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3일간 이나현을 죽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미래는 오지 않습니다.’


"…뭐야? 누가 장난 쳐 놓은거야?"


평소처럼 학교에 가 교실에 들어 가서 자리에 앉으니 책상에 이런 종이 쪼가리가 있다. 사실 짐작 가는 사람은 많다.


"김지연인가. 아님 정희민?"


가끔 가다 시비를 걸곤 하는 애들. 이런 유치한 괴롭힘은 무시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메모를 보란듯이 찢어버리고 휴지통에 넣었다.


"이나현이라… 이나현이 누구야?"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쯤 멀리서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있다.


"나현아, 안녕! 오늘 학교 일찍 왔네."


나현이란 이름이 들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갈색 머리를 늘여트린 여자애가 미소를 짓고 있다. 착하게 생겼는데. 저런 애를 싫어하는 이유는 역시 질투인가. 뻔하지,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는 애들은. 알 바는 아니지만.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으니 나현이란 애는 옆반인거 같다. 대신 우리 반에 친구가 많은지 자주 놀러오는 편인듯 하다. 나는 오늘 이나현이란 애를 이 쪽지 때문에 처음 알았지만.


그러나 호기심도 잠시 평소처럼 누워서 잠을 청했다. 짜증나는 학교. 짜증나는 멍청이들이 싫어서. 싸울거면 남을 끌어들이진 말아야지. 이나현과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



"쟤 깨워라."


옆에서 조금씩 흔드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렸다. 담임이 이쪽을 보며 한숨을 푹 쉬며 다시 칠판을 두드린다.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니까 다들 정신차려라. 그리고 현장체험학습 설문지 방금 나눠준거 체크해서 반장이 가져와."


눈 앞에 회색 종이가 있다. 신나서 점점 커지는 목소리들. 이런 거 아무 의미 없는데. 종이를 가져가서 아빠에게 보여주는 상상을 한다. 관심 한 점 못받고 쓰레기통에나 버려질텐데. 애초에 같이 방을 쓸 애도 없다. 간다고 했을 때 담임이 땀을 뻘뻘 흘릴 생각하니 그건 조금 웃기다. 아침 조회를 마치고 담임이 반을 나가는 걸 눈에 담고 다시 엎드렸다.


***


하교할때가 되어서야 느즈막히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구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서 보니 나현은 친구들과 하교할 준비를 하며 웃고 있다. 저 애는 친구가 많아보이네.


"…집에나 가자."


집에 도착하니 불이 꺼져 있다. 오늘은 아빠가 안 오는 날이니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없는 가방은 가볍게 떨어졌다. 든 게 없으니까 당연한 건가.


"..."


집은 적막하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누워 있다가 오늘 만난 그 애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나현은 누구의 원한을 샀길래 나같은 애한테 살인청부가 들어올까. 웃는 얼굴 뒤로 뒷담을 까다가 들켰다던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다가 자괴감이 들어 눈을 감았다.


***


"야, 이나현 왜 먼저 가, 같이 가!"


아, 또 그 이름이다. 이나현. 어제 처음 그 이상한 쪽지에 적혔던 이름에 벌써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나현은 오늘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다. 이런 말 잘 안하지만 웃는 게 예쁘네. 거울을 보며 씩 웃어봤다. 근육이 경련하는 느낌에 표정을 거뒀다. 이런 것도 역시 타고 나야 되는구나.


그런 쓸모 없는 생각을 하다가 오늘 집에 아빠가 들어온다는 사실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시간이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그 걸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간은 쏜살같이 가버린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엎드려 잠을 자고 하교를 해 집에 도착하니 방에 불이 켜져있다. 그 모습에 심장이 발작하듯이 뛰기 시작한다. 애써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한번 들이 쉴때 눈을 감고 상상을 한다. 밧줄을 매다는 상상을 한다. 내쉴 때 구체화한다. 그 갈고리 안에 머리를 들이미는 상상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들어가자 거대한 덩치의 인간이 보인다. 아버지. 아버지는 눈이 풀려있다. 붉어진 얼굴이 보인다. 기분 나빠.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시커먼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쳐다본다. 오늘 같은 날은 얌전히 있는 편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 귓가에 파열음이 울렸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볼에 따뜻한 무언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두꺼운 손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을 꽉 감았다. 최대한 얼굴만은 가리고 있으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다. 이제는 익숙해서 괜찮다. 학교에 가면 또 이런저런 더러운 소문이 돌겠지만.


나를 향한 분풀이가 끝나면 방에 조용히 들어가 교복을 갈아입는다. 쓸린 곳이 따끔해 반창고를 떼서 붙였다. 붙여도 자꾸 떨어지는 것이 접착력이 아주 별로인 싸구려다.


"… 이나현은 이런 일 평생 겪을 일 없겠지."


머릿결도 좋고 교복도 깔끔해서 나랑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거 같으니까. 나 같은 인간은 평생 이나현 같은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이 순간 왜 이나현이 생각 났는지 모르겠다. 한번 떠올리니 자기 직전까지 이나현에 대한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오늘은 걔 안보이네."


이나현이 안 보인다. 친구랑 매일 같이 오더니, 싸우기라도 했나. 책상에 턱을 괴고 창문 너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코빼기도 안보이는데. 일어나니 덕지덕지 성의없이 붙인 반창고가 떨어진다. 너무 대충 붙였나, 아니면 반창고 문젠가. 이젠 쓰레기가 된 것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데, 옆에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박예지 오늘도 지 애비한테 맞고 왔나봐."


"불쌍할 만도 한데 그 애비에 그 딸이라고 둘 다 병신인듯? 쓰레기 인생이네."


이어지는 악의가득한 웃음소리. 하루이틀 겪는 일도 아니니 한 귀로 흘렸다. 지금은 이나현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왠지 그 애를 봐야 심란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 웃는 얼굴이 묘하게 안정을 준다고 해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멀리서 이나현이 보인다. 인사를 할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니 온 것만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돌렸을 때,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쟤 보이지. 쟤가 박예지거든? 우리 반에 박예지 알아?"


"어… 응."


이나현의 목소릴 처음 들어보았다. 생긴 것처럼 맑은 목소리였다. 잠결에 들었어도 일어났을 정도로 청아한 울림. 마치 피아노 소리같다.


"걔 좀 무섭지 않아? 아빠도 미쳤고 걔도 정신병 걸렸대. 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뭐라고 해도 절대 대답 안하잖아. 진짜 징하지 않아? 저런 애들이 갑자기 눈깔 돌아가지고 칼 들고 그런다니까. 무서워… 엄마한테 말하는데, 엄마가 저런 애들 얼마 안 가서 자퇴하니까 걱정 말래."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말던 상관은 없었다. 그 뒤에 이어질 이나현의 대답을 피해 교실로 돌아왔다. 이나현이 저 말에 동조할까.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


자리에 앉아 달력을 보니 벌써 그 쪽지를 받은 날로 부터 3일째가 되었다. 그 쪽지의 범인은 누굴까.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딱히 이나현과 사이가 안 좋아보이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이나현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나 자신이나 걱정해야 될 텐데. 예를 들자면.. 내 자리에 있는 비참하게 찢어진 교과서. 무감해지고 싶었지만 감정이 없다는 건 그것대로 싫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는 거다.


쓸 수 없어진 교과서는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다. 따라다니는 시선이 질기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이런 일은 아무런 타격도 없는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이나현이 다른 반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하교할 시간이 되어 가방을 들었다. 일단 그 악질적인 쪽지의 범인은 내일 찾기로 하자.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오늘도 집에 불이 켜져 있다. 역시 그 인간이 온 모양이다.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열자마자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술이 싫다. 저 사람도 싫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는 걸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은 것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아니,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확실한 건, 극심한 고통이 중간중간 찾아와 눈물을 쏟을 정도였다는 것. 간밤의 그 고통은 새파란 멍울이 되어 드러났다. 아픔을 숨기기 위해 얇은 옷을 걸친다. 평소 같은 일상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


아침이 되고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어딜 갔지? 보통같으면 숙취로 죽은 듯이 자고 있을텐데. 의아해 하며 교복을 입으며 가방을 챙겼다. 오늘도 이나현이 우리 반에 오려나. 그런 아무 도움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학교에 도착해 책상에 가방을 놓는데, 어딘가 익숙한 종이가 있어서 펼쳐보니,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오늘부터 3일간 이나현을 죽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미래는 오지 않습니다.'


"....."


뭐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공황이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눈 앞이 새하얘진다. 몇분간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만 들이 쉬었다. 하얗게 점멸됐던 시야가 한참을 심호흡을 한 후에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움츠러든 몇 분이 가시고 난 후에야 기분 나쁜 종이를 힘껏 찢어버렸다. 누가 이런 질나쁜 장난을 하는 거야. 찾아내면 죽여버릴거야.


이나현을 죽이라고? 나에게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라고 하는 거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를 확인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니 22일이다. 그래, 3일전 그 날. 쪽지를 처음 발견해서 찢어버렸던 날이다. 하하.. 휴대폰이 고장났네. 왜 이런 병신같은 일이 나한테만 연속으로 일어나는 거지? 휴대폰을 껐다가 켜도 그대로였다. 서비스센터라도 들러야하나.


"나현아, 안녕! 오늘 학교 일찍 왔네."


그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이나현이 교실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이런 미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어. 분명 질 나쁜 장난이야.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결과적으로 폰은 고장나지 않았다. 인터넷을 찾아 날짜를 확인했다. 신문을 봤다. 티비를 봤다.


영락없는 22일이다.


지난 밤에 기분 나쁜 꿈을 꾸었나. 정말 끔짝한 꿈이다. 무슨 예지몽처럼 그런 꿈을 다 꾸지. 그렇게 생각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 가 앉았다. 엎드리기 전에 이나현을 흘긋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이나현은 확실히 나를, 내 눈을 보고 있다. 그 사실이 당황스러워 눈을 돌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다. 내 얼굴에 무언가 묻었나? 급하게 폰으로 얼굴 상태를 확인하니 평소와 같다. 다시 이나현을 보니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역시 내 착각이었다.


교실 앞 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온다. 손에 가득 든 종이를 뭉텅이째로 나눠준다. 뒤로 전달되는 종이를 받으니 '현장체험학습 설문조사'라고 크게 적혀있다.


그 종이를 보고 뒷목이 빠듯해지며 사고회로가 멈췄다.


"희진아, 정수아 깨워.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니까 다들 정신차려라. 그리고 현장체험학습 설문지 방금 나눠준거 체크해서 반장이 가져와."


"..."


그때와 같다. 이걸 또 나눠주고 다시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까. 설문지가 잘못됐거나.. 그런 거겠지.


멋대로 그렇게 결론내렸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그후 사흘 간은 내가 알던 사흘과 아주 흡사하게 흘러갔다. 아빠에게 맞고, 비웃음 가득한 그때와 같은 말들을 듣고.


***


눈을 떴다. 뜨자마자 날짜를 확인했다. 그날이었다. 22일. 저주받은 22일.


***

30일이 지났다.


아니, 3일이 열 번 지났다. 내가 꿈을 꾸는 거라고, 아니면 예지몽이라도 꿨던 모양이라고 현실을 부정했으나, 현실일리가 없었으나 아무래도 현실이었던 모양이다. 30일중 20일 가량을 아빠에게 두드려 맞기만 하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통증은 남는데, 상처가 남지 않는다. 남는 건 기억뿐이다. 상처가 남았더라면 이미 주검이 되었을거다.


상황이 절망적이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는 날만을 꿈꿔왔는데. 그날을 기다리며 아무 의미 없는 날들을 지내왔는데. 평생 미래가 오지 않는다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나현을 진짜로 죽여야 하는 모양이다. 쪽지는 매번 22일로 돌아와 학교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신병에 걸리던가 이나현을 죽이던가 둘 중 하나겠지.


열한 번째 22일에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교실 문 앞에 서 있는 이나현에게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경멸 어린 시선들도 지겹다.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저기서 말해도 될까?"


내 말에 이나현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알 수 없는 얼굴이다. 그 애는 예상외로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무시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싶었는데 잘 된 일이다.


학교 뒷 편에 가서 아무도 없는 곳까지 갔다. 그러고 보니 아무 대책도 안 세우고 가방에 주방용 식칼만 넣고 가져왔다. 정말 내가 미쳐가나 보다. 이나현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대로 칼을 꺼내면 도망갈 게 뻔하니 주위를 환기시킬게 필요하다. 둘러보니 이나현의 등 뒤에 학교 고양이가 알짱거리고 있다. 세 개의 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고양이다.


"저기, 고양이가 있네. 귀엽다."


아무래도 동물을 좋아하는 모양인지, 이나현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고양이를 보며 좋아했다. 그 틈에 가방 안의 칼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에게 점점 다가가면서 손에 땀이 났다. 너무 미끌거려서 금방이라도 칼을 떨어트릴 것 같다. 이나현은 바보같이 방심하고 있다. 여기서 이대로 찌르기만 하면….


찌르면 어쩔 건데? 넌 바로 경찰서행이야. 소년원행이라고. 아니, 감옥에 갈걸? 평생 갇혀있어야 될 수도 있어. 너 그런 걸 원하는 거야? 평생 콩밥만 먹으면서?


"...."


역시 타이밍이 나쁘다. 분명 내가 불러냈고, 그걸 모두가 봤으니 이나현이 죽으면 범인은 무조건 내가 되겠지. 그리고 아직 누군갈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정신이 나가진 않았다. 홧김에 불렀고 뒷감당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엉망이다. 만약 이나현이 죽어도 그대로면 어쩔 건데. 어쩌긴, 죄책감만 얻고 그냥 감옥 가는 거지. 자문자답하고 나서야 풀려있던 정신줄을 조금이나마 잡을 수 있었다.


일단 여기서는 물러서기로 하고, 이나현과 함께 화단에서 뒹굴거리는 삼색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같이 털 달린 생물은 정말 미치게 싫지만 이나현이 좋아하는 모습과 함께 보니 어떻게 생각하면 나름 귀여워 보이기도 하다.


이나현은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자 수업을 들어야 한다며 먼저 들어갔다. 뒷모습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이게 기회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

이나현을 죽이기 위해 필요한 것 첫 번째.

아무도 없는 장소로 불러내기. 이것은 어렵지 않다. 이나현은 점심을 먹고나면 교실에 있던 옥상에 있던 혼자를 자처했다.


두 번째.

흉기.


세 번째.

결심.


역시 마지막이 제일 문제다. 혼자서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 애를 마주하게 되면 항상 주저하게 된다. 그 애의 투명한 눈을 보고 맑은 목소리를 듣고 빙긋이 웃는 얼굴을 보면 힘이 풀리는 데. 죽이긴 커녕 침도 못 뱉을 거다. 나름대로 이나현을 죽이기 위해서 계속 반복되는 사흘 간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으나 항상 실패했다.


“…”


이번에도 실패였다. 뒤돌아선 그 애의 하얀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걸음만, 손만 뻗으면 되는데. 노래를 듣고 있는지 귀에는 무선이어폰을 끼고 흥얼거리는 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서, 추악한 내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비참해서 죽고싶다. 이나현을 죽이기 말고 나 자신을 죽이기였다면 좋았을걸.


이나현이 못 돼 처먹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면 내가 그냥 싸이코패스면 좋았을걸.


***

눈을 떴다. 역시나 22일. 어느 때처럼 책상에 가 종이를 발견했다. 찢는 것도 귀찮아져 그냥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종이는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진다.


그래, 몇백 번을 망설인 나는 이제 지쳤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건 이나현이 사느냐 내가 사느냐의 문제다. 이 긴 시간을 반복하면서도 이나현은 심지어 친구조차도 아니고 그저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는 남이다. 남과 나를 저울질한다면 역시 나를 선택해야 되겠지.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다시 한 번 그렇게 다짐하고 여느 때처럼 교실 문 앞에서 웃고 있는 이나현을 본다. 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아직까진 일말의 이성이 남아있는지 역시 사람을 선뜻 죽이긴 힘들다. 구실을 마련해야해. 내가 이나현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면 좋을 텐데. 거기다가 이나현이 날 죽도록 싫어하게 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힘입어 손을 올렸다.


짝!


경쾌하고 묵직한 마찰음에 교실 안 밖에서 시선이 쏠린다. 일말의 죄책감과 함께 자조적인 마음이 든다. 이나현의 눈이 아래로 시선을 향한 채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 애의 어깨가 떨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성이 날아갔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은 그러지 않았는지 가슴쪽이 뜨끔했다. 그러나 멈출 수 가 없다. 내 손은 다시 올라갔다.


마찰음이 몇번 더 울리고 나서야 주변 애들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내 팔을 결박했다. 팔이 붙잡혀서 다리를 움직여 밟으려니까 한 애가 내 뺨을 내려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입가에 쇠맛이 났다. 맞는 게 일이라 맷집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보다. 본능적으로 눈에 눈물이 고여 눈 앞이 뿌옇다. 그 와중에도 이나현의 표정이 궁금했다.


울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증오를 불태우며 이를 갈고 있을까. 어느 쪽이던 내가 바란 결과다. 이나현이 날 혐오하게 된다면, 이미 혐오하고 있겠지만, 나도 이나현을 증오하기가 더 쉬울거다. 더 나아가면 죽일 수도 있겠지.


교실은 아수라장이다. 모두가 이나현과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관찰하고, 욕을 내뱉고, 어른을 부른다. 난 이나현이 고개를 들 때만을 기다린다.


“거기서 뭐하는 거야! 또 너냐, 박예지!!”


타이밍이 안 좋다. 담임이 그새 얘기를 들었는지 이쪽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얼굴이 분노로 빨개지고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있다. 위험한 징조다. 갑자기 현실감각이 돌아오며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너희 아버지 데려와! 미쳤다고 친구를 때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못 넘어간다.”


방금 전까지 고요했던 심장이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나현을 어떻게 죽여야하나에 집중했던 생각이 모두 파편처럼 흩어지고 오로지 한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죽는다.


아빠가 이 일을 알게 되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죽을 수도 있다. 일단 내 팔다리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다..


방금 전까지 남을 죽일 생각을 했으면서 나에게 닥친 현실에 손에 땀이 흥건하게 젖었다. 담임에게 무어라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이건 변명의 여지도 없다. 모두가 봤으니까. 그래도 무어라 말을 해보려 입을 열었을 때, 울리는 단호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때린 게 아니에요. 그냥 서로 장난치다가 맞은 거에요.”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나현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눈물을 흘리지도 혼란스러워 하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나현아, 네가 맞는 거 다 봤어. 도대체 왜 그래? 우리 없었으면 너 큰일날 수도 있었잖아!”


옆에서 한 애가 거들자 모두들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너네가 맞았어?”


이나현의 협박 어린 한마디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의 만행에 대해 입을 열고 싶은 낯이었으나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데 굳이 말을 퍼트려 그 애의 원망의 눈초리를 받고 싶은 사람은 없어보였다. 담임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한번 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반 아이들과 옆 반의 아이들이 이나현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었으나 그 애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 애 뒤를 따라갔다.



“…뭐야? 무슨 생각이야?”


내 시비에도 이나현은 묵묵히 손만 씻었다. 그러곤 휴지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박예지였나. 나한테 무슨 원한 있니?”


원한이 있었으면 좋겠네. 속으로 빈정거렸다. 이나현을 보다가 눈을 피했다. 마주보기가 힘들다. 죄책감보다는 보고 있으면 몸이 간질거리는.. 수줍음? 웩. 설마.


“..그건 아닌데. 나한테 맞은 데 아프잖아. 내가 징계 받길 바라지 않아?”


“좀 있으면 수업 시작하니까 그만 교실에 들어가 봐.”


“…내가 맞을까봐? 나를 동정해서 입 다문거야?”


내 말에 이나현은 눈을 마주쳤다.


“어. 불쌍해서. 나 하나만 넘어가면 될 일을 굳이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어때.”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진짜로 화장실에서 죽일 순 없다. 내가 여기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을 테니까. 이나현은 내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정작 그 얼굴은 잔인할 정도로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항상 웃는 낯만 보니 몰랐는데 무표정한 얼굴은 살면서 한번도 웃어본적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는 낯이었다. 부드럽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도 지금 들으니 새삼 정이라곤 없는 말투였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정론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진짜 죽인다는 게 아니라 죽일 정도로 싫다는 얘기로 알아듣고 있다.


난 네가 싫은 게 아냐. 차라리 네가 싫었으면 좋겠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으면 좋겠다고!


이나현을 싫어해야 하는데, 증오해야 하는데 차가운 눈빛에 마음이 쿡쿡 쑤셨다. 멍청한 질문인 줄은 알지만 입이 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싫어?”


그 애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니. 불쌍해.”


동정이 싫다. 동정이 무섭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아래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게 싫고 무서웠다. 경멸 담긴 시선 아래는 묘한 동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나현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그 애의 뒷모습의 잔상을 좇을 뿐이었다.


이 순간 이후로 학교가 끝날 때까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나현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얼굴이 계속 앞을 아른거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래, 목표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죽여야 할 목표를 상기시켜서 잊지 않도록 하고 있을 뿐이야.


“박예지, 멍청하게 들 떠 있지마. 지금 한 치 앞길도 모르는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고 나니 묘하게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난 어차피 쭉 혼자였고 이제 이나현을 죽이고 어른이 되어서 독립을 할 거야.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야 돼.


가방에 고이 숨겨 논 칼을 꾹 잡았다. 이걸로…


…역시 안 돼. 이렇게 직접 죽이는 건 정말 못하겠다. 그나마 할 수있는 방법은 이나현을 밀어서 죽이는 건데. 밀고 눈을 감고 있으면 몇 초만 지나면 된다. 역시 이 방법으로 가야겠다.

이나현을 학교 옥상에서 밀어버리고 숨기. 현재로선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다.


***

등교하자마자 이나현 책상에 쪽지를 올려놨다. 옥상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없는 학교에 오는 건 처음이다. 운동장을 보며 난간에 기댔다. 떠오르는 태양이 보이고 바람이 불어와 그런지 기분이 괜찮았다. 그렇게 아래를 내려다 보며 있을 때 갑자기 기척이 느껴서 고개를 돌려고 할때였다. 다리에 힘이 빠지며 무게 중심이 휘청였다.


“아,”


머리가 아래로 향하며 시야가 거꾸러진다. 아찔한 기분이 전신을 감싼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팔목을 힘주어 잡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겨!”


이나현이다. 하얗게 질려서 나를 힘껏 잡아 끌고 있다. 힘에 부치는 지 점점 힘이 풀린다. 재빨리 다른 한손으로 난간의 끝을 움켜쥐었다.

몇 십 분의 씨름 끝에 나는 간신히 옥상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이나현도 지치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다.


“네가 불러서 와봤는데 네가 마악 휘청거리고 있었어. 왜 위험하게 거기 올라가 있는거야!”


내가 난간 끝에서 넘어가고 있는 걸 목격한 모양이다. 한껏 당황해서 울먹거리고 있다.


진짜로 죽나 싶었던 그 몇 초 동안 나는 야속하게도 살고 싶었다. 정작 이나현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으면서.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있어도 그게 나나 이나현은 아니다.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살려고 하면 남을 죽여야한다니. 죽이지 못한다면 내 마음이 죽을 텐데.

아무 말이 없으니 이나현은 숨을 다 고른 후에 말문을 열었다.


“…왜 불렀어?”


“…”


뭐라 말해야 되지. 이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내 목숨을 구해준 상대를 죽일 수는 없다. 지금 당장은.


“어제 일 사과하려고?”


“…응.”


이나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면서 누구한테 미안하다는 소리 해 본적도 없는데. 이나현을 친건 다분히 고의가 맞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죽이려고 불렀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되겠지. 그래도 막상 말하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나현의 눈동자가 쓸데없이 맑아서 멍청해 보이는 내 표정이 비쳐 보인다.


“…미안해.”


“나도 저번에 홧김에 불쌍하다느니 했던 거 미안. 그 말은 좀 심했던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이나현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예의상 같은 반 친구에게 지을 것 같은 마음 없는 미소. 그러나 그런 작은 미소에도 기분이 아주 이상해진다. 날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아 보여서… 마음이 울렁거리고 메스껍다.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오히려 좋다는 느낌이 든다.


“…너 울어? 잘 우는 편인가 봐.”


“…아니거든.”


빨개진 눈가를 세게 비볐다. 이나현은 다시 당황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나현은 대체 뭘까. 얘랑 같이 있으면 내가 그렇게 끔찍한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는 착각이 들어. 그래서 더 욕심이 난다.

역시 이나현을 죽이는 건 안 돼... 하지만 그러면..


***

교실로 돌아오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인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 들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박예지. 네가 나현이에게 뭐라고 협박했는지는 몰라도 나현이를 폭행한 건 변하지 않는다. 오늘 네 아버지와 상담하려고 불렀단다. 따라와.”


아빠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 고개를 수그렸다. 손에 땀이 흥건하게 잡혔다. 죄송해요. 이건 맨날 하는 말이잖아. 다신 안 그럴게요. 이것도 맨날 하는 말이야. 한번만 봐주세요. 이것도 매번 하는 말… 아무리 생각해도 결말은 하나였다. 집에 가서 죽도록 쳐맞기. 다음날 시체가 되어있을 수도.


“나현 어머님과 나현이. 같이 와주세요.”


이나현이 어느새 뒤에 와있었다. 나현의 어머님이라는 분도 와있다. 새삼스레 죄송해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나현이는 그저 실수로 장난치다가 건드렸다는 데요.”


“그건 저 녀석이 나현이를 위협하거나 해서 말하게 한 걸수도 있습니다 어머님.”


“우리 나현이는 그런 걸로 겁먹고 거짓말하는 아이는 아니에요.”


“선생님.”


이나현이 담임과 눈을 똑바로 마주친다.


“선생님 혼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잖아요. 당사자가 아니라는 데 왜 그러는 거에요?”


“…”


나는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분명 내가 고의로 해치려고 한 건 맞지만 여기서 담임의 말에 동조했다가는 내 목숨이 날아갈수도 있기 때문에. 아빠는 내내 가만히 있다. 그 점이 더 공포스러웠다.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봐도 되는 거요?”


“… 제가 잘 못 생각했나 보네요. 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아빠가 일어나려 할 때 이나현이 입을 뗐다.


“제 얼굴에 난 별거 아닌 상처 하나에 다 불러 모아서 귀찮게 하면서 예지의 온몸에 난 상처는 왜 모른 척 넘어갈까요.”


“…”


이나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빠를 보고있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책망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 누가. 왜. 어떻게 만들게 된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걸 그냥 넘어가시진 않겠죠?”


“…선생님은 몰랐네. 누가 그런지 아니 예지야?”


담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모를 수가 없는데. 전교생, 심지어 선생님마저도 알고 있는 사실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척 연기하고 있다. 참 웃기지도 않지. 그래서 웃었다. 아주 아주 큰 소리로.


“하하, 하하하하, 하…”


“…”


“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 알면 꼭 말씀드릴게요.”


***


어렸을 적, 엄마가 살아계셨을 적에, 엄마의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에 간 적이 있었다.

가자마자 보인 광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큰 아이들, 작은 아이들이 너나할것없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피아노를 치던 모습을.

그 모습은 내 안의 행복의 형태가 되었다.

처음엔 엄마의 권유로 쳤던 피아노는 나의 행복이 되어, 조그만 손으로 건반을 만지던 때부터 사춘기가 올 시절까지 친구가 되어주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며 장래희망 칸을 쓰던 나를 엄마는 미소를 띠며 보았다.


'예지는 재능이 있어요.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예지가 피아노를 너무 좋아해요. 당신이 부담을 느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가 힘내서 예지의 지원을 해줘야 돼요.'


아빠가 취미는 이제 그쯤하라며 말한 이후로, 내내 침울해져 있던 나를 보던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고집을 꺾으시고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쁨을 느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걱정거리라곤, 숙제를 안해가서 혼나면 어쩌지, 친구랑 싸웠는데 영원히 화해를 못하면 안되는데, 같은 고민들. 지금 와선 아무 하잘 것 없는 것들.


불행은 예기치 못하게 들이닥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사람이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죽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빠는 무서울 정도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와닿지가 않아서 모든 게 날 둘러싼 한 편의 싸구려 연극 같았다.

당연하게도 피아노는 그만뒀다. 아빠는 술이 없으면 잠에 들지 못했다. 난 바보같게도 엄마가 돌아오길 바라며 잠에 들다가도 아빠가 언젠간 엄마를 따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까봐 공포에 떨었다. 아빠가 어느날부터 손찌검을 시작했을 때는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떠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면서. 혼자가 될 까봐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서.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참을 수 없는 날도 있다. 오늘 같은 날 말이다.

아빠는 집에 오자마자 손에 잡히는 모든걸 집어던졌다. 무언가가 머리가 울릴 정도로 세게 강타해서 불에 지진 것처럼 뜨거운 고통이 들이닥쳤다. 바닥에 유리 재떨이가 나동그라져있다. 내 모습처럼.


"이제 그만해.. 제발.."


울먹이는 목소리에 아빠는 내 쪽을 빤히 보곤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일어섰다. 한걸음씩 다가갔다. 내 유일한 미련이었던 것으로 한걸음씩.


오랫동안 아무도 만지지않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커버를 열었다. 흰 건반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맑은 소리가 들린다. 떨리는 손으로 기억나는 악보를 따라 움직였다. 과거의 흔적은 예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내 인생이 한 편의 뮤지컬 영화였으면. 그랬으면 지금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졌겠지. 그러나 여긴 현실이고 벗어날 수 없는 늪에 갇혔다.


이 건반은 내가 정의했던 행복이었다. 그날 이후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유는 과거의 행복을 더럽히고 싶지않아서였다.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아서 나를 겨우 지탱한 삶의 이유였다.


♬♪♩♬♪♩♬♪


아무리 쳐도 행복의 주문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런 울림 없는 소리로 변질되었다.

삶의 의미는 이제 완전히 없어졌다. 마지막 희망도 죽어버렸다.


"이제 됐어."


커버를 닫으며 마지막 결심을 다졌다. 흐르는 피는 신경쓰지 않았다.


***

사람이 죽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언제 죽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죽으려 한다면 가장 살 가능성이 없는 방법을 골라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바닥으로의 추락이었다.

찬 바람이 분다. 옥상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여기서 투신해서 죽었다던 사람이 있었다나. 그런 얘기를 어렸을 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집 값 떨어진다며 다들 쉬쉬했었지.

신발을 벗고 올라서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쩔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감쌌다. 그러나 신체적 고통은 한순간이다. 의미없는 삶은 그만두고 싶다.

한걸음 내디뎠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예지..? 거기서 뭐해?"


믿을 수 없어 뒤돌아보니 이나현의 모습이 보인다. 이나현의 눈이 휘둥그레 지며 달려온다.


"야!.. 야! 뭐하는 거야! 안 내려와?"


"... 그냥 서 있는 거야."


내 말에 이나현은 눈을 세모꼴로 뜨고 노려본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저번에도 그렇고 자꾸 왜 옥상 난간에 서 있는거야? 그리고 신발까지 벗었잖아. 왜 그래?"


".. 그냥. 바람쐬고 싶어서."


"헛소리하지마. 지금 겨울이야.. 잠깐, 너 얼굴이 왜.."


이나현이 가까이 다가오며 이마에 난 상처를 쓸었다. 따가워서 얼굴을 찡그렸다. 단박의 이나현의 낯이 어두워졌다.


"..경찰에 신고할게."


"아니, 그러지마. 내 문제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신경을 어떻게 안 써? ..옛날부터 생각한건데, 너도 참.. 자꾸 신경쓰이게 굴면서.. 왜 자꾸.."


이나현의 눈에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오히려 당황한 건 내쪽이었다.


"어렸을 때, 네가 학교에서 피아노 치고 상타는 거 보고 엄마 졸라서 피아노 학원 다녔거든."


이나현은 눈물을 훔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넌 그때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로 멋있었어. 바보야..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약한 모습만 보여주는 거야.. 짜증나게."


"..."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어느 날부터 피아노학원에 다니면서 나를 힐끗힐끗 보던 애.


"앞에서는 다들 널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네가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어, 모두."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는다. 온기가 느껴져서 손을 뺐다.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 볼일이 있어서 먼저 내려가. 내일 학교에서 보자."


"너 먼저 내려가는 거 보고 내려갈거야. 경비 아저씨한테 옥상 문 좀 잠가놓으라고 해야겠어."


이나현이 눈을 부릅 뜨며 노려본다.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몇 분 전까진 죽어야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점점 풀어진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이나현은 담담하게 보다가 어색하게나마 나를 팔로 둘러싸고 등을 부드럽게 두드린다. 그때문에 나는 거의 오열을 하다시피 크게 울었다. 이때까지 울어야 했는 데 참았던 것을 다 쏟아내는 것처럼...


매 순간 엄마가 그리웠지만 이때만큼은 그립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단 하나, 타인의 애정어린 아주 조금의 관심이었다.

훗날 이나현에게 왜 옥상으로 왔냐고 물어봤을 때, 이나현은 옥상에서 피아노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길래 누가 피아노를 치는 것 같아서 올라와 봤다고 한다. 그러면 우습게도 나는 이번에도 피아노가 나를 살렸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하나 더 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사흘이 반복되지 않았는데, 이나현을 죽이지 않아도 미래가 왔다는 얘기다. 그 쪽지의 목적은 뭐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 쪽지가 아니었으면 이나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니까. 얽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이런 생각으로 귀결된다.


누가 그 쪽지를 놔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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