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 당신은 몰라도 되는 것

written by 휘엔




언젠가 지나가는 길에 여중생들이 꺅꺅거리며 이야기하는 것이 귀에 들어온 적이 있다. 패션잡지에 나온 자신의 럭키 넘버가 뭐라는 둥, 그 숫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숫자이니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둥. 잔뜩 흥분하며 신나게 열변을 토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꼭 다른 세계의 것처럼 보여 듣고 있던 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헤드폰을 고쳐 쓴 채 그 옆을 지나갔었다. 


숫자.

순위나 등수, 전화번호, 주소, 경기 스코어, 개수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문자.


자신에게 숫자가 갖는 의미란 딱 저 정도였다. 그렇기에 단순히 숫자를 누군가에게 정보를 알려줄 목적이 아닌, 럭키 넘버와도 같이 어느 특정한 숫자를 정하여 단지 그 숫자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그 감성의 알고리즘은 아무리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할 수 없던 일이었고, 굳이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와 더불어 정월, 발렌타인, 화이트데이, 할로윈, 크리스마스.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고 어딘가 붕붕 떠 있는 분위기의 날들을 예전의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날짜를 정해 그 날을 특별한 날로 삼다니. 생일이야 개개인의 특별한 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외의 이벤트로 취급되는 날들은 결국은 다른 날과 다를 것도 없기에 저런 건 상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랬던 자신이기에 자신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숫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생일도 아닌 어느 하루가, 그냥 달력의 어느 한 날이 자신에게 특별한 날이 되었다고 자각했을 때, 놀라웠다. 의미가 부여되는 숫자와 날짜를 가지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카라스노에 입학하고 배구부에 들어가서 받은 나의 번호는 11이었다. 초등학생은 10번, 제왕은 9번, 야마구치는 12번. 이게 1년 동안 내가 코트 위에서 불릴 번호구나. 새 유니폼을 받고 잔뜩 신이 나 있는 이들을 둘러보다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멈췄다. 그는 2번이었다. 캡틴이 1번이니 부주장인 그가 2번인 건 당연한가. 그때의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의 인상은, 운동부답지 않게 하얗고 작은 선배. 히나타와 카게야마와의 승부도 있었지만, 캡틴이나 타나카 씨의 존재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상대적으로 덜 기억에 남았었다. 그리고 부활동을 계속하면서 그가 카게야마에게 주전을 양보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짜증 났다. 당신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 포지션을 얻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왔을 텐데, 갑자기 나타난 어린 천재에게 자리를 뺏기고도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어? 팀을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야? 고작 부활동에 그럴 가치가 있어? 코트 밖에서 다른 1, 2학년과 함께 코트에 서 있는 인간들을 열심히 응원하는 그 모습에서 형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형도 분명 괴로웠을 테고 때로는 비참했을 텐데 웃었고, 끝까지 배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나의 형이 아니고 팀을 위한 그의 선택과 희생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존경할 만한 선택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가슴이 납득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세심하게 자신을 봐주고 챙겨주려는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고 거리를 두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2라는 숫자를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옅은 색의 머리칼과 반짝이는 눈 옆의 작은 눈물점이 떠오르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 부활동이 끝나고 모두가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의 연습은 잘 풀리지 않았던 전날의 연습과는 달리 새로운 포메이션이나 팀워크가 좋아서 모두가 기분 좋게 마무리했던 연습이었다. 그리고 연습이 끝나자 잔뜩 흥분한 그가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후배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장난으로, 때로는 칭찬의 의미를 담아 그가 부원들에게 하는 애정표현 중의 하나였다. 그 애정의식에 타나카 씨나 히나타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 고정 맴버였고, 천하의 제왕도 부끄러워하면서도 어색하게나마 허리를 굽혀 얌전하게 그의 손길을 받아냈다. 야마구치도 몇 번 받아봤고, 받은 뒤에는 볼을 붉히며 좋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도망가곤 했다. 어린애 취급 받는 느낌이라 싫었던 것도 있었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거북하다는 이유가 컸다. 그런데 그 날은 볼 정리함이 잘못해서 쓰러져 흩어진 볼을 정리하는 사이에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묵묵히 볼을 함께 주워 넣고 일어나자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오가는 말 하나 없이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분위기에 떠밀린 건지, 나도 모르게 다리를 굽히고 허리를 숙이자 차분했던 그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크게 흔들렸다. 조금 주저하듯, 천천히 뻗어져 온 그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자,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이내 떨어져 나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했다. 오늘 연습 수고 많았다며 어깨를 툭 치고 3학년 무리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방금 그의 쓰다듬었던 자신의 머리를 만져봤다. 그다지 부드럽지는 않았다. 남자 놈의 머리가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기뻐했던 걸까. 작은 의문을 품은 채 학교를 나섰다.   


집에 도착해서 좀 쉬겠다는 계획과는 다르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에게 떨어진 조미료를 사다 달라고 부탁받았다. 하는 수없이 옷만 갈아입고 상점가에 가서 리스트의 물품을 사고 마트를 나서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쇼핑이라도 했는지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패스트푸드점의 야외 테이블 밑에는 짐꾸러미가 놓여있었다. 바로 전까지 함께 땀을 흘리기도 했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신나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그들을 굳이 아는 체하기는 싫었기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을 겸, 그들의 자리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보이지 않는 위치의 벤치에 앉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 맞다, 다이치. 그거 알아? 오늘 츠키시마가 다리 굽혀줬어!

“하아? 무슨 소리야?”

“아까 내가 쓰담 쓰담 하려고 하니까 다리 굽혀줬다고!!”

“헤에-. 그 츠키시마가? 웬일이래.”

“묘하게 거리감도 있고, 쓰담 쓰담 할 때 매번 도망가길래 미움받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감동했다는 듯, 흥분하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그렇게 티 나게 행동했나 싶었다. 하긴, 관찰력이 좋고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는 섬세한 그가 자신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겠지만. 그의 활짝 웃는 미소가 뇌리에 박혀 들어왔다. 저렇게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할 줄 알았다면 이까짓 게 뭐라고, 진작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가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숫자 2가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것이. 


길을 가다가 보이는 간판의 전화번호에서 숫자 2만 눈에 들어왔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체크했는데 시계가 2시 22분이면 괜히 조금 설레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등 뒤에 달린 2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고 감정이 요동치자,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의 숫자가 나의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져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11과 2. 이 번호 둘이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 한구석이 술렁였다. 2라는 번호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닌데. 내가 입학하기 전의 그는 다른 등 번호를 가지고 있었을 텐데. 나의 등 번호도 영원히 11이 아닐 텐데. 그와 내가 함께 공유하는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를 나타내는 숫자가 11번이고 그를 상징하는 것이 숫자 2이기에, 그 두 번호가 특별해졌고 소중해졌다. 그리고 왜 이런 생각과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는지는 명백했지만, 나는 그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그와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하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더 그의 행동이나 말에 신경을 쓰며 그와의 방과 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인터하이 예선과 봄고가 지나고, 바로 이어진 대학 수험을 치른 뒤 졸업식과 동시에 그의 모습은 학교에서 사라졌다. 3학년이 은퇴한 뒤 1, 2학년만 남은 부활동은 봄고 이후로 익숙해졌지만, 어차피 학년도 다르니 교내에서도 자주 마주치지 못했으니 이전과 별다를 게 없는 생활이었는데도 같은 건물 안에 그의 존재가 없다는 건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허전함은 새로운 사람들과 환경으로 조금씩 메워졌고 이내 익숙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맘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혼자 시작한 감정이니 마주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져 추억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도쿄로 대학을 간 그는 가끔 너무나 자연스럽게 체육관의 응원석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도쿄에서 미야기. 신칸센을 타면 2시간 조금 안 되는 시간, 버스를 타면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한창 바쁠 대학 신입생이 어찌 그리 쉽게 왔다 갔다 하던지. 조금 잊을 만 하면 나타나니, 그가 그렇게 불쑥 예고 없이 나타날 때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이 자꾸 한 구석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렇게 몇 번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다시 들어가서 사라지라는 말에도 끝없이 자기주장을 하며 끈질기게 남아있는 이 감정이 지겨웠다. 하지만 이러는 것도 내 안에서 확실하게 끝을 맺지 않았기에 이 꼴이 났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딱히 그와 핑크빛 미래를 꿈꾸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닌데, 헛된 희망에 매달리며 혼자만의 감정의 잔재에 질질 끌려다니는 자신이 짜증 났다. 3년이나 끌어왔던 이 구질구질한 감정을, 그와의 접점의 시작이었던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우와~츠키시마! 단추 다 뜯겼네?”


역시 인기인! 그래서 고백은 얼마나 받으셨나아? 꽃을 건네며 능글능글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찌르는 그의 모습에, 그 꽃다발을 받을 생각조차 못 한 채 왜 여기 있냐고 물었더랬다. 


“집에 잠깐 일이 있어서 온 김에, 너희 졸업식도 볼 겸.”


작년 배구부 선배들의 졸업식에도 왔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신은 집안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여 만나지 못했지만. 겸사겸사라고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후배들을 위해 도쿄에서 미야기까지 온 것은 자명했다. 


“너희들은 내게 특별하니까.”


그가 후배를 소중히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희들’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 기쁘면서 맘에 들지 않았다. 너희가 아닌 네가 되었으면 했다. 나의 존재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길 바랐다.


“히나타나 다른 애들은 어딨어? 아까 만나긴 했는데 정신없어서 사진 찍는 거 깜빡했단 말이지. 츠키시마도 애들이랑 사진 찍어야지!”


그렇기에 얼른 가서 찾자. 라며 내 팔을 잡고 끌어당기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놨다. 


“…츠키시마?”


갑자기 멈춘 내 행동에 영문을 몰라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저 눈동자가 나만을 바라봤으면 좋겠는데. 무리겠지만.


사실 그가 있을 때도 그에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 그에게 고백이라는 문장은 당연히 거절당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져 있었기에. 어차피 안될 거 뭐하러 그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드냐는 생각이었다. 설마 그때의 생각이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힐 줄은 모르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꽃보다 더 환하게 펴지던 그 미소를 본 순간,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기회였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후회할 것이 뻔했다. 예전에 그의 손길을 처음 받고 왜 더 빨리하지 않았냐며 후회했던, 그가 곁에 있을 때 그냥 한발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던 그 순간들을 생각하며 후회했던 지난 2년처럼 평생을. 그러니 이 무의미한 괴로움을 없애고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스가와라 씨.”

“응.”

“좋아합니다.”


내 말에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분명 과거형으로 말할 생각이었는데 내뱉고 나서야 멍청한 입이 혀를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쪽이던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만.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1학년 때 그의 손길을 처음 받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갑자기 죄송했습니다. 꽃 감사해요.”


말 그대로 일말의 희망도 없었기에,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미안했지만 털어놓은 것 자체로 후련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기, 기다려! 츠키시마!!”

“?”


무슨 일이냐는 듯 잡힌 손목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보자, 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아~진짜!! 너 뭐야,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녔다. 

 

“왜 그렇게 바로 가는 거야?”

“왜 안되는데요?”


어차피 원하는 대답이 돌아올 것도 아니고. 애당초 내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이 이후로는 볼 일도 없을 거고. 


“너 진짜...”


기가 막힌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러면서도 잡은 손은 놓지 않는 그의 모습에 잠시 후련해졌던 가슴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손목을 꼬옥 쥔 채로 푹 고개를 숙인 그의 귀와 목 뒤가 새빨갰다. 영겁 같던 침묵 뒤, 결심했다는 듯 심호흡을 하고 확 고개를 든 그의 입술이 뻐끔댔다. 당신은 뭘 말하려는 거야?


“츠키시마. 나...”


.

.

.


가을이 오긴 한 건지 달력이 넘어가니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오늘은 바람이 꽤 강해서 아침에 그가 나갈 때 머플러를 단단히 감싸줬는데, 올 때도 제대로 하고 오려나. 시계를 보자 슬슬 그가 올 때였다.


“다녀왔습니다아-!”


그도 양반은 못 되는 듯싶었다. 힘차게 외치며 들어온 그의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회색 머리칼에 낙엽도 붙어있었다. 다행히 머플러는 제대로 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밖에 바람 장난 아니야!”

“그렇게 보이네요.”


머리에 붙은 낙엽을 떼어주고 붉어진 얼굴에 양손을 가져다 대니 양 볼이 차가웠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 그가 기분 좋게 내 손에 얼굴을 부볐다. 


“얼래? 오늘 무슨 날이야?”


그의 가방을 받아 먼저 들어오자 이내 신발을 정리하고 따라 들어온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니요. 딱히.”

“근데 왜 이렇게 저녁이 호화판이야?”

“시간도 있었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진짜로…?”


기념일? 도록 도록 눈동자를 굴리며 잊은 기념일인가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으며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200일…?”

“저희 같이 살기 시작한 지 2년째인데요.”

“설마 동거 기념일?”

“저희 봄에 이사한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럼 사귀기 시작한 지 3650일…?”

“앞으로 7년 뒤에 그 소리 하세요. 모르겠다고 아무 말이나 던지지 마시구요.”

“아으으으...그럼 뭔데?!”

“그러니까, 아무 날도 아니라구요.”

“…진짜입니까, 츠키시마 케이 씨?”

“진짜입니다. 스가와라 코우시 씨.”


몇 번이고 확인한 끝에 그제야 안심한 듯, 그가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빈손이 아니라 다행이다.”


씨익 웃으며 주섬주섬 소파 옆에 놓은 가방을 뒤적이던 그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흐흐흐흐…”


그리고 이어진 수상쩍은 웃음과 함께 무언가를 든 양손이 뻗어져 왔다.


“짜잔-!”


눈앞에 들이밀어 진 작은 공룡 스트랩이 대롱대롱 그의 양손에서 흔들렸다.

 

“커플 공룡 스트랩! 어때? 귀엽지?”


아니, 아까 오는 길에 이상하게 이게 눈에 밟히더라고. 특히 얘! 안경 쓴 공룡! 얘 보니까 왠지 네 생각이 나서 말이지. 어지간히 만족스러운 구매였는지 신나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모처럼 츠키시마가 힘내줬는데 빈손으로 왔으면 미안했을 뻔했어.”

“뭐, 그거야 이따 밤에 돌려주시면 될 텐데요.”

“에엑, 츠키시마 군. 언제부터 그렇게 스트레이트하게 말하는 아이가 되어버린 거야?”

“처음부터요. 이런 저는 싫은가요?”


제 말에 볼이 차가운 손에 감싸였다. 


“너무 좋아.”


동시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가까워지며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맘에 들어?”

“뭐, 나쁘진 않네요.”

“케이 군, 왜 이런 데서 부끄러워하시나요. 조금쯤은 솔직해져도 되지 않습니까?”

“…감사합니다.”

“응. 같이 달고 다니자.”


자신의 대답에 활짝 웃으며 내밀어진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휴대폰을 올려놓자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휴대폰을 함께 꺼냈다. 


“곧 준비 다 되니까 손 씻고 오시구요.”

“알았어어~”


콧노래를 부르며 스트랩을 끼우는 데에 집중하는 그의 뒷모습이 만족스러웠다. 


그래. 당신은 몰라도 돼.


11월 2일. 당신과 나의 날. 


나 혼자만의 작은 비밀.





November 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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