살짝 닿았다가는 떨어졌다. 종종 있는 일이다.

카게야마는 쉽사리 행동을 개시하지 못하고 머리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한참을 고민했다. 머리끈의 지령이라도 떨어져야 안심하고 뭐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야치가 보다못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머리끈은 신경쓰지 말고, 머리카락을 적당히 모아봐."

카게야마는 쭈뼛거리더니 손 크게도 머리카락을 한 움큼 집었다. 전체 머리카락의 절반은 되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가 주는 힘을 따라 야치의 고개가 젖혀졌다. 다시금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엄청 가깝다. 

현미경이라도 갖다댄 것처럼 속눈썹 한 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원근감이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저 실제 거리가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손길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것이 의외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감촉이라 야치는 속으로 찔끔했다.

카게야마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만큼?"

"아니, 너무 많아! 조금 덜어내야 해. 지금은 너무 적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응, 이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 그 다음에는 그 머리카락을 머리끈 안에 집어넣어봐."

머리를 처음 묶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카게야마는 이 다음 단계-머리끈을 한 바퀴 돌려서 다시 머리카락을 그 사이로 집어넣는-에서 실패했다. 몇 번씩 머리끈이 풀려 땅바닥에 떨어지고 몇 번씩 야치의 머리카락이 풀려내려왔다.

큰 낭패라도 당한 듯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카게야마를 보고 야치가 하하 웃었다.

"만만치 않지?"

야치는 머리끈을 주워 툭툭 털고는 깔끔하게 머리를 묶었다.

"카게야마! 야치!"

저 멀리서 히나타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야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정문에 다다라 자전거에서 뛰어내리는 히나타에게 야치가 물었다.

"히나타, 머리 묶는 법 알아?"

히나타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알지! 나츠 머리 매일 묶어주거든."

으스대기도 하고 뿌듯해하기도 하는 히나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히나타도 하는 걸 내가 못하다니,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카게야마는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나서 귀엽다. 

"좋은 오빠네. 나츠는 참 좋겠다."

"엉망진창으로 묶는 거 아냐?"

"아니거든! 내가 너냐?"

오늘 웬일로 별 탈 없이 넘어가나 했더나 역시나 아옹다옹 투닥투닥.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말다툼에 야치는 그러려니 앞장서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질 때까지 카게야마는 내내 아무 말 없이 손가락만 꾸물거렸다. 

"버스 왔다. 가볼게."

"잘 가, 야치! 내일 봐!"

"응, 히나타, 카게야마, 내일 보자!"

히나타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야치도 창문 안쪽에서 히나타와 카게야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기 세계에 빠져든 나머지 인사도 까먹은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로는 투명 머리카락과 머리끈이 보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야치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왠지 내일도 모레도, 카게야마가 머리를 묶는 비법에 통달할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야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묶었다. 아까는 서두르느라 제대로 묶지 못했다. 창문을 거울삼아 꼼꼼하게 묶은 뒤 장식이 위로 향하도록 머리끈을 조심조심 돌렸다.

"잘 된 것 같다. 잘 된 것 같아."

그나저나 카게야마는 왜 갑자기 머리묶기에 꽂혔을까? 집요하게 파고들어 끝장을 보려는 모습이 마치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똘똘 뭉친 아기 리트리버같다. 나쁘지 않다. 한다면 하는 게 카게야마를 카게야마로 만드는 것들 중 하나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말을 하다가 무언가 중요한 걸 지나쳤던 것 같다. 뭐였더라.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지나가더니 뒤죽박죽 섞여버리는 바람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아마 내일 기억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모레 떠오를지도 모른다. 영영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머리를 더 열심히 감아야겠다.

짠찐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